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제, 화려하거나 초라하거나 (3) 수정 >
“중국인? 일본? 한국? 배우 해볼 생각 없어요?”
“이미 배웁니다. 에이전트도 있고.”
이 작자가 몇 번째더라.
털북숭이 에이전트가 나를 기분 나쁜 눈초리로 훑어본다. 곧이어 나랑 더 말 섞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곧장 이송하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나랑 둘이서 애기 좀 하면······!”
“안돼요.”
“어디 묵고 있어요? 연락처 좀 줘요!”
“싫어요.”
“명함! 그럼 명함이라도 받아가요! 앤젤라 메리웨더 알아요? 예전에 나랑 일했는데! 레드카펫 밟아보고 싶으면 저런 송사리 에이전트한테 시간낭비하지 말고 나한테 연락해요!”
“꺼져요.”
단칼에 쳐낸 이송하가 나를 질질 끌어당겼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작자를 겨우 떼어내고 조용한 건 잠깐뿐이다.
“오늘 밤에 약속 있어? 맷 버크하트 프라이빗 파티 데려가줄까?”
“라스트 댄스 갈라 스크리닝 초대권 있는데 같이 갈래요?”
“드라이브 어때?”
무관심 속에서 활보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이송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미인을 알아보는 사람은 수두룩했다. 거리로 나온 지 한 시간 만에 이송하의 외모는 세계적으로 먹힌다는 걸 확인했다. 온갖 날벌레들이 다
달라붙었다. 에이전트, 헌팅, 헌팅, 헌팅.
이런 거지같은 도시를 봤나.
거리가 통째로 클럽이라도 된 것 같다.
새빨간 람보르기니를 운전하는 덩치가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아까부터 졸졸 따라다니는 진드기였다. 구경이고 나발이고, 안 되겠다. 이송하의 어깨를 붙들고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으로 홱 잡아끌었다.
“잠깐 숨만 좀 돌리고 나가자.”
대답이 없다. 대신 숨소리가 바빠진다.
힐긋 눈동자를 기울였다. 공간이 좁아빠진 덕에 이송하의 속눈썹이 내 턱 아래로 내려다보였다. 움직이면 닿겠다. 부스러진 돌 벽에 등을 기댔더니, 이송하의 머리가 자석처럼 따
라오다가 멈춘다.
혀끝이 코랄빛 입술을 살짝 핥고 들어갔다.
“······또 구경하고 싶은 데가 어디야?”
“여기요.”
이송하가 가이드북을 핸드백에 쑤셔 넣었다.
“뭐?”
“여기 구경하고 가요. 어둡고 으슥한 뒷골목, 여기 좋은 것 같아요.”
“어둡고 으슥한데서 뭘 구경할 건데.”
또 대답이 없다. 이송하가 나를 올려다봤다. 빤히.
입안이 마른다. 이번엔 내가 입술을 핥았다. 이국땅이라 그런가, 눈앞의 얼굴이 유독 낯설다. 아. 낮에 인터뷰 촬영 때문에 풀 메이크업을 했는데, 사람들 틈에 치이면서 좀 번졌나
보다. 그래선지 답지 않게 퇴폐적으로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니 날벌레들이 꼬이지.
여기서 화장을 지울 수도 없고, 선글라스라도 씌울까.
고민하는 중에도 시선이 따라온다.
“뭘 그렇게 봐?”
“구경하고 있는데요.”
이송하 눈이 코앞까지 다가와 휘어졌다.
언젠가부터 가득 차올라 있던 것이 넘실거린다. 당장에라도 넘칠 것처럼.
큰길이 아니라 좁은 골목을 따라 들어갔다. 바깥 거리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한가로우면서도 활발하게 떠도는 공기가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여긴 끈덕지게 들러붙는 날벌레들
이 없다.
노천카페에서 잠깐 발길을 멈췄다.
커피 두 잔과, 이송하가 고른 디저트들이 테이블위에 가득 깔렸다. 버터향과 초콜릿향이 물씬 풍겼다. 핸드폰을 보니 남조윤과 김현섭은 제대로 관광중인 모양이었다. 단체창에
사진이 줄줄이 올라왔다.
대부분 남조윤의 부모님께 보여드리기 위한 인증샷이었다.
