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성배 쟁탈전 (上) -1 >
“제대로 도착한 것 맞지 발람?”
훈이의 말에, 데스나이트 발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 음울한 분위기, 스산한 울림들. 여긴 분명히 내가 찾던 곳이 맞다.]
유적지 무덤 던전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이안도, 샤크란도 아닌, 바로 간지훈이였다.
중부대륙에 진입한 시간은 훈이가 가장 늦었지만, 임모탈의 권능과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는 데스나이트 발람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줬던 것.
임모탈의 권능을 사용하면, 모래 위에서는 세 배 이상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홀드림의 왕관… 이라고 했지?’
하지만 훈이가 찾고 있는 것은, 이안이나 샤크란과는 다른 물건이었다.
훈이의 목적은 자신의 히든퀘스트를 완료하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홀드림의 왕관’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때, 발람이 앞으로 나서며 훈이에게 경고했다.
[적이다, 훈이. 준비해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전방에서 기괴한 소리들과 함께 몬스터들이 등장했다.
시커먼 연기로 휘감겨 있는 미이라의 형상을 한 몬스터들.
훈이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지팡이를 앞으로 뻗었다.
“잊혀진 홀드림의 하수인이라… 네놈들은 새로운 어둠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냐!”
어떤 상황에도 빠지지 않는 훈이의 역할몰입.
그리고 발람은 그런 훈이를 흡족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기준에서 훌륭한 대사였기 때문.
훈이의 말이 이어졌다.
“어둠의 힘, 그리고 임모탈의 권능이여… 현신하라…!”
딱히 입 밖으로 내뱉을 필요 없는 시동어를 열심히 외친 훈이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바닥에서 수많은 스켈레톤 전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끼긱- 끼기긱-!
크헤에엘-
어림 잡아도 수십은 되어 보이는 스켈레톤 워리어들과, 그 반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된 스켈레톤 메이지들!
게다가 130레벨이 넘는 데스나이트도 두 기나 더 소환해낸 간지훈이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전방을 향해 지팡이를 뻗었다.
“건방진 이단자들을 모두 처단하라!”
그렇게 시작된 전투.
‘잊혀진 홀드림의 하수인’ 이라는 이름을 가진 몬스터들의 레벨은 150 이상이었으며, 숫자도 거의 열 개체 이상은 되었다.
하지만 훈이의 암흑군단은 강력했고, 큰 피해 없이 몬스터들을 다 잡아낼 수 있었다.
훈이는 임모탈의 권능 아이템을 슬쩍 응시하며 다시 의지를 불태웠다.
‘퀘스트는 무조건 성공해야해. 권능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면….’
훈이의 현재 레벨은 129.
레벨업이 빠른 흑마법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흑마법사 중 거의 서버 1,2위를 다툴 만 한 높은 레벨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훈이가 소환해 낸 언데드들의 규모는 그 레벨대의 흑마법사가 절대로 소환해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특히 데스나이트를 두 기나 소환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어둠마력을 충전시켜주는 임모탈의 권능 덕분이었다.
쾅- 콰쾅-!
그리고 훈이가 소환한 두 기의 데스나이트와는 완전히 다른 생김새를 가진 데스나이트 발람.
무려 170레벨에 육박하는 발람은, 던전 안의 몬스터들을 손쉽게 상대했다.
“다 마무리한 것 같군.”
[그렇다, 훈이.]
“그럼 안쪽으로 들어가 볼까?”
그런데 그 때, 말을 마치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훈이를, 발람이 막아섰다.
[누군가 던전에 들어왔다, 훈이.]
“음…?”
생각지도 못한 상황.
훈이는 잠시 고민했다.
‘유적 안쪽에는 홀드림의 왕관 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티펙트들이 있을 텐데….’
정확히 어떤 물건들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단 한 개의 아티펙트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게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
‘그리고 중앙대륙은 PK에 패널티가 없다고 헀지?’
게다가 던전에 들어온 ‘누군가’가 유저이든 NPC이든 전혀 상관이 없는 상황이라면….
훈이의 입 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발람.”
[왜 부르는가, 훈이.]
