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고립, 그리고 위기 -2 >
* * *
“자자, 이쪽으로 질서 있게 모여주세요. 곧 전투가 벌어질 겁니다.”
중부대륙 루스펠측 최전방 기지에는, 전투참여를 위해 모여든 루스펠 제국 소속의 유저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최전방 전투는 어지간해서는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험했지만 그럼에도 많은 유저들이 전장을 찾는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는데, 첫째로는 역시 일반 퀘스트를 할 때는 얻기 힘든 막대한 명성치였고, 둘째로는 좋은 아티펙트나 퀘스트를 얻기 위해 필요한 ‘황실공헌도’를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최전방 전투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거대길드 소속의 유저들은 길드에 속한 채 전투를 치루는 것이 더 득이 많았기 때문에 찾아오지 않았지만, 소속된 길드가 없거나 중부대륙에 진출하기 힘든 중소길드 출신이면서 100레벨 이상인 유저들은 거의 대부분 이 최전방 기지에 모여 들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기 때문에 시끄러운 것은 당연했다.
“야, 근데 만약 전투 시작하자마자 죽어버리면 어떡해? 그럼 명성치고 공헌도고 얼마 얻지도 못하고 레벨만 하나 날리는 거잖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시작하자마자 죽어도 큰 손해는 아니야. 기본적으로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명성 1만에 공헌도 1천이 생기거든. 내가 아는 랭커 전사분 어제 혼자서 적 병사 몇십 잡으셨는데, 명성 5만 넘게 얻으셨더라. 공헌도도 거의 1만인가?”
“에이, 병사 말고 기사도 막타 몇 번 친 거 아니야? 병사만 잡았는데 명성 5만이나 나온다고?”
“아냐, 그분 레벨 130정도신데, 기사는 못 건드리겠다고 하더라고. 카이몬 기사들 거의 140레벨 이상이래.”
“크으… 기사는 그럼 명성 얼마나 줄까? 경험치도 많이 주겠지?”
그리고 각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용병등록을 기다리는 제국 유저들 사이에는 이안도 줄을 서 있었다.
‘거참, 절차 엄청 복잡하네. 헬라임한테 바로 찾아갈 걸 그랬나?’
헬라임에게 바로 찾아갔으면 아마 쉽게 용병등록을 할 수 있었겠지만, 전방막사는 너무도 넓었고, 헬라임이 어디에 있는지 알 방법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이안은 목을 쭉 빼서 길게 늘어서 있는 줄 앞쪽을 한번 확인해 보고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오,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는 거야? 시간 아까워 죽겠네….’
그런데 그 때, 누군가 낯익은 목소리가 이안을 불러왔다.
“저기… 혹시 이안 자작님 아니십니까?”
이안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말을 탄 채 이안을 응시하고 있는 루스펠 제국 소속의 기사 하나가 서 있었다.
이안은 순간 당황했다.
‘누구지? 어떻게 나를 아는 거지…?’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했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았던 것.
이안은 당황한 기색을 지우고는 그를 향해 물었다.
“네, 맞습니다만… 누구신지…?”
그리고 이안의 의문점은 금방 해결되었다.
“아, 자작님 맞으시군요?! 기억 못하시다니 조금 섭섭합니다. 하핫. 헬라임 근위대장님 모시고 있는 부관 '발터' 입니다. 바로 며칠 전까지 같이 홀드림 사냥에 참여하시지 않았습니까?”
설명을 다 듣자, 이안은 상대의 얼굴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기억나는 척을 해야만 했다.
‘아자, 땡잡았다!’
이안은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하, 발터경! 제가 큰 실수 했군요, 어찌 기억하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발터경 덕에 지하던전을 얼마나 수월하게 사냥했는데요. 하하!”
발터는 곧바로 말에서 내려 이안의 손을 맞잡으며 예를 취하였고, 그들 주변은 삽시간에 웅성이기 시작했다.
“뭐야, 저 유저 황실 근위기사랑 친분이 있잖아?”
“대체 누구지? 랭커나 유명인들은 전부 거대 길드소속이라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근위기사가 저렇게 친한 척 할 정도면 엄청 거물 아니야?”
“게다가 황실기사가 먼저 말을 걸었다구!”
