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201화 (201/218)

<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7) >

누구 작품인가.

박 팀장이 던진 화두는 나의 하룻밤을 고스란히 집어삼켰다.

성공이 예정된 작품이니만큼, 여주인공 뿐 아니라 남은 하나의 주인공 자리도 내 배우한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다. 헌데 배역은 하나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배우는 여럿이다.

작품 하나로 배우의 앞날이 바뀌기도 하는 게 이 동네다.

성공할 작품과 가능성뿐인 작품을 각각 누구에게 내밀어야 할까. 담당하던 배우가 이송하와 남조윤뿐이었을 때는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번민거리였다. 선택지가 여럿이었다면 이런 고민할 필요가 없을 텐데.

그런데······ 원래 미래에서 도시정글을 촬영한 배우들은 누구였을까.

나는 야금야금 피어오른 생각을 어스름 속에 파묻었다.

일단은 우물가에서 숭늉 찾기보다 밥을 짓는 게 시급했다.

도시정글 시나리오의 소유권문제부터 정리해야지. 나는 앞으로의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내가 원하는 미래를 얻을 수 있는 길이 눈앞에 일직선으로 펼쳐졌다.

그리고 그 길에 발을 들여놓기 전.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이 마침내 뚜껑을 열었다.

*

“팀장님.”

이태희가 갈구하는 눈으로 3팀장을 바라봤다.

“안 된다.”

“긴장도 풀 겸, 한 잔만.”

“긴장 따위는 맥주로 풀어. 이건 아무 때나 깔만 한 술이 아니야.”

거실 소파에 앉은 3팀장이 유리병을 더 꽉 끌어안았다. 가느다란 원통형 유리병에는 제법 굵은 뿌리가 잠겨있다. 그동안 넵튠 애들이 뭔가 커다란 성과를 냈을 때마다 3팀장이 선물로 보냈던 삼삼주다.

“이놈은 진짜배기야. 내가 이놈을 캐서 술을 담갔을 때, 어마어마한 일이 아니고서는 까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단 말이야. 이건 너희들이 음원차트 줄세우기 하면 깐다.”

듣고 있던 애들 표정이 뜨뜻미지근해진다.

차트 줄세우기.

파급력 있는 가수가 컴백했을 때, 앨범에 있는 곡들이 음원차트의 순위를 휩쓰는 현상을 그렇게들 부른다. 팬덤이 큰 보이그룹이나 곡 좋기로 유명한 음원강자들은 1위부터 상위권을 통째로 줄 세우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한테는 언감생심 기대하긴 어려운 일이고.

내부에서는 차트 십위 권 안으로 세곡이 진입만 해도 대성공이라고 보고 있다. 이태희의 자작곡들은 A&R팀과의 기나긴 회의 끝에 트리플 타이틀로 제작됐다. 프로모션도 골고루 때렸고 뮤직비디오도 세 개를 다 찍었으니까, 나도 세 곡은 첫 페이지에 뜨지 않을까 내심 기대 중이다.

“줄세우기 못하면 도로 들고 가신다구요?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에요?”

임서영이 불한당을 보는 얼굴로 말했다. 곳곳에서 거들고 나선다.

“들고는 왔는데, 막상 우리한테 주려니까 아까운 거지.”

“형, 그거 산삼은 맞아? 도라지처럼 생겼는데.”

기대한 만큼 실망한다고, 다들 최대한 마음을 비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상태다. 목표는 중박이라나. 그러면서도 내 쪽을 힐끔힐끔 쳐다봐서, 나는 아까부터 웃는 얼굴을 유지하느라 입 끝에 경련이 날 지경이다.

내 표정이 안 좋으면 지레 겁먹는 사람들이 많아서.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하나 꺼냈다. 풀톱을 뜯으면서 거실을 둘러봤다. 이관우가 탁자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쉬지 않고 새로고침을 누르고, 넵튠 애들과 3팀장, 김현조가 억지로 긴장을 풀면서 그쪽을 주시한다.