“어쩔 수 없다. 마음이 아프지만… 대업을 위해서라면 살인멸구를 해야겠군.”
훈이는 무게를 잡으며 뒤돌아 섰고, 그의 말에 발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좋은 생각이다. 역시 어둠의 계승자답군.]
훈이는 뒤돌아서 불청객을 맞기 위한 준비를 했고, 발람 또한 검을 뽑아들고 전투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낯익은 얼굴과 마주하게 된 훈이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 너, 넌…!?”
물론 그 ‘낯익은 얼굴’은 바로 이안이었다.
“이야… 이게 누구야, 꼬마 오랜만이다?”
순간, 투기장 루키리그에서의 악몽이 떠오른 훈이는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의외의 만남이기는 했지만, 훈이는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그 때의 복수를 할 신이 내린 기회다! PK존에서 이놈을 만날 줄이야!'
“잘 됐다, 이안! 네놈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지난날의 수모를 갚아주마!”
“….”
훈이의 장황한 말에 이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뒤늦게 따라 들어온 카이자르가 이안을 향해 물었다.
“저 이상한 꼬마, 아는 놈이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는 놈이기는 한데….”
이안이 앞으로 한 발짝 움직이며 훈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넌 어째, 변한 게 하나도 없냐?”
지지 않고 대꾸하는 훈이.
“이 비겁한 놈! 네놈만 할까!”
훈이는 이어서 지팡이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저들을 전부 몰살하라!”
설마 훈이가 다짜고짜 공격을 감행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지만, 그렇다고 당해 줄 이안은 아니었다.
이안은 재빨리 뒤로 빠지며, 떡대를 앞세워 반격을 시작했다.
“떡대 어비스 홀!”
쿠오오오-!
교차된 떡대의 팔을 타고 쏟아지는 나선형의 기류.
그리고 훈이를 향해 달려드려는 카이자르를, 이안이 잠시 멈춰 세웠다.
“카이자르, 잠깐만.”
“왜 그러냐.”
“훈이 저놈은 죽이지는 말아봐.”
“…?”
이안이 씨익 웃었다.
“뜯어낼 게 좀 있어서 그래.”
* * *
15분 뒤.
“훈이, 인마.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건 알겠는데, 왜 형한테 까불고 그래.”
제국기사들과 이안의 소환수들에게 둘러싸여 분한 표정을 하고 있는 훈이의 앞으로, 이안이 성큼 성큼 다가갔다.
“오, 오지마!”
“싫은데?”
능글맞은 표정으로 훈이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이안은 지팡이를 불쑥 내밀었다.
“너, 딱 한방이면 죽을 거 같다?”
대놓고 협박을 시전하는 이안.
훈이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아, 안 돼… 그러지 마…!”
훈이가 이렇게까지 경기(?)를 일으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훈이가 지금 진행 중인 히든 퀘스트가 사망하는 순간 실패로 돌아가게 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죽는 것 자체의 패널티도 제법 컸지만, 그냥 죽는 정도 선에서 끝나는 것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두려워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어떻게 얻은 히든퀘스트인데…!’
사실 훈이는 이안에게 이렇게 쉽게 제압당할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안 자체도 생각보다 강력했지만, 저 시커먼 대검을 든 백발의 검사는 정말 재앙이었다.
믿고 있던 데스나이트 발람도 백발의 검사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린 것이었다.
‘170레벨이 넘는 발람이 순식간에 당할 줄은….’
훈이는 바닥까지 떨어져 깜빡거리고 있는 생명력 게이지 바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그리고 체념한 표정이 된 훈이를 슬쩍 응시한 이안은, 슬쩍 운을 띄웠다.
“야, 살려줄까?”
“…?!”
솔깃한 제안에 잠시 움찔 한 훈이.
‘살려줄까 라니… 이렇게 치욕적일수가!’
하지만 자존심을 세우기엔 지금 죽음으로 인해 잃어버릴 것들이 너무 많았다.
훈이는 조금 슬프지만 자존심을 살짝 접어두고 이안에게 물었다.
“조건이 있겠지?”
그의 반문에, 이안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짜식, 똘똘하네. 당연히 조건은 있지.”
“조건이 뭔데?”
