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제, 화려하거나 초라하거나 (2) >
“휴양지가 좋긴 좋다! 바다 겁나 시퍼래!”
“시퍼런 게 뭡니까. 낭만 없이. 코발트블루죠, 코발트블루!”
“아이고, 서른 넘어 봐요. 낭만 찾게 되나!”
뒷좌석에 낑겨앉은 김현섭과 이관우가 속닥거렸다.
낭만주의자로 돌아온 이관우는 새파랗게 빛나는 지중해를 보며 온 몸으로 감격했다. 그에게 어깨를 붙잡힌 김현섭이 짜부라지겠다고 욕지거리를 할 정도였다.
스타일리스트와 아티스트들은 반대편 차창에 착 달라붙었다.
“저 사람! 키어런 우드 아냐?”
“어디 어디 어디!”
“저기 페라리 옆에!”
“저기 페라리가 한두 대예요?”
“아니, 비치타올 들고 있는 남자 있잖아!”
“······에이, 아니구만!”
잠깐 실망하더니 금방 다른 쪽을 보며 짹짹거린다. 우린 관광하러 온 게 아니라 일하러 온 거라고, 외국 스텝들한테 밀리면 안 된다고 기합 넣을 땐 언제고. 누가 봐도 관광객들이다.
그럴 만도 하다.
길거리에는 페라리, 마세라티, 벤틀리, 그밖에 이름도 모르겠는 고급차들이 즐비하다. 배우 뺨을 후려칠 미남마녀들도 수두룩하고. 누구라도 눈이 돌아갈 거다. 이런 곳에선.
“저 중에 무명 배우나 배우지망자들도 꽤 있을 거예요.”
감탄하는 소리들을 들었는지 SBE필름 기획피디가 낮게 웃었다.
“이 시즌엔 유명한 영화감독이나 제작자, 에이전시 관계자들이 이 동네에 다 모이니까. 각국에서 내로라하는 언론사 기자들도 사천 명쯤 쏟아져 들어오고. 여러모로 기회의 땅인 거죠. 우리한테도 그렇고.”
중얼거리던 기획피디가 내 쪽을 바라봤다.
“정 팀장님도 칸 입성은 처음이시라더니, 뭐 이렇게 태연하세요? 누가 보면 현지인인줄 알겠네.”
“그래 보입니까? 나름대로 설레는 중인데.”
못 믿겠다는 듯, 기획피디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쪽은 벅찬 마음이 주체가 안 될 지경이라 야자수 개수 세면서 진정시키는 중인데.
크로와제 대로는 마치 거대한 세트장 같았다.
제작비를 어마어마하게 때려 박아 지은 세트장. 현대극보다는 시대극이 어울리겠다. 이국적이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거리에 차곡차곡 들어앉아 있다. 그중엔 중세유럽의 고성처럼 웅장한 건축물들도 있었다.
김현섭이 그쪽을 보고 입을 벌렸다.
“길거리에 궁전들이 있네.”
“다 호텔이에요.”
기획피디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마제스틱, 마르티네즈, 칼튼. 5성급 호텔들. 영화제 측에서 제일 급 높은 초청 인사들한테만 제공하는 숙소라 진짜 대단한 양반들은 다 저기 있어요. 입구에 파파라치랑 구경꾼들 바글바글하잖아요. 유명인 얼굴 한번 보려고 죽치는 사람들.”
“저런 덴 방값 어어어마어마하게 비싸겠네요.”
“비싸기도 비싸고, 이 시기엔 돈이 있어도 못 구하죠.”
김현섭이 앞서가는 세단과 호텔들을 힐긋 보고 물었다.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최고 대접받는 배우라 이거죠?”
“저 안에서도 갈라지죠. 누군 스위트룸, 누군 일반객실.”
“동기부여 하나는 팍팍 되겠구만.”
유서 깊은 호텔들 쪽에 한눈을 파는 사이, 앞서 달리던 세단이 멈췄다. 앞서 봤던 고성들만은 못해도 상당히 멋스러운 외경이다. 희고 거대한 기둥들이 입구를 받치고 있어서 꼭 신전 같기도 하고.
