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99화 (199/218)

<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5) >

시나리오는 하난데.

자기가 주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둘이라.

-아, 아닌가요?

오현경 감독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주 감독한테 전화 받고서 설마 했었는데요.

주 감독. 주재찬. 둘이 아는 사이란 말이지.

-도시정글이라는 제목이 아주 흔한 것도 아니고, 저도 몇 달 동안 고민해서 지은 거거든요. 그리고 팀장님이 느와르 얘기를 하셨다길래. 제 시나리오도 장르가 느와르고. 딱딱 맞아떨어지니까 혹시나 싶어서······.

그렇지.

조각은 딱딱 맞아떨어지는데, 완성그림이 영 희한하네.

-제가 착각하고 연락드린 거면 정말 죄송, 실례······!

“아닙니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지나친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도록.

“술자리에서 오갔던 대화라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시나리오 마이너 장르 얘길 하던 중에 말씀하신 작품 얘기가 잠깐 나왔습니다. 음, 오현경 감독님 작품인 줄은 몰랐는데.”

-네?

들썩거리던 숨소리가 확 경직됐다.

-······혹시 주재찬 감독 작품이라고 들으셨어요?

애지중지 품고 있던 알을 위협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예민한 반응이다.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오현경 감독이 황급히 말했다.

-그럼 속으신 거예요. 도시정글, 예전엔 몰라도 지금은 제 작품이에요.

지금은?

-제가 샀으니까.

*

손아귀에서 핸드폰을 굴리다가 툭 던졌다. 우르릉, 천둥소리가 들린다.

링거걸이를 질질 끌고 가서 창문을 열었다. 신선한 공기, 귀청을 두들기는 빗소리, 그리고 빗물이 들이닥친다. 시원하다. 세상을 떠내려 보낼 것처럼 빗물을 콸콸 쏟아 붓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시나리오를, 샀다.

주재찬 감독이 돈을 받고 그녀에게 시나리오를 팔았고, 저작권을 모조리 포기했다면. 두 사람의 거래는 법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다. 주재찬 감독이 시나리오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는 거고.

그런데 왜 미래에서는 다시 주인이 주재찬 감독으로 바뀌었을까.

주재찬 감독이 본인이 팔았던 작품을 다시 샀나?

그게 아니면······.

“뭐하세요? 위험하게.”

턱, 뒷덜미를 잡혔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어요.”

돌아보니 시커먼 마스크를 쓴 얼굴이 코앞에 있다. 서지준이다. 그가 내 뒷덜미를 쭉 끌어당기는 틈에 이봉준 실장이 창문을 닫았다. 이 양반들이 지금 무슨 어처구니없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거지.

“바람 쐬던 중이에요. 떨어지긴 왜 떨어집니까.”

내 말에 서지준이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충동적으로?”

“내가 미쳤어요?”

웃으며 물었는데 대답이 없다. 도리어 서지준의 눈빛이 습해진다.

임주원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떠들며 침대에 가 앉았다.

“굳이 올 필요 없었는데.”

“오랜만에 외출할 기회라 왔어요. 나도 바람 좀 쐬려고.”

변장용 마스크를 벗고, 서지준이 종이가방을 나한테 떠안긴다.

장미 꽃바구니. 놀랍지도 않다.

“저번 것보다 더 크네요. 더 빨갛고.”

“병문안이라 좀 더 신경 썼어요. 아, 요즘은 병문안 선물로 꽃은 잘 안한대요. 알레르기니 감염이니, 환자한테 위생상 별로라고.”

“알면서 이걸 왜.”

“걘 조화예요.”

아.

“비누 꽃이라니까, 한 송이씩 따서 거품목욕하시라고.”

“······잘 쓸게요.”

꽃바구니를 캐비닛 선반에 올려놨다. 이봉준 실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물 마시러 간 사람이 기절해서 실려나갔다길래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저보다는 덜 놀라셨을걸요.”

“그렇게 심적 고통이 심했으면, 미리 말을 좀 하지 그랬어.”

“그거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내가 다양한 정신병 증상을 앓고 있긴 하지만, 공황장애는 아니라고.

하지만 이봉준 실장도 서지준도 내 말을 믿는 표정은 아니었다. 회사에 퍼진 소문은 날 못마땅해 하는 작자들이 이때다 싶어 떠드는 헛소리, 딱 그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저한테 문제가 있어 보여요?”

“아니.”

이봉준 실장이 콧잔등을 문질렀다.

“넌 겉보기엔 멀쩡해. 내가 너였으면 공황장애에 식욕부진, 신경쇄약까지 같이 왔을 걸? 근데 2팀장님 쓸려나가고 상황이 정신없이 변하는데도 넌 엄청 태연해 보이더라고. 안 쓰러졌으면 아직도 그런 줄 알았을 거야.”

“이건 단순히 과로에 수면부족······.”

“단순한 게 아니지. 수면부족이든 과로든.”

말하면서 이봉준 실장이 내 팔뚝을 툭 쳤다.

“너도 모르는 사이에 부담이 쌓인 건지도 모르고.”

“팀장님.”

서지준이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내가 팀장님이랑 같이 일하겠다고 하긴 했지만, 팀장님이랑 일하면 하는 작품마다 성공할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에요. 내가 똑똑한 건 아닌데, 그렇게 비상식적인 놈도 아니거든요.”

“글쎄.”

이봉준 실장이 피식거렸다. 서지준이 덧붙였다.

“뭐, 봉준이 형 안목보단 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야”

“혹시 내가 팀장님한테 부담이 됐으면, 그럴 필요 없다고 하려고 왔어요.”

