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위험한 도박 -2 >
* * *
전운(?)이 감도는 진성의 자취방.
“그게… 하린아. 오해라니까?”
“뭐가 오핸데?”
“로렌님은 그냥 오늘 처음 알게 된 분이야. 우리 길드 요새 증축작업 도와주신다고 오신 고마운 분이라구. 그냥 ‘대화’ 하고 있었던 것 뿐이야. 대화!”
“그렇구나… 대화를 하고 있었던 거 였구나…. 옆구리에 완전 딱 달라붙어서 대화하던데. 예쁜 여자가 옆에 딱 붙어있으니까 좋지?”
“아, 아니… 그게…!”
“흑흑, 박진성 여자친구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불쌍해… 흑흑. 얼마나 서러울까….”
“으아아….”
사실 하린은 누구보다 진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는 진성에게는, 예쁜 여자보다 게임 퀘스트가 2만 배 정도는 더 중요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로렌과 이안이 아무 관계가 아니라는 것 쯤은 굳이 변명을 듣지 않더라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괘씸하잖아? 이럴 때 약점이라도 잡아놔야 다음에 놀러가자고 해도 군말 없이 따라 나오겠지.’
진성과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조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합리화를 하며, 하린은 계속해서 시무룩한 얼굴로 연기했다.
“흑흑… 나 너무 슬퍼….”
그러자 진성은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왜 그래 하린아,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뭐가 아니야, 흑흑. 좋아한다는 말도 한 번 안 해주더니, 다 이유가 있었어…!”
은근슬쩍 듣고 싶은 말을 유도하는 하린.
하지만 진성은 달리 연애고자가 아니었다.
‘하린이가 중부대륙에 온 뒤로 요리 숙련도를 못 올려서 나한테 삐진 건가?’
놀라울 정도로 창의적인 해석!
진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으 요즘 내가 너무 바빴어, 미안해. 요즘 너무 심심했지? 내가 중부대륙 거점지에도 주방시설 만들어줄게. 화 풀어, 응?”
하린은 어이가 없어서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뭐…?”
진성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다음번에 사냥 나가면 요리재료도 많이 채집해 올게. 중부대륙에는 네가 써보지 못한 희귀한 요리재료도 엄청 많을 거야.”
“….”
하린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겨우 다스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 이 바보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반면에 하린이 잠잠해지자 진성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그래서 서운했던 거였어! 하린이도 내가 모솔인 걸 아는데 여자 때문에 삐졌을 리 없지!’
잠시 후, 겨우 분노(?)를 진정시킨 하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나 좋아하는 거 맞아?”
어지간한 철학적 화두보다 열 배는 심오하고 난해한 질문.
하린의 화(?)가 풀릴 것이라 생각했던 진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진성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럼…!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하린이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그렇다니까?”
“그럼, 증명해봐.”
“어, 어떻게…?”
하린이 눈을 감으며, 한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가리켰다.
“여기다가 뽀뽀… 한번 해봐.”
당황한 진성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뭐…?”
“빨리 해봐. 그럼 내가 이번 한번만 봐줄게.”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에 진성은 당황했지만, 하린은 진심이었다.
망설이는 진성을 향해 하린이 재촉했다.
“뭐 하는 거야, 안 할 거야? 나 좋아한다는 거 거짓말이었어?”
“아, 아니야! 할게, 할 거야!”
진성은 벌떡 일어나 하린의 옆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두 눈을 살짝 감고 하린의 볼을 향해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진성으로서도 하린의 볼에 입을 맞추는 것이 싫을 리가 없었다.
다만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심장이 요동치는 것이 문제였을 뿐.
‘침착하자 진성아…!’
그런데 잠시 후.
쪽-!
진성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 몸이 굳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하린의 볼이 아닌 입술이, 그의 입술과 맞닿았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그 입술을 떼고 싶지는 않았고, 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들어 하린의 등을 살짝 감싸 안았다.
그러자 하린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가볍게 맞닿은 두 사람의 입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루스펠 제국 소속의 대표적인 거대길드 라고 할 수 있는 3대 길드의 전력이 전방에서 빠져나가자, 그렇지 않아도 밀리던 방어전선이 더욱 빠른 속도로 동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방어전선이 빠르게 밀려 내려오자, 요새가 완공될 때 까지는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했던 로터스 길드도 남는 전력으로 최전선을 도왔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안도 두 차례나 참전했지만, 아무리 동분서주해도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전투에서 이길 수는 없었다.
‘이대로면 정말 아슬아슬한데….’
골치아픈 표정으로 성곽에 걸터앉아있는 이안의 옆으로, 피올란이 다가왔다.
“무슨 생각 하세요, 이안님?”
이안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뭐,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죠.”
“아하….”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입을 열었다.
“피올란님,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셨나요? 협조는 좀 구했어요?”
이안의 물음에 피올란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설득해 봐도 꿈쩍도 안하네요.”
“뭐라고 하는데요?”
피올란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음… 그냥 오리발만 내밀어요. 자신들 길드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단지 후방에 인력이 필요해서 전방에 있던 길드원들을 빼온 것 뿐이라고 말이죠.”
이안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흠… 최소 얼굴에 철판 두 세장은 깔았네요. 딱 봐도 전방 전선 버리고 후방으로 빠지려는 움직임인데….”
“그러니까요. 그래서 저도 조금만 시간 더 벌어주면 전방기지를 기반으로 막아낼 수 있다고 도와달라고 그랬는데, 씨알도 안 먹히더라구요.”
피올란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겠죠. 그들은 애초에 전방기지에 최전선이 형성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요.”
피올란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죠?”
