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4) >
젠장. 답답해 죽겠네.
주재찬 감독 시나리오가 아니었나?
“주재찬 감독 시나리오가 아니었나?”
······어?
지금 ‘내가’ 말했나?
‘내가’ 생각한 말이, 미래의 내 입에서 튀어나갔다. 토씨하나 안 바뀌고 그대로. 우연인가? 그냥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나? 입안에서 바짝바짝 말라가는 침을 꿀꺽 넘겼다. 동시에 목 안에서 역한 술맛이 난다.
지금 실제로 침을 삼킨 것 같은데. 설마 이것도 우연인가?
다시, 한번 해볼까?
아.
목을 울리며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청각을 곤두세우면서.
하지만 목소리는 내 머릿속에서만 빙빙 맴돌았다. 재차 시도했다. 주재찬 감독에게 말을 걸어보고, 가나다라와 애국가 가사도 떠들어보고. 심지어 고함도 쳐봤다. 여전히 소리는 없었다.
없었지만, 그럼에도 지금가지와는 분명히 뭔가가 다르다.
살갗에 닿아오는 바람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생생했다. 심장박동이 점점 발라진다. 목젖까지 기어 올라온 소리가 넘어올락 말락,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하고 애간장을 태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해보면, 어쩌면······!
“개소리 하지 마요.”
부지불식중에 멱살이 붙들렸다. 그리고 홱 끌려갔다.
“내 시나리오야. 시발, 내 거라고.”
코앞에서, 주재찬 감독이 이글이글 끓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술 냄새가 훅 끼얹어졌다. 그는 굶주리고 조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보였다가도, 순식간에 포만감에 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두 눈이 기이한 광기에 휘감겼다.
“내 거. 내 시나리오······! 내 거라고, 이제.”
막혔던 목구멍으로 숨이 훅 들어왔다. 발작하듯 기침이 쏟아졌다.
“깜짝이야1”
“물, 물 좀 드세요, 여기!”
“어으씨, 놀라서 혓바닥 씹었잖아!”
이봉준 실장과 성의민 실장이 번갈아 떠들었다. 나는 성 실장이 내미는 냉수를 단숨에 들이켰다. 얼음까지 통째로 씹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혓바닥을 날름거리던 이봉준 실장이 나를 바라봤다.
“갑자기 뭐야? 눈 뜨고 꿈꿨어? 아니면 귀신이라도 봤······.”
돌연 그가 내 쪽으로 시나리오들을 내밀었다.
“야, 가 아니지. 정선우 팀장님. 어떤 작품이 잘될까요?”
“뭐하세요?”
“아니 그냥, 신들린 건 아닐까 싶어서.”
“내참.”
두 실장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뭉개졌다. 머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다. 나는 머그컵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넘어가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수군거리던 둘이 파드득 놀라서 나를 쳐다본다.
“사레들렸어요. 물 좀 마시고 올게요.”
“아······ 사레야?”
아쉬워하는 얼굴을 뒤로하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직원들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한달음에 정수기 앞까지 가서 연거푸 냉수를 마셨다. 정신이 좀 맑아진다. 빈 컵에 다시 물을 따르며 생각했다.
뭐였지. 방금 그거.
아주 잠깐이지만, 미래예지 속에서 현실감을 느꼈다.
그동안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미래예지를 겪을 때만큼은 늘 꼭두각시놀음이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속에서 나한테 허락된 거라고는 보고, 듣고, 느끼는 것뿐이었는데.
그런 방금 전에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만약에.
미래예지 속에서 내 의지대로 말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된다면.
그게 가능하다면 내 식구들, 내 연예인들이 성공만 밟고 올라가게 만들 수 있다. 작품, 곡, 방송 프로그램, 그밖에 뭐든. 어떤 것이 성공하고 실패할지 미래를 보면서 전부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어떤 연예인이 뜨고 추락할지.
그리고 누가 내 친구가 되고, 또 적이 될 사람인지도.
지금처럼 미래에서 조각조각 얻어들은 정보를 맞추느라 머리를 쥐어짤 필요도 없겠지. 한 걸음 한 걸음 건너갈 때마다 발밑을 걱정하면서 돌다리를 두들길 필요도 없을 거다.
미래가······ 고스란히 내 손아귀에 다 들어올 테니까.
