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4) >
“뭐, 들어봅시다. 무슨 상황인지.”
엔트 캐피탈 황 이사가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 뒷모습을 보며 주재찬 감독도 흥분을 가라앉혔다. 동요할 필요는 없었다. 오현경 감독이 누구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여기까지 따라왔든, 투자사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그를 밀어낼 수는 없을 테니까.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정선우가 동행인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쪽은 SBE필름 기획피디님.”
“안녕하세요.”
남자가 건넨 명함에는 기획팀장이라는 직함과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주재찬 감독이 얼떨떨하게 명함을 바라봤다. SBE필름. 최성원 감독과 함께 얼라이브라는 메가히트 영화를 만든 제작사. 그리고 그가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갔다가 까인 곳이기도 했다.
황 이사가 아, 하고 입을 뗐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피디님이 어떻게 같이 계세요?”
“도시정글을 저희가 공동으로 제작하게 될 것 같아서요.”
“SBE필름이요?”
황 이사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리고 정선우와 SBE필름의 기획피디, 그리고 영화사 숲의 대표를 번갈아봤다. 이윽고 상황파악이 끝났는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선우 팀장님이 징검다리가 되셨나 보네. 경험 많은 제작사가 합류하면 투자자 입장에선 좋죠. 이송하 씨 하고도 일해 보셨으니까 익숙하실 거고.”
그즈음, 주재찬 피디는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이번엔 분노가 아닌 기대로 인한 흥분이었다. 제작사의 급이 올라가는 만큼 감독인 그의 급과 평가도 올라갈 테니까.
주재찬 감독이 한껏 들떴을 때, 기획피디가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익숙하죠. 남조윤 씨도 뭐, 익숙하고요.”
“네?”
“남조윤 씨랑 이송하 씨 투톱이면, 현장에서 잡음생길 일은 없겠네요.”
“잠깐,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희가 캐스팅 제안을······.”
황 이사가 찌푸린 눈으로 주재찬 감독을 돌아봤다. 캐스팅을 어떻게 한 거냐고 책하는 눈초리였다. 당황한 주재찬 감독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정선우를 쳐다봤다.
“정 팀장님! 제가 분명히, 이송하 씨한테 제안을 드렸었는데.”
“네. 제가 제안을 두 번 받았죠. 남주인공. 여주인공.”
“아니, 사정 말씀 드렸었잖아요. 남조윤 씨는 내부적으로 혼선이······!”
“저는 양쪽 다 진행했으면 하는데요.”
정선우가 웃으며 말했다. 동시에 황 이사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남조윤 씨까지 받지 않으면, 이송하 씨도 못 주시겠다. 그런 겁니까?”
“그건 제가 실력도 없는 배우를 끼워 파는 것처럼 들리네요. 정작 제안은 조윤 형, 남조윤 씨한테 먼저 들어왔는데. 남주인공 배역. 누구보다 잘 소화할거라고 확신합니다. 믿음이 부족하시면 따로 오디션을 보셔도 좋고요.”
“정 팀장님이야 당연히 확신하시겠죠. 본인 배운데. 오디션을 볼 필요도 없을 것 같고요, 저희 입장은 분명하니까.”
황 이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주인공 역에 남조윤 씨는 반댑니다. 주 감독님 생각은 어때요?”
“······저는 사실, 남주인공 역할에는 서지준 씨를 부탁드리고 싶었는데요. 이송하 씨랑은 드라마 같이 하실 때 반응이 좋기도 했고. 마침 지금 차기작 확정하신 것도 없으시니까.”
주재찬 감독이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는 이송하 캐스팅이 확정되면 분위기를 타고 서지준을 언급할 작정이었다. 그 라인업이면 투자자들이 침을 질질 흘릴 테니까.
“정 팀장님. 서지준 씨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면······.”
“그 역할에는 서지준 씨보단 남조윤 씨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요.”
대답은 황 이사만큼이나 단호했다.
당황한 주재찬 감독이 다시 말을 고르는 사이, 황 이사가 혀를 찼다.
“정 팀장님은 본인이 나서면 투자자들이 혹해서 내 돈 가져가라고 몰려들 줄 아시나본데. 그것도 말이 되는 배우를 들이미실 때 얘기죠. 주인공이에요, 주인공. 이송하 씨만 믿고 가기엔 그쪽도 영화 여주인공으론 첫 작품이고. 영화 망하면 배우들은 주인공 커리어라도 건지지. 투자자만 독박 쓰는 거 아닙니까. 이송하 씨까지 같이 빼시겠다면, 그냥 그렇게 하세요.”
신랄하게 내뱉은 황 이사가 영화사 숲 대표를 홱 돌아봤다.
