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내기의 결과 -4 >
* * *
100명 가까이 수용할 수 있을 법 한 커다란 가상현실과의 메인 강의실.
“구자호-”
“예!”
“김가형-”
“넵.”
한 명, 한 명, 출석을 부르며 출석부를 읽어 내려가던 이진욱은 비교적 익숙한 이름에 잠시 시선이 고정되었다.
‘박진성… 그러고 보니 요놈, 개강 첫 주에 안 나왔었는데?’
물론 첫 주는 수강변경 기간이기에 나오지 않아도 출석점수에는 영향이 없었다.
하지만 전공수업은 변경하게 될 일이 거의 없었으므로 첫 수업부터 나오는 것이 보통이었기에 진욱은 심기가 조금 불편해졌다.
‘내가 방학 중에 전화로 협박까지 했는데… 오늘은 나왔겠지?’
진욱은 강의실을 둘러보며 진성의 출석을 불렀다.
“박진성-”
하지만 고요한 강의실.
진욱은 설마 하는 마음에 출석을 한 번 더 불렀다.
“박진성? 안 나왔나?”
그런데 그 때, 강의실의 뒷문이 벌컥 열렸다.
드르륵-
“예! 저 왔습니다…!”
강의실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진성을 향했다.
퀭한 표정에 턱밑까지 내려온 짙은 다크써클.
거의 패잔병을 연상케 하는 그의 모습에 진욱은 혀를 찼다.
“소란 피우지 말고 얼른 자리에 앉도록.”
진욱은 진성을 슬쩍 째려보고는 다음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겨우 시간에 맞춰 강의실에 들어온 진성은 강의실까지 뛰어왔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유현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유현은 옆에 앉은 진성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도 오늘은 출석 했네.”
“후, 내가 그 정도로 막장은 아니다 인마.”
하지만 유현은 전혀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인마, 막장이 아닌 놈이 이번 주도 3일이나 학교를 안 나와?”
수강변경주가 지나고 그 다음 주도 3일이나 빼먹은 진성이었기에, 유현의 핀잔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성은 비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슨 이유?”
진성은 대답 대신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었다.
“바로 이걸 위함이지.”
그리고 진성이 보여준 스마트폰의 화면에는 진성의 캐릭터인 이안의 상태창이 스크린 샷으로 찍혀 있었다.
“음…?!”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유현의 두 눈이 화등잔 만 해졌다.
“뭐야, 레벨이 93이야?!”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큰 소리로 말 할 번 한 것을 진성이 주의를 줘서 겨우 무마시켰다.
과의 모든 학생이 들어야 하는 필수 전공 수업이었기에 강의실이 커서, 다행히 이진욱 교수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은 듯 했다.
“보면 모르냐 짜샤. 형이 이 정도다.”
유현은 진성의 잘난척에 대꾸해 줄 생각조차 못 하고 멍하니 스마트폰의 화면을 응시했다.
‘93레벨이라니… 내가 이제 100레벨을 겨우 넘겼는데….’
지금 유현의 레벨은 103.
유현도 방학동안 제법 빠르게 레벨업을 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도 이제 진성과의 레벨차이가 10 밖에 나지 않을 정도로 따라잡힌 것이었다.
‘얘가 초기화할 때 내 레벨이 몇 이었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났지만, 80레벨 언저리 정도 였던 것 같았다.
유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플레이 타임이 월등하고 초기화로 인해 추가스텟 보정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믿을 수 없는 레벨 업 속도였다.
이대로라면 정말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
“이 괴물 같은 놈….”
유현의 투덜거림에 진성은 피식 웃었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라 인마.”
유현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부럽다. 휴….”
그리고 유현과 진성이 투닥거리는 동안 출석을 다 부른 이진욱 교수의 강의가 시작됐다.
그리고 강의가 시작되자마자, 진성은 여지없이 책상 위에서 곯아 떨어졌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모습이었기에, 유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게 잠까지 줄여가면서 미친 듯이 게임했으니… 피곤한 게 당연하지….’
그런데 수업이 끝나갈 무렵.
책상 위에서 잠만 자던 진성이 기적적으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뭐야, 왜 일어났어? 악몽이라도 꿨냐?”
