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전장의 지배자 -3 >
* * *
다음날 같은 시각에 이어진 ‘용맹의 전장’ 에서의 두 번째 경기도, 큰 어려움 없이 로터스 길드의 손에 들어왔다.
물론 첫 번째 경기에서 이안의 활약을 확인한 폴라리스 길드 유저들은, 최선을 다해 싸웠다.
하지만 오히려 첫 경기보다 더 약한 전력이 배치되어있었던 2경기였기에, 이안은 처음의 계획대로 어렵지 않게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전투 도중에 삼십이 넘는 병사들과, 가신 ‘말라임’이 사망했지만, 그 정도로 1승을 챙겼다면 엄청난 이득이었다.
‘가신이야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 살아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안은 이 두 번의 전투에서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
그것은 10만이 넘는 명성도, 손쉽게 얻은 2승도 아니었다.
‘그토록 오르지 않던 카르세우스 알의 부화율이 5%나 오를 줄은 몰랐지.’
그동안 죽어라 던전을 돌고 사냥을 해 대도 정말 병아리 눈물만큼 차오르던 신룡의 부화율이, 단 두 번의 전투로 5%나 올라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지금 신룡 카르세우스 알의 부화율은 11% 남짓이었다.
아마도 상대를 죽일 때 마다 빨려 들어왔던 보랏빛 기류가, 이 카르세우스 알의 부화율을 올려주는 에너지가 되었던 것이라고 이안은 추측했다.
전쟁의 용 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닥치는 대로 영지전을 걸기에는 위험 부담이 좀 큰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이번 영지전에서 이안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
세워 놓은 전략대로 움직이면 수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어차피 2회 모두 출전했기 때문에, 더 출전할 수 없기도 했다.
원래는 수성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영지전은 한동안 접어두고 120레벨까지 포를란 던전에만 틀어박힐 생각이었던 이안이었다.
포를란 던전은 100레벨 제한의 던전이었지만, 워낙 소환술사에게 효율이 좋은 던전이었다.
115레벨이 되어가는 지금도 포를란 던전만큼 효율이 좋은 사냥터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룡의 알 때문에 이안의 계획이 전면적으로 수정되었다.
‘영지전 수성이 끝나면, 근처 촌락 등급의 거점지들을 몇 군데 치러 가자고 제안해야겠어.’
원래는 계획에 없었던 것이었지만, 신룡 카르세우스를 깨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고, 생각을 정리한 이안은 오후 수업을 가기 위해 접속을 종료하고 캡슐에서 빠져나왔다.
* * *
“오늘은 어쩐 일로 안자고 수업 열심히 듣더라?”
유현의 말에 진성은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아니, 진욱 교수님이 자꾸 졸면 빼줬던 수업 다시 다 집어넣어 버릴 거라고 협박하시잖아. 어쩔 수 없잖아, 들어야지 뭐….”
힘없는 그의 말에 유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이유가 있었고만.”
“그래 인마.”
몇 마디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웃던 두 사람의 대화는, 결국 다시 카일란을 주제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가장 큰 관심사가 카일란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야, 그럼 이제 우리 내일 영지전 부터는 진짜 그냥 세 경기 다 줘버려?”
유현의 말에 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냥 미련 없이 다 줘버려. 그게 이득이야.”
“세 경기 다 주고 나면… 공성전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 저쪽이나 단판 게임이 되어버리잖아. 2승 챙긴 김에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말이야.”
진성은 유현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어차피 세 번째, 네 번째 경기는 이미 등록 끝났으니까, 다섯 번째 전투에서 전력승부 해보던가. 그것도 허를 찌르는 작전일 수 있겠네.”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해봐야겠어. 내가 저쪽 입장이라도 두 경기 우리가 그냥 주면 5경기는 좀 방심할 수 있을 테니까. 확실히 괜찮은 전략은 맞는 것 같아.”
오후 늦은 수업 덕에, 한가한 하굣길.
