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철옹성 -3 >
* * *
중부대륙에 로터스 길드의 거점지가 들어선 뒤, 하린은 길드원들을 따라다니며 제법 많은 레벨을 올렸다.
덕분에 만년 두 자리 수 일 것만 같았던 하린의 레벨도 세 자리 수를 넘어 110레벨을 바라보는 상태가 되었지만, 그 레벨로 다크루나길드와의 수성전에 참여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뭐, 그래도 요리는 최상급으로 만들어서 공급했으니까. 나도 도움이 된 거겠지!’
수성전이 시작되기 전, 열심히 만들어놓은 버프요리들을 일일이 공급한 하린.
그녀의 생각처럼, 요리 버프는 로터스 길드원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요리 레벨 만큼은, 카일란 내에서 독보적일 정도로 높은 그녀였으니까.
임무를 모두 완수(?)한 하린은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접속을 종료하고 방 안의 쇼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티이잉-!
벽에 걸려있는 커다란 TV 화면에 불이 들어오자, 하린은 빠르게 채널을 돌려 YTBC의 채널을 틀었다.
“안에서 함께할 수는 없어도… 응원은 해 줘야지.”
YTBC에서 독점으로 이번 다크루나 길드와 로터스 길드의 공성전을 중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키보드가 어디 갔더라…?”
하린의 방 안에 있는 TV는 하린의 컴퓨터 본체와 연결된 스마트 TV였다.
스마트 TV는 언제든 TV와 PC를 연동해 가며 사용할 수 있는 무척이나 편리한 물건 이었다.
무선 마우스와 키보드를 찾은 뒤 쇼파 위에 자세를 잡은 하린은, 방의 불까지 꺼 놓고 영화라도 관람하는 기분으로 공성전을 열심히 시청하기 시작했다.
하린은 방 구석에 쟁여놨던 꺼낸 과자봉지를 뜯으며 중얼거렸다.
“우리 진성이는 언제 나오는 거야? 다크루나 쟤들 1위 길드라더니 타워만 부수다가 전멸 당하는 거 아냐?”
감자칩을 아그작 아그작 씹으며 공성전을 시청하던 하린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빡빡이와 함께 멋지게 등장하는 진성을 보며 활짝 웃었다.
“우리 진성이가 게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한단 말이지…?”
하린은 마치 자신이 진성이 되어 싸우기라도 하듯, 화면 안으로 몰입하기 시작했다.
“아, 시청자 채팅이나 한번 열어볼까?”
하린은 키보드를 두들겨 화면 오른쪽에 숨겨져 있던 시청자 채팅창을 열었다.
그리고 떠오른 채팅창을 본 하린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 뭐야? 무슨 글이 이렇게 빨리 올라와?”
차마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글이 올라오는 채팅창.
심지어 세 자리 수가 넘는 채팅채널 중에도 뒤쪽의 채널이었는데도, 끊임없이 채팅이 올라오고 있었다.
- 와 저 황금거북이 뭡니까? 현무같이 생겼네. 아시는 분 있어요? 나 저거 잡으러 갈래!
- 그러게요, 황금현무 간지 터지네. 저거 뭔지 아시는 분?
- 님들아 저기 써있잖아요. 빡빡이라고….
- 아니… 저기요, 빡빡이는 이안님이 지은 저 소환수 이름인 거구요. 저 몬스터 종이 뭔지 알고싶다는 거죠.
- 아하! 제가 겜알못이라… 죄송….
채팅을 읽어내려가며 하린은 피식 웃었다.
“우리 빡빡이가 좀 멋지고 늠름하기는 하지.”
이안의 모든 소환수들의 먹이를 담당하고 있는 하린은, 빡빡이와도 이제 제법 친해졌다.
맛있는 음식을 삼시 세 끼 챙겨주는 예쁜 하린을 싫어하는 소환수가 있을 리 없었다.
- 와 씨, 님들 저거 방금 이안님 장막스킬 쓰는 거 봤죠? 리얼 반응속도 미쳤네?
- 엥? 방금 뭐 장막류 스킬 발동시킨 거 였어요? 어쩐지 대검이 갑자기 왜 튕겨나가나 했네.
- 헐, 저는 그냥 저 황금거북이가 방어스킬 쓴 건줄 알았어요.
- 노노, 방금 물의 장막 스킬 발동시킨 것 같아요. 화염계 장막스킬은 본 적 있는데 물의 장막은 처음 보네.
- 크… 지렸네. 저 팬티 갈아입으러 갔다 옵니다.
