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204화 (204/218)

< 한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2) >

“그게, 원래 각본이라는 게 수정하면서 완성도를 높이는 거니까요.”

“수정이 아니라 아이템만 가지고 새로 쓴 수준이던데.”

“그 아이템이 제일 중요하죠. 초고가 없었으면 수정고도 없었을 테니까.”

나는 턱을 괴고 주재찬 감독을 바라봤다. 당혹스럽고 불편한 상황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표정. 나를 향한 불쾌감도 엿보인다.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주재찬 감독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혹시 오늘 오현경 감독님이랑 얘기하셨어요? 오 감독님이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내부적으론 이미 정리가 끝났거든요. 그분은 아까 영화사에서도 깽판을 치고 가시더니. 투자사에서 오 감독님 대신 저한테 연출을 맡긴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거든요. ······팀장님도 뒤풀이 때 제 연출 좋았다고 하셨잖아요.”

서서히 그의 눈빛에 끈적끈적한 광기가 묻어났다.

“이건 제 손으로 연출해야 잘될 작품이에요. 정말입니다.”

안다.

저 손에서, 아주 크게 잘될 작품이지.

손을 가만 못 두고 깍지를 꼈다 풀었다 부산을 떠는 그에게 말했다.

“나중에 문제 안 생기겠어요?”

“네? 문제요?”

“오현경 감독님, 시나리오에 대한 애착이 상당하시던데. 제작 들어가고 나서 저작권 소송 걸리면 시끄럽잖아요. 기사에 배우들 이름도 오르락내리락할 거고.”

주재찬 감독이 눈을 껌뻑거렸다. 곧이어 그가 흥분한 얼굴로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이걸로 제작사랑 투자사에 소송 걸면 앞으론 영화 못 찍죠. 찝찝해서 누가 그런 감독이랑 일 하겠어요?”

그가 슬쩍 내 표정을 보더니 더 신나서 떠들었다.

“이게, 계약서상 시나리오 저작권이 영화사로 넘어가있는 상태거든요. 지금 제작비 예산 조율중이라서 영화사에서는 투자사 요구에 최대한 협조적으로 나올 거고요. 그러니까, 소송거리도 안 되는 거죠.”

“소송거리가 안 된다.”

“네. 오현경 감독님은 사실 그대로, 윤색작가로 크레딧에 올라갈 거니까요. 시나리오 하나에 각색, 윤색작가 몇 명씩 붙는 경우도 허다한데, 내 손 거쳤다고 다 내 작품이라고 우기면 안 되죠. 이 판이 원래 그런 건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이 판이 원래 그런 건데.”

그럭저럭 얘기가 끝났을 무렵, 직원이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정 팀장님. 손님이 또 오셨는데요. 분위기가 좀······.”

속삭이던 직원이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다. 반쯤 열린 문 뒤로 오현경 감독이 다가왔다. 십년은 더 늙은 듯한 얼굴이다. 눈에는 굵은 실핏줄이 얽혀있어서 흰자가 온통 시뻘개 보였다.

“또 들이닥쳐서 죄송합니다, 팀장님!”

고개를 푹 숙였다 올린 오현경 감독이, 주재찬 감독을 발견하고 벼락 맞은 것처럼 굳었다. 죽으러 온 것 같던 사람이 삽시간에 죽이러 온 사람으로 돌변했다.

“너, 이 쥐새······!”

“타이밍 딱 맞춰서 오셨네요. 마침 팀장님이랑 얘기 끝났는데.”

주재찬 감독이 태평스럽게 일어났다.

“그럼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팀장님.”

보란 듯이 웃으며 인사를 건넨 그가 오현경 감독을 스쳐지나갔다. 일분도 안 되는 시간동안, 오현경 감독의 안색은 시커멓게 죽었다가 탈색되기를 거듭했다. 그녀가 혼이 나간 것처럼 휘청거리며 앞자리에 앉았다.

“상황을, 어디까지 들으셨······.”