다시 빈 컵에 물을 따랐다. 과부하가 걸린 머릿속을 찬물로 씻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뭔가 징조 같은 게 있었나?
그러고 보면 최근 며칠사이에 미래예지를 세 번이나 겪었다. 그중 두 번이나 주재찬 감독과 얼굴을 맞댔지. 미래예지가 나를 주재찬 감독과 도시정글이라는 작품에게로 인도한 것처럼.
둘을 붙잡아서, 다음 작품을 말아먹고 미다스의 손이라는 별명도 녹슬어버리는 내 미래를 바꿀 수 있도록.
그런데······ 어라. 잠깐만.
내가 본 세 가지의 미래 모두 노이즈가 깔린 접속불량 예지였는데.
왜 마지막에 미래가 안 바뀌었지?
이십년 후의 말끔한 미래는 내가 현재를 바꾸든 말든 고정돼 있지만, 접속불량 미래는 내가 현재를 바꾸면 거기에 맞춰서 바뀌었었는데. 프리티걸이 성공하는 미래를 본 후에 정재이가 자살하는 미래를 봤었던 것처럼.
주재찬 감독과 도시정글에 대한 미래를 보고나서, 분명 그걸 손에 넣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왜 여전히 도시정글을 놓치고 후회하는 미래가 보였을까. 왜 바뀌지 않았지?
내가 도시정글을 내팽개치고 다른 영화를 찍는다는 건가?
“······팀장님!”
귀가 확 뚫렸다. 옆을 돌아보니 이관우가 당황한 얼굴로 서 있었다. 김현조도, 3팀장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다. 다른 직원들이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너 왜 그래? 어디 다쳤냐?”
이관우와 김현조가 동시에 물었다.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멀쩡한데요.”
“멀쩡한 놈이 왜 컵은 깨먹고 멍하니 서 있어?”
“네?”
고개를 내렸다. 발밑이 물로 흥건하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내 손에 들려있던 머그컵이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져있었다. 저걸 언제 떨어뜨렸지?
“아, 잠깐 정신이 없었나 봐요. 바로 치울게요.”
빗자루나 휴지 같은 걸 찾으려고 움직였을 때.
바닥이 훅 꺼졌다. 그리고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며 뒤집혔다.
설마, 또?!
눈을 떴다.
소란스럽던 회사사람들은 온데간데없다. 눈앞에 보이는 건 창문이었다. 저녁시간인지 창밖이 어둑어둑하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번갯불이 먹구름에 뒤덮인 하늘을 쩍 갈랐다.
이건 어떤 미래지? 여긴 어디고?
젠장, 머리가 지끈거린다.
“음······.”
신음을 흘리면서 이마를 짚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이 움직인다.
“오빠!”
무심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다시 놀랐다. 머리도 움직인다.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손을 들고 눈앞에서 흔들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보기도 했다. 된다.
정신이 좀 몽롱하고 몸뚱이가 무겁긴 하지만, 틀림없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흥분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손이 움직이네.”
“오빠, 괜찮으세요? 왜 그러세요?”
“가나다라마바사. 동해물과 백두산······ 말하는 것도 되고.”
“오빠!”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이송하다. 당황과 걱정으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그 옆으로 임서영과 엘제이, 이태희도 보인다. 다들 표정을 괴상하게 일그러뜨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송하가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임서영의 눈에 눈물이 찰랑찰랑 고이는 모습이 선명······.
응?
잠깐, 왜 노이즈가 없지?
“오빠, 무섭게 왜 그래요! 저 보여요? 저 알죠? 이거 손가락 몇 개예요!”
울먹거리는 임서영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송하가 홱 뒤돌았다.
“간호사, 내가 간호사 불러올게!”
“잠깐. 잠깐만!”
상황을 멈춰놓고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며 파악했다. 나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었다. 오른팔에는 주삿바늘이 꽂혀있고, 그 옆으로 링거가 보인다. 가슴아래를 덮은 이불에는 병원의 마크가 박혀있다. 병실. 개인병실이었다.
침대를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여전히 눈앞은 노이즈 한 점 없이 깨끗하다.
뭐야, 이거. 미래예지가 아닌가?
건조한 입술을 핥고 물었다.
“오늘 며칠이야?”
임서영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다. 동시에 이송하가 간호사를 외치며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미간을 가득 찌푸린 엘제이가 대표로 대답했다. 그리고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회사에서 넘어졌다가 그대로 기절했어요. 기억 안 나요?”