이관우가 안전벨트를 풀다 말고 감탄했다.
“여기도 엄청 좋은데요?”
“여기도 영화제에서 제공하는 숙소니까. 방값도 하루에 백만 원은 할걸요.”
기획피디의 대답에 김현섭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이고, 고마워라!”
“기한이 2박3일이라 모래는 쫓겨나겠지만.”
“에라이!”
“예전엔 진짜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작사 주머니 털어서 배우들 숙소 잡아주고, 스텝들은 손바닥만 한 아파트 한 칸 빌려서 침대 하나에 몇 명이서 다닥다닥 붙어 자고 그랬는데. 그래도 호텔 내주는 거면 대접 많이 좋아졌죠.”
“고, 고마워라.”
“딱 배우하고 감독 방만 내줬지만.”
“······그럼 스텝들은?”
“근처에 레지던스 잡아놨죠.”
“에라이!”
김현섭을 들었다 놨다 한 기획피디가 킬킬거렸다.
이관우가 끼어들었다.
“근데 왜 영화제에서 숙소를 2박3일밖에 안 주는 겁니까?”
“우리는 그 안에 공식 일정이 끝나거든요. 근데 시상식이 폐막식이랑 같이 열려서 그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가슴 졸이면서.”
“그럼 수상 못하면 폐막식만 보고 가는 겁니까?”
“상 못 받으면 폐막식에도 못가요. 연락이 와야 참석할 수 있는 잔치라.”
밴 안의 분위기가 써늘해졌다. 기획피디가 텁텁한 웃음을 흘렸다.
칸은 계급사회니까 각오 단단히 하라더니. 과연, 대접부터 다르다. 나도 어지간한 정보는 다 머릿속에 쑤셔 넣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는데도, 직접 피부로 겪어보니 더 따갑다.
칸 영화제를 상징하는 야자수, 종려나무 잎사귀가 그려진 세단이 도착하자 호텔 측 경호원이 다가왔다. 동시에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파파라치 기자와 구경꾼들 몇 명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국내와 중화권에서 몇 번이고 경험한 일이라 나도 서둘러 움직였는데, 괜한 짓이었다.
구경꾼들은 경호원의 접근금지 사인을 몹시, 매우 잘 따랐다.
이송하와 남조윤을 보는 시선엔 호기심만 잠깐 돌다가 사라졌다. 혹시 몰라서 이송하한텐 선글라스도 쓰라고 해뒀는데, 그것도 괜한 짓이었나 보다.
생소한 불어 사이사이에 영어가 드문드문 섞여 들려온다.
누군지 모르겠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다, 무슨 일로 왔는지 모르겠다, 배운지 제작자인지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I don't know, I don't know. 개중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왜 헷갈리게 영화제 차량을 타고 다니냐고 불평하는 파파라치도 있었다. 그 놈은 얼굴을 기억해뒀다.
들은 대로 영화제 측에서 제공한 객실은 얄짤없이 세 개였다.
사실을 알고는 그냥 단체숙소에서 같이 묵겠다고 나선 이송하와 남조윤을 호텔에 집어넣고, 나머지는 SBE필름 측에서 마련한 숙소에 짐을 풀었다.
그 뒤로는 칸을 즐길 여유도 없이 빡빡한 스케줄이 들이닥쳤다.
영화제 본부 팔레 데 페스티벌, 컨퍼런스 룸에서 열린 공식 기자회견이 시작이었다. 오현경 감독과 남조윤은 불어와 영어로 동시통역되는 현장에 면역력이 없어서, 영어가 유창한 이송하가 기자회견을 끌어가다시피 했다.
넵튠 안에서는 인터뷰하면 안 되는 멤버 1순위였는데.
불안해한 게 무색하게도 기자들에겐 상당히 좋은 인상을 남긴 모양이었다.
기자회견 뒤로도 인터뷰 요청이 제법 들어왔다.