서지준이 다시 나를 돌아봤다.

“작품 한두 개 찍고 은퇴할 것도 아닌데, 잘될 때 있으면 안 될 때도 있는 거야 당연한 거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나면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는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

날카로운 눈매가 장난스럽게 휘어진다.

“내가 팀장님이랑 일하겠다고 한 건,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였으니까.”

단 하룻밤뿐인 입원이었는데, 병문안은 넘치도록 받았다.

서지준과 이봉준 실장이 돌아간 뒤에는 남조윤과 김현섭이 들렀고, 임주원까지 예능촬영 스케줄을 마치고 들이닥쳤다. 부산에서 막 올라온 프리티걸과 이태신 실장도 한밤중에 얼굴을 비추고 갔다.

빗소리가 잦아드는 새벽녘에, 나는 가만히 내 발밑을 되짚었다.

모든 일들이 숨고를 틈도 없이 벌어지긴 했지. 2팀장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됐고, 그가 회사에서 나가는 바람에 예상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큰 잡음 없이 여러 사람을 내 식구로 끌어안게 됐고.

여유가 없었나?

그랬던 것 같다. 팀장업무를 인계받느라 회의와 미팅은 더 늘어났고. 정리해야 할 스케줄도 많아졌고. 무엇보다 배우들의 차기작과 미래예지에 대한 생각에 몰두하느라 밤을 새운 것도 여러 번이고.

부담감.

서지준이 남기고 간 말이 떠오른다. 언젠가 김현조도 그랬지. 한번 실패하면 그 다음에 성공하면 된다고. 좀 말아먹어도 인생 안 끝난다고. 그 후로 성공에 대한 압박감이나 부담감 따위에서 좀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불완전한 미래예지가 눈에 밟힌다.

내가 선택한 작품이 망하는 미래를 보게 될까봐.

내가 거절한 작품이 성공하는 미래를 보게 될까봐.

이번처럼, 내 선택을 후회하게 될까봐.

*

“정 팀장님!”

“괜찮습니다.”

“몸은······!”

“괜찮고요.”

“팀장님, 손님 오셨는데요?”

“괜찮, 손님?”

직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오현경 감독님이라고 하시던데요.”

오현경 감독?

어제 대화는 잘 매듭지었는데. 왜 갑자기 회사로 찾아왔지?

눈살을 찌푸리자 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영화 시나리오 가져오셨길래 회의실로 안내해 드렸는데요. 어제 통화하셨다고 해서 작품 미팅 잡으신 건줄 알고. 약속 안 돼 있으신 거예요?”

“시나리오를 가져왔다고?”

“네. 팀장님 외부미팅 있다고 하고 돌려보낼까요? 아, 그런데 그 감독님이 정 팀장님 찾아왔다고 하니까, 박 실장님이랑 윤 실장님이 인사하겠다고 회의실로 들어갔는데.”

2팀장 밑에 있던 실장들이다. 공황장애 소문확산의 1등공신일 작자들. 인사하러 들어간 게 아니라 궁금해서 들어간 가겠지. 내가 관심보이는 시나리온가 싶어서.

곤란한데.

오현경 감독이 나를 찾아온 일도, 다른 실장들과 만나는 일도, 원래의 미래에는 없었던 일이겠지. 작품이 정해진 길을 착착 밟고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이미 톱니바퀴가 어긋난 채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예측하지 못하는 곳으로 바퀴가 굴러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마음을 정하고 직원에게 물었다.

“어디 회의실이야?”

회의실은 북적북적했다. 작은 유리창 너머로 박 실장과 윤 실장의 떨떠름한 얼굴이 보인다. 그들 사이에 이봉준 실장이 둥그스름한 몸을 끼워 넣고 웃고 있었다.

“어어, 오셨네.”

나를 발견한 이봉준 실장이 일어났다.

“그럼 우린 이만 나갑시다. 편하게 얘기들 나누시게.”

이봉준 실장의 재촉에 다른 실장들이 더욱 떨떠름한 얼굴로 엉덩이를 들었다. 박 실장의 시선이 잠깐 테이블 위에 놓인 시나리오에 닿았다가, 큰 미련 없이 돌아간다. 두 실장을 먼저 보낸 이봉준 실장이 내게 속삭였다.

“시나리오 영업하러 온 감독 같은데. 왜, 네가 관심보인 시나리오라고 하면 더 흥미롭게 보는 투자자들도 있으니까. 그런 효과 노리고 너 만나려고 하는 사람들 많잖아.”

“어떤 작품인지 보셨어요?”

“간단하게 들었어.”

그가 회의실 안쪽을 돌아보며 혀를 찼다.

“장르가 스타일리시한 액션 느와르야. 시나리오를 봐야 알겠지만, 말만 들어도 제작비 엄청 들어갈 것 같은데. 예전에 작품 몇 개 말아먹은 전적 있는 감독에 소규모 제작사라 그만큼 투자가 붙을까 모르겠네. 제작이나 될까 싶은데, 저건.”

이봉준 실장을 보내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부터 일어나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여자가 긴장된 웃음을 지었다. 두 손에는 어느새 시나리오를 꼭 쥐고 있다. 나는 잠시 그 겉표지에 시선을 빼앗겼다. 도시정글이라는 제목 아래, 반듯한 글자로 이름이 쓰여 있었다.

각본/감독 : 오현경

제작도 될 거고, 큰 성공도 거둘 거다.

주인이 바뀌면.

<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5)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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