그리고 이송하는 그 와중에 대본과 시나리오를 움켜쥐고 있다.

“뭐해?”

“차기작 고민하는 중이에요.”

“지금 그게 눈에 들어와?”

이송하가 비장하게 끄덕거린다. 작품이 아니라 살생부를 보는 눈이다.

“제가 좋은 작품 찾아낼 테니까 기다려보세요.”

“음. 좋긴 한데. 앨범 떴다.”

내 말에 이송하가 허둥지둥 일어났다. 곧바로 거실에 귀청을 두드리는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 노트북 화면을 손가락질하며 소리 질렀다. 누군가 핸드폰을 흔들며 소리 질렀다. 액션과 리액션이 모두 비명이었다.

나도 그 속에서 맥주캔을 흔들었다. 그리고 비로소 진심으로 웃었다.

3팀장이 거침없이 산삼주를 개봉했다.

음원차트의 1위부터 3위까지가, 모두 넵튠의 신곡이었다.

*

“자리가 불편해?”

“그럴리가요. 굉장히 편안합니다.”

롤스로이스에 타고 있는데 불편할 리가 있나.

“자꾸 한숨을 쉬길래.”

“한숨이 아니라 감탄삽니다. 차가 좋아서요.”

사실 몸은 편한데 마음이 불편하다.

손채영한테 들었던 찜찜한 이야기와, 얼마 전 2팀장의 문제들이 머릿속에서 잔뜩 엉겨 붙어있다. 이송하가 백한성 대표와는 아무 문제없다고 해명했고, 또 백한성 대표가 나한테 2팀장의 문제를 다시 언급한 적이 없는데도.

이 사람과의 맞대면이 좀 거북하다.

“새로 한 대 뽑아줄까?”

“예?”

“차.”

백한성 대표가 가볍게 말했다. 떡 하나 주는 것처럼, 가볍게.

목구멍에서 기침이 쏟아졌다. 무진장 먹음직스러운 떡이지만, 얻어먹으면 소화하는데 애먹을 것 같아서 싫다. 대출을 과하게 땡기는 느낌이랄까.

지금 타고 있는 미니밴도 충분히 사랑스럽고, 앞으로도 사랑스러울 거라고 빙 둘러 거절하는 동안, 롤스로이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예약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한식당 직원을 따라 아치형 돌다리를 건넜다. 연못에는 팔뚝만한 비단잉어들이 한가롭게 헤엄치고, 그 위로 버드나무가 그림처럼 늘어져있다. 정원 너머로는 한옥 기와지붕이 보인다.

식당이 아니라 대궐이라도 불러도 좋을 만큼 거창하다. 그동안 일적으로 미팅하느라 내 돈 주고는 안갈 호텔 식당도 많이 다녔는데, 맛은 몰라도 그림은 여기가 가장 좋다. 식당으로만 쓰기엔 아깝다.

“무슨 생각하길래 그런 표정이야?”

“사극 찍을 때 장소협찬해도 되겠다는 생각이요.”

백한성 대표가 낮게 웃었다.

“앞으론 올 일이 많을 거야. 이쪽 단골이 꽤 많은 식당이거든.”

그가 턱짓하며 말했다. 앞쪽에서 다른 손님들이 나오고 있었다.

중장년층의 남자들. 대부분이 낯이 익은 얼굴들이다.

“저 중에 아는 얼굴 있어?”

“대부분은 압니다.”

인터뷰 기사로 여러 번 봤으니까.

영화 제작 배급사인 월드B 픽쳐스 코리아 대표. 대형 엔터테인먼트 소나무 본부장. 그밖에도 크고 작은 매니지먼트 회사의 대표, 이사 같은 직함을 달고 있는 높으신 사람들.

저쪽에서도 백한성 대표를 알아봤는지 다가오는 걸음들이 빨라진다.

“잘못 봤는줄 알았네. 백 대표님도 복날이라 몸보신하러 오셨어요?”