이송하가 가만히 사진을 바라봤다.
핸드백 밖으로 튀어나온 가이드북 끄트머리를 보고 말했다.
“우리도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다른 것 좀 더 돌아보고 갈까. 해변이나.”
“생각해보니까 다른 건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 지겹게 봤어요.”
“아. 거기서 오래 있었댔지?”
옛날 얘기는 좀처럼 안 꺼내더니.
곧바로 화제를 넘길 줄 알았는데, 이송하가 말을 이었다.
“고모랑 고모부가 캘리포니아에 계시거든요. 저 어렸을 때 집이 좀 어려웠는데, 그때 고모가 애 한명 정도면 몇 년 맡아주겠다고 하셔서.”
“가족 중에 너 혼자 간 거야?”
이송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큰 언니가 유학가고 싶어 했는데, 고모랑 고모부가 절 데려갔어요.”
“왜?”
“제일 예뻐서 골랐대요.”
커피를 마시다가 멈칫했다.
문득 이송하의 가족들이 떠올랐다. 가족적으론 안보였던 분위기도.
심란한 말을 던져놓고 이송하는 아무렇지 않게 크로와상을 물어뜯었다. 그리고는 맛이 좋다며 행복해한다. 목 끝까지 올라온 질문들을 도로 밀어 넣었다. 무슨 말을 꺼내도 저 평
화로운 분위기를 망칠 것 같아서.
지금은 그냥 함께 웃었다.
*
“라스트 댄스 시사회 보고 싶다! 칸까지 왔는데!”
“포기해. 극장 앞에서 표 구걸하는 사람들 수두룩할걸?”
“포스터 사진이라도 같이 찍자! 메이슨 터커 얼굴 잘 보이게 찍어줘!”
영화의 거리. 가로수처럼 줄줄이 걸린 포스터들 사이에서 여행객들의 셔터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나와 이송하도 그 틈바구니에 끼어 낯익은 포스터를 바라봤다.
Jungle City.
해외수출용으로 제작한 포스터엔 이송하와 남조윤의 얼굴이 없다. 하단에 알파벳 몇 개로 이름만 적혀있을 뿐이다. 이송하한테 선글라스를 씌워놔서 그런가, 이쪽은 눈여겨보는
구경꾼들이 없어서 한산했다.
드물게 관심보이는 구경꾼들도 있긴 했지만.
“정글시티, 이거 내일 시사회래. 우리 이거 보자!”
“별로 안 땡기는데?”
“그래도 이건 표 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여기까지 왔는데 기념으로 극장 안에는 한번 들어가 봐야지! 언제 또 올수 있을지 모르는데!”
거의 이런 용건이었다.
“메이슨! 메이슨이다!”
“메간!”
어디선가 비명 같은 외침이 터졌다. 물론 메이슨 터커와 메간 샤너가 한가하게 크루아제 거리에 나타난 건 아니고. 구경꾼들이 몰려간 곳은 거리 한편에 놓인 대형 스크린 앞이다.
지금 팔레 데 페스티발에서 진행 중인 레드카펫 행사의 생중계 영상이었다.
조금 전까지 다양한 분야의 VIP와 셀러브리티들의 입장하던 화면 속에, 마침내 오늘 시사회의 주인공인 할리우드 탑스타들이 등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일찌감치 자리 잡고 기다린 구경꾼들과 기자들 때문에 현장은 발끝 들이밀 틈도 없을 테니, 이렇게 화면으로라도 구경하라는 거지.
화면속의 반응은 열광적이고, 여기 반응은 광적이다.
“뭐야! 뭐야! 악수해준다! 싸인도 해주네!”
“그냥 저기서 몇 시간 기다릴 걸!”
금방 북새통이 된 스크린 앞에서 다양한 언어가 쏟아져 나온다. 대충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영어와 중국어 정도지만, 다른 언어들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뻔하다. 쏟아지는 말
의 반이 배우들 이름이었다.
화면은 계속해서 라스트 댄스의 주연배우들을 비췄다.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은 배우들이 레드카펫 위에서 유쾌하고 과감한 포즈를 취했다.
한번만 쳐다봐 달라는 팬들의 함성소리, 라스트 댄스의 배경음악, 수백 명의 사진기자들이 일제히 눌러대는 셔터소리가 스피커 밖으로 튀어나와 고막을 찔렀다.
