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6) >
“크라우드 펀딩이요?”
기획피디가 귀밑을 긁적였다.
“글쎄요. 크라우드 펀딩으로 모으는 돈은 한계가 있어서요. 투자보다는 기부나 후원하는 개념으로 많이 쓰이기도 하고. 독립영화나 아예 저예산 영화면 모를까, 우리 영화엔 큰 도움은 안 될 걸요.”
“요즘은 블록버스터도 많이 하던데요.”
“그건 투자보다는 홍보 마케팅용으로 하는 거죠.”
“네, 그런 용으로요.”
두 사람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나는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해놓은 제안을 꺼냈다.
“펀딩 액수는 소액으로 제안하고, 말만 투자지 대중한테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흥밋거리를 주는 거죠. 프리티걸 앨범 내기 전에 메이킹 필름을 제작해서 화제성을 높였는데, 반응이 꽤 괜찮았거든요.”
“그건 꽤가 아니라 엄청 괜찮았죠.”
기획피디가 혀를 내둘렀다.
“이것도 화제가 될 겁니다. 제가 꽂힌 작품이 성공하느냐, 망하느냐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니까. 천원이든 만원이든 관객들의 돈이 투자형태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결과가 더 궁금해질 거고. 당연히 홍보에도 도움이 되겠죠.”
“······인터뷰하곤 비교도 안 되게 큰 도움이 되겠죠.”
“대중의 관심이 쏠리면 뒤늦게 투자 결심하는 창투사도 생길 거고.”
“어쩌면 예산이 넘쳐서 못 받는 상황까지 갈수도 있고요.”
“제가 제작에 관여할수록, 화제성도 더 높아질 것 같은데요.”
탑스타를 주인공으로 쓰는 것도 결국은 화제성 때문이다. 집에서 TV틀면 나오는 드라마와 달리, 영화는 수고스러움을 감수하고 영화관에 찾아가야 하는 콘텐츠니까. 그래서 수십억 들여가며 포스터를 찍어내고 홍보하는 거고.
사람들을 영화관으로 불러들이는 힘.
남조윤에게 티켓파워가 부족하다면, 까짓것 내가 채워 넣으면 된다.
“그러니까, 정 팀장님이 아예 전면에 나서주시겠다는 겁니까?”
“뭘 새삼스럽게.”
“아니, 그러셨다가 자칫······.”
기획피디가 뒷말을 망설였다. 월드아트 부장이 대신 말했다.
“이 영화 폭삭 망할 수도 있어요.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한 일반인들하고 부분투자자들이 본전도 못 찾으면, 팀장님이 쌓아온 이미지가 확 나빠질 텐데요. 미다스의 손이라는 타이틀이 아예 끝장날지도 모르고.”
“그렇겠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획피디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손익분기점은 넘을 거라고 백프로 확신하시는 겁니까?”
“백프로 확신은 못하죠.”
정확히 말하면, 내 발로 확신 없는 길로 들어섰지.
“그런데 왜 굳이 리스크를 더 짊어지시려는 겁니까?”
“이 영화. 성공시키고 싶으니까요.”
확신 없는 길인데. 희한하게도 언제부턴가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거든.
미래예지로 본 것보다 더 성공하진 못하더라도 설마 폭삭 망하기야 하겠냐는, 그런 미적지근하고 싱거운 확신이 아니라.
이송하와 남조윤이 출연하고, 오현경 감독이 찍고, 영화사 숲과 SBE필름이 제작하고, 낮은 가능성에 베팅한 투자자들이 붙고, 월드아트 픽쳐스가 배급할 예정인 이 도시정글이라는 영화.
이 영화가 성공할 거라는 확신.
아니, 이 영화를 성공시킬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기획피디와 월드아트 부장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굴러갔다. 나라는 홍보아이템을 어떻게 사용해야 가장 효과적일지 계산하는 눈치였다. 두 사람이 쥔 볼펜이 수첩 위를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 모습을 보며 또 다른 용건을 꺼냈다.
“물론 이렇게 진행할 경우, 저한테도 돌아오는 건 있어야죠.”
“그렇죠. 원하시는 옵션이 있으면 말씀해보세요.”
사업가의 얼굴을 한 아트월드 부장이 말했다.
나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먼저, 배우 개런티 말인데요.”
“개런티요. 확 긴장되네요.”
아트월드 부장이 농담처럼 웃었다. 말마따나 긴장한 얼굴이었다. 내 입에서 어처구니없는 액수가 나올까봐 걱정하는 건가. 물론 넉넉하지도 않은 제작비를 개런티로 왕창 뜯어낼 생각은 없다. 다만.