제작사와 배급사 쪽이 팔레 데 페스티벌 지하에서 열리는 필름마켓에 부스를 차리고 세일즈 전쟁에 뛰어들었고, 우리는 인터뷰를 모조리 받아 소화했다. 쫓기듯이 일하다 보니 다들 이틀 만에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얼굴이 됐다.
그나마 기력 충만하게 달려들던 게 이송하였는데.
“오빠, 인터뷰 끝나면 다음 일정 뭐예요?”
“인터뷰.”
“그 다음 일정은요?”
“인터뷰.”
“그거 끝나면요?”
“인터뷰.”
“젠장.”
그나마도 릴레이처럼 이어지는 일정에 기력이 쭉쭉 빨려나갔다.
그러는 동안 국내에서는 연일 칸 영화제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나갔다. 개중에는 칸에 온 배우들을 정말 ‘국가대표’로 표현한 기자들도 있었다.
도시정글의 공식 일정도 기삿거리로 조각조각 던져졌다.
외신 기자들이 도시정글의 기자회견장에서 어떤 질문들을 했는지. 분위기는 좋았는지, 필름 마켓에서의 반응은 어떤지, 심지어 이송하와 남조윤에게 제공된 호텔의 하루 숙박비와 내부시설까지.
국내에서 쏟아지는 시선은 점점 더 열렬하고 뜨거워졌지만, 칸에서 받는 시선은 여전히 미적지근했다. 인터뷰는 계속 들어왔지만 경쟁부문에 초청된 영화나 세계적인 스타들과의 대접은 갈수록 천지차이였다.
그 온도차와 괴리감은 점점 더 심해졌다.
“시사회 전에 좋은 기사가 많이 나가는 게 좋거든요.”
점심. 도시정글 부스에서 마주친 기획피디가 해쓱한 낯빛으로 말했다.
“이 동네도 입소문이 중요해서. 최악의 경우엔 상영관이 휑할 수도 있어요. 그럼 칸까지 와서 우리끼리만 잔치하고 가는 꼴이라. 참, 그보다 최악도 있구나. 저 예전에 왔을 땐 중간에 관객들이 욕하면서 우르르 빠져나가는 바람에 배우들이 울고불고, 칸평점 최하위라 언론에서도 난리난리······.”
나는 해쓱해진 그에게 물을 건네고 말했다.
“시사회가 두 번 잡혔잖아요. 기자 시사회랑, 공식 시사회.”
도시정글의 기자 시사회는 내일 아침 8시 30분이었다.
그리고 공식 시사회는 내일 밤 11시 30분.
기자 시사회는 너무 빠르고, 공식 시사회는 너무 늦다. 기획피디가 상영관 분위기를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다.
“영화가 좋으니까 기자 시사회 이후에 바람만 잘 불어주면, 공식 시사회에서는 돛단 배처럼 쭉쭉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내 말에 기획피디가 말라붙은 입술을 핥았다.
“그럴 수도 있겠죠. 우리 영화가, 도시정글이 여기서 통하기만 하면.”
“기대해볼 만큼은 되지 않겠어요? 신인감독상에 노미네이트 된 거 보면.”
“······그, 혹시 정 팀장님은 혹시 수상 가능성도 기대하시는 겁니까?”
수상 가능성이라.
내가 스텝들 앞에서 칸 입성을 긍정적으로 애기하자마자 칸에서 초청장이 날아왔기 때문인지, 은근히 수상 가능성을 물어보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나는 똑같이 대답했다.
“기대야, 당연히 하죠.”
이번에도 확신은 없지만.
미래예지에서 ‘데뷔작, 그것도 느와르같은 비주류 작품으로 흥행대박치고 신인감독상에 각본상까지 받았지, 칸까지 갔다 왔지’라는 말을 들은 것 때문에 여러 번 되새김질을 해봤는데.
상을 칸에서 받았다는 건지, 아니면 국내에서 받고 칸에는 갔다만 왔다는 건지, 뉘앙스가 영 헷갈려서.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도시정글은 많은 부분이 틀어진 상태라 원래의 미래에서 어떻게, 얼마나 바뀔지 알 수가 없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대하고 있다.
내가 뒤집어엎은 미래가, 원래보다 더 좋을 방향으로 바뀌었기를.
