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의 별이 되거나, 별을 따거나 (1) >
-야. 우리가 세발낙지 먹으면서 진지하게 고민을 좀 해봤는데.
오디오스피커에서 김태웅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친구 놈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지 시끌시끌하다. 나도 모르게 이맛살이 구겨졌다. 이놈들이 진지하게 고민해서 좋은 결과를 낸 적이 있던가. 없다.
-그거, 크라우드 펀딩. 우리도 거금 투자하기로 했다. 친구끼리 도와야지.
“돕고 싶으면 그냥 영화를 봐. 얼라이브는 봤냐?”
-부담가질 거 없어. 우리가 서로 절대 돈거래만은 하지 말자고 약속하긴 했지만, 이번은 상황이 좀 특수하잖냐. 네 결혼 축의금 미리 준다고 생각하고 각자 오천 원씩 걷었다. 친구끼리 도와야지.
“그러니까 돕고 싶으면 그냥······ 얼마?”
-오천 원씩.
전화를 뚝 끊었다.
조수석에서 캐스팅 디렉터 이교진 실장이 피식거렸다.
“제 주변에도 은근히 많아요. 도시정글 크라우드 펀딩에 관심 있는 사람. 이전에도 정 팀장님 차기작이 망할지 흥할지 재미삼아 내기하는 사람들 제법 있었는데, 이번엔 아예 대놓고 베팅하라고 판 깔아준 느낌이라.”
이교진 실장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나를 돌아봤다.
“팀장님 주변엔 더 시끄럽겠네요.”
“시끄럽죠.”
가족, 친척들은 물론이고 한 다리 걸쳐서 아는 사람들까지 궁금해 한다. 영화촬영이 끝나면 만듦새가 어떤지, 내부시사회 반응이 어떤지 귀띔 좀 해달라는 사람들도 있고. 어째 도박판 한가운데 선 기분이다.
“여기 사람 너무 많은데요?”
이교진 실장이 주차장 너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휴일의 프리마켓은 인파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정 팀장님 괜찮으시겠어요? 알아보는 사람들 있을 텐데.”
“대비 해왔어요.”
테가 크고 투박한 변장용 안경을 꺼내 쓰고, 자연스럽게 헝클인 머리에는 모자를 썼다. 백미러에 비치는 인상이 좀 달라 보인다. 얇은 점퍼를 들고 내리자 먼저 내려 기다리던 이교진 실장이 눈썹을 올렸다.
“그게 다예요? 대비하신 것 치곤 변장이 약한데요.”
“하나 더 있어요.”
대답하면서 초록색 점퍼를 망토처럼 홱 걸쳤다. 대학교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등판을 보고 이교진 실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대학 과잠인지 강렬하네요.”
“드라마 촬영소품이래요. 스타일리스트가 구해왔더라고요.”
대학생 코스프레를 하고 프리마켓 행사장으로 성큼 들어섰다. 공원부터 거리까지 좌판과 돗자리가 깔려있고,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시끌벅적하게 흥정을 벌였다. 활기가 펄떡거리는 풍경이다.
내가 찾는 얼굴은 이젤과 초상화 액자가 늘어선 곳에 있었다.
분위기 훈훈한 화가와 손님들 사이에서 한 자리만 유난히 딱딱했다.
“가만. 움직이지 마세요.”
화가가 낮게 말했다.
앞자리에 앉은 꼬마가 목을 더 빳빳하게 세웠다.
“아저씨, 그림 언제 다 돼요?”
“조금만 더 참아봐. 아저씨가 특별히 잘 그려주시려고 하는 거니까.”
칭얼거리는 꼬마를 부모가 달랬다. 잔뜩 기대하는 얼굴들이었다.
꼬마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간편한 티셔츠차림인 동료들과는 달리, 혼자 셔츠를 입고 전문가용 앞치마까지 허리에 질끈 둘러맨 차림이었다.
부슬부슬해 보이는 검은머리. 칠이 살짝 벗겨진 안경과 검은 마스크.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표정과 섬세한 손놀림까지.
“아······.”
옆에 선 이교진 실장이 감탄사를 흘렸다.
젊은 화가는 종이와 꼬마의 얼굴을 번갈아보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뭔가 엄청난 예술작품이 탄생할 것 같은 분위기에, 지나가던 사람들마저 걸음을 멈추고 기웃거렸다.
“야야, 저 화가 쫌 사연 있어 보이지 않냐? 분위기가. 어?”
“분위기는 개뿔. 그냥 잘생겼다고 해.”
“그림도 잘 그릴 것 같은데. 우리도 초상화 그리고 가자. 얼마야?”
“3천······ 어? 저 사람만 공짜네. 왜 공짜로 그려주지?”
“그러네. 자원봉사잔가?”
여자 둘이 줄을 서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화가가 연필을 내려놨다. 꼬마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아저씨, 끝났어요?”
“끝났는데. 별로 마음에 안 드네.”
