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200화 (200/218)

<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6) >

“죄송합니다!”

오현경 감독이 선수 치듯 머리를 푹 수그렸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놀라셨죠? 실례인 거 아는데, 마음은 너무 급하고, 미리 연락드리면 이런 자리 만들어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요. 바쁘신 분들은 보통 그렇더라고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전화상으로 느꼈던 것보다 훨씬 경쾌한 인상이다.

동글동글한 귤색 단발머리. 주근깨가 보이는 뺨에, 미안한 웃음이 자근자근 밟히는 눈. 이렇게 연락 없이 갑자기 들이닥쳐도, 저 얼굴을 앞에 두고 면박을 줄 사람은 많지 않겠다 싶다.

의자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일단 앉으시죠. 그런데 제가 지금 일하던 중에 나와서.”

“바쁘시죠! 제가 십분 내로 용건 말씀드리고 갈게요. 제가 프레젠테이션은 도가 텄거든요. 반년동안 투자자 쫓아다니느라. 실은 어제 전화통화로 말씀드렸던 시나리오 때문에 왔는데요.”

오현경 감독이 시나리오를 살짝 들었다 놨다. 나는 반사적으로 쫓아가려는 시선을 겨우 정면으로 돌려놨다. 그리고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말했다.

“아, 어제 그거요. 도시······.”

“정글이요! 팀장님한테 꼭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메이저니 마이너니, 스타감독이니 무명감독이니, 그런 자질구레한 조건은 상관 안하시고 순수하게 작품만 보시는 분이시니까.”

“제가요?”

“고양이 수호령은 신생제작사에 입봉 작가였는데도 손잡으셨고.”

“TVL 편성 받은 작품이었고, 그때는 송하도 검증 안 된 신인이었죠.”

오히려 공중파 원톱주연급이었던 데다가 굵직한 작품에 러브콜도 많이 받았으면서도 고양이 수호령을 선택한 서지준이야말로 순수하게 작품만 본 사람이지. 나와는 달리, 서지준은 그 작품이 성공할 거라는 확신도 없었는데.

“아, 그랬나? 그런데 그 뒤에 작품들도.”

“로열패밀리랑 얼라이브는 망하면 큰일 나는 작품들이었죠. 그래서 실패할까봐 겁나서 안전한 우량주들만 고른다고 욕도 많이 먹었었는데.”

오현경 감독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잘 봐주셨으면 해서 밑밥 좀 깔아봤어요. 사실 감독들이야 다들 똑같은 말 하겠지만, 저는 정말 이 영화 성공할거라고 확신하거든요.”

나도 그럴 거라고 확신한다.

그러니까, 주인이 바뀌면.

다시 시선이 시나리오로 향했다.

영화의 성공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시나리오다. 그럼 한 감독의 손에서 성공한 시나리오가 다른 감독, 지금껏 흥행작이 한 편도 없는 가독의 손에 들어가서 성공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당연히 백프로는 아니겠지.

“제가 못미더우실 거 알아요. 감독으로서 매력 있는 카드는 아니죠. 솔직히 말하면, 투자자들한테도 그런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제가 연출에서 손 떼고 다른 감독 앉히는 조건이면 투자 생각해보겠다고.”

응?

“요즘은 한번 실패하면 끝이잖아요. 세 번이나 말아먹은 감독은 투자받기 정말 힘들더라고요.”

“감독 교체도,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뇨. 전혀요. 제 작품이니까요.”

오현경 감독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두 눈이 열망으로 반짝인다.

“제 인생에 마지막 영화라고 생각하고 만드는 작품이에요. 1년 동안 칼 갈면서 시나리오 수정했고, 투자자들 만나면서 끈질기게 설득하고 매달렸어요. 지금은 긍정적으로 얘기중인 투자사들도 있고요.”

말하면서 오현경 감독이 뿌듯하게 웃었다.

그냥 누구한테 들어온 시나리온가 궁금해서요.

주재찬 감독이 오현경 감독한테서 다시 저작권을 사오는, 그런 평화적인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통화 때의 반응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쉽게 작품을 포기할 사람처럼은 안 보인다.

미래에서 주재찬 감독이 그랬지.

‘그 시나리오 손에 넣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라고.

강압적인 방식을 썼나?