*
저녁에 인터뷰가 하나 미뤄져서 잠시 짬이 났다.
밤에는 또 내일을 위해 준비할 게 많아서, 짬이라고 해봤자 두어 시간뿐이었다. 낮 동안에도 화려했던 크로와제 거리는 저녁 7시부터 시작하는 경쟁부문 시사회와 레드카펫 행사로 성대하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축제였다.
그 광경은 지켜보는 사람의 가슴도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스타일리스트와 아티스트들은 현지에서 더 좋은 드레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명품샵으로 날아갔고, 이관우는 낭만에 젖어보겠다며 해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는 호텔 객실 문을 툭툭 두드렸다.
“누구세요?”
“나.”
곧바로 문이 열렸다. 이송하가 체념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또 인터뷰예요?”
“아니. 두 시간쯤 비는데, 너 피곤하지 않으면 잠깐 나갔다 올까 하······.”
“안 피곤해요!”
문이 바람처럼 쾅 닫혔다.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느라 용쓰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언제 시간이 나느냐고 찔러대던 녀석이, 여덟 번째로 튕겨나간 후로는 영 시무룩해보이길래 신경 쓰였는데. 삼 분만에 더없이 씩씩한 기세로 도로 뛰쳐나왔다.
“가요!”
“핸드백이 왜 그렇게 뚱뚱해. 딱 두 시간인데 가이드북은 놓고 오지?”
“걱정 말고 저만 믿으세요! 두 시간을 스무 시간처럼 보내면 돼요!”
걱정이 되는데.
입이 찢어지기 직전인 이송하를 두고, 이번엔 옆방을 두드렸다.
남조윤이 문을 열었다. 동시에 이송하가 자랑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 잠깐 나갔다 올게요.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형도 갈 건데.”
“······어딜요?”
“우리랑 같이 중요한 볼일 보러.”
내가 대답한 순간, 이송하의 얼굴이 살인자의 얼굴로 변했다.
김현섭이 객실에서 남조윤의 등을 밀며 함께 나왔다.
“미적대지 말고 얼른 갑시다! 시간 아까우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이송하가 나를 곁눈질한다.
서럽고, 서운해 죽겠고, 착잡하고, 세상이 밉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뭐 그런 다양한 감정들이 이송하의 얼굴 위를 스치지나갔다. 하고 싶은 말이 목까지 찬 얼굴로 입술만 달싹인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도 아닌데.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입술이 배어내는 말을 읽고 있는데 자꾸 웃음이 새나온다. 이것도 악취민가.
호텔 입구로 빠져나갈 무렵엔 이송하의 얼굴은 살인자를 넘어 도살자가 돼 있었다. 파티를 즐기러 외출하는 스타들을 보려고 모인 파파라치와 구경꾼들이 이송하를 보고 슬금슬금 길을 내줄 정도였다.
그렇게 호텔을 벗어나고 나서.
“그럼, 문제 있으면 연락해요.”
“어. 이따 보자.”
남조윤과 김현섭이 손을 흔들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나도 손을 흔들어주고는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엉거주춤 따라오던 이송하가 나와 멀어지는 남조윤을 번갈아봤다. 그리고 흥분했다.
“전 한국 기자한테 들킬까봐 다 같이 다니는 줄 알았어요!”
“외국에 일하러 와서 연예인이랑 매니저가 같이 다니는 게 뭐 문제라고.”
완벽한 알리바이지.
“없죠. 문제없죠.”
이송하가 하얀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나는 이송하 쪽으로 반걸음쯤 다가가며 덧붙였다.
“혹시 모르니까 좀 더 붙자.”
“그, 그래도 돼요? 얼마나요?”
“글쎄. 여기 소매치기가 그렇게 많다더라.”
“조심해야죠! 저도 가이드북에서 주의사항 봤어요. 우리 딱 붙어서 다녀요!”
이송하의 발걸음이 경쾌해진다.
나도 그 걸음에 발을 맞췄다.
그리고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들 없는, 불야성의 거리로 들어섰다.
< 영화제, 화려하거나 초라하거나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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