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성배 쟁탈전 (中) -1 >
“이… 이게 대체…!”
훈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카이자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흙빛이 되어가며 허공으로 흩어지는 홀드림!
그리고 둥실둥실 떠오른 채 카이자르를 향해 움직이는 홀드림의 왕관.
훈이는 자신의 눈 앞에 떠있는 상태메시지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홀드림의 왕관이 ‘불패의 검사 카이자르’를 선택했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노력을 전부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는 한 줄의 메시지.
훈이가 절규했다.
“으아아!! 내 퀘스트… 퀘스트는…!”
그와 별개로, 어느새 홀드림의 왕관을 받아 든 카이자르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왕관을 보고 있었다.
“크으, 물건이 사람 볼 줄 아는구만.”
그리고 카이자르는 이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봤냐, 영주 놈아. 내가 이 정도다.”
“….”
이안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카이자르와 훈이를 번갈아 응시했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이안으로서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거 맞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훈이의 표정이 더욱 안쓰러웠다.
그리고 카이자르가 이안의 가신인 줄 모르는 훈이는, 그저 카일란의 개발사를 욕할 수 밖에 없었다.
'제기랄. 이건 유저농락이야. 유저 능욕이라고! LB소프트에 전화해서 항의해야겠어.'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바뀔 것이 없을 것이라는 건, 훈이도 잘 알고 있었다.
훈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망할…! 어떻게 이렇게 꼬일 수가 있는 거야?”
그렇다고 카이자르에게 덤벼 왕관을 빼앗을 엄두는 더더욱 나지 않았다.
단 몇 번의 공방으로 데스나이트 발람을 때려눕히던 그 위용이 아직 잊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안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훈이에게 말을 걸었다.
“야, 이거 어쩌냐.”
“….”
“이건 불가항력이잖아.”
훈이가 이안을 째려보았다.
“지금 시비거냐…?.”
“아니 뭐, 시비는 아니고.”
훈이는 이안이 얄미웠지만, 그렇다고 이안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저 속으로 분을 삭일 수 밖에 없었다.
이안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때, 발람이 입을 열었다.
[훈이, 임모탈님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
그 말과 동시에 훈이의 시선이 자동으로 돌아갔다.
“뭐, 뭔데?”
훈이로서는 시커먼 어둠 속에 한 줄기 빛과도 같은 발람의 말.
발람이 카이자르를 슬쩍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100일 동안 왕관의 주인의 옆에 머물면서 새어나오는 어둠의 기운을 목패 안에 받으면 된다.]
그리고 발람이 훈이의 손에 들려있는 해골 목패를 가리켰다.
[다행히도 왕관의 어둠의 봉인이 풀렸기 때문에, 저장되어있던 어둠의 기운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올 것이다. 그걸 전부 받아내는 데 20일이 걸린다.]
그 말에 훈이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퀘스트만 성공시킬 수 있다면, 아티펙트 하나 정도 손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20일이라는 기간이 제법 길기는 했지만… ‘임모탈의 권능’은 그 정도의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능력이었으니까.
“다행….”
그런데 그 때, 그들의 뒤쪽에서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마음대로?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 이상한 꼬마.”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아닌 카이자르.
훈이의 얼굴이 다시 사색이되었다.
“아니, 대체 왜…! 그냥 흘러나오는 어둠의 기운만 받겠다는데…!”
카이자르가 손을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간지훈이, 네놈은….”
모두의 시선이 카이자르의 입으로 모였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훈이는 절망했다.
“너무 비호감이다.”
“….”
단호한 카이자르의 한마디.
게다가 개인의 취향(?)이라 뭐라 반박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훈이는 말문이 막혔다.
훈이는 충격에 말을 더듬었다.
“비, 비호감이라니…! 임모탈님의 권능을 이어갈 차기 어둠의 군주에게…!”
카이자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이상하다.”
“….”
이안은 입 밖으로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카이자르에게 말했다.
왠지 저 불쌍한 꼬마녀석을 도와주고 싶어졌다.
“가신님아.”
“왜 그러냐 영주놈아.”
“그러지 말고 한번 도와줘라.”
생각지도 못하게 이안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훈이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카이자르는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지?”
“쟤, 알고 보면 불쌍한 애야. 봐, 말하는 것만 봐도 정상인 같지는 않잖아.”
카이자르가 훈이를 슬쩍 응시했다.
그리고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도 일리가 있기는 하군.”
훈이는 자신을 이상한 놈 취급하는 두 사람을 보며 분노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퀘스트였으니까.
“야, 꼬마 놈아.”
카이자르의 부름에 훈이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으응?”
“내 제안을 수락하면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훈이가 재빨리 물었다.
“제안? 그게 뭔데?”
그리고 카이자르의 말이 이어졌다.
“앞으로 내 부하가 되면 된다. 그래도 영주놈을 부려먹을 순 없으니, 부려먹을 사람이 한 놈 필요하다.”
“….”
훈이의 주먹이 수치심(?)에 부르르 떨렸다.
“부려먹을 놈이라니…!”
카이자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
훈이와 발람, 그리고 이안의 시선이 카이자르의 입을 향했다.
“네놈이 만약 나보다 강해진다면 자유를 주도록 하지. 어떤가. 임모탈의 후계자라면 그 정도의 배짱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훈이와 카이자르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리고 이 종잡을 수 없는 상황전개에, 이안은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었다.