유현의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 않고, 진성은 스마트폰을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 유현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진성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뭐 하는 거지?’
진성은 스마트폰을 두들기더니 예의 그 스크린 샷 이미지를 다시 열었다.
‘뿌듯해서 계속 보는 건가?’
그런데 그 때.
진성이 그 이미지를 어디론가 전송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의도치 않게 그 전송 대상을 확인한 유현은 기겁했다.
“얌마! 뭐하는 짓이야? 너 잠 덜 깼지?”
“무슨 소리야. 난 아주 말짱하다고.”
“미친, 멀쩡한 놈이 교수님 번호로 게임 스크린샷을 전송해?”
진성과 이진욱교수의 내기 내용을 알 리 없는 유현으로서는 진성이 미친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진성은 실실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때, 교단 위에 얹혀 있던 이진욱 교수의 스마트폰이 진동했고, 그는 강의를 잠시 멈추고 스마트폰을 들어 확인했다.
“야, 어떻게 해. 교수님 스마트폰 보신 것 같아!”
“걱정 말고 짐이나 싸 인마. 이제 수업 끝났다.”
진성의 말대로 수업은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5분 뒤.
이진욱교수의 마지막 한 마디를 들은 유현은 진성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쉴 수 밖에 없었다.
“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한다. 다들 나가봐도 좋아. 박진성 학생만 잠시 남도록.”
* * *
수업이 끝나고 이진욱 교수의 교수실로 끌려(?)간 진성은 쇼파에 앉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이진욱 교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잠시 후, 이진욱의 입이 먼저 떨어졌다.
“아까 보낸 그 이미지. 설명해보게.”
“제 카일란 캐릭터 상태창입니다. 교수님께서도 카일란 유저라고 하셨으니, 보자마자 아시지 않았습니까?”
“크흠….”
이진욱이 헛기침을 하자, 진성은 추궁하듯 덧붙였다.
“혹시… 저와의 내기를 잊으신 건 아니겠죠?”
이진욱은 골이 땡겨오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는 내기 같은 건 잊고 있었다.
그건 내기였다기보다는 학교 수업에 좀 더 충실하라는 협박에 가까운 것이었으니까.
진성이 해 낼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당연히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진욱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잊진 않았지….”
그 말에, 진성은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었다.
“후후, 교수님께서 설마 학생을 상대로 두 말 하진 않으시겠죠?”
진성은 이제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확답만 받으면 최소 이진욱 교수의 수업에서는 해방될 수 있었다.
이진욱 교수의 수업이 무려 전공수업만 두 개나 되었으니, 이것은 엄청난 매리트였다.
하지만 진성의 예상과 다르게, 이진욱은 진성이 듣고 싶은 말을 바로 해주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내기. 내 기억으로는 ‘개강 전’ 까지가 기한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날카로운 이진욱의 지적에 진성은 움찔했다.
사실 그 부분이 진성으로서도 가장 찔리는 구석이었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진성은 열심히 변명을 내 놓았다.
“그게… 저… 교수님.”
“뭔가?”
“제가 사실 93레벨은 개강 전에 찍었는데요….”
“그래? 그렇다면 지난주에 보여줬어야지. 내 알기로 지난주에 자네는 수업에 나오지도 않았었는데?”
“제가 어제까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지나가던 초등학생이 듣는다고 하더라도 비웃을 정도의 궁색한 변명!
하지만 딱히 대안이 없었다.
그저 ‘그랬다’라고 우기는 수 밖에.
이진욱 교수가 LB사에 직접 방문해서 이안 캐릭터의 접속 로그라도 뜯어보지 않는 이상 진성이 틀렸다는 증거를 찾아낼 수는 없었으니까.
“그 말을 지금 날더러 믿으라는 건가?”
기왕 이렇게 된 것.
진성은 끝까지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정말인 걸 어떻게 합니까, 교수님.”
그리고 한 편으로는 울상이 된 표정으로 열심히 자신의 무고를 어필했다.
너무 박박 우기기만 하는 것도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찌됐든 계약서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교수가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면 내 입장에선 억울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교수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하는 것도 무척이나 중요했다.