“이미 드시고 나가는 중이신가 봅니다.”

“같이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거 타이밍이 안 맞았네요.”

규모의 차이는 있더라도 제각각 회사를 대표하는 임원들인데. 속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겉으론 대부분이 백한성 대표에게 살갑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개중 몇몇은 어려워하는 기색도 보이고.

그것만으로도 업계에서 백한성 대표의 영향력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던 백한성 대표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 이쪽은 우리 회사 정선우 팀장.”

내가 인사하자마자 흥미로운 시선이 쏟아졌다.

“알죠, 매니지먼트 업계에서 알아주는 유명인산데.”

“이 친구 때문에 요즘 W&U이미지가 그렇게 좋다면서요?”

“그, 그, 넵튠! 노래 좋다고 아주 난리들 났던데, 축하해요.”

몸보신 하면서 낮술들도 했는지 리액션이 좀 과장스럽다.

감사인사를 하면서 그들의 짓궂은 말에 장단을 맞췄다. 뭐든 하다보면 는다더니, 일하면서 처세술도 좀 늘었는지 이런 사람들과의 말상대도 예전보단 쉬워졌다.

“내 밑에도 이런 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직 생각 있으면 백한성 대표님 눈치 보지 말고 언제든지 연락해요. 우리 회사가 이제 크는 중이라, 지금 들어오면 초창기 임원이야. 직원복지도 아주 괜찮다니까?”

직원복지는 괜찮은지 몰라도 눈치는 별로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신생 매니지먼트사 대표의 말에 사람들 표정이 어색해졌다. 그들이 월드B픽쳐스 코리아 대표와 얘기 중이던 백한성 대표를 힐긋 봤다. 백한성 대표는 나와 눈을 맞추더니 가볍게 웃고 넘어갔다. 별것 아닌 농담을 들은 것처럼.

곧 사람들이 농담으로 분위기를 돌려놨다.

“사람을 보고 침을 발라야지!”

“백 대표님 사람한테 침이 발리기나 합니까? 더더군다나 이렇게 직접 데리고 다니시면서 보양식까지 챙겨 먹이는 후밴데?”

농담조이긴 한데, 어째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농담이다.

사람들과 안부 인사를 마치고 다시 갈라졌다. 등 뒤에서 신생 매니지먼트사 대표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그냥 농담 삼아 말도 못합니까?”

“분위기를 보고 해야지. 저기 이장엽 팀장 지금 꼴······.”

2팀장?

귀를 더 기울여봤지만, 소리는 금방 멀어졌다.

“넵튠 정규앨범, 성공시키느라 고생했어.”

삼계탕을 반쯤 해치웠을 즈음 백한성 대표가 말했다.

“저보다 애들이랑 3팀장님, 김현조 실장님이 고생했죠. 다른 직원들이랑.”

타이틀곡을 잘 뽑은 건 순전히 이태희 능력이고. 내가 자작곡들의 성공여부를 확신하지 못할 때 괜찮다고 앞장서서 밀어붙인 건 김현조와 3팀장이고. A&R프로듀서와 홍보팀을 비롯한 직원들이 뭉쳐서 완성한 앨범이니까.

“그런 멘트도 괜찮고.”

백한성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홍보팀이랑 얘기해서 정 팀장 개인 인터뷰를 잡았으면 하는데, 어때?”

“개인 인터뷰요?”

“회사 대표로 넵튠 정규앨범 얘기도 하고. 정 팀장 차기작에 대한 얘기도 하고. 실패 한번 없이 성공신화 쓰고 있는 정 팀장이 또 어떤 작품에 관심을 보이는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목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던데. 아예 본격적으로 캐고 다니는 기자들도 있고.”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여럿 봤다. 넵튠의 신곡보다 내가 정식 팀장으로서 처음으로 고르는 작품이 뭔지, 그 작품에 합류하는 배우가 누구인지를 더 궁금해 하는 기자들. 흥미본위로 다루던 미다스의 손에 대한 소문이 점점 과해지는 느낌이다.