“통계약말고 러닝개런티로 계약했으면 좋겠는데요.”
“러닝개런티요?”
“네. 손익분기점이 넘으면, 그만큼 개런티를 추가로 받는 형태로.”
투자자들이 지분을 나눠 갖는 것과 비슷하게. 영화가 손익분기점에 미치지 못하면 하나마나한 계약이 되겠지만, 손익분기점을 넘고 이익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러닝개런티가 차곡차곡 쌓이겠지.
“그럼 저도 의욕이 더 생길 것 같고요.”
내 말에 아트월드 부장이 기획피디와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조건은 아니네요. 개런티는 그렇게 진행하죠.”
“깔끔해서 좋네요.”
입 끝을 올리며 계속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
[실패 없는 ‘미다스의 손’ 정선우, 차기작 ‘도시정글’은 어떤 영화?]
[W&U ‘정선우팀’ 이송하 ․ 남조윤 영화 도시정글 출연확정]
[미다스의 손잡은 도시정글 오현경 감독, ‘무명 ․ 여성감독’ 편견 깰까]
보도자료로 뿌린 떡밥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프리티걸과 넵튠의 신곡이 여전히 음원차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데다 한창 TV와 무대를 오가며 활동 중이라, 더 손쓸 필요도 없이 도시정글과 내 이름이 실검에 올라갔다.
도시정글에 대한 간략한 정보들. 그리고 크라우드 펀딩에 대한 떡밥까지.
펀딩 시기는 크랭크업 이후로 잡았다. 그때부터가 홍보물량을 쏟아 부어야 할 시기니까. 소액펀딩이라 마감도 빠를 테니, 너무 일찍 시작하면 영화 개봉할 즈음엔 관객들이 펀딩이 있었는지도 잊어버릴지도 모르고.
예상대로 관심은 꽤나 뜨끈뜨끈했다.
-헐. 듣보잡 감독에 주인공이 남조윤이야? 이건 진짜 도박인데.
-충무로 관계자 말이 저 시나리오 투자 못 받아서 굴러다니던 거래요.
-기레기들이 다 정선우 다음 작품은 안전한 블록버스터로 고를 거라고 예측했었는데, 정선우 완전 개썅 마이웨이ㅋㅋㅋ꺼져, 난 내 길을 간다.
-이거 펀딩 어떻게 하는 거예요? 로또 살 돈 모아서 저거나 해볼까.
-근데 영화펀딩은 돈 버린다고 생각하고 소액만 해야 됨. 수익률 개판임.
-지인이 영화감독인데 요즘 정선우 소문 안 좋대요. 밑천 다 떨어졌다고.
온라인뿐 아니라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떠들썩하긴 마찬가지였다.
초대받고 참석한 VIP영화시사회에서는 주연배우만큼이나 질문을 받았다.
“정 팀장님, 도시정글 시나리오가 그렇게 좋아요?”
“그렇게 좋아요.”
“조연 오디션에 우리 회사 신인들 좀 보내볼까?”
“잠깐잠깐, 혹시 정 팀장님도 사비 털어서 영화에 투자했어요?”
“글쎄요.”
대부분 영화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응원했지만, 뒤돌아서면 멍청한 선택을 했다고 쑥덕거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작품을 골랐으면 좀 더 승승장구했을 거라면서.
아, 면전에서 비웃는 사람도 있고.
“내 작품 마다하고 얼마나 대단한 감독이랑 작품 하려나 기대했더니.”
화장실 앞에서 마주친 차재호 감독이 콧방귀를 뀌었다.
“오현경 감독? 누구야, 그건.”
“도시정글 감독님이시죠.”
“감독도 감독 나름이지. 정선우 팀장, 일 참 미련하게 하네. 차기작 고르다가 공황장애까지 왔다면서. 정 팀장이 놓친 여주인공, 한서연 캐스팅했어. 내가 보기엔 걔가 이송하보다 훨씬 낫더라고.”
이 양반이 이젠 대놓고 막말을 하네.
차재호 감독이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 영화 개봉하면 보러 와. 시사회티켓 보낼 테니까. 뭘 놓쳤는지 봐야 다음부턴 또 실수를 안 하지. 아, 이렇게 언론 시끄럽게 해놓고 영화 망하면 다음이 없을 수도 있겠네. 백한성 대표가 또 칼 같잖아.”
