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205화 (205/218)

< 한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3) >

기획피디가 물었다.

“정 팀장님, 돈벼락 맞으셨어요?”

“그랬으면 영화가 아니라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겠죠.”

“아니면 뭐, 소액 펀딩에 관심있으세요?”

“그런 건 아니고요.”

나는 아랫입술을 한번 핥고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걸 전부 동원해서, 이 영화에 한번 투자해보려고요.”

기획피디가 내 얼굴과 시나리오를 번갈아봤다. 난제를 마주한 표정이다.

“······왜요?”

“투자하고 싶을 만큼 확 꽂힌 작품이라서죠. 당연히.”

“확 꽂힌······ 잠깐만요.”

기획피디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10분만. 얼음이 녹기 전에 돌아올게요!”

***

복도를 단숨에 가로지른 기획피디가 대표실로 들어갔다.

“대표님!”

“어! 너 마침 잘 왔다.”

깍지 낀 손에 턱을 받치고 있던 SBE 대표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3교시 연애시간 있잖아. 우리가 재미없다고 깐 시나리오. 그거 수박픽쳐스에서 가져갔다는데?”

“네? 그걸 수박에서 찍는대요? 요즘 시나리오가 기근이긴 한가보네.”

“거기 가서 대박나면 어떡하지?”

대표가 발끝을 바닥을 탁탁탁 두드렸다. 초조함이 역력한 몸짓이었다. 얼라이브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 동안 자신감과 콧대가 하늘을 찌른 그는, 차기작도 성공시켜야 한다는 압박으로 나날이 말라가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거 재밌었던 것 같아. 너 그거 왜 깠냐!”

“대표님이 까라고 하셨잖아요! 얼라이브 대박치고 나서 눈만 높아지셔가지고! 그리고 3교시 어쩌고, 그거 재미없었어요. 그게 대박나면 수박 대표님이 조상님 묏자리를 잘 쓴 거고.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라.”

떠들던 기획피디가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대표 책상에 양손을 턱 올렸다.

“지금 W&U정선우 팀장이 왔는데요.”

“왜, 또 좋은 시나리오 찾나? 나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 양반이 오늘은 시나리오를 들고 왔어요.”

대표가 눈을 껌뻑였다. 기획피디는 그에게 정선우와의 짧은 대화와, 그 이후로 급하게 찾아본 도시정글의 정보를 낱낱이 토해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던 대표가 감상을 말했다.

“나참, 꽂힐게 그렇게 없었대? 미친 거 아냐?”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갑자기 기자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요.”

“무슨 말?”

메이킹필름과 프리티걸이 신드롬에 가까운 성공을 거둔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정선우에 대해 떠들어댔다. 기획피디는 그중 심야 케이블예능에서 들었던 멘트를 떠올렸다.

“W&U 정선우 팀장은 종종 미친 짓을 하는데 그 미친 짓이 매번 초대박이라는 결과로 돌아왔기 때문에 미친놈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그 사람이 다시 미친 짓을 하면, 나도 거기 동참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대표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그럼 한번······ 무슨 얘기하는지 들어 볼까?”

*

“W&U 정선우 팀장, 반응은 어땠어요?”

맞은편에 앉은 엔트 캐피탈 직원들이 물었다.

주재찬 감독은 태연스럽게 초밥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되게 좋던데요? 예상했던 것보다 더 긍정적이었어요. 이송하 씨랑 같이 검토하고 연락주기로 했습니다.”

“이송하 정도면 괜찮지! 화제성도 좋고, 중국에서도 먹히고.”

“남조윤 섭외 번복한 것 때문에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선우 팀장이 주 감독님 단편작품에 제대로 꽂혔나 봐요?”

“네, 그때 좋게 보신 것 같아요.”

뒤풀이에서 만났던 정선우 팀장은 그에게 몹시 사근사근했다. 그를 제치고 대상과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감독들이 있었는데도, 그에게 유난히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정선우 팀장이 성공할 사람을 잘 알아본다는 건 유명한 얘기였다.

그래서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면 시간낭비 할 것 없이 곧장 섭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예상보다는 실망스러운 반응이었다.

물론 사실 그대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 일단은 눈앞의 투자사 직원들에게 그의 능력과 가치를 증명해보여야 했으니까. 그러지 못하면 겨우 차지한 감독자리가 위태로웠다.

“고생하셨어요, 주 감독님. 그런데 감독 교체에 대해서는 별말 없었어요?”

“예. 쉽게 납득하던데요. 뭐, 요즘은 촬영 중간에도 감독 바뀌고 하니까.”

“잘 아시네요.”

황 이사가 각진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영화사에서는 우리 제안 거절 못해요. 우리가 발 빼면 제작 엎어지니까. 다른 투자배급사도 없고, 부분 투자자도 없고. 우리 입김이 제일 세다는 말이죠. 오현경 감독이 버티거나 말거나 이제 연출은 주 감독님이에요.”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재찬 감독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 끝은 흥분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입봉작을 손에 넣었다. 그것도 독립영화가 아닌 상업영화를.