“메인 투자사에서 조윤이 형 캐스팅을 반대했고, 감독님도 교체될 판이라는 것 정도요. 제가 지금까지 경험한 제작환경 중에 제일 어수선하네요.”

오현경 감독이 머리를 푹 수그렸다.

“자신만만하게 제안해놓고 이 꼴을 만들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주인공 역할에 남조윤 씨가 제격이라고 생각한 건 진심이에요. 제가 투자사를 설득했어야 하는 문젠데, 갑자기 그, 상황이······.”

“주연캐스팅이야, 투자사 생각은 다를 수 있죠. 그쪽 발언권이 크니까. 상황은 이해합니다. 감독님은 앞으로 어쩔 생각이세요?”

내 말이 따갑기라도 한 것처럼, 오현경 감독이 움칫거렸다. 말라붙은 입술을 겨우 달싹이던 그녀가 돌연히 허겁지겁 일어났다. 그리고 애원하듯 쏟아 부었다.

“팀장님, 정말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거 아는데, 혹시 시나리오가 마음에 드셨으면, 여주인공 역에 이송하 씨나 손채영 씨 한번만 생각해봐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면 제가 투자사도 다시 설득하고, 팀장님 요구사항 있으시면 무조건, 무조건 수용해서······!”

젖은 목소리가 허물어졌다. 내 반응이 두려운 것처럼 시선을 피하던 오현경 감독이 고개를 들고 내 표정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음순간, 절망스러운 얼굴로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

나는 지금 사십대 후반이다. 관록이 넘치는 나이지.

영국 비밀요원 같은 클래식한 정장을 입고, 호텔 펜트하우스처럼 고급진 사무실에서 일하는, 글로벌한 매니지먼트 회사 대표다. 그렇게 자기세뇌를 했더니 백한성 대표와의 대치상황에서도 마음이 제법 평안했다.

“사표 들고 왔어?”

아이씨, 깜짝이야.

“사표요?”

“그런 얼굴인데. 아까부터 날 노려보고 있잖아.”

“제 얼굴이 원래 그런 얼굴입니다.”

“그건 아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반항적이라서.”

백한성 대표가 낮게 웃더니 다시 물었다.

“사표가 아니면, 전속계약 할 준비하러 왔나?”

“계약서도 써 주십니까?”

“원하면. 정 팀장을 연예인처럼 관리하겠다고 했잖아. 계약금도 줄까?”

“도시정글 영화는 제가 하고 싶습니다.”

따끈하게 풀리던 분위기에 내 손으로 얼음물을 끼얹었다.

“억지로 포기하려니까 내장이 뒤틀려서 안 되겠습니다.”

“정 팀장.”

“연예인도 신인딱지 떼면 작품 선택할 때 본인의사 내세울 수 있잖습니까. 연차로 따져도 인지도로 따져도 저는 신인 급은 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뭣보다 대표님은 연예인 당사자 의견 존중해 주시는 분이고요.”

립서비스로 마무리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싸늘하다. 얼어 죽겠다.

백한성 대표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알아듣게 얘기 안 했나? 다른 연예인들은 한번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지만, 정 팀장의 타이틀은 모래성이라 한번 실패하면 전략적 가치가 무너진다고. 난 내가 좋은 제안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사 결정대로만 움직이면 제 앞에 비단길을 깔아주시겠다는 거니까요. 그 길만 잘 따라가면 제 커리어는 알아서 탄탄해질 거고요. 좋은 기회죠.”

“잘 아네. 그런데?”

“제가 비슷한 경험을 해봤는데, 그렇게 깔린 길을 따라가기 시작하면 거기에만 목을 매게 되더라고요. 중독자처럼. 그러다가 길이 끊기면 미친놈같이 금단증상에 시달리고. 제 의지로는 한 발짝도, 걷기 어려워지고.”

다른 길로 빠지려는 생각을 끊고 백한성 대표를 바라봤다. 그도 나를 보고 있었다. 언제나 두르고 있던 여유도, 부드러운 웃음도 사라진, 고요한 무표정이었다.

