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의 별이 되거나, 별을 따거나 (3) >
엘리베이터가 지하에서부터 올라왔다.
3층을 지났을 쯤엔 여기저기서 침 넘기는 소리가 났다. 대표실로 직행할 줄 알았는데, 엘리베이터는 4층에서 멈췄다. 그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물! 누가 얼음물 좀 가져와요!”
“도경아, 정신 좀 차려!”
순간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구급차였나 했다. 매니저 둘이 시체처럼 늘어진 여자를 양쪽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거의 질질 끌고 왔다. 구불거리는 빨간 머리카락이 산발이 돼서 흔들거렸다.
“술병은 놓고! 정신 차리라니까!”
“술이라도 마셔야 정신을 차릴 거 아냐!”
이도경이 병모가지를 꽉 쥐고 소리쳤다. 보드카다.
분명 공항 영상에서는 제정신이었는데.
이도경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상태가 가관이다. 윤상아는 눈물콧물 흘리며 대성통곡중이고, 장요한은 창백한 얼굴로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매니저와 스텝들이 달라붙어서 달래고 위로하느라 야단이다.
난장판이구만. 누가 보면 연예기획사가 아니라 재활센터인줄 알겠다.
한쪽에선 결국 보드카 병을 뺏긴 이도경이 몸부림을 쳤다.
“내놔! 안 내놔?!”
바닥에 철퍼덕 엎어지더니 아예 드러눕는다. 여배우가 아니라 개다.
“비켜.”
사십대 초반. 넥타이 없는 수트차림의 남자가 사람들을 제치고 다가왔다.
몇 번인가 인사만 나눠본 1팀장이다. 그는 매니저에게서 보드카 병을 받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직원이 떠온 얼음물을 빈병에 채우고 도로 이도경의 입에 쑤셔 넣었다.
“자. 데리고 올라가.”
이도경이 매니저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이어서 1팀장이 장요한의 입에 물린 담배를 빼앗고 턱짓했다. 다른 매니저가 장요한을 데려갔다. 남은 건 윤상아 뿐이었다. 통곡하다 못해 끅끅거리는 그녀에게 다가간 1팀장이 담배를 한번 빨고 말했다.
“그만 울어. 기자들 반응 예상 못한 것도 아니잖아.”
“팀장님, 저, 숨을 잘 못 쉬겠어요. 화장실에서 진정 좀 하고 갈게요.”
“그래, 그럼.”
윤상아가 매니저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겨우 라운지가 조용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직원들이 앞 다퉈 1팀장에게 인사했다. 그는 고갯짓을 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니, 내가 아니라 뒤에 있는 쓰레기통 쪽으로.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진 그가 3팀장에게 말했다.
“잘 지냈냐?”
“여기야, 그냥 그랬죠.”
3팀장이 어물쩍 대답했다. 1팀장이 실소를 지으며 나를 돌아봤다.
“승전보는 계속 전해 들었는데. 축하를 못해줬네. 술이나 한잔 할까?”
“좋죠.”
고개를 끄덕인 1팀장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태풍이 지나간 후에도 라운지는 어수선했다. 다들 대표실에서 오갈 얘기를 추측하느라 정신없다. 나는 다시 5층으로 올라갔다. 홍보팀은 전쟁터였다. 박 팀장과 직원들이 전화기를 붙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팀장실로 들어가서 컴퓨터를 켰다. 배우들의 이름이 이미 포털 실검란을 뒤덮고 있었다. 특히 이도경. 국내에서 정상을 찍고 한창 잘나갈 때 미국으로 넘어간 배우라 반응이 더 격했다.
며칠은 시끄럽겠는데.
한참 기사를 열어보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이번에도 이봉준 실장이었다.
“어, 아래층에 좀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은데.”
“1팀 내려왔어요?”
“배우들만. 근데 지금 이도경이······.”
“또 드러누웠어요?”
“아니, 한판 붙었어.”
붙어?
“누구랑요?”
“손채영이랑.”
······이건 또 웬 뜬금없는 사태야.
그쪽은 요즘 드라마 촬영스케줄 맞추느라 정신없을 텐데.
“지금 밑에 와 있다고요?”
“걔가 이도경이랑 사이가 안 좋아.”
“손채영이랑 사이좋은 사람이 어딨어요.”
“많이 안 좋아. 이도경이 할리우드 간다고 유세를 엄청 떨었었거든.”
술병 들고 난장을 치던 이도경과 손채영의 투샷을 떠올려봤다.
관뒀다. 당 떨어진다.
다시 라운지로 내려가 보니 훌륭한 개판이었다.
