< (2). 사면초가 (上) -2 >
이안은 상대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일단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만 봐도 암살자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이안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도 여유롭게 앞을 막아설 수 있을 정도의 암살자.
이안이 알기로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진 암살자는 카일란 내에 몇 없었다.
사실 가신들을 먼저 보내버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신규 클래스인 암살자 중에서 이안 자신의 상대가 될 만한 유저는 없으리라 확신했기 때문.
어차피 혼자서도 상대할 자신이 있는데, 괜히 가신들을 끌고 왔다가 상대가 도망가기라도 하면, 이안으로서는 도주하는 암살자를 잡을 방법이 없었다.
‘일단 루스펠 제국 안에서는 한명 뿐인 것 같고…. 예전에 루키리그에서 날 이겼던 놈. 이름이 림롱이었나?’
하지만 이안이 생각하기에 루스펠 제국 소속의 암살자가 파이로 영지의 방어요새를 염탐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기에, 림롱에 대한 생각은 금세 접어 버렸다.
‘카이몬 제국의 암살자라면 타이탄 길드 소속인 유저가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현재 공식적인 암살자 랭킹 1위는 타이탄 길드 소속이었고, 그의 레벨은 이안이 알기로 140 초반 정도였다.
‘그놈이라면 내 앞에서도 자신만만할 만 하지.’
이안의 레벨은 150이 넘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이안의 전투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대인 PvP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암살자라면, 레벨이 조금 낮더라도 위축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안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상대를 탐색하던 그 때.
암살자가 쌍륜을 휘두르며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타탓-!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이안과의 거리를 좁히는 남자.
이전 같았으면 우선적으로 거리를 벌리는 데 신경 썼겠지만, 이안에게는 믿는 구석이 생겼다.
“소환…!”
일단 빠르게 모든 소환수들을 소환하고 버프스킬을 캐스팅한 이안은, 지체 없이 새로 얻은 스킬인 ‘셀라무스 전사의 의지’를 사용했다.
[‘셀라무스 전사의 의지’ 스킬을 사용합니다.]
[20분간 모든 전투능력치가 40%만큼 상승합니다.]
[생산 능력치를 하나의 전투능력치에 전부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 능력을 선택해 주세요.]
까앙-!
그 새 달려든 암살자의 공격을 막아낸 이안은, 뒤로 물러서며 스킬을 마저 설정했다.
“민첩에 투자한다!”
[‘민첩’ 능력치가 대폭 증가합니다.]
[모든 무기에 대한 숙련도가 15레벨만큼 증가합니다.]
[사용 중인 무기와 관련된 숙련도인 ‘창술’의 레벨이 중급 5레벨로 설정됩니다.]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이안의 온 몸에 황금빛 빛줄기가 휘감겼다.
창대를 고쳐 쥐는 이안을 보며, 남자가 이안을 비웃었다.
“소환술사 주제에 근접전이라도 펼치려는 건가?”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후회하게 될 거다.”
짧게 대답한 그는 다시금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고, 이안은 창을 휘두르며 그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깡- 까강-!
검 날과 창극이 맞부딪히며 울려 퍼지는 쨍쨍한 쇳소리.
두 사람은 순식간에 여러 합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퍼엉-!
강한 공격이 서로 맞물리며 반동으로 인해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자, 라이를 비롯한 소환수들이 남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몸집이 크고 공격속도가 느린 빡빡이는 암살자에게 별다른 피해를 입힐 수 없었지만, 반면에 라이와 핀의 합공은 무척이나 정교하고 위협적이었다.
촤아악-!
[소환수 ‘라이’가 (알 수 없음)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알 수 없음)의 생명력이 13253만큼 감소합니다.]
[소환수 ‘핀’이 (알 수 없음)에게 피해를 입혔습니다.]
[(알 수 없음)의 생명력이 10233만큼 감소합니다.]
그리고 공방을 주고받던 이안의 두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뭐지…? 루스펠 제국 유저잖아?’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통해 암살자의 국적을 알 수 있었던 것이었다.
만약 카이몬 제국의 국적을 가진 유저라면, 시스템 메시지에 ‘카이몬 제국의 유저(알 수 없음)’ 이라고 떠오르게 되는데, 그러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루스펠 제국의 유저라는 반증이었다.
‘국적은 비공개 처리가 안 될 테니… 확실히 루스펠 제국 소속일텐데, 대체 루스펠 소속의 유저가 염탐을 왜 시도하는 거지? 우리 영지 따라서 요새 설계라도 하려는 건가…?’