과거에는 감독이 절대적인 권력자였지만 요즘은 다르다. 제작사랑 의견일치가 안 되서 쫓겨나듯 하차하는 경우도 있고, 투자자 입맛에 안 맞아서 교체되기도 하고. 배우한테 까이는 경우도 있다. 드물지도 않은 일들이다.

감독 교체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말하지만······ 글쎄. 이름 있는 중견감독도 별의별 이유로 갈려나가는데, 이름 없는 감독이 자본을 쥔 사람들의 압력을 얼마나 버텨낼까.

문득 입안이 말랐다. 한 가지가 거슬린다.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 미래가, 주재찬 감독이 연출한 도시정글이 성공한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그걸 놓쳤다는 걸 알려주는 거라면. 내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뭘까. 오현경 감독 때문일까.

“이제 시동 걸었고, 달릴 일만 남았어요. 그래서 같이 달릴 주연캐스팅 진행 중인데요. 이송하 씨······.”

내 반응을 살핀 오현경 감독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바쁘신 거 알죠. 그럼요. 서지준 씨랑 임주원 씨도 바쁘시고. 다 알죠. 사실 애초에 그분들 말고 다른 분 생각하고 왔어요. 제가 생각하던 이미지에, 그 분이 딱 어울릴 것 같거든요.”

오현경 감독이 시나리오를 내 쪽으로 밀며 말했다.

“남조윤 씨한테 제안 드리고 싶어요. 남자주인공 역으로.”

남조윤?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세요. 후회하지 않게 해드릴 자신, 있습니다.”

오현경 감독이 돌아가고, 내 손엔 시나리오가 남았다.

나는 회의실 안에서 어수선한 머릿속을 대강 정리하고 일어났다. 시나리오가 담긴 서류 봉투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등 뒤로 기척이 따라붙었다. 오징어다리처럼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윤 실장이었다.

그가 시나리오 봉투를 곁눈질하며 웃었다.

“얘기 꽤 오래하던데. 설마 그 작품에 관심있으세요?”

“왜요. 윤 실장님이야말로 관심 있어요?”

“아뇨?”

윤 실장이 과장스럽게 부정했다.

“그냥 궁금해서요. 팀장님이 이 시나리오, 저 시나리오 닥치는 대로 보시는 건 아는데. 이제는 제작도 불투명한 영화에까지 시간 투자할 여유가.”

헛기침을 한 그가 다시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

“······투자할 필요가 없지 않나 싶어서요. 팀장님이 부담감 때문에 시나리오 고르는 척 하면서 시간 끄는 거라고 쑥덕거리더라고요. 근데 그 시나리오는 누구한테 들어온 시나리오에요? 이송하 씨? 설마 지준이는 아니죠?”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

“저한테요? 뭐, 궁금한 거 있으시면 물어보세요.”

“일 안하세요?”

윤 실장이 우뚝 멈췄다. 그가 눈을 깜박거렸다.

“이, 일 하는데요? 저 오후에 강민식 감독님 작품, 오디션 미팅도 있고.”

“저한테 관심 가질 시간에 그 오디션 준비나 하셨으면 좋겠는데.”

윤 실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더 이상은 따라오는 발소리가 없었다.

미니밴에 올라탔다. 차를 끌고 오피스텔로 향하는 중에 몇 번이나 눈길이 조수석으로 돌아갔다. 지난 며칠간 수없이 생각했던, 도시정글의 시나리오. 손가락 끝이 핸들을 두드린다. 오늘따라 차가 밀리는 기분이다.

오피스텔로 돌아가서 차근차근 읽어볼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나는 근처 주차장에 차를 대는 중이었다.

숨을 내쉬고 봉투를 들었다. 시나리오를 꺼내는데, 그 사이에 알록달록한 프린트물이 끼어있다. 캐스팅제안서였다.

남조윤의 흑백 화보사진과 함께 오현경 감독이 왜 주인공 역할로 남조윤을 원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구구절절하고, 간절하고, 낯간지러운 문장으로 쓰여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제안서를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시나리오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

눈앞에서 뭔가가 흔들린다. 가늘고, 구불구불하고, 하얗게 젖은.

크림 파스타.

“안 먹고 뭐해?”

홍보팀 박 팀장이 파스타가 돌돌 말린 포크를 흔들며 말했다.

“아, 잠깐 딴 생각이 나서요.”