“꺼지라니까! 너 지금 나한테 개소리하러 왔어?!”
“아니. 구경하러 왔지.”
손채영이 팝콘 대신 도넛을 먹으며 말했다. 생기가 철철 넘치는 얼굴이다.
“촬영 스케줄 빡빡해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네 얼굴 보니까 스트레스가 확 풀리네. 넌 촬영스케줄 빡빡했던 게 언젠지 기억은 나?”
“야! 너도 드라마 말아먹었다며! 그래서 광고도 뺏겼다며!”
“······작품은 계속 들어와. 아, 내 드라마에 단역 하나 줄까?”
“이 미친년이 보자보자하니까!”
보드카 병을 휘두르며 길길이 뛰는 이도경을 매니저들이 뜯어말렸다. 한참 역부족이었다. 다른 직원들은 전염병 창궐지역에서 최대한 멀어지려는 것처럼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봉준 실장이 옆구리를 찔렀다.
“손채영 말려야 되는 거 아냐?”
“제가요?”
“도넛 주고받는 사이잖아.”
거래를 주고받은 사이지.
“2팀 임시팀장님이 말리겠죠.”
자판기 앞을 보며 말했다. 임시팀장 직함을 달고 2팀장의 빈자리를 차지한 조병환 실장이 누군가를 붙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아, 이장현 실장이다. 전에 홍시 구하러 다닐 때는 그래도 사람 꼴이었는데. 지금은 폐인 꼴이다.
“안 그래도 회사 아수라장인데 채영이까지 데려오면 어떡해!”
“TV보자마자 회사로 가라던데요. 어떻게 말려요.”
“뭐? 그거 말리는 게 네 일이야, 인마!”
“자르세요, 그럼.”
조병환 실장이 삿대질을 하며 꽥꽥거렸다.
보고 있던 이봉준 실장이 혀를 찼다.
“저 팀은 나날이 미쳐돌아가는구만. 근데 이장현이 쟤, 송하 담당하고 싶어서 껄떡거리지 않았나? 요즘은 조용하네. 저거 쉽게 포기할 놈은 아닌데.”
“아, 약속한 게 있어서 한번 땜빵으로 맡겼었는데.”
“근데?”
“본인이 송하보단 손채영이 낫다고 가던데요.”
이봉준 실장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그가 뭔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계단 위에서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1팀장이 층계참을 돌아 내려왔다. 웅성거리던 직원들이 입을 다물었다. 손채영과 이도경도 드잡이를 멈춘 채 이쪽을 쳐다봤다. 1팀장이 눈으로 라운지를 돌아보며 물었다.
“상아는?”
“따라간 노 실장이 전화를 안 받아서, 찾아보라고 로드 보냈습니다.”
얼굴이 낯선 1팀 직원이 대답했다. 동시에 누군가 더듬거리며 덧붙였다.
“어, 유, 윤상아 씨 저기 있는데요?”
“어디?”
“저기요.”
손가락이 TV를 가리켰다. 시선들이 우르르 그쪽으로 몰려갔다. 널찍한 화면에는 여전히 종편채널의 연예가십 프로그램이 비쳤다. 그리고 윤상아는 그 속에 들어가 있었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손에는 인터뷰 마이크를 들고.
-그럼 윤상아 씨의 미국행은 소속사의 강요였다는 겁니까?
-네. 저는 솔직히 할리우드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는데. 소속사 대표님이랑 팀장님이 끈질기게 권하셔서, 두 분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미국에 가서 몇 년 동안 시키는 일만 했어요.
맙소사.
손채영과 이도경의 드잡이는 문제도 아니었다.
윤상아가 생방송으로 폭탄을 퍼붓고 있었다.
-억지로 노출씬을 찍으셨다는 건······.
-미국 케이블 채널에서 새로 제작하는 TV쇼 캐스팅제안이 왔는데, 노출하고 베드씬밖에 없는 역할이었어요. 못하겠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 인지도 올리려면 해야 된다고 하셔서······.
윤상아가 처량 맞은 눈물을 쏟아냈다. 짓무른 눈이 클로즈업됐다.
-소속사에 유감이 많으시겠네요.
-네. 소속사 때문에 제 배우인생이 망가졌으니까요.
윤상아가 다시 통곡했다. 울음소리가 라운지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모두들 아연한 얼굴로 TV화면만 쳐다봤다. 5층 홍보팀 쪽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욕지거리가 비명과 함께 터져 나왔다.
“······아직도 제가 할리우드에 있는 줄 아나보네.”
뒤에서 1팀장이 말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
“법무팀에 연락해.”
“아, 네!”