“보여주세요!”
작은 손이 잽싸게 종이를 낚아챘다. 기대하느라 숨까지 멈추고 그림을 딱 들여다본 순간, 꼬마가 흠칫했다.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부모도 흠칫했다. 차례를 기다리며 엿보던 여자들도 흠칫했다.
초상화가 아니라 추상화였다.
넓적한 얼굴에 눈코입이 있다는 것 말곤 닮은 젊이 없다.
“······ 아저씨, 이게 뭐예요? 발로 그렸어요?”
“손으로 그렸어.”
“이게 저예요? 제가 이렇게 생겼어요?”
“별로라고 했잖아.”
“이 정도로 별로일 줄은 몰랐죠!”
흥분한 꼬마가 옆에 있는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소리쳤다.
“딴 아저씨들이랑 누나들은 다 잘 그리는데! 왜 아저씨 그림만 이 모양이에요?”
“꼬마야.”
화가의 뒤에서,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또 다른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림이 이 모양이니까 공짠 거야. 더 좋은 초상화 받고 싶으면 옆에 가서 3천원 내고 다시 그려달라고 해.”
“그지같아!”
“원래 세상은 거지같은 거야.”
투덜대면서도 꼬마는 추상화를 챙겨갔다. 물론 줄 서서 기다리던 여자들도 함께 갔다. 옆에서 다른 화가들이 또 한건 했다며 킬킬거렸다. 나는 손님이 뚝 떨어진 화가의 앞에 가서 앉았다.
“솜씨가 이래서 그림으로 먹고 살겠어요?”
“이 친구가 원래 작풍이 좀 특이해서······ 팀장님?”
김현섭이 나를 알아보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길거리의 추상화가, 남조윤이 반가운 얼굴로 웃었다.
“왔어?”
“좀 어때요? 생각보다 사람들이 더 많은데, 별일은 없었어요?”
남조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현섭이 대신 대답했다.
“얘도 변장했잖아요. 안경도 쓰고, 마스크도 쓰고, 머리도 덥수룩해서 알아보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안경 벗었을 때도 알아보는 사람 없던데.”
“그냥 변장해서 그런 걸로 하자.”
김현섭이 남조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짐을 챙기는 남조윤을 보며 다시 물었다.
“지켜보니까 제법 화가느낌이 나던데. 할만은 해요?”
“많이 익숙해졌어.”
“욕먹는 건 많이 익숙해졌지.”
김현섭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냥 다른 화가들 하는 거 보면서 흉내만 내면 안 되는 거야? 좋은 추억 남기겠다고 온 사람들한테 기어이 네 그림을 들려 보내야겠냐?”
“그려놓고 안 주는 것보단 낫잖아.”
“안 주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두 사람에게 이교진 실장을 소개했다.
그는 마주친 순간부터 남조윤을 샅샅이 훑어대더니, 내가 근처 커피트럭에서 커피를 사다가 화가들에게 한잔씩 건네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남조윤을 집요하게 보고 있었다.
“남조윤 씨가 얼라이브에서 맡았던 역할, 저도 배우 여럿 추천했었는데.”
이교진 실장이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단역배우, 연극배우, 뮤지컬배우, 연기학원 다니는 지망생까지. 몇 백 명을 보여드렸는데 최성원 감독님이 오디션 보시더니 다 떨어뜨리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역할에 남조윤 씨 캐스팅됐다고 했을 땐, 솔직히 정 팀장님 로비인줄 알았어요. 얼마나 잘하나 보자 싶었는데.”
그가 남조윤과 나를 번갈아봤다.
“정말 잘 하시더라고요. 보자마자 납득했어요.”
“아······ 감사합니다.”
이교진 실장의 눈이 버드나무처럼 휘었다.
“도시정글 시나리오 보고 ‘일그러진 미학’을 가진 예술가 역할도 꽤 괜찮겠다 싶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더 좋네요. 주인공이 이렇게 잘 어울리면 조연 캐스팅도 의욕이 확 생기는데요?”
*
“예매하셨어요?”
“뭐 보러 오셨어요? 지금 표 사시면 20프로 할인해 드리는데!”
호객을 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이 팜플렛을 내밀었다. 나와 이교진 실장, 남조윤과 김현섭을 차례대로 보더니, 그나마 제일 만만해보였는지 김현섭의 팔을 붙들고 매달린다. 이교진 실장이 파리 쫓듯이 손을 휘저었다.
“예매 했고, 지금 보러 가는 중이에요.”
목적지인 소극장에 도착했을 즈음엔 연극 홍보전단지가 양손에 가득했다.
김현섭이 혀를 내둘렀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
“그래도 불법호객 단속하면서 많이 줄어든 게 이거예요.”
이교진 실장이 어깨를 들썩였다. 티켓박스를 지나서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양쪽 벽에는 연분홍색 포스터가 줄줄이 붙어있다. 가장 아래쪽에 있는 캐스팅보드에는 오늘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들 사진이 보였다.