유현과 진성은 조용한 가운데서 아무런 방해 없이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일란의 이야기만 계속 하던 진성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지 화제를 바꾸었다.
“야, 유현아.”
“응?”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말야….”
“…?”
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말하기를 머뭇거리는 진성.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진성의 표정에, 유현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진성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너 연애 해 본적 있냐?”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정말 뜬금없는 진성의 말에 유현은 당황했다.
“아, 아니. 고등학교때 잠깐 여자 친구 만나본 적은 있었지만… 연애라고 하긴 좀 그렇고….”
이제 겨우 스무살 새내기인데다, 종일 게임만 해 대는 유현 또한 연애랑은 거리가 먼 인물이었던 것.
하지만 그 잠깐이라도 여자친구가 있어본 적이 있다는 그의 말에, 진성은 화색이 돌았다.
“야, 그래도 암튼 모솔은 아닌 거잖아!”
“그, 그런가? 그게… 일단 그렇다고 하자.”
덕분에 좀 더 희망을 얻은 진성은 본론을 꺼내었다.
“그… 물어보고 싶은 게 뭐냐면.”
“응, 말해봐.”
“며칠 전에 내가 하린이랑 교내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었거든?”
“그런데?”
진성의 이야기를 듣는 유현은 점점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식권 뽑으러 가려고 그랬는데, 자기가 도시락 싸왔다면서 막 꺼내는 거야. 물론 그 중간과제 때문에 만든 거라고는 했지만.”
“오… 그래서?”
“그리고 그 날이 너랑 하린이가 교양수업 같이 듣는 날이어서, 당연히 너랑 같이 오는 건 줄 알았는데, 네가 과제하러 가야된다고 먼저 갔다며?”
잠시 생각하던 유현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나 그런 적 없는데…?”
그에 진성은 살짝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하린이가 그랬어. 네가 까먹은 거겠지. 걔가 뭐 하러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
유현은 아리송한 표정이 되었다.
“글쎄… 뭐 하러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어쨌든, 얘기나 계속 해봐.”
진성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무튼, 그래서 둘이 하린이가 싸 온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는데, 하린이가 갑자기….”
진성이 뜸을 들이자, 유현은 재촉했다.
“갑자기 뭐.”
“갑자기 막 그 리조또를 숟가락으로 떠서 나한테 먹여 주는 거야!”
“…?!”
다소 충격적인 말을 들은 유현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뭐, 뭐야. 그러니까 하린이가 너한테 밥을 먹여줬다고?”
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렇다니까?!”
“그거 막, 연인 사이에 해야 되는… 그런 거 아니야?”
진성의 목소리가 조금 커진다.
“그치? 난 우리 엄마가 먹여주는 밥 먹어본 기억도 없는데!”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데?”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유현은 빨리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지만, 아쉽게도 그 다음은 별 거 없었다.
“어떻게 됐긴 뭐. 밥 먹다가 체할 번 한 거지.”
“….”
김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유현을 보며, 진성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내 질문이 뭐냐면.”
“응.”
잠시 뜸을 들인 진성이 입을 열었다.
“하린이가 나한테 혹시 관심이 있는 걸까?”
유현은 생각에 잠겼다.
방금 진성에게서 들은 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카일란 안에서도 진성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하린을 본 기억이 여러 번 떠올랐다.
잠시 후 유현은 대답했다.
“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 * *
따스한 햇살.
한가로운 오후!
이안이 내정을 보기 위해 영주성으로 들어간 사이, 이안의 소환수들은 이진욱의 사육소에서 여유 넘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뿍- 뿌뿍-!
사냥 중독자 이안이 내정을 보는 시간이야말로, 그의 소환수들 에게는 꿀 같이 달콤한 시간!
뿍뿍이는 단짝친구인 핀과 함께 맛있는 간식을 먹고 있었다.
지금 뿍뿍이는 그 어느때 보다 행복했다.