이안의 생각에 가장 가능성이 큰 가설은, 카이몬 제국 측에 사주를 받은 ‘세작’ 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영지 내부까지는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루스펠 제국 국적의 유저가 요새에 접근하기 더 쉬운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한편 이안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전투는 점점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암살자의 생명력 게이지 바 가 천천히 깜빡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반면에 이안은 거의 피해가 전무했다.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린 암살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놀랍군. 이 정도까지 강할 줄이야. 과장된 부분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이안은 혀를 차며 대답했다.
“쯧쯧… 뭐, 알았으면 이제 순순히 항복하는 게 어때? 난 네가 어디서 온 놈인지 알고 싶거든.”
사실 이안으로서는 전력을 다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
‘라이 하나도 제대로 감당 못 할 것 같은 녀석이 가오는 오지게 잡네.’
몸놀림이나 전투감각은 뛰어나 보였지만, 특별한 스킬이나 변칙적인 공격이 없었기 때문에 상대하기 너무 쉬웠던 것이었다.
암살자가 이안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군.”
그 말에 이안이 씨익 웃었다.
“누가 그냥 보내 준데?”
이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환수들이 그의 주위를 둘러쌓았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디텍팅 포션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디텍팅 포션이란, 복용시 일정 시간동안 은신중인 상대를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아이템이었고, 이안은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안은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들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러니 자발적으로 정체를 밝히는 게 좋을 거야. 보아하니 장비도 좋아 보이는데, 죽어서 하나라도 떨구면 억울하지 않겠어?”
하지만 그는 이안을 비웃기라도 하듯, 마법 스크롤 한 장을 꺼내어 들더니 팔랑거렸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날 잡을 수 없을 거야.”
그리고 이안이 미처 손 쓰기도 전에 스크롤을 쭈욱 찢는 남자.
“제기랄.”
그의 몸은 보랏빛의 기류에 휘감기며 허공으로 유유히 사라져 버렸고,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쩝, 요즘은 귀환 스크롤을 개나 소나 다 쓰네.”
남자가 사용한 스크롤은, 다크루나 길드의 길드마스터인 이라한이 사용했던 스크롤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물론 광역 귀환 스크롤은 아니었기에 이라한이 썼던 물건보다는 훨씬 저렴했지만, 그래도 한두 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분 나쁘네…. 아무래도 세작이겠지?”
이안이 중얼거리듯 하는 말에, 옆에 있던 라이가 대답했다.
[그런 것 같다.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주인.]
“뭐가?”
[전투실력은 엄청 뛰어난 것 같은데, 가장 기본적인 암살자 공용 스킬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 말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느꼈어. 정체를 숨기려고 하는 거겠지. 히든클래스라도 가지고 있는 놈이라면, 주력 스킬을 사용하는 순간 정체가 탄로 날 테니까.”
걸음을 돌린 이안은 서둘러 영지 안으로 들어갔다.
‘요새 내부 구조를 알아내려고 하는 세력이 있다는 말이지…? 경계를 더 철저히 해야겠어. 디텍팅 타워라도 더 지어야 하나?’
* * *
이안이 서둘러 영지로 돌아간 그 날.
그의 염려처럼 곧바로 공세가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카이몬 제국의 연합군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일란 내에서 여태 펼쳐졌던 수 많은 공성전들 중에 단연 최고의 규모!
이러한 움직임이 포착되자, 공식 커뮤니티와 방송에서는 벌써 난리가 난 상태였다.
특히 공식 커뮤니티의 메인 페이지에는, 벌써 전투의 양상이나 양 측 전력에 대해 분석해 놓은 글들이 자극적인 제목으로 올라와 있었다.
[루스펠 제국의 마지막 희망! 과연 파이로 영지는 카이몬의 5만 대군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루스펠 제국의 ‘안시성’ 파이로 요새를 무력하게 카이몬에 내어준 루스펠 3대 길드.]
[가상현실게임 역사상 가장 큰 대규모 공성전! 그 배경을 낱낱이 파헤친다.]
당연히 카일란을 플레이하는 유저라면 누구나 이 대규모 공성전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게시판이나 채팅창 같은 곳은 곧 벌어질 대규모 공성전과 관련된 이슈들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슈들 중 가장 핫한 것은, 루스펠 제국 거대길드들의 ‘무능함’에 관한 이야기였다.
- 아니, 님들. 난 카이몬 국적이라 상관 없긴 한데… 솔직히 루스펠 거대길드들 하는 게 뭐임? 동부대륙 컨텐츠들은 죄다 선점해 놓고 중부대륙 열려서 제대로 싸움 나니까 빌빌거리기만 하네.
- 에휴, 그러니까요. 제 말이…. 밥값을 못 해요 밥값을.
