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203화 (203/218)

< 한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1) >

“대표님! 지금 저랑 뭐하자는 거예요!”

“오 감독, 밖에서 이러지 말고 회의실 들어가서······!”

“개판이라고 소문날까봐 쪽팔리세요? 쪽팔릴 짓을 왜 하세요!”

“아냐, 그게 아니라 앉아서 좀 진정하고······!”

“진정하게 생겼어요? 이런 법이 어딨어요!”

제일 요란하게 날뛰는 건 오현경 감독이었다. 비명에 가까운 악다구니였다. 영화사 대표는 가운데 끼어서 창백한 얼굴로 진땀을 빼는 중이고. 어떻게든 불길을 진화하려는 모양이었지만, 주재찬 감독이 기름을 끼얹었다.

“이런 법이 왜 없어요? 오현경 감독님이 계약서 쓰고 영화사에 시나리오 저작권리 양도하신 거잖아요. 그럼 누구한테 메가폰 맡기느냐는 영화사 권한이죠. 아니에요?”

“내가 연출하기로 이미 얘기 끝난 일이야!”

“계약서엔 그런 조항은 없다던데요?”

“대표님! 저한테 맡기기로 약속하셨잖아요! 도시정글 제 작품이에요!”

“나는 당연히 오 감독이······!”

“따지고 들면 제 작품이죠! 제가 초고 쓴 오리지널 원작자니까! 오 감독님은 그거 가져다가 윤색작업만 하신 거고!”

“뭐? 이 쥐새끼 같은 게 보자보자하니까!”

말싸움은 금방 개싸움으로 변했다. 서로 억울해죽겠다고 난리였다.

나는 눌러쓴 모자챙을 더 내리고, 112를 누를까 말까 고민 중인 구경꾼 코스프레를 했다. 영화사 직원들은 아연한 얼굴로 개싸움을 쳐다보느라 문가에 서 있는 구경꾼까지 신경 쓸 정신도 없어보였다.

“오현경 감독님. 이건 그냥 비즈니스적인 문제예요.”

누군가 한숨을 쉬며 끼어들었다. 양복차림으로 빈 테이블에 걸터앉아있는 남자였다. 영향력이 큰 사람인지 그가 나서자마자 소음이 뚝 그쳤다. 눈길이 모조리 그에게로 쏠렸다.

“투자사 입장에서 볼 때. 어차피 이름 있는 감독님이 아니면, 오 감독님 보다는 영화제 수상자 출신인 신인감독님이 낫다는 게 중론이라서. 원작자시니까 그림도 좋고요. 입봉작으로 대박치고 괴물신인 나왔다고 들썩들썩했던 전례도 몇 번 있었으니까.”

“이사님!”

“작품 잘되는 게 중요하잖아요. 이번엔 메가폰 넘기시고, 오 감독님은 크레딧에 윤색작가로 올라가는 걸로 좋게 마무리하시면 어때요?”

양복쟁이의 말에 오현경 감독의 낯이 붉으락푸르락 요동쳤다. 영화사 대표가 양복쟁이에게 붙어서 뭐라고 말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양복쟁이를 설득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오현경 감독이 벼랑 끝에 몰린 얼굴로 말했다.

“지금 W&U정선우 팀장님한테 남주인공 캐스팅 오퍼 넣은 상태예요.”

“정선우 팀장? 그 사람이 시나리오에 관심 있답니까?”

내 이름이 갑자기 수면위로 끌려올라갔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주재찬 감독은 눈을 커다랗게 떴고, 영화사 대표는 난감해했다. 그리고 투자사 관계자로 보이는 양복쟁이는 고깃덩이를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어디까지 얘기된 상탭니까? 그쪽에서 긍정적이에요? 남주인공이면, 누구 얘기중인데요? 서지준? 임주원? 아니면 지금 난리 난 그, 송인호?”

“남조윤 씨요.”

“누구요?”

“얼라이브로 뜬 배우, 모르세요? 씬스틸러로 연기호평 받았던.”

프로필을 찾는 듯 핸드폰을 만지던 양복쟁이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환장하겠네. 독립영화 찍습니까? 무명감독에 조연급 중고신인을 주인공으로 앉히면, 이 영화에 뭐 믿고 수십억 투자합니까? 기대갈 게 있어야죠. 난 또 섭외력이 좋으신 건가 했더니만.”

신랄하게 비꼰 양복쟁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소문처럼 정선우 끼워서 홍보하면 배우는 그냥 아무나 갖다 박아놔도 영화 잘될 것 같으세요?”

“아무나가 아니라, 심사숙고해서 캐스팅 제안한 거예요. 출연한 독립영화 전부 봤는데 주인공 역할에 이미지도 적합하고, 연기도 잘하는······!”