나는 가만히 스크린을 바라봤다.
영화제 초대장을 손에 넣었을 때, 니스 공항에 도착해 이송하와 남조윤을 호텔에 들여보냈을 때, 외신기자들과 인터뷰를 가졌을 때. 그때마다 저 세계가 한걸음씩 가까워지는 기
분이었는데.
발끝에 닿은 것 같아서 사실 좀 들떴었는데. 아니었다.
아직 이렇게나 멀다.
“······.”
문득 옆을 돌아봤다. 흥분해서 계속 뺙뺙거리던 이송하가 조용했다.
어느새 선글라스를 벗은 이송하가 우두커니 서서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새빨간 레드카펫과, 환호와, 카메라 플래시가 벼락처럼 쏟아지는 세계를.
“오빠. 저 저기 한번 가보고 싶어요.”
사람들이 꽉 들어찬 팔레 데 페스티발은 텅 비어있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의미 그대로, 그야말로 꿈의 궁전이다.
휘황찬란한 조명이 비치고, 요란한 소리들은 심장을 맨손으로 꽉꽉 주무르는 것 같다. 높은 계단을 따라 30미터나 되는 레드카펫이 깔려있다. 그 위를 걸어 올라가는 배우들의 뒷
모습이 훌쩍 더 멀어진다.
더듬더듬 다가가던 이송하가 요란한 구경꾼의 팔에 밀쳐졌다.
“송하야, 괜찮아?”
“네! 네,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발뒤꿈치를 들고 고개를 쭉 뺀다.
까마득해 보이는 레드카펫, 환호하는 팬들, 턱시도를 차려입고 사진기를 앞세운 기자들. 그 모든 게 한데 어우러진 풍경을 바라본다. 묘한 표정이다. 이제껏 먹어본 적 없는 신제
품 과자를 눈앞에 두었을 때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뭔가······.
기웃거리는 이송하를 보다가 통제선 쪽으로 다가갔다.
영화에 관계된 모두가 흥분한 상황에서도, 주역인 이송하는 미묘하게 온도가 달랐다. 영화제 참석이나 인터뷰, 수상에 대한 기대 같은 것보다 잿밥인 관광에 더 관심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사실 이전부터도 그랬다.
이송하는 넵튠 안에서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는 노래와 춤 실력 탓에 힘겨워하다가 연기에 재능을 발견했고, 기뻐했고, 매달렸다. 마침내 설 자리를 찾은 사람처럼. 그리고 드라마
건 영화건 매 작품마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뭔가 뜨뜻미지근했다.
남조윤이나, 그밖에 내가 겪은 다른 배우들과 비교해 봐도 그렇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송하의 시선은 늘 한도를 넘어서지 못하고 미적지근한 상태로 머물렀다.
그게 목에 박힌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다르다. 다른 것 같다.
만약 이곳에서 이송하의 가슴이 끓어오르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밀어붙이는 구경꾼들을 막느라 정신없는 진행요원에게 주머니에서 꺼낸 것을 내밀었다. 이송하의 배우용 ID카드다. 여전히 다른 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이송하를 가리
키며 말했다.
“안쪽에 볼일이 있는데 잠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레드카펫이 아니라······!”
“티셔츠에 운동화 신고는 여기 못 들어가요!”
ID카드를 힐긋 본 진행요원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빌어먹을 드레스 코드.
이럴 줄 알았으면 드레스에 수트라도 빼입고 돌아다닐 걸 그랬나. 진행요원의 고함을 들었는지 이송하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혀를 차며 통제선에서 물러났다.
조금만 참자.
몇 시간만 지나면, 내일 아침엔 저 레드카펫에 서게 될 테니까.
*
이송하와 남조윤은 스타일리스트가 고르고 고른 드레스와 수트를 차려입고 레드카펫 계단을 올라갔다. 어젯밤의 그들 못지않게, 아니, 콩깍지가 씌운 내 눈에는 누구보다 매력적
이었다.
구경꾼들이 환호하고, 사진기자들은 셔터를 눌렀다.
이송하는 오현경 감독을 끌어안다시피 하며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잡았다.
“어제 메이슨 터커랑 메간 샤너 레드카펫 행사하는 거 봤는데··· ‧···.”
