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황금귀룡 -2 >
* * *
삑- 삑삑삑삑-!
진성의 원룸 앞에 도착한 하린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도어락의 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어차피 진성은 게임 중 일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벨도 누르지 않았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간 하린은, 구석에 있는 진성의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진성이 들어가 있음이 분명한 캡슐을 뚫어져라 응시하기 시작했다.
‘우리 진성이 이제 밥 먹으러 나올 때가 됐는데….’
하린은 평소와는 사뭇 다른 예쁘장한 원피스 차림이었다.
물론 그저 기분내기 위해 꾸미고 나온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기필코 이 게임폐인을 끌어내서 데이트를 해야겠어.’
평소에도 막 입고 다니는 편은 아니었지만, 화장에도 신경을 좀 쓰고 향수까지 뿌린 하린은 결연한(?) 표정으로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응시했다.
[12:47]
진성은 일반적인 게임폐인들과는 다르게 규칙적인 식사습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12시 50분 정도만 되면 어김없이 점심을 먹으러 캡슐 밖으로 나온다.
하린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거울이나 한번 볼까? 오늘 화장도 좀 잘 먹은 거 같은데….”
흥얼거리며 손거울을 이리저리 살피던 하린.
그리고 잠시 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12시 50분이 지나자 진성의 캡슐이 열리기 시작했다.
위이잉-
침대에 앉아있던 하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진성은 그녀를 보지 못했는지 식탁으로 어슬렁 어슬렁 걸어가고 있었다.
‘어휴, 어떻게 집에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를 수가 있지? 저 둔한 놈…!’
사실 진성이 둔한 탓도 있었지만, 오랜 시간 캡슐 안에 있다가 나온 것이다보니, 주변 인지능력이 떨어진 탓이었다.
하린은 후다닥 진성의 옆으로 뛰어가 팔짱을 꼈다.
그리고 반쯤 멍한 표정이던 진성은 느닷없는 하린의 등장에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으아앗!”
거의 경기를 일으키는 진성을 보며, 하린은 해맑게 웃으며 팔을 잡아끌었다.
“왜 이렇게 놀라고 그러셔? 언제든지 놀러 와도 된다면서?”
“그, 그거야 그렇지만….”
겨우 놀란 가슴을 가라앉힌 진성이 하린을 향해 다시 물었다.
“그런데 너 대체 언제 왔어? 올 거면 미리 메시지라도 보내주지.”
하린은 베시시 웃으며 어깨를 으쓱 했다.
“서프라이즈!”
“….”
식탁으로 가던 걸음을 돌려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앉았다.
“점심 같이 먹으려고 온 거야?”
진성의 물음에 하린이 대답했다.
“그것도 있고…?”
“또 다른 게 있어?”
“오늘은….”
잠시 뜸을 들인 하린의 말이 이어졌다.
“기필코 널 카일란 밖으로 끌어낼 생각이거든.”
“뭐…?”
하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성을 마주보며 밝게 웃었다.
“어때? 나 오늘 예쁘지 않아?”
진성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하린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훨씬 꾸미고 나온 하린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진성은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쁘네.”
“얼마나?”
어색한 표정으로, 진성의 말이 이어졌다.
“많이…?!”
하지만 표정이 어색한 것일 뿐이었지, 진성의 말은 진심이었다.
단지 이런 상황(?)을 처음 경험해보기 때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던 것일 뿐.
하린이 진성의 신형 캡슐 옆에 있는 컴퓨터를 슬쩍 응시하며 말했다.
“나 컴퓨터로 인터넷이나 좀 하면서 놀고 있을 테니까, 얼른 씻고 나갈 준비 해.”
“뭐…?”
“내가 그럼 설마 너랑 게임이나 하려고 이렇게 예쁜 옷 입고 왔겠어?”
진성은 퀘스트를 마무리하러 가야 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 했지만 가까스로 되삼켰다.
“너무 갑작스럽….”
하지만 단단히 벼르고 온 하린이었기에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하린은 진성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데이트 신청이야, 박진성. 원래는 너한테 기회를 주고 싶었지만… 네가 나한테 데이트신청을 하는 건 카일란이 망하기 전까지는 불가능해 보였거든.”