나는 뇌를 쥐어짜서 내린 결론을 꺼냈다.

“그래서 앞으로는 기회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이용하려고요.”

“어떻게.”

“도시정글.”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영화라는 게 문제면.

“제 손으로 성공 가능성이 더 높은 영화로 만들어오겠습니다.”

전략적 가치. 모래성 같은 타이틀.

그런 거에 전전긍긍 목매지 않도록, 내 가치는 내 방식으로 만들 거다.

*

“선전포고네.”

“대표님한테 선전포고 해본 놈은 쟤밖에 없어. 앞으로도 없을 거야.”

“회사에 그렇게 오래 있었던 2팀장님도 억, 하는 순간에 갈려나갔는데 무슨 용기로. 재는 소시오패스, 뭐 그런 종류 같아. 정상적인 놈이면 2년 넘게 조직생활한 놈이 대표님 면전에다 대고 선전포고를 어떻게 하냐.”

들으라는 듯 책상 주변에서 떠드는 양반들에게 정정했다.

“선전포고까진 아니었는데요.”

“엿 먹어라, 난 내가 꼴리는 대로 일하겠다, 하고 나왔으면 선전포고지.”

“사표는 써놨지? 이러다 작별인사도 못하고 나갈 수도 있으니까 송별회는 미리 하는 게 좋지 않겠냐?”

3팀장과 김현조, 이봉준 실장과 성의민 실장이 꼬리를 물고 쑥덕거렸다. 내용은 농담인데 얼굴들은 걱정으로 썩어있다. 정말 내가 당장에라도 잘릴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너 혹시 회사생활에 매너리즘 왔냐? 그냥 막 비뚤어지고 싶어?”

“매너리즘은커녕 의욕 충만하거든요.”

“뭐?”

어처구니 없어하는 사람들 속에서, 김현조가 마른세수를 하며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쩌려고?”

내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굿프렌즈 촬영 중인 야외 머드풀장이었다. 메이킹필름 이후 굿프렌즈의 메인연출을 맡은 유수영피디와 인사를 나누고, 곧장 애들을 찾았다. 컴백기념 게스트출연중이라 네 명이 우르르 달려왔다.

진흙을 질질 흘리면서.

“오지 마.”

“왜요! 고생한다고 안아주진 못할망정, 우리 드럽다고 피하는 거예요? 오빠 그런 사람이에요?!”

“난 그런 사람이야. 오지 마.”

“싫은데요!”

네 명이 들러붙어서 내 살갗에 진흙을 처발랐다. 저 멀리서 이관우가 말리지도 못하고 손만 움찔거렸다. 녀석도 이미 붙잡혔다 풀려났는지, 반팔 티셔츠 밖으로 드러난 굵직한 팔뚝과 목덜미가 온통 흙칠갑이었다.

엘제이가 내 티셔츠 속에까지 진흙을 묻히며 입을 쭉 찢었다.

“온 김에 촬영 보고가요. 오늘 촬영 드럽고 재밌어요.”

“계속 드럽고 재밌게 잘 하고. 난 볼일 있어서 가야돼.”

“무슨 매니저가 컴백한 걸그룹보다 더 바빠!”

임서영이 툴툴거렸다. 그래도 둘은 떠들어댈 기운이라도 있지, 이태희는 체력고갈로 숨만 붙어있었다. 다른 애들이랑 잠깐 촬영얘기를 하다가 살짝 이송하를 불렀다. 머드풀장에 제일 많이 처박혔는지 꼴이 제일 가관이다.

이송하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저 지금 좀 똥덩어리 같은데. 샤워하고 올까요?”

“아냐. 전자레인지에 돌린 초코아이스크림 같고 좋아.”

“초코아이스크림이요?”

목소리가 좀 밝아진다. 이송하가 내 얼굴을 핥듯이 보더니 슬쩍 웃었다.

“오빠 얼굴이 환해진 것 같아요.”