“여기 이 친구네요.”
이교진 실장이 캐스팅보드 가운데를 가리켰다.
회사원 역할. 박희재. 여기까지 온 이유였다.
도시정글의 주요 조연 중 하나, 살인청부업자 배역을 놓고 이교진 실장과 함께 수백 장의 프로필사진을 살펴봤다. 박희재는 그가 어느 기획사 매니저에게 추천 받은 배우였다.
쌍꺼풀 없이 길게 찢어진 눈매가 인상적인. 연극무대는 8년째라던가.
“연기도 괜찮았으면 좋겠네요.”
“추천한 매니저 말로는 아주 괜찮다는데, 눈으로 봐야죠. 추천해주는 사람들 말만 믿으면 얼굴은 다 이송하보다 예쁘고 연기는 전부 박희승보다 잘하거든요.”
티켓에 찍힌 좌석으로 올라갔다. 넷이 나란히 앉았더니 시선이 쏟아진다.
김현섭이 모자챙을 끄집어 내리며 이교진 실장에게 말했다.
“꼭 이렇게, 우리까지 같이 넷이 올 필요가 있었을까요?”
“주연이랑 붙는 씬이 많은 역할이잖아요. 같이 있는 그림을 보면 더 이미지가 선명해지니까, 아무래도 도움이 되죠. 가끔 배우끼리 합이 안 맞는 경우도 있어서.”
“그럼 이송하 씨도 같이 왔으면 참 좋았을 텐데.”
“송하는 어떻게 변장해도 눈에 띌 걸요.”
내 말에 김현섭이 떨떠름한 얼굴로 객석을 돌아봤다.
“남자 넷이 이러고 있는 것보단 덜 띌 것 같은데요.”
빈 좌석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인들이었다. 아니면 여자 둘이거나. 그 틈에 남자들 넷이 주르륵 앉아있으니 그림이 좀 희한하긴 하다. 더군다나 조합도 친구라기엔 많이 어색해 뵈고.
김현섭이 다시 중얼거렸다.
“차라리 둘둘이 찢어지는 건 어떨까요?”
“그게 더 이상해 보일 것 같은데.”
“놀러온 게 아니라 극단 관계자인 척 합시다, 그럼.”
이교진 실장이 도시정글 시나리오를 꺼냈다. 김현섭도 남조윤도 화구가 든 가방에서 시나리오를 꺼냈다. 어차피 남조윤은 사람들 시선이 몰리거나 말거나, 연극에 집중할 준비를 마치고 계속 무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교진 실장이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은 시나리오를 넘기며 감탄했다.
“보면서 느낀 건데 이 시나리오, 디테일이 참 좋아요. 범죄 액션장르 시나리오 많이 봤는데 이건 유난히 대사가 리얼하더라고요. 감독님이 관련 자료조사를 많이 하셨나 봐요.”
“제가 듣기로는.”
전에 영화사 숲의 대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오현경 감독님이 한창 시나리오 수정 작업할 때, 진짜 사채업자한테 돈을 빌려가지고 두세 달 안 갚았대요.”
“예?”
“그쪽 반응 보려고요. 피 묻은 시나리오예요, 이거.”
“직접 해볼게 따로 있지.”
김현섭이 질린 표정을 했다. 이교진 실장도 뻣뻣한 웃음을 지었다.
“감독님이 이 작품에 목숨 거셨나보네요. 그렇게까지 하시는 분이면 배우들도 엄청 깐깐하게 보시겠네. 각오 해야겠는데요.”
떠들던 것도 잠시. 조명이 꺼지고 연극이 시작됐다.
오랜만에 보는 연극이라 그런지 어느 순간 푹 빠져들었다. 각본도 제법 재밌었지만, 그보다 배우들의 연기가 아주 좋다. 낯익은 얼굴이라곤 한명도 없는데. 여기저기 알려지지 않은 연기파 배우들이 많긴 많구나.
박희재는 그 중에서도 돋보였다. 물론 내 눈에만 돋보인 건 아니었다.
서로 의견을 조율할 필요도 없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에, 박희재와 다른 배우들과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우리를 발견하고 배우들이 수군거렸다. 사인, 팬, 볼펜 따위의 단어가 귓속으로 들어왔다.
이교진 실장이 능숙하게 명함을 한 장 꺼내들고 다가갔다.
“박희재 씨?”
“네. 무슨······.”
“캐스팅디렉텁니다. 영화 오디션 하나 안 보실래요?”
웅성거림이 확 커졌다. 박희재가 이교진 실장의 명함을 받아들었다. 다른 배우들이 미심쩍은 눈으로 같이 달라붙어서 확인했다.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 바닥에 사기꾼이 워낙 많아야지.
남조윤이 쓴 마스크를 벗기는 게 좋을까 고민했을 때였다.
연극에 여주인공 역으로 나왔던 배우가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 하늘의 별이 되거나, 별을 따거나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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