“대표님. 캐스팅 이렇게 가면 저희 이 영화에 투자 못합니다. 리스트 작성해서 드릴 테니까 그 중에서 캐스팅 다시 진행하시는 게 어때요?”
룸의 분위기가 대번에 싸늘해졌다.
주재찬 감독이 초조하게 눈알을 굴렸다. 캐스팅까지 투자사에 휘둘리면 그가 계획했던 판이 엎어진다. 다시 정선우를 설득하려던 주재찬 감독이 주춤 입을 다물었다. 정선우의 반응이 묘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별반 동요가 없었다. 영화사 숲의 대표나 SBE필름의 기획피디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짧게 한숨을 내쉬거나 혀를 찼을 뿐이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태도였다.
“오현경 감독님 생각은 어떠세요?”
불쑥, 정선우가 물었다. 오현경 감독이 비장하게 대답했다.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저는 남조윤 씨가 적격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참. 이게 웬 조합인가 했더니.”
황 이사가 실소를 터뜨렸다. 오현경 감독이 계속 말했다.
“끈질기게 설득했던 투자자 몇 군데에서 긍정적인 대답을 받아왔어요. 부분투자라 각각이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주연배우 세팅되면 부분투자자들은 더 설득할 수 있습니다.”
“대표님!”
영화사 숲의 대표가 화들짝 놀랐다. 황 이사의 매서운 눈길을 외면하고, 그는 칙칙한 얼굴로 오현경 감독을 옹호했다.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찬물을 마시던 황 이사가 결국 컵을 내던지다시피 하고 일어났다.
“알아서들 잘 해보세요, 그럼.”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렸다 닫혔다. 주재찬 감독은 멍청하게 황 이사가 박차고 나간 문을 쳐다봤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가 낙동강 오리알보다 못한 신세가 될 판이라는 건 명백했다.
그가 시선을 굴렸다. 영화사 숲의 대표와 오현경 감독. SBE 기획피디.
그리고 정선우.
주재찬 감독이 황급히 말했다.
“정 팀장님, 잠깐만, 저랑 얘기 좀 하시죠.”
정선우는 선뜻 일어섰다.
건물 밖으로 나가는 동안 주재찬 감독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신이 도운 것처럼 눈앞에 뚝 떨어진 기회였다. 이대로 그의 시나리오를, 그의 입봉작이 될 영화를 놓칠 수는 없었다.
줏대 없는 영화사 대표가 오현경 감독의 손을 들긴 했지만, 그건 정선우와 오현경 감독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SBE필름에 징검다리를 놓은 것도 정선우. 지금 상황을 주도하는 건 다름 아닌 정선우 팀장이었다.
즉 정선우를 설득하면 되는 일이었다.
“팀장님 말씀 듣고 생각해보니까 남조윤 씨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니, 좋습니다. 오현경 감독님이 얘기한 부분투자자들은 저도 설득할 수 있고요.”
주재찬 감독이 확신하듯 말했다. 물론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둘이 똑같은 조건이라면 정선우가 그를 선택할 거라는 확신이.
“배우 분들, 예정대로 저한테 맡겨주세요. 팀장님도 제 연출이 더······!”
“글쎄요.”
“예?”
“오현경 감독님 전작들을 봤는데, 연출이 참 좋더라고요. 놀랄 만큼.”
정선우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속을 가늠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주재찬 감독에게는 더없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가 매달리다시피 설득했지만, 정선우의 반응은 변함없었다. 주재찬 감독이 가슴을 언성을 높였다.
“팀장님! 연출이 어땠든, 그래봤자 다 망한 작품 아닙니까? 미친 게 아니고서야 그런 감독을 어떻게 믿고 배우를 맡기······!”
갑갑한 속을 터뜨리던 주재찬 감독이 멈칫했다.
정선우가 피식 웃었다.
“제가 미쳤냐는 얘길 여러 번 들었는데, 사실은 그게 저한텐 미친 짓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 선택은 미친 짓이네요. 합리적으로 따지면 선택지는 명확한데, 지금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으니까.”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던 정선우가 뚝 자르듯이 말했다.
“어쨌든, 매니저로써 제 배우를 맡기고 싶은 분은 오현경 감독님이네요.”
주재찬 감독이 욕지거리를 웅얼거렸다. 기회가 그의 손아귀에서 흘러나가고 있었다. 뒤집힌 뱃속에서부터 악의가 울컥 올라왔다. 기어코 그를 판에서 밀어내겠다면, 그에게는 아예 난장판을 만들 방법도 있었다.
주재찬 감독이 입술을 비틀었다.
“······소송 걸 겁니다.”
“소송?”