“그래, 머드팩 고오맙다. 승합차 조수석에 네 시나리오 하나 갖다놨어.”

“시나리오요? 그거 주러 오셨어요?”

이송하의 눈이 번뜩였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들썩였다.

내가 티를 내면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든 말든 무조건 하겠다고 할까봐서.

“겸사겸사. 너희 지방스케줄 가기 전에 얼굴도 좀 보고, 시나리오는 새로 받은 건데 너 대기시간에 심심하면 보라고. 보고 마음에 들면 얘기해.”

누구 말마따나, 작품은 배우랑 매니저가 같이 선택하는 거니까.

촬영장을 나와서 다시 미니밴을 몰았다. 원룸빌라 근처의 작은 슈퍼마켓. 남조윤이 노란 장바구니에 햇반과 카레, 짜장, 미트볼 같은 레토르트 식품들을 집어넣고 있었다. 나를 보고 그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하루 이틀 봐요? 저 온다니까 냉장고 채우려고 장보는 거죠, 지금.”

남조윤이 대답 없이 웃었다. 그가 든 장바구니에 쌀과 과일을 수북하게 쌓고 계산대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시나리오 하나 더 가져왔어요.”

“영화?”

“네. 이것까지만 보고 이젠 차기작 선택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영양사한테 식단 짜달라고 할 테니까 내일부터 챙겨 드시고. 앞으로 또 낮밤 없이 일하려면 몸 관리해야죠.”

촬영 얘기가 나오자마자 남조윤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앞에서 계산하던 아주머니의 표정도 확 달라졌다.

“총각 취직했어? 어이구, 맨날 놀더니 잘됐네!”

원룸촌 공인백수인 남조윤과 헤어진 후엔 잠깐 오피스텔에 들렀다. 군데군데 말라붙어있는 진흙을 닦고, 옷차림도 신경 쓰고, 영업사원처럼 멀끔한 꼴을 하고서 이번엔 충무로로 나갔다.

빽빽한 빌딩숲 속에서 얼라이브 대형 현수막을 찾아 들어갔다.

SBE필름 기획피디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고개부터 저었다.

“없어요. 진짜로.”

“뭐가요?”

“좋은 시나리오 들어온 거 있나, 하고 오신 거 아니에요?”

“오늘은 아니에요.”

그제야 그가 반갑게 인사하고 앞장섰다.

“전 당연히 그 용건인 줄 알았죠. 이제 정 팀장님 연락이 카드연체 독촉전화보다 더 무서워. 좋은 작품 들어오면 제일먼저 팀장님한테 연락한다니까. 얼라이브 때 인연이 있는데. 약속해요, 약속.”

“그 약속은 제가 몇 번째예요?”

“아, 근데 요즘 좋은 시나리오가 씨가 말랐어요, 없어!”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회의실로 들어갔다. 직원이 금방 마실 것을 내왔다.

“그런데 시나리오 보러 오신 거 아니면, 어쩐 일로······?”

“오늘은 제가 보여드릴 게 있어서요.”

“정 팀장님이요? 저한테?”

기획피디에게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받아들더니, 봉투 안에서 도시정글의 시나리오를 꺼냈다. 제목과 시놉시스를 훑는 얼굴이 더 어리둥절해졌다.

“시나리오네요? 이거 예전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SBE에도 들어왔었어요?”

“다른 제작사에서 아예 아이템잡고 작가감독 세팅해서 만드는 거 아니면, 충무로에서 제작사 없이 돌아다니는 시나리오는 어지간하면 우리 회사 거쳐 가죠. 대부분은 각이 안 나와서 까지만. 이것도 아마 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별로였어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그랬으니까 깠겠죠.”

그가 들춰보던 시나리오를 덮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정 팀장님이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사를······ 혹시 W&U에서 영화 제작에도 관심 있어요? 이거 W&U에서 투자하려는 작품이에요?”

“아뇨, 제가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대단한 헛소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기획피디가 얼굴을 찌푸렸다.

< 한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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