여기저기서 이안에 대한 부러움과 그의 정체에 대한 추측이 난무할 때,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나 저 사람 알아!”
“누군데?”
“그, 있잖아. 이번 대규모 업데이트 트레일러 영상에 나왔었던 소환술사! 그 사람이야!”
“맞아! 이안! 이안이다!”
이안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움찔했다.
하지만 이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안의 인지도는 어느새 어지간한 랭커들에 비견될 정도로 올라와 있었으니까.
다만 그 인지도의 지분이 거의 소환술사 유저들이나 신규직업 유저들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 고레벨만 모여 있는 이 전장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조금 늦게 나온 것일 뿐이었다.
중부대륙에 입성할 수 있는 신규직업 유저들 숫자 자체가 정말 극소수였기 때문.
특히 레벨업이 힘든 소환술사 유저의 경우에는 중부대륙에 입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저는 거의 열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찌되었든, 이안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발터와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발터경, 혹시 제가 부탁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들어드려야지요.”
이안은 생각보다 더 호의적인 반응에 조금 놀랐지만, 곧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그동안 왕실기사단이랑 퀘스트 한 게 몇 번인데… 친밀도가 높은 게 당연한 거지.’
그리핀 부화 퀘스트부터 시작해서 포로구출작전 등 굵직굵직한 제국퀘스트를 해온 이안.
특히 고대 유적, 홀드림의 무덤 던전 안에서 기사들을 훌륭히 지휘했던 이안이었기에, 당시 현장에 있었던 발터의 친밀도는 최상에 가까웠다.
“저도 최전방에서 기사단을 도와 싸우고 싶은데, 최대한 선두에서 많은 적들을 상대하고 싶어서 말이지요. 발터경이 저를 헬라임 단장님께 좀 안내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기다리기 싫어서 새치기를 하고 싶다는 말을 교묘히 포장한 이안!
물론 발터는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제가 듣기로 로터스 길드도 거점을 수성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황실을 위해 이렇게 전방공격대에 달려와 주시다니, 폐하에 대한 충성심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자작님.”
이안은 얼굴에 철판을 최대한 두껍게 깐 채 호탕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핫핫, 제국의 최전방 방어선이 무너지고 나면, 저희 길드 거점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선에서 카이몬 놈들을 막는데 앞장서겠습니다.”
발터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 역시 폐하께서 자작님을 총애하시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자작님. 제가 단장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단장님께서도 아마 기뻐하실겁니다.”
이안은 발터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며 감사를 표시했다.
“고맙습니다, 발터경.”
짧은 대화를 마치고 황실기사 발터의 뒤를 따라 막사 안으로 사라진 이안.
그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유저들이 투덜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와… 게임 안에서까지 인맥이 중요하다니… 이거 서러워서 살겠나…!”
“그런데 아무리 네임드 유저라고 해도, 소환술사가 최전방 격전지에서 얼마나 활약을 할 수 있다고 저렇게 모셔 가는 거지?”
“그러니까 말입니다. 소환술사 레벨업 오지게 힘든 건 다 아는 사실이고… 이안 저사람 랭킹 목록에도 없던데 110레벨은 찍었으려나?”
“헐, 이분들 뭘 잘 모르시네요. 이안님 전투영상 한번이라도 보기는 했음?”
“아뇨. 뭐 본적은 없지만 뻔하지 않습니까. 소환술사 한 두번 보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이안에 대한 논란이 점점 짙어질 때 쯤, 지금껏 가만히 있던 한 여성 유저 하나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말의 파급력은 상당했다.
“지인은 아니지만… 이안님 최소 130레벨 예상합니다.”
곧이어 여기저기서 곧바로 터져 나오는 반발.
“아니, 그게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랭킹 1위 소환술사 유저가 지금 122레벨인가 그런 걸로 알고 있는데요.”
“내말이…. 흑마법사도 130 넘은 유저가 다섯 명이 안 되는데….”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제가 현재 소환술사 1위에 랭크되어있는 그 122레벨 소환술사거든요. 그리고 이안님 전투영상을 본 결과… 저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당황한 표정이 된 유저들.
“그런데 어떻게 랭킹에 안 뜰 수가….”