진성은 반박할 수 없었기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
“아무튼! 얼른 씻고 나와. 빨리!”
하린은 재빨리 진성에게 다가가 등을 떠밀었고, 진성은 당황해서 하린을 의자 위에 앉혔다.
“아, 알겠어. 알겠다구. 씻고 나올 테니까 컴퓨터만 보고 있어 알겠지?”
하린이 장난스런 웃음을 지어보이며 대꾸했다.
“오래 씻으면 문 따고 들어 갈 거니까, 빨리 씻도록!”
* * *
진성은 나름대로 집에 있는 옷들 중 가장 괜찮은 것들로 챙겨 입고는, 하린과 함께 집을 나섰다.
하지만 그래봐야 큰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옆에서 빛나는 외모를 자랑하는 하린에 가려져 진성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으니까.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하린아?”
진성의 물음에 하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따라 오기나 하세요, 진성씨. 오늘 너한테 선택권은 없어.”
“그… 그래….”
하린의 박력(?)에 움찔한 진성은 잠자코 그녀를 따라나서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인벤토리에 들어있을 여의주가 마음 한 구석에 신경 쓰였지만, 그래도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하린을 보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하린이가 확실히 예쁘긴 하단 말이지.’
진성은, 자신의 모든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게임시간을 양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하린이라고 생각했다.
손잡고 걷는 지금, 어지간한 고급 아이템을 득템했을 때 보다도 더 설레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서울 근교에서 가장 커다란 놀이공원이었다.
“놀이공원에 오고 싶었던 거야?”
진성의 물음에 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놀이기구 타는 거 되게 좋아하거든.”
진성도 나름 흥미로운 표정으로 놀이기구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얘기를 꺼내었다.
“나 놀이공원 처음 와봐.”
“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냥, 살다보니까 그렇게 됐네.”
“뭘 살다 보니까야, 그저 게임할 시간이 아까웠던 거지.”
이미 너무도 진성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하린.
반박할 수 없는 하린의 말에, 진성은 말없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놀이공원의 자유이용권을 끊은 두 사람으 기분좋게 놀이기구들을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다.
놀이공원의 자랑인 고속 열차 A-익스프레스에 탑승한 진성이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덜컹- 덜컹-
드르르륵-
천천히 체인이 감기며 더욱 높은곳을 향해 움직이는 놀이기구.
진성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하, 하린아.”
“응? 왜그래?”
“이, 이거… 너무….”
차마 신이 날 대로 난 하린의 앞에서 무섭다고 말하기 민망했던 진서은 말을 더듬었지만, 하린은 곧바로 진성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뭐야, 너 지금 무서운거야?”
진성은 발끈하며 대꾸했다.
“무, 무섭다니! 그냥 여기가 너무 높은 것 같아서… 으아악!”
덜컥-
가장 높은 지점까지 끌려 올라간 열차가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멈춰 서자, 진성의 입에서는 반사적으로 비명이 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본 하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못살아….”
가늘게 떨리는 진성의 눈망울!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안전바를 꼭 움켜진 진성을 보며 하린은 웃음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진성이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 같은 건 없었다.
그렇게 진성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쐐애애액-!
바람을 가르며 곤두박질치듯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고속열차!
진성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어어억!!”
반면에 하린은 잔뜩 신난 표정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와아아아!”
극과 극의 모습으로 놀이기구를 즐기는 두 사람.
진성은 눈을 감은 채, 소환수들을 떠올렸다.
‘뿍뿍이가 보고 싶어…! 핀이, 할리, 라이…. 얘들아 날 좀 구해줘. 흑흑.’
하린이 듣기라도 했다면 평생 놀림감이 되었을 만한 대사였지만, 진성은 진심이었다.
이 고통스러운 시간이 얼른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연애가 이렇게 무서운 거였다니…! 내가 모솔인 이유가 있었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진성은 계속해서 딴생각을 했고, 그렇게 15시간 같은 15분이 지난 뒤, 진성은 다시 지상을 밟을 수 있었다.
“으… 으으….”
새하얗게 질린 얼굴.
후들거리는 두 다리.
거의 녹초가 된 진성을 보며 하린이 비웃었다.