“답답하시네. 그걸로 되면 다들 저기 대학로 연극배우들 데려다 쓰지, 왜 돈다발 뿌리면서 탑스타들 데려오려고 안달복달을 하겠어요. 됐어요. 대표님. 감독교체 제안서 처리 안 되면 저희는 투자 철회하고 빠집니다. 다른 투자사 알아보세요. 남조윤······ 나, 참.”

그때 주재찬 감독이 끼어들었다.

“정선우 팀장님, 제가 저번에 단편영화제 뒤풀이 때 만났는데요. 그때 제 작품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거든요. 명함도 받았고. 제 수상작 정말 좋았다고, 좋은 작품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달다고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그랬어요?”

주재찬 감독이 오현경 감독을 힐긋 보더니, 양복쟁이에게 호언했다.

“캐스팅 제가 다시 할게요.”

*

영화사 숲의 대표는 마른입술을 축이며 대표실 안을 기웃거렸다.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옷차림이 시커먼 게 수금하러 온 사채업자의 뒷모습 같았다.

몰려든 직원들이 대표의 등을 떠밀었다.

“들어가시죠, 대표님.”

“재촉하지 마. 내가 아직 정리가 안돼서 그러니까.”

“대표님이 정리하시는 동안 커피에 얼음 다 녹을 것 같은데요.”

대표가 아차한 얼굴로 양손에 든 머그컵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넘겼다.

“이미 녹았네. 다시 만들어와.”

“아직은 괜찮아 보이는데.”

“홍수구만, 뭐가 괜찮아. 다시 빨리, 아니, 천천히.”

직원을 보내고, 그가 가슴을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감독들이랑 투자사 돌려보내고 겨우 어깨 좀 펴나 했더니만······.”

“도시정글 때문에 왔겠죠?”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나? 작품 깐깐하게 고른다고 소문났던데.”

“다른 탑급 배우들이 아니라 남조윤이잖아요. 무명이었다가 이제 막 이름 알린 조연배우한테 주인공 역할을 제안했으니까, 구미가 당겼을 수도 있죠.”

“당장 계약하자고 온 거면 어떡하지?”

피디의 말에 직원들이 고요해졌다. 대표에게 시선이 모였지만, 그는 다리를 덜덜 떨며 손수건으로 진땀을 훔치느라 정신없었다. 신경쇄약으로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직원들이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거절해야지. 별수 있나?”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두고두고 관계 안 좋아지면?”

“당장 투자금 날아가게 생겼는데 어떡해요. 솔직히 다른 투자사들도 반응 비슷할 거예요. 우리도 처음엔 다 반대했잖아요. 오현경 감독님이 확신하시니까 설득에 넘어간 거지.”

“벌써 다른 배우 얘기중이라고 하면요?”

“그랬다가 들키면 그냥 욕먹을 거 개욕, 쌍욕먹지. 그냥 투자사를 쌍놈으로 만들죠? 그쪽에서 배우 마음에 안 든다고 투자 뺀다고 지랄이라고, 우리도 죽겠다고 읍소하는 게 낫지 않아요?”

찌그러져있던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걸로 가자. 이 피디, 네가 들어가서 얘기해라.”

“관록 있는 대표님이 얘기하시는 게 맞다고 봅니다.”

결국 대표가 새로 제조된 아이스커피 두 잔을 들고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에 잠긴 듯하던 손님, 정선우가 인기척을 느끼고 일어났다. 대표의 참새가슴이 다시 한 번 조여들었다. 관록은 저쪽이 더 있어보였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아! 네, 기다리셨죠. 얼음을 좀 급하게 구하느라고. 더우실까봐.”

정선우가 눈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받았다. 대표는 의자에 구겨지듯 앉으며 맞은편을 힐끔거렸다. 생각보다 젊어보였다. 프로필상 나이가 만으로 스물여덟이니, 실제로 젊긴 하다.

저 나이에 W&U같은 큰 회사의 팀장이라. 굵직굵직한 배우들까지 쥐고 있으니 어디 가서 굽실거릴 일도 별로 없겠지. 씁쓸한 입맛을 다신 대표가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어떻게 회사로 연락을······.”

“도시정글 시나리오 때문에요.”

“왜 감독한테 먼저 연락을 안 주시고······.”

“두 분 중에 어떤 감독님한테 연락해야 될지 헷갈려서요.”

대표가 흠칫 놀랐다.

“네?”

“지금 제작상황이 좀 어수선한 상태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 게 아니면 곧장 캐스팅 얘기로 들어······.”

“아뇨. 어수선합니다. 저희가 아직 캐스팅 확정할 상황이 아니긴 해요.”

타이밍을 잡은 대표가 열심히 둘러댔다. 정선우가 부드러운 추임새를 넣으며 경청했다. 젊은 나이에 성공길을 걸어서 오만한 구석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달리 예의가 반듯한 사람이었다. 대표의 긴장이 빠르게 풀렸다.