“우리같이 어중간한 규모의 길드들이 주로 밀집해 있는 전방전선에서 최전선이 형성된다면, 그들로서는 배가 아플 수 밖에 없죠. 전투에서 전공을 많이 세울수록 전공포인트를 비롯해 어마어마하게 많은 보상들이 생기니까요.”
“아니, 우리만 싸우나? 그들도 주력부대를 이쪽에 주둔시키면 되는 거 아니에요?”
이안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최전선에 거점지를 가지고 있는 길드들은, 방어타워까지 적들을 공격하는 데 활용할 수 있잖아요.”
“아하…!”
“우리 거점지에 지어진 방어타워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그 위력이 정말 어마어마하잖아요. 가장 기본 방어타워만 해도, 어지간한 최상위 레벨 유저 두셋 이상의 위력을 내니까요. 아마 요새가 제대로 완성되고, 계속해서 우리 거점지 주변에 전선이 형성되면, 아마 우리는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을 거예요.”
피올란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정말… 그렇네요. 게다가 전투가 없을 때는 전쟁에 참여하는 npc나 유저들이 머물면서 수익창출도 되겠어요.”
“그렇죠. 유저들이 우리 거점에 있는 상점이나 경매장을 이용하면 그게 곧 세금으로 돌아올 테니까요.”
피올란이 감탄어린 눈빛으로 이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와… 그럼 이안님은 모두가 꺼려하던 이 위치에 거점지를 점령할 때부터 여기까지 생각하신 건가요?”
그 물음에, 이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처음에는 그냥 틈새시장을 노렸던 거죠.”
“에이… 너무 겸손한거 아니에요?”
“겸손이 아니라 정말이에요. 제가 중부대륙 거점지에 지을 수 있는 방어타워나, 생산할 수 있는 병사들이 이렇게 강력할줄 미리 알았겠어요? 어쩌다 보니 얻어걸린 거죠 뭐.”
“그건, 그러네요.”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실, 성배 아니었으면 지금 이렇게 대규모 공사를 진행할 수도 없었어요. 성배가 거점지 성장속도를 두 배로 빠르게 만들어주니까, 이 정도까지 가능했던 거죠.”
이안은 고개를 돌려 완성이 얼마 남지 않은 요새를 훑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어. 홀드림의 성배나 전쟁교역소 둘 중 하나만 없었어도 이런 계획은 세우지 못했을 거야.’
생각에 잠겨있는 이안을 향해, 피올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겠어요. 어떻게든 루스펠 제국군과 다른 중소길드들이 버텨주면 우리 거점지를 기점으로 전선이 형성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망하는 거잖아요?”
피올란의 말에 이안이 딱 잘라 대답했다.
“전선은 동쪽으로 계속 밀릴 겁니다.”
“네?”
“우린 아마 고립되겠죠.”
거대길드들이 작당하고 전력을 뒤로 물린 이상, 중소길드들과 일반 유저들이 아무리 노력해봐야 전선은 동쪽으로 계속 밀릴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거점지만 적진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겠지.’
이안도 처음에는 설마설마 하는 마음이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될 것임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며칠 전 직접 전투에 참여해본 뒤 더욱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자원을 쏟아 부어 만들어낸 이 요새가 얼마동안이나 집중공세를 버텨줄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카이몬 제국의 영역 한복판에서 얼마동안 버텨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안은 최대한 노력해볼 생각이었다.
‘두달? 아니, 한 달만 버텨도 본전 이상은 충분히 뽑아먹을 수 있을 거야.’
사방에서 밀려들어오는 카이몬 제국군을 한 차례만 막아내도, 어마어마한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어렵기야 하겠지만, 버티면 버틸수록 로터스 길드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할 것이 분명했다.
피올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안님은, 적진 한복판에서 버텨낼 생각으로 요새를 지었던 거예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피올란님.”
피올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 이안님 무모한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정말 역대급이네요.”
이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나도 인정.”
피올란도 마주 웃었다.
“아니,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 너무 해맑은 거 아니에요?”
“걱정 마요 피올란님. 이건 그래도 제법 승산 있는 도박이니까.”
잠시 뜸을 들인 이안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못해도 본전은 뽑아낼 거니까, 나만 믿어요.”
* * *
그로부터 3일 뒤,
카이몬 제국의 작전기지.
양 쪽으로 늘어앉은 제국의 장교들과 그 뒤에 도열한 기사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작전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총 서른 명 정도의 인원이 들어찬 이 작전회의실 안에, 유저는 고작 다섯 명 뿐이었다.
다크루나 길드의 길드마스터 이라한과, 타이탄 길드의 길드마스터인 샤크란.
그리고 개별적으로 카이몬 제국 기사단에 입단하여 고위 기사로 승급을 성공한 세 명의 랭커 유저가 그들이었다.
이라한과 샤크란은 제국 기사단의 소속이 아니었지만, ‘후작’이라는 높은 귀족 작위를 가진 유일한 유저들이었기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가운데 자리한 상석에 앉은 사령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군들의 용맹에 힘입어, 우리 카이몬 제국군은 루스펠의 허약한 군대를 물리치고 연전연승을 거듭하고 있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좌중을 둘러본 뒤 말을 이었다.
“그 결과 바로 오늘! 우리는 중부 사막지대를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중부대륙은 대부분이 사막화 되어 있는 척박한 땅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도 대륙의 가장 중심부인 중부 사막지대는 어떠한 거점지도 존재하지 않는 황량한 지대를 의미했는데, 이곳에서 지금까지 양 대륙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것이었다.
그 말인 즉, 최전방에 자리잡고 있는 로터스의 거점지 바로 코 앞까지 카이몬 제국군이 도달했음을 의미했다.
< (5). 위험한 도박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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