잠시 뜸을 들인 이안이 말을 이었다.
“우선, 네가 우리 파티에 들어와야 해.”
파티가 되면, 던전 최초발견 보상이 공유되게 된다.
훈이도 이안의 제안이 의미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잃을 것도 별로 없었고.
“그리고?”
이안의 말이 이어졌다.
“홀드림의 성배를 비롯한 던전 안에서 나오는 모든 아티펙트는 전부 내 거다.”
그 말에 훈이가 살짝 움찔했다.
“그건 안 돼.”
홀드림의 왕관을 얻지 못한다면, 살아서 던전을 도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
이안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왜? 넌 죽지도 않는데다가, 우리랑 파티사냥하면 경험치도 엄청 먹을 텐데… 그 정도도 안 돼?”
훈이가 소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홀드림의 왕관. 그거 하나만 나 줘.”
훈이의 말에 이안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이안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특정 아티펙트를 지목하는 훈이를 보며,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요놈, 이 던전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해.’
훈이를 살려두길 잘 했다고 생각한 이안은 두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게 왜 필요한데?”
훈이는 솔직하게 얘기했다.
“내 퀘스트에 필요해. 그거 하나만 나한테 주면 나머지는 다 양보할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이안.
“그걸 어떻게 믿어?”
하지만 훈이도 그 이상 양보할 수는 없었기에, 지지 않고 대꾸했다.
“내가 그 이상으로 욕심내면 네가 날 죽이면 되잖아? 내가 아이템 먹고 나르는데 가만히 있을거야?”
“그건 아니지만….”
잠시 생각한 이안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대신에, 홀드림의 성배부터 먼저 찾아줘. 그리고 다른 왕관을 제외한 다른 아티펙트들 찾는 데에도 협조해. 그러면 나도 네 왕관 찾는 걸 도와주도록 할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에, 훈이는 한숨을 푹 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 그래, 알겠어….”
* * *
한편, 중앙대륙의 동부.
빠른 속도로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처치해 가며 중심부로 이동하는 데 성공한 타이탄 길드의 원정대는, 쉽게 유적지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유적지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달려드는 몽크들과 미이라들을 연이어 처치한 세일론은, 옆에서 마법을 뿌리던 에밀리를 향해 투덜거렸다.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어떻게 보면, 철저한 전투준비 없이 무턱대고 들어온 중부대륙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최강을 자랑하는 전력을 가진 타이탄길드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이 고갈되고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다른 사냥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의 경험치 정도.
그리고 아직은 알 수 없는 재화인 ‘전공포인트’ 또한 그들에게 위안을 줬다.
“이 근방 어디일 거다. 다들 조금만 더 힘내보도록.”
길드원들을 독려한 샤크란은, 최전방에서 몬스터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쾅 콰콰쾅-!
세 개의 분신이 허공에서 엇갈리며 만들어내는 커다란 폭발음!
그리고 순간적으로 일어난 엄청난 기의 파동이 전방에 흩뿌려졌다.
촤라락-
그 모습을 본 에밀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샤크란님은 또 강해지셨군.”
세일론도 고개를 뜨덕였다.
“확실히 예전보다 더 강해지신 것 같다. 새로운 아이템이라도 얻으셨나….”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몬스터들을 상대해가던 그 때.
대열 후미에 있던 한 타이탄 길드원이 세일론을 향해 소리쳤다.
“세일론님! 저쪽에 뭔가 있습니다!”
그 소리에 세일론을 비롯한 모든 인원의 시선이, 그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돌아갔다.
그리고 그것을 본 에밀리가 기쁜 목소리로 소리쳤다.
“샤크란님! 유적을 찾은 것 같아요!”
사막 한 가운데 솟아 있는 높다란 첨탑.
그리고 그 주변을 휘감고있는 휘황찬란한 구조물들.
하지만 그것을 본 샤크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에밀리. 저건 유적지가 아니야.”
“네에…?”
그런데 실망한 에밀리의 표정과는 달리, 샤크란은 들뜬 얼굴이 되어 있었다.
‘내가 가진 정보가 맞다면… 저건 전쟁의 탑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성배 대신…!’
< (6). 성배 쟁탈전 (上)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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