악마 같은 주인이 내정을 보기 위해 영주성에 들어간 동안, 그의 점심을 하린이 대신 주었기 때문이었다.
“뿍뿍아 한 개 더 먹을래?”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소리보다 감미로운 하린의 목소리!
그리고 어떤 노랫말보다 뿍뿍이의 심금을 강하게 울리는 그 대사까지!
뿍뿍이는 아직 자신 앞에 놓여있는 미트볼도 다 먹지 못했지만,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뿍- 뿌뿍-!
이럴 때가 아니라면 언제 마약미트볼을 배불리 먹어본단 말인가!
악덕 주인 이안이었다면 아무리 많아야 2개 이상은 주지 않았을 터.
뿍뿍이는 행복한 표정으로 하린의 손에 얼굴을 부볐다.
“그런데 뿍뿍아.”
뿍-?
“너 이안이 나오기 전에 이거 다 먹을 수 있어?”
뿌뿍!
뿍뿍이는 자신있다는 표정으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하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너한테 이렇게 미트볼 많이 준거 이안이가 보면 나 혼날 텐데….”
글썽이는 하린의 커다란 눈망울을 발견한 뿍뿍이는 등껍질을 부르르 떨며 슬픔에 잠겼다.
뿍…!
이렇게 아름답고 착한 미트볼 여신님을 감히 악덕 주인 따위가 혼낸다니.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뿍뿍아, 그러니까 빨리 먹어야 해. 알겠지?”
뿍-!
뿍뿍이의 다짐을 받아낸 하린은 이번엔 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핀이 먹고 있는 것은 뿍뿍이와 달리 미트볼이 아니었다.
하린이 핀에게 준 것은, 무려 정성들여 조리한 꽃등심 스테이크!
새침한 표정과 함께, 기품 있게 스테이크를 뜯어먹고 있는 핀을 향해 하린이 물었다.
“핀이 너는 어때? 맛있어?”
하린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핀은 뿍뿍이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초딩 입맛인 뿍뿍이와는 달리, 핀의 입맛은 엄청나게 고급이었던 것이다.
꾸루룩-
핀은 스테이크의 맛을 음미하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때, 더 먹을래 핀?”
하린은 긴장하며, 미식독수리 핀의 반응을 살폈다.
처음 핀을 만났을 때, 하린은 핀의 점수를 따기 위해 마약미트볼을 여러 차례 조공해 보았다.
귀여운 아기독수리였던 핀이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이안의 소환수였으니 필히 점수를 딸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핀은 아랑곳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하린은 핀이 식탐이 없는 줄로만 알고 실망했었다.
요리는 그녀가 이안의 소환수들에게 점수를 딸 수 있는 가장 쉽고도 빠른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단지 자극적인 마약미트볼이 핀의 입맛에 맞지 않았던 것!
어지간한 고급 레시피가 아니고서는 핀의 입맛을 만족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이 바로 하린의 레시피가 평가되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곧, 핀이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꾸룩- 꾸룩-!
이것은 분명 더 먹고 싶다는 핀의 의사 표현.
하린의 표정이 순간 환해졌다.
“와아! 핀아, 그럼 이번엔 이거! 이거 한번 먹어봐!”
하린은 인벤토리 안에서 새로운 음식을 또 꺼내었다.
핀의 입맛에 요리를 맞추다 보면, 요리의 숙련도가 엄청 잘 올랐기 때문에 요즘 핀은 하린의 주요 고객이었다.
심지어 제발 먹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수준.
이쯤 되면 뿍뿍이가 부러워할 법도 했으나, 뿍뿍이는 그 어떤 음식보다 미트볼의 자극적인 맛을 좋아했다.
눈 앞의 미트볼을 이안이 나오기 전에 전부 먹어치워야 하는 사명을 가진 뿍뿍이의 눈에, 핀의 스테이크는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런데 그 때.
이렇게 평화롭던 로터스 영지 사육소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린아, 나 다 끝났어!”
< (1). 전장의 지배자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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