“도시정글 제 작품이에요!”
돌연 정선우가 소리 내 웃었다. 후련한 듯한 웃음을 흘리며 그가 말했다.
“제작사에서 크레딧에는 이름 올릴 겁니다.”
“······!”
“소송거리도 안 되게.”
***
“영화 망하고 나면, 오늘 일 후회할 겁니다!”
나는 주재찬 감독의 저주를 한 귀로 흘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번에 초능력자 차재호 감독도 나중에 후회할거라고 비아냥거리더니. 왜들 내 미래를 점지해주려고 안달인지 모르겠네.
성큼성큼 룸으로 돌아가는데, 문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이 보였다.
오현경 감독이었다.
“정 팀장님.”
“밖에 나와서 뭐하세요. 이제 들어가서 진짜 영화얘기 해야죠.”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어서요. 분명 다른 대안도 있으셨을 텐데.”
대안이라.
주재찬 감독. 아니면 더 믿음직하고 능력 있는 다른 감독들.
고민했었다. 오현경 감독의 전작을 보면서 이전의 실패가 실력부족이 아니라 운이 지독하게 안 따랐구나, 판단하면서도. 내가 감탄한 시나리오 속의 감성은 전부 오현경 감독의 감성이라는 걸 되새기면서도. 상황을 바꾸려고 혼자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러면서도 저울의 추가 저쪽으로 확 기울진 않았는데.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예?”
의아해하는 오현경 감독을 보면서, 기억을 되짚었다.
“넌 어떤 작품 찍고 싶어?”
내가 묻자마자 이송하가 기다렸다는 듯 종이뭉치 세 개를 늘어놓았다. 드라마 대본, 그리고 드라마 기획안 두 개였다. 내가 마른침을 삼켰을 때 이송하가 입을 열었다.
“세 개 중에 고민이에요. 드라마는 아직 못 골랐고, 영화는 이거요.”
이송하가 드라마 대본과 기획안 위로 시나리오를 툭 올려놨다. 도시정글. 표지에 쓰인 제목을 보자마자 긴장이 탁 풀렸다. 그리고 의심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너 혹시 회사에서 무슨 애기 들었어?”
“무슨 얘기요?”
“아니, 이 시나리오 어디가 마음에 들었어?”
내 물음에 이송하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시나리오도 재밌고. 뭣보다 여주인공이 인상적이어서요. 비중도 크고. 드라마는 여주인공 비중 높은 작품이 많은데 영화는 이런 거 찾기 힘들잖아요. 놓치면 많이 아까울 것 같아요. 그리고······.”
이송하가 슬쩍 웃으며 덧붙였다.
“각본 쓴 감독님이 캐릭터를 굉장히 애정을 갖고 만드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연기하고 싶어졌어요. 애정을 갖고 찍어주실 것 같아서.”
똑같은 질문을 남조윤에게도 던졌다.
“형은 어떤 작품 찍고 싶어요?”
“이거.”
남조윤이 시나리오의 탑에서 하나를 꺼내왔다.
“도시정글. 네가 마지막으로 준 거. 이게 제일 끌리는데.”
“······왜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더니, 남조윤이 차분하게 답을 꺼냈다.
“재밌어서.”
“형은 시나리오는 다 재밌다면서요.”
“더 재밌었어. 그리고······ 이게 눈에 밟혀서.”
그가 투명한 파일에 곱게 담아둔 것을 꺼냈다. 알록달록한 프린트물. 처음 오현경 감독에게 받았던 대본에 곁들여있던 캐스팅제안서다. 남조윤을 향한 오현경 감독의 구구절절하고, 간절하고, 낯간지러운 러브콜.
“십년 만에 처음 받아봤거든, 이런 거.”
보고 혹하라고 끼워놓긴 했지만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는데.
남조윤이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단역이라도 좋으니까, 이 영화 찍고 싶어.”
“그러더라고요. 둘 다.”
말을 끝내고 바라봤다. 오현경 감독은 괴상한 얼굴이었다. 눈썹은 일그러뜨리고, 입술은 올라가있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우왕좌왕하는 사람처럼. 나는 짧게 숨을 내쉬고, 오현경 감독에게 다시 인사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우두커니 선 오현경 감독을 두고 룸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곳은 우중충한 먹구름에 뒤덮여있었다. SBE필름 기획피디는 심각한 얼굴로 통화중이고, 영화사 숲의 대표는 이미 폭우에 쫄딱 젖은 듯한 청승맞은 얼굴이었다. 그가 나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메인투자도 날아갔고, 이걸 이제 어떻게······.”
“다른 투자자를 찾아야죠.”
당장, 지금부터.
< 한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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