- 윗님 기본이 안 돼 있으시네요. 이안님 전투영상 관람할 때는 기저귀 차고 오셨어야죠.
기본적으로 멀리서 논 타겟 투사체를 맞춰내는 이안의 전투방식이 화려하기도 했지만, 100위대에 랭크되어있는 길드가 랭킹1위 길드를 상대로 선전하는 전투내용 자체가 유저들을 열광시키고 있었다.
- 이거 이러다가 로터스 길드가 정말 이기는 거 아닙니까? 로터스가 이기면 진짜 골 때리겠는데…?
- 에이, 설마요. 지금까지도 충분히 대단하기는 했지만, 이라한님 싸우는 것 봐요. 저분도 진짜 괴물임. 130레벨대 병사들이 칼질 한방에 녹아버리네.
채팅을 읽던 하린이 처음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당연히 우리 길드가 이길 건데 왜 질 것 같이 말하는 거지?”
하린이 승리를 확신하는 근거는 간단했다.
지금까지 이안과 함께한 전투가 패배하는 것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나름 합리적인 논리를 탑재한 하린이 키보드를 두들겼다.
- 이봐요, 님들. 대체 다크루나 길드가 어떻게 이긴다는 거죠? 이번 전투는 무조건 로터스가 이길 거예요.
- ?? 윗분 밑도 끝도 없는 소리 하시네? 지금까지 로터스가 엄청나게 선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다크루나 병력이 절반 가까이 건재하다고요. 아직 병사만도 천명 이상 남아있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리?
하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다시 키보드를 두들겼다.
- 아무튼 이겨요. 보시면 아실 듯.
- 거 참, 무 논리 갑이네. 아직까지는 아무리 봐도 다크루나가 조금 더 우세한 것 같은데….
- 저분 이안 팬클럽 회원이신 듯. 냅 둬요.
하린은 잠깐동안의 키보드배틀(?)에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는 채팅창을 닫아 버렸다.
“바보들.”
세 글자로 짧게 키보드 워리어들을 평가한 하린은 다시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 YTBC의 해설자들이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뭔가요?!]
* * *
쿠웅-!
묵직하고 거대한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자욱하게 흩날리는 흙먼지.
눈 앞이 뿌옇게 변할 정도로 짙은 흙먼지 안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안을 비롯한 로터스 길드의 유저들은 당혹스런 표정이 되었다.
‘이 괴물 같은 놈은 대체 뭐야?’
빡빡이보다도 더 거대한 몸집의 청동거인.
자신의 키보다도 더 크고 무식하게 생긴 시퍼런 창을 움켜쥔 거인의 위용은 좌중을 압도했다.
크롸롸롸롸-!
거인은 기괴한 목소리로 전방을 향해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고는 철창을 휘둘렀다.
콰아앙-!
“제기랄! 피해!”
하지만 좁은 성문에서 피할 곳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무식한 창에 격중 당한 로터스 길드의 유저 너댓 정도가 순식간에 회색 빛으로 변해서 사라졌다.
이안은 거인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정보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놈이야? 무슨 레벨이 220이나 돼?’
[거신족 돌격대장 - Lv 220]
이안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라한 저 괴물 같은 놈 하나도 힘든데, 저건 어떻게 상대하지?’
한편 표정이 안 좋은 것은 이라한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장의 카드였던 소환마법 아티펙트까지 사용했음에도 전황이 그리 쉬워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아무래도 저 놈이 로터스 병력 전체를 좌지우지 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그래도 거대길드의 수장답게, 이라한은 전투의 흐름을 금세 파악했다.
“놈, 네 상대는 나다!”
이라한이 양 허리춤에 꼽혀 있던 쌍검을 뽑으며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것을 발견한 이안은 재빨리 명령을 내리며 등에 메고 있던 장궁을 빼어 들었다.
“카이자르! 저 청동거신 좀 맡아줘!”
카이자르가 아니라면 무지막지한 괴물을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이안은 그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 수 밖에 없었고, 다행히 카이자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신족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알겠다. 거신족 이라면 내 상대가 될 자격이 있지.”
특유의 자아도취에, 이안은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이라한이 지척까지 다가온 탓이었다.
“죽어라!”
푸른 냉기에 휩싸인 이라한의 검이 이안의 심장을 노리며 파고들었고, 이안은 가까스로 검격을 피하며 근처에 있던 할리를 불렀다.
“할리!”