“급이 다르다는 게 이런 건가 보네요. 좀 힘 빠진다.”
극장 입장을 기다리던 제작사 쪽 스텝들이 중얼거렸다.
나는 목을 조르는 보타이를 잡아당기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잠깐 들여다보다가 곧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사라지는 구경꾼들을.
형식적으로 몇 번 셔터를 누르고 다른 유명인을 찾아 사라지는 기자들을.
이송하는 남아있는 카메라를 향해 열심히 웃었다. 잠깐 당황한 티를 냈던 남조윤과 오현경 감독도 다시 웃음을 올리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번 기회에 이송하의 가슴에 불을 질러주고 싶었는데.
그보다 먼저 내 가슴에 불길이 확 일어났다.
***
ID카드를 매단 한국 언론사 기자들이 극장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객석은 거의 찼네요. 레드카펫이 초라해서 걱정했는데.”
“유명인사 없는 레드카펫이 다 이렇지, 뭐.”
“괜히 초라했네, 어땠네, 그런 기사 쓰지 말고 긍정적으로 써. 그래야 기자간담회 분위기도 좋을 거 아냐. 시사회를 보려고 몰려든 전 세계 기자와 바이어들로 객석이 만석이었다,
뭐 이런 거 있잖아.”
천여석의 좌석에 주인이 차곡차곡 들어찼다. 삼천 명 이상이 밀려들어서 좌석도 없이 서서 봐야하는 영화들과 비교하면 소박했지만, 어쨌거나 만석이었다.
“시사회 중간에 박수나 함성 터지면 횟수 체크하고, 이따가 외신 기자들한테 영화 어떻게 봤는지 인터뷰도 좀 따고. 그리고 공식 상영회 끝나고 나면 박수갈채 몇 분 동안 쏟아졌
는지 시간 재서 5분간, 7분간, 아니면 이례적으로 뜨거운 박수갈채, 뭐 이런 헤드라인 좀 걸어주고. 뭐, 그런 거지.”
“박수갈채 그런 거 그냥 매너로 다 해주는 거라면서요. 그거 시간재서 기사 쓰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거야.”
어디선가 튀어나온 불평에 중년 기자가 혀를 찼다.
“그런 거라도 없으면 기사 쓸게 없잖아, 쓸게! 그리고 국민들도 궁금해 해!”
“수상 가능성은 없을까요?”
누군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경쟁작들이 굵직굵직해서 거의 텄다고 보긴 하는데.”
“도시정글 내부시사 때 반응은 어땠대요? 영화 괜찮게 뽑혔대요?”
“주워들은 걸로는 만듦새는 괜찮다던데. 시나리오도 좋잖아.”
“칸에서 오라고 부른 거 보면 완성도도 나쁘진 않겠죠.”
“뭐 이런 걸 초청해서 영화제 질 떨어뜨리느냐고 엄청 두들겨 맞은 영화들도 많아. 보다가 욕하면서 나가는 양반들도 겁나 많고. 지난번엔 한 오륙십 명이 동시에 빠져나가더라.
분위기 아주 거지같았지.”
“결국 어디서 기사 터져가지고 국내 흥행도 말아먹었잖아, 그건.”
중년 기자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어쨌든 시상식 전까지는 수상 가능성 있다고 내보내야 되니까 이건 반응 좋았으면 좋겠는데. 국내에서는 칸에 온 팀들 중에 도시정글이 제일 화제라고, 기삿거리 물고오라고 부
장이 지랄 지랄을 하더라.”
“상도 하나 떡하니 받아줬으면 좋겠구만. 국내영화 칸에서 상 못 받은 지 한참 됐잖아요. 국내 영화계를 위해서라도······.”
“웃기시네. 너 도시정글 크라우드 펀딩에 돈 넣어서 그러는 거 아냐?”
“쉿. 이제 시작하려나보다.”
객석의 웅성거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별 기대가 없어 보이는 외신기자들과 바이어들도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오전 8시 30분. 영화제 메인상영관인 뤼미에르 옆에 딸린 드뷔시 극장에서, 마침내 도시정글의 프레스 스크리닝이 막을 올렸다.
아주 조용한 시작이었다.
< 영화제, 화려하거나 초라하거나 (3) 수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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