“기자들이 이 작품, 저 작품 거론하면서 추측기사 내보내기 시작하면 지저분해질 텐데. 그 전에 인터뷰를 하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러려면 우선 차기작으로 내놓을 작품부터 결정해야겠지만.”

느긋한 목소리가, 묵직하게 등을 민다.

“진지하게 보고 있는 작품이 있습니다. 금방······.”

“도시정글?”

젓가락이 접시 위에서 미끄러졌다.

아직 보고하지 않은 내용인데. 내가 무의식중에 티를 냈나?

“이 바닥엔 비밀이 없다니까.”

백한성 대표가 어깨를 가볍게 들썩였다.

“그 작품은 내려놓고, 다른 걸로 골라보는 게 좋겠는데.”

“예?”

“시나리오 많이 봤잖아. 개중에 추려놓은 작품들도 있을 거고. 다른 실장들이랑 상의해서 다섯 개쯤 올려봐. 그거 가지고 다음 주에 회의하면 어느 정도 가닥은 잡히지 않겠어?”

잠깐.

“도시정글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은······.”

“말 그대로. 정 팀장 차기작으로는 안 맞는 것 같아서.”

그가 잘라 말했다. 그제야 백한성 대표가 예고 없이 쏟아 부은 말들이 정리됐다. 그래. 도시정글을 들이밀면 밥ㄴ대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한 바다. 우량주들 사이에 놓고 보면 초라해 보이는 작품이니까.

언제고 해야 할 설득이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찬물로 목을 축였다.

“눈에 띄는 작품은 아니지만, 시나리오가 좋습니다.”

“음. 봤어.”

봤다고?

“정 팀장이 신경 쓰는 작품이 궁금해서.”

“그럼······ 시나리오가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요즘 트렌드랑 안 맞긴 하지만 장르적 재미는 충분한 작품입니다. 당장이야 제작이 불투명해 보이지만, 배우 세팅되면 관심보이는 투자자들도 늘어날 테니까 제작비 부족으로 무산되는 일도 없을 거고요.”

내 유명세를 적절히 써먹으면 일이 더 잘 풀리겠지.

“제가 차기작 고민하면서 본 시나리오 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양이 수호령 처음 봤을 때도 이건 놓치면 안 되겠다고 느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도시정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설득하는 동안, 백한성 대표는 가만히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간간히 추임새처럼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한참 듣던 그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리오는 나쁘진 않았어. 정 팀장 말대로 요즘 트렌드는 아니지만, 국내 느와르 작품이 드물고 캐릭터도 매력적이니까 배우 스펙트럼 넓히기에도 좋고. 배우가 원하면 리스크 감수하고 찍어볼 만은 해.”

백한성 대표의 입에서 긍정적인 코멘트가 줄줄 나왔다. 당장에라도 승낙할 것 같은 반응이라, 뒤이은 말이 더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다른 작품으로 알아봐.”

목소리와 표정은 여전히 부드럽지만, 일말의 여지없이 단호하다.

뭐지?

설마 공황장애 소문 때문에 내 판단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기라도 했나? 아니면 백한성 대표가 따로 언급했던 초능력자를 까고 선택한 작품이라 심기가 불편한가?

혼란한 머리로 생각하는데, 백한성 대표가 달래듯이 말했다.

“도시정글은, 놓치기 아까우면 다른 팀 실장한테 넘기고.”

“······다른 팀이요? 왜 그래야 됩니까?”

도통 이해가 안 가는데.

내가 하는 건 안 되고, 다른 팀 실장은 된다고?

“수단방법 안 가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할 작품을 찾아야 하는 상황인데. 굳이 위험도가 높은 작품을 선택하진 말라는 거지.”

“그게 무슨······.”

그가 빙긋이 웃었다.

“정선우 팀장은, 실패하면 안 되니까.”

<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7)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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