그동안 돈놀이하는 투자자들한테 굽실거리느라 자존심이 많이 상하긴 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덕분에 오현경 감독의 수정고와 연출 자리를 한꺼번에 손에 넣었으니까.

그는 도시정글을 반드시 성공시킬 작정이었다.

흥행작이 생기면 차기작에는 제작사와 투자사들이 서로 달라붙을 테니까. 그리고 그의 시나리오와 연출력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보는 눈 없는 제작사들 모두가 그를 미리 알아보고 붙잡지 못한 것을 후회할 테니까.

“투자한 거 후회 안 하시도록, 영화 잘 만들겠습니다.”

“그래 주셔야죠.”

황 이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주 감독님. 국내 영화 투자 수익률이 어느 정돈지 아세요?”

“네?”

“마이너스예요. 마이너스 7프로. 작년에 개봉한 상업영화들 있잖아요. 저예산 말고 제작비 10억 넘어가는 것들. 영진위 통계 보면, 그중에 반이 제작비 회수도 못하고 말아먹었더라고요. 손익분기점 넘긴 게 16편밖에 안 돼요. 투자자들 환장하죠. 그런데 왜 투자를 하냐면······.”

황 이사가 방석 옆에 있던 도시정글 시나리오를 식탁위로 툭 올려놨다.

“종종 대박이 나오거든요. 투자자들 막 들러붙은 대규모 블록버스터 말고. 시나리오는 참 좋은데 대중성이 별로네, 요즘 트렌드가 아니네, 하면서 다른데서 눈독 안 들이는, 이런 거.”

황 이사가 시나리오를 젓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런 게 성공하면 수익률이 이백프로, 삼백프로씩 나온단 말이에요. 우린 그걸 기대하고 투자하는 거고. 그러니까 꼭 잘 좀 만들어주세요. 그러라고 감독 교체한 거니까.”

주재찬 감독이 눈살을 찌푸렸다. 황 이사가 계속 말했다.

“전작 망한 감독보단 낫지만 주 감독님도 저희한테 아주 좋은 카드는 아니었어요. 시나리오 쓰신 당사자시고, 앞으로 저희 쪽에 최대한 협조하신다고 하셔서 맡기는 건데. 지켜보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말씀하신 것처럼 촬영 중간에도 감독 바꿀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영화 잘 만들 자신 있으니까.”

주재찬 감독이 입술을 비틀며 대답했다.

그도 이대로 투자사 손에 휘둘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서둘러 다른 투자자들을 끌어 모을 생각이었다. 투자사가 많아질수록 자연스럽게 엔트 캐피탈이 차지하고 있는 지분과 영향력이 줄어들 테니까.

투자자들을 꼬이게 만들 미끼도 있다.

미다스의 손이라는 타이틀로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정선우 팀장. 차기작이 정해질 때마다 화제를 끌어 모으는 한류스타 이송하. 둘을 잡아서 앞세우면 틀림없이 다른 투자자들도 흥미를 보이리라.

그리고 주재찬 감독은 정선우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회의실을 뛰쳐나간 기획피디는 약속대로 10분 만에 돌아왔다. SBE대표와 함께. 그사이에 도시정글을 둘러싼 상황도 최대한 알아보고 왔는지, 표정은 아까보다 더 괴상했다.

기획피디가 먼저 운을 뗐다.

“알아봤는데. 제작상황이 총체적 난국이던데요.”

“좀 그렇죠.”

투자사 돈에 휘둘려 감독도 제 마음대로 못 앉히는 제작사.

서로 내 시나리오라고 개싸움 중인 무명감독과 입봉감독.

솔직히 말하면, 이런 환경에서 제작된 작품이 흥행과 작품성 두 개를 다 잡으며 성공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이러니까 될 작품은 똥을 처발라도 되고, 안 될 작품은 때려죽여도 안 된다는 말이 나오는 거겠지.

가볍게 숨을 뱉고 말했다.

“총체적 난국인 상황은 맞는데, 거기서 꺼내오고 싶을 만큼 좋은 작품이라서요. 환경만 좋아지면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질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그 환경을 좀 조성해보고 싶은데.”

은근한 목소리로 낚싯대를 흔들었다.

“좋은 환경이요?”

“이를테면 실력 있는 프로듀서가 합류한다거나.”

기획피디를 잠깐 보다가 대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믿음직한 공동제작사를 찾는다거나.”

“공동제작이라.”

대표가 턱을 문질렀다. 아예 관심 없는 표정은 아니라, 더 자세히 말했다.

“영화사 숲이 중소 수입배급사로 시작한 회사라, 자체제작은 아직 준비가 미흡한 부분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투자사 조율도 잘 안되고. 그래서 공동제작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입니다.”

긍정적이라는 말은 완화한 표현이고, 영화사 숲의 대표는 공동제작을 고려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내 말을 동아줄처럼 붙들었다. 공동제작이 되면 영화가 성공했을 때의 이익도 분산될 테지만, 그는 코앞의 부담을 분산시키는 게 더 급급해 보였다.