“크흠.”
그리고 겉으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진욱이었지만, 속으로는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이 스크린샷이 합성이 아니라면, 이거 정말 대단한 놈인데 말이야….’
비록 라이트 유저이기는 했지만, 그 또한 소환술사 캐릭터를 육성중인 어엿한 카일란의 유저였다.
이 시점에서 93레벨의 소환술사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얼마 전에 게임방송에서 소환술사 공식 최고레벨이라는 유저가 78레벨이라며 인터뷰하는 장면도 얼핏 본 기억이 있었다.
‘이 놈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내 자료수집에 요놈을 좀 써먹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꿍꿍이가 생긴 이진욱은 잠시 판단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자네, 이번 주 일요일에 따로 일정 있나?”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진성은 당황했지만, 곧 대답했다.
“저… 아마 집에서 카일란을 할 것 같은데요.”
이진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일요일에 카일란에서 보도록 하지.”
“예에?”
“뭘 그리 놀라고 그러는가? 일요일 오후 2시에 로보스 마을에서 보도록 하세.”
진성은 잠시 고민했다.
‘이 영감이 내가 지금 거짓말이라도 하는 거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슬쩍 이진욱의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내가 준 이미지를 합성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카일란 내에서 직접 만나서 레벨을 확인하려는 것이리라.
결론을 내린 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교수님.”
“그래, 그럼 그 때 보도록 하지.”
대답을 하고 진욱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안은 따라 일어나며 다시 한번 내기를 상기시켰다.
“교수님, 내기는 제가 이긴 것 맞죠?”
하지만 이진욱은 곧바로 원하는 대답을 주지 않았다.
“그 얘기는 일요일에 만나서 하도록 하겠네.”
그렇게 진성은 찜찜한 기분으로 교수실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 * *
“크으, 드디어 해방이다!”
카일란에 접속한 이안은 감격스러워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이제 학기 중에도 좀 더 카일란에 집중할 수 있겠어!’
기한 내에 93레벨을 찍기 위해 잠도 줄여가며 얼마나 열심히 사냥만 했던가!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아직 이진욱 교수에게 확답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토요일이 되면 자연히 해결될 일이라 믿었다.
어쨌든 내기는 자신이 이긴 것이었으니까.
‘후, 이제 레벨업에 대한 압박에서 좀 벗어났으니, 미뤄뒀던 퀘스트나 하나씩 정리해볼까?’
이안이 지금 방치하고 있는 퀘스트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드래곤 테이머 오클리로부터 받은 차원의 마탑 퀘스트. 또 하나는 루스펠 제국의 황제 셀리어스로부터 받은 그리핀 알 부화 퀘스트.
‘일단 차원의 마탑 퀘스트를 먼저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포르칼 산맥을 넘긴 했는데….’
차원의 마탑 퀘스트는 제한시간이 없다.
반면에 그리핀 알 부화 퀘스트의 제한시간은 ‘알 수 없음’ 이었다.
이 부분만 놓고 본다면 그리핀 알 부화 퀘스트가 더 시급하긴 했지만….
‘당장에 내가 알 부화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어떡해?’
사냥 도중 틈나는 대로 소환술사의 탑 같은 곳의 NPC들에게 소환수 알의 부화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딱히 쓸 만한 정보도 나오지 않았다.
이안의 성격상, 길이 잘 보이지 않는 퀘스트 보다는 당장 진행할 수 있는 퀘스트부터 시작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게다가 차원의 마탑을 클리어할 시 졸업 아이템 급인 드래곤 머리장식의 봉인을 풀 수도 있었고, 어쩌면 신룡이라 불리우는 워 드래곤을 소환수로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퀘스트 보상에 대한 기대치 자체가 달랐다.
‘일단 차원의 마탑으로 가 보자.’
작열의 대지를 지나면 차원의 마탑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마탑 근처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의 레벨대는 80~90 정도로 오히려 북부대륙보다 하위 레벨의 몬스터들 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이안에게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마음을 정한 이안은 곧바로 라이를 타고 차원의 마탑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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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내기의 결과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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