- 그나저나 진짜 이상하네요. 순위도 한참 떨어지는 로터스 길드가 저렇게 버티고 있는데, 대체 규모도 훨씬 큰 돼지들이 왜 후방으로 죄다 빠져서 숨어 있는 거임? 이해가 안 되네.
- 윗님, 로터스가 버티고 있는지는 이번 공성전 지나봐야 아는 거죠.
- 아니, 일단 다크루나 한번 막은 것만 해도 충분히 버틴 거죠. 다른 길드 한 서너군데만 로터스처럼 막아줬어도, 최소한 중앙 지역에서 이렇게 밀리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 에휴, 지금이라도 로터스 길드 도와서 어떻게든 막아냈으면 좋겠는데….
- 지금은 이미 늦었네요. 파이로 영지는 어차피 뺏길 거고, 후방에서 얼마나 잘 막아주느냐가 관건인 듯 합니다.
- 로터스가 그래도 최대한 오래 막았으면 좋겠네요. 이안님 파이팅!
한편, 파이로 영지 내부에 있는 로터스 길드원들은 무척이나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성전이 시작되기 전 조금이라도 방어력을 올려놓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르스가 병영의 관리소에서 나오는 카윈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이, 카윈아. 지금 병영에서 훈련 중인 병력, 오늘 내로 훈련 끝나겠어?”
“음… 조금 빠듯할 것 같아. 아마 내일 해 뜨기 전까지는 끝나지 싶은데…?”
헤르스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으음… 곤란한데….”
“왜?”
“이제 카이몬 제국군이 진형 거의 다 갖추기 시작했더라고. 빠르면 오늘 밤에도 공성전이 시작될 수 있을 것도 같아서….”
두 사람이 대화하던 그 때, 어느새 다가온 이안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니, 그건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아.”
“응? 어째서?”
이안은 시간을 한번 확인하면서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선, 쟤들 공격 가능한 타이밍이 아무리 빨라도 10시나 11시 정돈데, 그때 공성전 시작되면 내일 직장인들 출근 어떻게 하냐. 최소 다섯 시간은 잡아야 할 텐데.”
“아…?”
이안의 논리는 제법 설득력이 있었고, 카윈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 마디 덧붙였다.
“우리야 방학이지만 직장인은 방학이 없으니까….”
물론 최상위 랭커들의 절반 이상은 게임 자체가 직업인 이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전체로 놓고 보자면 그렇지 않은 인원의 비율이 더 많을 것이었다.
헤르스가 입을 열었다.
“무튼 네 말대로 오늘 전투가 시작되지 않으면 다행이네. 난 질 땐 지더라도 철갑기병은 꼭 써보고 싶었거든.”
헤르스가 카윈에게 물었던 훈련중인 병력.
그것은 무려 3차 업그레이드까지 마친 병영에서 생산할 수 있는 병력인 철갑기병이었다.
철갑기병은 기본 레벨이 170에 달했으며, 한 기가 어지간한 유저 하나의 몫은 해 줄 수 있는 강력한 병력이었다.
이안이 카윈을 향해 물었다.
“카윈아, 이번에 생산되는 총 병력이 몇 기 인데?”
“음… 아마 오백 기 정도 될 거야.”
이안의 시선이 이번에는 헤르스를 향해 넘어갔다.
“그럼 기존 병력들과 다 합치면 우리도 한 삼사천 정도는 이제 보유한 건가?”
헤르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계산 대로면 칠천 정도 되지 싶은데?”
“음…? 대체 어떻게 그만큼 숫자가 되는 거야?”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벙찐 표정을 한 이안.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피올란이 해 주었다.
“제법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거든요.”
“…?”
의아한 표정을 한 이안을 비롯해, 세 사람의 시선이 피올란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 곳에는 피올란 외에도 몇 몇의 사람이 더 서 있었다.
이안의 시선이 그들 중 가장 앞쪽에 서 있는 한 사내를 향해 고정되었다.
‘누구지…?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
군청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고급 갑주를 온 몸에 두르고 있는 사내.
그가 앞으로 걸어나오며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안님.”
대충 보아도 최상급의 랭커임이 분명해 보이는 남자.
이안은 얼떨결에 손을 맞잡으며 그에게 물었다.
“누구… 시죠?”
그가 입을 열어 대답하려는 찰나, 뒤에 있던 카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로이첸님…? 로이첸님, 맞으시죠?!”
남자는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 헤르스님께 허락을 받아, 저희 벨리언트 길드가 이번 수성전을 돕기로 했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는 로이첸.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이안의 두 눈이 빛났다.
‘벨리언트…! 잘하면 이번 수성전… 정말 끝까지 버텨낼 수도 있겠어!’
이안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되어 로이첸에게 마주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려운 결정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로이첸님.”
< (2). 사면초가 (上)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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