언제부턴가 그는 참새처럼 떠들고 있었다.

“그래서 저도 이게 참 미치겠다니까요. 의리 생각하면 당연히 오현경 감독이랑 해야죠. 오 감독이 이거 만들어보겠다고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 하면서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그래요?”

“시나리오 저작권 살 때도 대출받아서 넉넉히 준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초고 쓴 감독이 투자사에 가서 뭐라고 썰을 풀었는지, 갑자기 거기서 감독을 교체하자고 제안서를 보내가지고······ 날벼락이죠, 날벼락.”

“주재찬 감독이 투자사를 설득한 겁니까?”

“그 친구가 영화제에서 상 받고나서 시나리오 들고 제작사랑 투자사를 여러 군데 돌았는데, 그 시나리오로는 다 까였나 봐요. 우리랑 얘기중인 투자사에서도 거절당했는데, 거기서 도시정글 시나리오를 봤나 보더라고요. 계약상 저작권이 영화사에 넘어와 있는 걸 알고 본격적으로 끼어든 거죠.”

“그런데 그 투자사는 어딥니까?”

정선우가 가볍게 물었다.

“창투사 엔트 캐피탈이에요. 투자금 50억 얘기중인 곳인데 놓치면 당장 제작 엎어지고, 그렇다고 넙죽 감독 갈아치울 수도 없고. 한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영화 찍는 내내 투자사한테 휘둘릴 텐데······.”

한숨을 푹푹 내쉬던 대표가 흠칫 정신을 차리고 덧붙였다.

“이게 정리되기 전까지는 캐스팅도 올스톱입니다. 죄송하지만······.”

“대표님.”

생각에 잠겨있던 정선우가 그를 불렀다. 은근한 목소리였다.

“제가 제안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

“정 팀장님!”

시나리오의 후반부를 빠르게 넘기고 있을 때였다. 직원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감독님이 찾아오셨는데요. 또요.”

“감독님?”

“네, 약속되신 거냐고 물었더니 팀장님 시간 나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순간 오현경 감독이 다시 찾아왔나 싶었다. 부재중 전화가 몇 개 찍혔는데 회의 중이라는 매뉴얼 답신만 보내놓은 상황이라. 못 기다리고 지난번처럼 회사로 들이닥친 건가 했는데. 직원의 입에서 나온 건 다른 이름이었다.

“주재찬 감독님이라고 하시던데요.”

“좋은 작품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하셨죠.”

주재찬 감독이 말했다. 얼마 전에 오현경 감독이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표정도 비슷한 면이 있다. 특히나 열망으로 가득한 눈이.

볼 때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뒤풀이 때 봤던 얌전한 모습, 오현경 감독이랑 개싸움을 하던 모습이 전혀 딴사람 같더니. 지금 저 눈빛은 미래예지에서 봤던 그와 꽤나 흡사했다.

“제가 그랬죠.”

“이 시나리오, 다른 경로로 받으신 걸로 아는데요.”

그가 백팩에서 시나리오를 꺼냈다. 각본 감독란이 비어있는 것만 빼면.

익히 알고 있는 시나리오다.

“네, 봤습니다.”

“제가 학생일 때부터 오랫동안 붙들고 쓴 작품인데, 사정이 있어서 한동안 저작권이 다른데 넘어가 있었어요. 그래서 팀장님이 저한테 다른 작품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도 말씀을 못 드렸는데.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목소리가 흥분으로 달궈졌다.

“이 영화, 제가 연출하게 될 것 같습니다.”

“오현경 감독님이 아니라요?”

“그분은 하차하시고 크레딧에 각본윤색으로 올라갈 겁니다. 연출은 제가 맡을 거고요. 팀장님이 오 감독님이랑 한번 만나셨다고 들었는데, 캐스팅 건은 제가 다시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요.”

내 반응을 살피던 그가 눈동자를 굴리며 덧붙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이 시나리오를 세상물정 모르는 감독지망생일 때, 뺏기다시피 해서 팔았거든요. 값도 제대로 못 받고. 그래서 그동안 제가 쓴 시나리오를 제 거라고 말도 못하고 후회만 했는데.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주인 찾아오더라고요. 이건 제가 목숨 걸고······.”

들으면서 시나리오를 몇 장 넘겨봤다. 살펴볼 것도 없었다. 내가 읽은 것과 토씨하나까지 똑같은 내용이다.

“시나리오가, 수정고네요?”

“네?”

“주 감독님이 쓰신 초고가 아니라.”

주재찬 감독이 아, 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거의 비슷합니다.”

“아니던데. 제가 영화사에 부탁해서 받았거든요. 제목 없는 초고. 지금 보던 중이었는데.”

나는 읽다가 멈춘 시나리오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예 다른 작품이던데요.”

< 한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1)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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