“눈이 흐리멍덩한데. 아직 몸 안 좋은 거 아냐? 본부장님이 급한 일 토스하고 좀 쉬어도 된다고 했다면서. 왜 어제 쓰러져서 입원했던 사람이 하루 만에 출근을 하고 그래?”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요.”

“초심을 잃었어, 초심을.”

“네?”

“자기 로드였을 때. 허구한 날 회사 수면실에서 쪽잠 잘 때 그랬잖아, 나중에 실장 되고 팀장 되면 사람 사는 것처럼 살 거라고. 사생활도 챙기고, 휴식도 챙기고. 근데 어째 지금이 더 여유가 없는 것 같은데?”

그랬었지.

운전으로 시작해서 운전으로 끝나던 로드 때는 실장 달면 좀 편해질 줄 알았고, 실장 달고 나서는 팀장으로 올라가면 느긋하게 인생 즐기면서 살 줄 알았는데. 어째 점점 더 회사 지박령이 되가는 것 같다.

“그래도 일에 투자한 만큼 보상받았으니까. 출세, 유명세.”

박 팀장이 어깨를 들썩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권력.”

권력이라. 낯설게 들린다.

“일하다보면 금방 실감하게 될 걸. 유명세는 더 실감할 것도 없겠지만.”

“그건 이제 좀 피하고 싶네요. 병원신세 지고 온 것 때문에 일거수일투족 시선집중이라. 오전 내내 시달렸어요. 회사에 좀비가 돌아다녀도 저보다 시선을 덜 받을 것 같던데요.”

“그래서 회사가 아니라 밖에서 얘기하다고 한 거구나?”

박 팀장이 에코백을 뒤지더니 녹색 서류봉투를 꺼냈다.

“주재찬 감독. 얼마 전에 단편영화제에서 미장센 작품상 받았던데. 그때 만났어? 인상이 깊었나봐?”

“그랬죠.”

“조용히 좀 알아봤는데, 수상 후에 소소하게 러브콜은 좀 받은 것 같더라고. 영화가 아니라 주로 광고나 뮤직비디오 쪽으로. 근데 주재찬 감독은 본인 시나리오로 영화하고 싶은 모양이고.”

“그래요?”

“사극인데, ‘왕의 무사’라고. 그거 들고 제작사 찾아다니는 중이야. 메이저에서는 이미 다 까였고, 작은 회사 쪽으로 발품팔고 있는 것 같은데. 반응은 별로야. 거쳐간 제작사에 슬쩍 물어보니까 견적이 안 나온다네.”

박 팀장이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자기, 혹시 그 시나리오에 관심 있어?”

“그건 아니고요.”

그 작품도 기대하고 찬찬히 읽어보기는 했는데.

그다지 끌리는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그럼 다행이고. 자기가 그거에 꽂혔으면 다시 입원하라고 했을 거야.”

정말 안도했는지 박 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시나리오가 아니면 감독한테 관심 있는 거야? 작품상 받은 단편영화가 마음에 쏙 들기라도 했어? 다음에 넵튠이나 프리티걸 뮤직비디오 맡기게? 설마 입봉도 못한 감독한테 영화 연출 맡기고 싶은 건 아닐 거고.”

“그 설마랑 좀 비슷하긴 한데.”

“조사할수록 별로 같이 일하고 싶은 감독은 아니더······.”

박 팀장이 멈칫했다.

그리고 파스타가 목에 걸리기라도 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비슷하다고? 이 감독한테 영화 연출 맡기고 싶다는 거야? 아니, 잠깐.”

시선이 나를 샅샅이 더듬었다.

“어떤 작품인데? 자기 지금 뭐에 꽂혔구나? 어쩐지 최근에 자기 표정이 고양이 수호령 시나리오 끌어안고 다닐 때랑 비슷해 보일 때가 있더라고. 그렇게 뜸 들이면서 보는 사람 애 태우더니, 어떤 작품에 꽂힌 거야? 응?”

박 팀장이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캐물었다.

“정리되면 말씀드릴게요. 아직 시가상조라.”

“왜, 그쪽이랑 줄다리기 중이야? 배역 문제? 개런티?”

줄줄 묻던 박 팀장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다시 말했다.

“그럼 이거 하나만 묻자. 누구한테 들어온 작품인데?”

이번에는 내가 멈칫했다.

“송하? 남조윤 씨? 지준이? 임주원 씨? 아니면 송인호?”

박 팀장의 얼굴이 홱 다가왔다.

“그 중에 누구?”

<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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