훈이가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하, 이거 어떻게 해야하지?’
훈이는 실눈을 뜨고 카이자르를 슬쩍 응시했다.
‘임모탈의 권능을 얻으면 저놈을 이길 수 있을까?’
훈이는 카이자르의 정확한 레벨을 모른다.
이안이 모든 설정을 비공개로 해 놓았기 때문에, 카이자르를 비롯한 모든 이안의 가신들도 레벨이 노출되지 않았다.
그저 겉으로 보이는 전투력으로, 카이자르의 강함을 추측할 수 있을 뿐.
‘그래. 저놈 레벨이 높아야 200이 넘겠어? 엔피씨는 레벨이 잘 오르지 않으니 임모탈의 권능만 있으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거야.’
훈이의 생각처럼, NPC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거의 레벨이 오르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카이자르는 일반적인 NPC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카이자르는 이안의 가신이었고, 지금도 계속 성장중이었다.
결정적으로… 카이자르의 레벨은 247.
훈이가 예상하는 수준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던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었다.
그런 사실들을 모르는 훈이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좋아…. 하겠어.”
카이자르가 게슴츠레한 눈초리로 훈이를 응시했다.
“정말?”
“그래. 대신 약속을 지켜라.”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거지?”
“내가 네놈을 이긴다면, 이 계약은 무효가 되는 것이다.”
훈이의 말에 카이자르가 피식 웃었다.
“물론이지. 나 카이자르는 한 입에 두 말을 담지 않는다. 믿어도 좋다.”
그리고 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이자르가 훈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에 훈이는 불안한 눈으로 카이자르를 응시했고, 놀랍게도 훈이의 눈 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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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종계약-
불패의 검사 카이자르가 당신을 수하로 임명하고 싶어 합니다.
수락하면 당신은 불패의 검사 카이자르의 수하가 되며, 조건을 충족하기 전까지는 계약을 해지할 수 없습니다.
조건 : 일대일의 대결에서 카이자르를 상대로 승리.
* 당신이 명령을 어긴다면 카이자르가 당신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채로 카이자르로부터 계약을 파기당한다면 명성이 10만 감소합니다.
계약을 수락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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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안은 놀란 눈으로 카이자르를 보았다.
‘가신이 된 NPC도 퀘스트를 줄 수 있는 거였어…?’
이안은 훈이의 눈 앞에 떠올랐을 메시지 창이 어떤 것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훈이의 머리 위에 떠오른 이펙트는 퀘스트를 받을 때 떠오르는 그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안은 훈이가 더욱 불쌍해졌다.
‘설마… 수락하는 건 아니겠지? 말이 조건부 계약이지… 저 조건이면 그냥 종신계약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하지만 말릴 생각은 없었다.
이안의 입장에서도, 부려먹을 수 있는 부하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
‘쫄따구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리고 저놈 제법 쓸모 있기도 하고.’
그리고 이안이 기대했던 대로, 훈이는 카이자르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아. 수락하도록 하지.”
아직까지 불끈 쥔 주먹을 부르르 떨고있는 훈이를 보며, 옆에 서있던 헤르스가 이안을 향해 속삭였다.
“야, 쟤 큰일 난 거 아니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큰일 났지.”
근처에 있던 피올란도 거들었다.
“저 꼬마, 불쌍하네요. 얼마 후에 현실을 알게되면 캐릭터 삭제할지도 모르겠어요.”
이안의 발 밑에 내려와 있던 뿍뿍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뿍- 뿌뿍-
안타까운 표정으로 훈이를 바라보는 뿍뿍.
뿍뿍이의 눈에는, 미트볼로 인색하게 구는 악덕주인 이안과 카이자르가 왠지 모르게 겹쳐보였다.
하지만 주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훈이는 전의를 불태웠다.
“내가 금방 건방진 네놈을 이길 정도의 실력을 키워 도전하겠다. 그때 가서 날 피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훈이를 향해 돌아오는 건, 카이자르의 비웃음이었다.
“말투부터 고쳐라 꼬맹아. 주군에게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말투라니.”
카이자르의 말을 들은 이안은 어이가 없었다.
‘뭐? 영주한테 영주놈이라고 하는 가신놈이…!’
이안의 생각과는 별개로 훈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주군.”
“말이 짧다.”
“알겠… 습니다.”
지팡이를 땅에 짚은 채, 훈이는 울분을 삼키고 있었다.
“크윽. 차기 어둠의 군주인 내가 이런 꼴이 되다니…!”
그리고 그런 그를 발람이 위로했다.
[임모탈님의 부활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훈이. 그대는 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이안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허, 진짜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어느새 훈이는, 이 상황과 역할에 이입하고 있었던 것!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홀드림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으니 홀드림의 보물들을 챙겨야 했다.
‘저 문 뒤에 아티펙트들이 쌓여 있겠지?’
성배를 제외한 아이템은 공평하게 분배를 해야하겠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엄청난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것임을, 이안은 의심하지 않았다.
“저 안에 성배가 있겠죠?”
이안의 물음에 헬라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문고리를 잡은 이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굳게 닫혀있던 철문이 삐걱거리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 (7). 성배 쟁탈전 (中)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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