그리고 그녀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마 지금껏 모든 정보를 100% 비공개로 설정해 놓았겠지요. 비공식 랭커 중에 그런 유저들도 몇몇 있지 않습니까?”
“그, 그런….”
쉽게 믿기는 힘든 말이었지만, 그녀의 머리위에 떠 있는 그녀의 캐릭터 정보가 그녀의 말에 무게감을 더해주었기에, 사람들은 부러운 표정으로 이안이 사라진 자리를 응시했다.
[로렌 / Lv122 / 소환술사]
* * *
[그러니까… 이제 한 시간 뒤에 발발할 제국 간 전쟁에 최선봉으로 들어가신다는 거죠?]
책상 앞 의자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으로 누군가와 통화중인 진성.
“네, 맞습니다. 전투과정은 전부 다 캡슐 내장캠으로 녹화할거구요. 제 캡슐 나온 지 얼마 안 된 최고사양 신상이라서, 화질도 죽여줄 겁니다.”
계속해서 진성의 스마트폰 넘어로 맑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네요. 어쩐지 지난번 홀드림 무덤 지하 던전 영상도 퀄리티 정말 좋았었는데… 역시 캡슐이 최신형 이었군요.]
“맞습니다. 아무튼, 이번에도 영상편집 잘 좀 부탁 드립니다 소진씨.”
[물론이죠. 걱정 마세요. 영상 자체가 워낙 좋기도 하지만, 제 실력 아시잖아요.]
“물론이죠. 그럼 영상 다 되는 대로 곧바로 쏴 드리겠습니다.”
용건을 마친 진성이 전화를 끊으려는데, 다시 소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참, 진성씨.]
“예?”
[그, 홀드림 던전 클리어 영상은 언제쯤 업로드해도 될까요?]
그 물음에 진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그 영상이 퍼지면 아직까지는 좀 위험할 수도 있겠어. 거대길드에서 날 더 주목할 테니까….’
가장 큰 문제는 영상이 퍼지고 나면 홀드림의 성배가 진성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도 함께 퍼져나갈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물론 성배를 획득하는 장면은 편집해서 올라가겠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진성의 말이 이어졌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아직은 알려지면 안 될 정보가 담겨있어서…. 한 보름 정도 후면 괜찮을 것 같네요. 그때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죠.”
그 말에 소진이 입맛을 다셨다.
[쩝…. 빨리 올리고 싶어서 근질거리는데…. 뭐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럼 곧 다시 연락 주세요, 진성씨!]
“넵!”
전화를 끊은 진성은 인터넷을 켜서 자신의 전투장면이 담긴 유캐스트의 영상목록을 검색해서 쭉 훑어보기 시작했다.
적게는 몇십만 조횟수인 것부터 시작해서, 많게는 거의 천만조횟수에 육박하는 영상도 있었다.
진성은 뿌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좋아, 이 정도 조횟수면 지난달보다도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어오겠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영상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진성.
그동안 제법 많은 전투영상들을 소진에게 넘겨준 덕에, 이제 이안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하면 거의 스무개에 달하는 영상이 검색되었다.
“통장에 돈 들어오면 뭐부터 사야할까…? 역시 돈은 쓰는 맛에 버는 거지!”
통장으로 굴러 들어올 돈을 펑펑 쓸 생각에 행복해진 진성!
그런데 진성의 다음 말이 가관이었다.
“방어구부터 최상급 템으로 다 바꿔야 하나? 아니면 지팡이를 바꿀 때가 됐나? 음… 마력의 구체는 아직 쓸만해서 바꾸기는 좀 아까운데….”
남들 같으면 벌어들인 돈으로 차를 사거나 좀 더 좋은 집으로 옮겨갈 생각을 했을 텐데, 벌어들인 돈으로 게임 아이템에 현질할 생각을 하는 진성.
아마 이 광경을 부모님이 보셨다면, 뼈도 추리기 힘들었을 테지만, 진성은 싱글벙글하며 다시 캡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다 쓰진 말고 조금은 남겨서 하린이랑 소고기라도 먹으러 가야겠어.”
그래도 이제는, 다행히(?) 진성의 머릿속에 하린의 지분이 조금은 생긴 모양이었다.
< (3). 고립, 그리고 위기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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