이라한은 달려들던 관성 때문에 조금 떨어져서야 멈춰설 수 있었고, 그 틈을 타 이안은 전류증식을 발동시켜 활 시위에 걸어 올렸다.
피이잉-!
찰나지간에 물 흐르듯 펼쳐진 이안의 연속동작.
하지만 이라한의 전투감각 또한 녹록치 않았다.
타탓-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둔덕을 박차고 방향을 돌린 이라한은 이안을 향해 다시 쌍검을 휘둘렀다.
후우웅-!
쌍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가 x자 형태로 이안을 향해 날아들었고, 이안은 재빨리 할리의 등 위에 올라타며 검기를 피해 내었다.
그리고 할리의 등 위에 오르자마자, 이안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할리의 고유능력 발동이었다.
“할리, 바람의 가호!”
이제 140레벨이 다 되어가는 할리의 바람의 가호 버프는 순발력을 무지막지하게 뻥튀기 시켜주었고, 바람처럼 날아다니는 할리의 위에서 이안은 연달아 화살을 쏘아 대었다.
핑- 피핑-!
그리고 주변에서 그 모습을 목도한 다크루나 길드 소속의 유저들은 당황스런 표정이 되었다.
“뭐야, 저놈 소환술사 아니었어?”
“미친! 소환술사가 어떻게 저렇게 속사를 잘하는 거지?”
궁사클래스 유저들이 피지컬을 대결할 때 가장 많이 보는 종목중의 하나가 바로 속사였다.
논 타겟 스킬의 명중률과 빠른 속사능력이야말로 궁사 클래스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안이 구사하는 속사는, 랭킹권에 있는 다크루나길드의 궁사들이 보기에도 엄청난 수준이었다.
화살이 활 시위를 떠나는 순간, 어느새 새로운 화살이 시위에 걸려 있었으니까.
게다가 조준부터 발사까지의 시간도, 과연 조준을 하기는 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이라한의 움직임이 워낙 빠른 탓에 한 두발 씩 빗나가기는 했지만, 궁사클래스의 명중률 보정도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명중률 또한 놀라운 수준이었다.
반면에 이안을 상대하는 이라한의 피지컬도 엄청났다.
할리를 탄 채로 신출귀몰하며 계속해서 날아드는 이안의 화살의 70% 이상을, 피해내거나 검으로 쳐내며 맞상대하는 이라한.
두 사람의 전투는 거의 사전에 합을 맞추고 공수를 교환하는 묘기라 해도 믿을 만큼 화려하고 정교했다.
‘제기랄, 할리 순발력이 지금 일만이 넘을 텐데 어떻게 이정도 수준으로 따라붙는 거지?’
이안은 이라한의 어마어마한 순발력 능력치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역시… 비공식 랭킹1위 유저라는 건가…?’
게다가 지금까지 맞상대했던 그 누구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전투감각.
이안은 조금씩 이라한에게 밀렸지만, 라이와 핀 그리고 빡빡이까지 합세하자 어느 정도 대등한 전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쯤 되자 어이가 없는 것은 이라한이었다.
‘대체… 뭐하는 놈이야 이거?’
처음 이안을 향해 달려들 때는 순식간에 그를 제거하고 전세를 역전시킬 생각이었다.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길드소속 인데다 PvP에 최약체로 유명한 ‘소환술사’ 유저에게 이렇게 고전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만약 이안이 개인정보를 어느정도 공개 상태로 해 놓아서 아이디가 확인이 가능했더라면 이라한도 그를 알아보았을 수도 있었다.
‘이안’이라는 소환술사는 커뮤니티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으니까.
하지만 크게 관심이 없는 이라한은 이안의 얼굴까지 알아보지는 못했다.
거의 10여분이 넘도록 계속해서 이어지는 두 사람의 공방전.
폴린까지 이라한을 공격하기 위해 합세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안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이안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건 진짜 깡 스텟 차이야! 컨트롤은 확실히 내가 위인 것 같은데…!’
전투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이안이 머리를 열심히 굴리던 그 때.
두 사람의 뒤쪽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커다란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와아아…! 거인을 쓰러뜨렸다!”
그 소리에 당황했는지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멈춘 이라한.
그리고 그 틈을 놓칠 이안이 아니었다.
“어딜 보는 거야, 멍청아!”
어느새 활을 등에 걸어 메고 지팡이를 뽑아 든 이안이 날린 마력의 구체가 이라한의 가슴에 정통으로 틀어박혔다.
쾅- 콰쾅-!
< (6). 철옹성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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