지시를 받은 1팀 직원이 재빨리 움직였다.
1팀장이 다시 대표실로 사라지고, 정신 차린 직원들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봉준 실장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우리 팀 오늘 회식 못하겠네.”
“······그러게요.”
*
법무팀과 홍보팀이 수습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해명기사가 속속 터졌다. 질질 끌 사건은 아니었다. 윤상아의 인터뷰 내용이 진실과는 거리가 꽤 있었으니까.
W&U를 성토했던 여론은 곧장 윤상아 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하지만 진실과는 별개로 W&U와 윤상아의 이름은 계속 기사와 대중의 혓바닥 위에 오르내렸다. W&U는 미국진출 실패에 이어 이미지에 제대로 흠집이 났고, 윤상아는 할리우드 스타병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윤상아가 원한 게 할리우드 가십걸들처럼 사고를 치고 유명세를 얻는 거였다면, 목적은 충분히 이룬 셈이다.
뭐, 할리우드와 달리 이곳은 가십만으로 먹고살 수 있는 동네가 아니고.
백한성 대표와 1팀장이 해명정도로 넘어가진 않을 테지만.
어쨌든 회사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분주한 동안에도 다른 일들은 속속 진행됐다. 도시정글의 오디션도 이어졌고. 심사석에 앉아있는 내 모습은 어김없이 기삿거리가 됐다.
여러모로 정신없는 날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날들 속에서도 잡념이 싹 사라지는 순간이 있었다.
리딩.
지하연습실에서 이송하와 남조윤의 연기를 보고 있을 때만큼은,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빠져들었다. 연습인지 실제인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활자로 읽을 때도 숨통을 턱턱 조여오던 시나리오가 나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마지막 씬을 보고나서야 겨우 긴 숨을 내쉬었다.
시간을 보니 이미 한밤중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두 사람에게 물과 수건을 내밀었다. 이송하가 내 손을 무시하고 일어났다. 땀에 젖은 티셔츠 안으로 어깨와 등이 짐승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헬스 트레이너와 무술감독이 힘을 합쳐 만든 몸짓이다.
“정신 차리게 세수 좀 하고 올게요.”
높낮이 없는 목소리를 남기고 이송하가 연습실을 나갔다.
매번 겪는 일이다. 이송하는 한번 역할을 뒤집어쓰면 원상태로 돌아오는데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다. 모든 작품에서 그랬지만, 도시정글이 가장 오랜 시간을 잡아먹는 것 같다.
“대단하다.”
남조윤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송하요?”
“얼라이브 때는 맞출 수 있었는데, 이번엔 못 따라가겠어.”
고개를 뒤로 젖힌 그가 얼굴위에 수건을 덮었다. 어깨와 가슴이 들썩였다.
극초반, 예술가의 종잇장처럼 휘청휘청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 계속 식단조절하며 살을 빼는 중이라 그런가. 안 그래도 메마르고 희미한 사람이 더 희미해 보인다.
“내 쪽이 너무 쳐질까봐 걱정인데. 주인공 몫은 해야 되는데.”
“걱정은. 형도 좋아요.”
“그럼 다행이고.”
남조윤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난 아직도 네가 왜 나를 골랐는지 궁금할 때가 많거든. 송하랑 리딩 할 때는 특히 그렇고. 나는 목숨 걸고 해도 저렇게는 못할 것 같아서.”
“송하는 무조건 연기를 시켜야겠다는, 말하자면 계시 같은 걸 받았고.”
정확하게는 미래를 본 거지만.
“형을 봤을 때는,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았죠. 너무 내 취향이라.”
농담처럼 덧붙인 말에 남조윤이 다시 웃었다.
“그리고 형은······ 나한테 의미가 좀 남다르기도 하고.”
중얼거리다가 말을 돌렸다.
“오디션 보면서 배우들 어마어마하게 많이 봤는데. 그 중에 정말 연기 잘한다 싶은 배우들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송하 때처럼 계시를 받거나, 형 봤을 때처럼 충격 받은 배우는 없었어요. 내 취향이 좀 심하게 고급인가.”
“오빠 취향이 뭐라고요? 뭐가 고급인데요?”
이송하가 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왔다. 다급한 걸음으로.
쓰였던 배역은 날아가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송하였다.
곧이어 낮게 섞인 웃음소리가 연습실을 훈훈하게 데웠다.
가을은 무척이나 짧았다.
겨울은 그보다 더 짧았고, 봄은 그야말로 스치듯 지나갔다.
어느새 다시 여름이 코앞이었다.
< 하늘의 별이 되거나, 별을 따거나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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