잠자코 내 말을 듣던 대표가 팔짱을 끼고 머리를 까딱거렸다.

“시나리오를 다시 읽어봐야겠지만, 나도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확 땡기진 않았단 말이에요. 시나리오는 좋았던 것 같은데. 국내에선 느와르 장르가 힘을 못 써서 흥행도 재미는 못 볼 것 같고. 요즘 감동코미디가 주륜데 이건 전체적으로 너무 어둡기도 하고.”

“주류요? 제작비 수백억에 탑배우들 세팅해서 좀비영화 만드신 분이.”

내 말에 대표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입꼬리가 올라간 게 보인다. 다른 제작사들이 주류영화만 줄줄 뽑아내며 영화판을 획일화시킬 때, 뚝심 있게 비주류 장르를 밀어붙여 성공시켰다는 평을 그렇게 좋아한다더니.

어쨌든 나도 대표가 다양한 장르에 손대는 사람이라 SBE필름을 찾아왔다.

더불어 기획피디와 얼라이브 촬영 현장에서 함께 했던 제작피디, 그리고 영화 투자사들을 조율하는 투자지원팀도 모두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능력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기획피디가 은근히 물어왔다.

“근데 정 팀장님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작품이면, 주인공 배우도 팀장님이 나서서 세팅하시는 겁니까?”

“그래야죠. 안 그러면 이렇게 적극적일 이유가 없죠.”

“누군데요?”

두 사람이 귀를 활짝 열고 상체를 내 쪽으로 쭉 내밀었다.

“아직 논의 중입니다. 확정되면 제일 먼저 연락드릴게요. 약속해요.”

내 말에 기획피디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다른 제작사에 먼저 가셨어요?”

“SBE에 제일 먼저 왔어요. 여기서 까이면 웰메이드에 가볼까 하고······.”

“일단은.”

대표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나리오를 잡았다.

“시나리오부터 한번 보고 얘기합시다.”

“아, 그런데 지금 메가폰 두고 감독 둘이 옥신각신하는 중이라면서요? 이건 시나리오도 시나리오지만 장르 특성상 연출이 중요한데. 어떤 감성으로 연출하느냐에 따라서 ‘카리스마 쥑이네’랑 ‘똥폼 잡고 앉아있네’가 왔다 갔다 한단 말이에요.”

“그렇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기획피디가 다시 말했다.

“감독 둘 중에 누구한테 연출 맡길지는 정해졌어요?”

“네. 정해졌어요.”

백한성 대표의 제안을 거절한 건, 남이 깔아준 길을 고스란히 따라가지 않고 내 의지를 갖기 위해서다. 기회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이용하기 위해. 미래예지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내 의지로 미래예지를 이용하기 위해서.

나는 이 작품을 만들고 싶나?

만들고 싶다. 미래에서 성공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러고 싶어졌다.

그럼 이 작품을 어떻게 만들고 싶은가.

애초부터 미래예지를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모처럼 가슴 뛰는 고민이었다. 그리고 미래예지가 깔아준 길을 벗어나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 의지로 불확실한 곳으로 발을 내디뎠다. 길이 사라지고 눈앞이 깜깜해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길에서 벗어나니, 오히려 내 발밑에는 수없이 많은 길이 나타났다.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르는 길. 더 크게 성공할 수도 있는 길.

불확실한 가운데 어쨌든 하나는 확실하다.

걸어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훨씬 즐거워졌다는 것.

***

주재찬 감독과 엔트 캐피탈의 황 이사가 나란히 식당에 들어섰다.

도시정글의 감독도 확정되었으니, 함께 식사를 하면서 앞으로의 일정을 정하기 위한 자리였다. 더불어 W&U정선우 팀장과 주연 캐스팅에 대한 사안도 조율할 예정이었다.

“주 감독님, 정선우 팀장한테 아직 확답은 못 들었다고 하셨죠?”

“네. 관계자들 다 있을 때 얘기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 식당도 정선우 팀장이 예약했다는 것 같은데, 분위기로 봐서는 확정이라도 봐도 될 것 같은데요.”

황 이사의 말에 주재찬 감독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들을 안내한 직원이 미닫이문을 열었다. 안에는 이미 몇 명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인사를 하며 들어가던 두 사람이 멈칫했다. 긴장한 듯이 딱딱한 자세로 앉아있는 영화사 숲의 대표 옆에, 오현경 감독이 앉아있었다.

주재찬 감독의 입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오 감독님은 왜 또 오셨어요?”

“영화 얘기하러 왔지, 너, 그쪽 보러 왔겠어요?”

오현경 감독이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영화 애기를 왜······!”

주재찬 감독이 언성을 높이려다가 간신히 눌러 참았다. 그의 눈에 오현경 감독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들이 보였다. 정선우 팀장이 처음 보는 일행과 나란히 앉아있었다.

정선우 팀장이 어깨를 들썩였다.

“올 사람은 다 왔네요. 이제 영화 얘기할까요?”

< 한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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