“야, 넌 남자가 뭐 그렇게 겁이 많아? 아까 타러 올라갈때는 호기롭게 올라가더니.”
하지만 진성은 나름대로의 변명을 대었다.
“하린아, 내가 가상현실 게임을 잘 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뭔데?”
“난 공간지각능력이 엄청 뛰어나거든.”
하린이 어이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게 지금 겁이 많은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그러니까, 난 저 위에 있을 때 남들보다 몇 배로 무서운 거야.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위험한 데 올라와있는지 너무 정확히 인지하고 있거든.”
말도 안 되는 괴변을 늘어놓는 진성을 보며, 하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웃기고 있네. 그럼 나는 공간지각능력이 부족해서 안무서운거야?”
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그런 거지. 넌 저 위에 있어도 지금 여기가 어딘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인지가 안 되는 거야.”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논리를 펼쳐가는 진성.
하지만 하린의 다음 말로 인해 진성의 주장은 곧바로 묵살되었다.
“시끄럽네요, 아저씨. 배고프니까 뭐 좀 먹으러 가기나 하자.”
“그, 그래….”
진성은 하린이 곧바로 다른 위험한(?) 놀이기구를 타러가자고 제안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적잖이 안도했다.
* * *
“그러니까 에밀리. 여기서는 식량생산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얘기지?”
“그렇습니다. 샤크란님. 사실 불가능하다기 보다는, 정확히 말하면 너무 효율이 나쁜 겁니다. 저희 중심영지에서 생산하는데 필요한 자원의 거의 열배가 들어가니까요.”
“흐음… 그정도라니…. 생각했던 것 보다 심각한 수준이군.”
다크루나 길드에 이어 성공적으로 첫 번째 중부대륙의 거점지를 점령한 타이탄길드는 생각지 못한 난관에 부딪혀 있었다.
일단 거점지를 점령했으면 발전시켜야 하는데, 황량한 사막 위의 거점지인지라, 아무런 자원도 생산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치안대를 키워서 주변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그 전리품을 얻는 정도였는데, 전리품들을 얻어도 어디 내다 팔 곳이 없으니 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북부영지는 날이 좀 춥기는 해도 기본적인 농경 시스템과 주변 영지, 제국간의 네트워킹이 가능해서 일정 수준의 기반만 닦아 놓으면 빠르게 성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는데, 중부대륙은 정말 답이 없었다.
두 사람의 옆에 잠자코 서 있던 세일론이 입을 열었다.
“그럼, 방법은 본진에서 자원 끌어다가 퍼붓는 수 밖에 없네.”
에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지금으로서는 빠르게 성장시키려면 그 방법 밖에….”
샤크란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군.” 하지만 중부대륙의 거점지가 장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거점지 레벨이 낮아도 기본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병력의 질이 북부대륙의 영지보다 월등히 높았으며, 등용할 수 있는 인재들의 레벨도 기본이 130부터 시작이었다.
게다가 전쟁 특화 지역이라 그런지, 각종 전투 관련 장비상점이나 특별한 능력을 가진 영웅 NPC를 양성할 수 있는 기관도 거점지 레벨이 높아지면 지을 수 있었기 때문에,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중부대륙의 거점지는, 초반에 자리 잡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렇지 어떻게든 기반을 닦아놓기만 하면 제 값을 톡톡히 할 게 분명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샤크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지금까지 모아뒀던 자금을 모두 쏟아부을 때가 왔군.”
샤크란의 말에 에밀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마스터. 지금 자금을 최대한 끌어 모아서 중부대륙 거점지 두세 군데만 확실히 키워 놓으면 분명 엄청난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의견이 모아지자 샤크란은 곧바로 길드 채팅방을 열어 간부 회의를 소집했고, 빠르게 일을 진행시켰다.
그렇게 거점지를 하나씩 점령한 두 거대길드가 차근차근 기반을 닦아나갈 무렵.
루스펠 제국의 상위길드들은 그제야 중부대륙에 하나둘 입성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카이몬 제국의 길드들이 이미 압도적인 우세를 가져가기 시작한 중부대륙.
하지만 어디에나 변수는 있는 법이었다.
< (1). 황금귀룡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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