그가 느긋하게 지나쳐가며 덧붙였다.
“도시정글인가 그건 내가 내 돈 주고 볼게. 표 한 장이라도 팔아줘야지.”
“감독님.”
차재호 감독이 나를 돌아봤다.
나는 제법 부드럽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감독님 작품을 자꾸 놓쳤다고 하시니까, 말씀드리는데.”
“뭐?”
“그 영화 망할 거 같아서 깠어요.”
“······뭐?”
“초능력자요. 그거 망할 것 같아서 깠다고요. 손익분기점이 한 400만 명쯤 되나요? 제가 보기엔 아주 폭삭 망할 것 같은데. 망할 것 같은 영화에 굳이 내 배우 넣어서 같이 망할 필욘 없잖아요.”
“뭐, 너 지금, 뭐······!”
차재호 감독이 생선처럼 눈을 부릅떴다.
뻣뻣하게 굳은 혓바닥으로 더듬거리는 그를 보고 다시 웃었다.
“판단력 떨어지는 놈이 하는 말인데 뭐 그렇게 심각하세요?”
아직도 내 어깨에 올라와있는 팔을 툭 떼어내고 걸었다.
한참 만에 뒤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
무더위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즈음.
월드아트 픽쳐스의 투자금. 그리고 이삭 줍듯이 긁어모은 부분투자금을 움켜쥐고 드디어 촬영준비에 들어갔다. 촬영 스케줄과 콘티회의가 밤낮없이 진행되고, SBE필름의 주도로 스태프들이 하나둘씩 채워졌다.
그리고 동시에 주인공을 제외한 조, 단역의 캐스팅도 진행 중이었다.
“배우 캐스팅이요?”
“네. 팀장님이 오디션이랑 캐스팅 과정에 같이 참여해주셨으면 해서요.”
SBE필름 기획피디가 두툼한 파일을 내밀었다. 들춰보니 배우 프로필들이다. 낯이 익은 얼굴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낯선 얼굴이었다.
“제작과정에서 팀장님이 참여하실 수 있으면서도, 기사로 냈을 때 화제가 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회의를 해봤는데. 아무래도 캐스팅이 제일 흥미롭겠더라고요. 아무래도 팀장님은 안목이 좋으시니까.”
기획피디가 똑같은 두께의 파일을 두 개 더 얹으며 말했다.
“이건 일단 우리 회사에서 그동안 받았던 것들인데, 이미지만 보시고요. 공고 냈으니까 곧 오디션도 봐야죠. 주조연급은 인지도 있는 배우들부터 접촉중인데, 주인공이 남조윤 씨라 섭외가 잘 안 풀릴 수도 있어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자기보다 인지도 낮은 주인공은 탐탁지 않을 테니까.
“조단역급도 그냥 오디션으로는 괜찮은 배우들 다 찾기 어려울 거예요. 오디션도 빈익빈 부익부라. 진짜 괜찮은 배우들은 흥행할 것 같은 블록버스터나, 눈도장 찍을 만한 유명감독 작품 오디션을 노리거든요.”
“얼라이브 때는 캐스팅 잘됐었겠네요.”
“그때는 뭐, 흘러넘쳤죠. 그런 호황을 언제 또 누려볼까 싶네요.”
입맛을 다신 기획피디가 사무실로 안내했다. 촬영 전에 준비단계를 끝마치느라 다들 밤낮없이 일하는 중인지, SBE필름과 영화사 숲의 직원들이 의자나 책상 따위에 엎어져 졸고 있었다.
그리고 자료가 지저분하게 쌓인 소파 옆에, 누군가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결벽으로 보일정도로 깔끔한 옷차림. 가까이 가면 잉크냄새가 날 것 같은 삼십대 남자였다. 우리를 발견한 그가 팔짱을 풀고 다가왔다. 나를 보는 눈초리에 뾰족한 호기심이 가득하다.
“정 팀장님, 이분은 이교진 실장님. 캐스팅 디렉터예요.”
캐스팅 디렉터?
***
백한성 대표는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봤다.
소파에 앉은 본부장이 그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도시정글 영화 잘못되면, 정선우, 정 팀장은 어쩌시려고요?”
대답은 없었다. 본부장이 둥그런 턱을 긁적였다.
“대표님이 조용하시니까 다들 추측만 무성하던데요. 잘린다는 말도 있고.”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티스푼으로 찻물을 살살 저으며 고개를 든 본부장이 멈칫했다.
백한성 대표가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 한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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