“내가 뭐?”
기절?
되묻자마자 이송하가 간호사를 데리고 다시 뛰어 들어왔다. 그 뒤로 이관우와 김현조도 보인다. 간호사한테 몸을 맡기고 자초지종을 들었다. 회사에서 흥건한 물바닥을 밟고 넘어졌는데, 그대로 의식이 날아가서 병원으로 왔다고.
맙소사.
“너 한나절동안 잤어.”
눈 밑이 시커먼 김현조가 한숨을 쉬었다.
“의사랑 얘기해봤는데, 넘어질 때 머그컵 조각에 좀 긁힌 거 말고는 괜찮다더라. 그냥 기절한 김에 자는 것 같다길래 집에는 따로 연락 안 드렸어. 의사가 네 스케줄 듣더니만 수면부족이니, 과로니 하더라고.”
아무리 그래도 회사에서 기절이라니.
뭐 이런 어처구니없는······.
“아니에요.”
임서영이 끼어들었다. 나를 보는 눈이 축축하다.
“안 괜찮아요. 오빠 머리 다친 것 같아요.”
“머리?”
“넘어질 때 부딪친 거 아니야? 일어나자마자 헛소리 하던데?”
엘제이까지 거들자, 김현조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헛소리? 머리는 안 부딪쳤는데?”
“가나다라마사바. 동해물과 백두산.”
“뭐라고?”
“그랬다니까. 전신마취하고 깬 사람처럼. 다시 검사해야 되는 거 아니야?”
MRI 촬영이니 뭐니 얘기가 번지길래 얼른 손을 내저었다. 너무 생생한 꿈을 꿔서 깨어나고도 잠깐 정신이 없었다고. 헬렌 켈러처럼 앞 못 보고 말 못 하는 악몽을 꿨다고 둘러대고 나서야 격하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선우야, 너 말이다······.”
김현조가 말을 꺼내다말고 머뭇거렸다.
“아니다. 내일 얘기하자. 오늘밤은 일 생각하지 말고, 여기서 영양제나 맞으면서 좀 쉬어.”
그가 복잡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두드리더니, 넵튠 애들에게 눈짓했다.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가자.”
“조금만 더 있······.”
“쉬게 둬. 너희도 내일모래가 컴백인데, 지금 해야 할 일 산더미야.”
잠깐 저희들끼리 속닥거린 애들이 미적미적 움직인다. 뭔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남은 얼굴들이다. 임서영이 말문을 열었다.
“푹 쉬어요, 오빠. 저희는 걱정하실 거 하나도 없어요.”
“어?”
“메이킹필름 끝나고부터 우리 신곡 언제 나오냐고 손꼽으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오빠가 이렇게 판 짜놨는데 앨범이 망하, 아니, 잘못되기야 하겠어요? 다들 못해도 중박일 거라고 그래요!”
“망하면, 제 노래가 부족한 탓······.”
“하늘 탓이죠.”
엘제이가 이태희의 옆구리를 찌르며 정정했다. 임서영이 열심히 끄덕거린다.
“맞아! 그건 하늘을 원망해야 돼.”
그러더니만, 다들 비장한 얼굴로 인사를 남기고 홱 돌아선다.
다른 애들이 병실 밖으로 나가는 사이에 이송하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수심 가득한 얼굴이다. 그 위로 안타까움과 자책감 따위도 스쳐간다. 누가 보면 내가 죽을병 걸린 환자인 줄 알겠다.
“오빠. 제가 전에, 오빠가 골라주는 작품이면 뭐든 하겠다고 했잖아요.”
“······그랬었지.”
“그거 취소할게요.”
뭐?
“작품은 배우랑 매니저랑 같이 선택하는 거잖아요.”
이송하가 못 박듯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망해도 오빠 탓 아니에요.”
왜들 뜬금없는 말을 하나 했더니만.
-팀장님, 공황장애 생겼다는 거 진짜예요?
핸드폰 건너편에서 임주원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헛소리는 어디서 나온 헛소리예요?”
-팀장님이 갑자기 헉헉거리면서 정수기 앞으로 가더니 찬물을 연달아 여섯 잔인가, 일곱 잔인가 원샷하고, 손 떨다가 컵도 깨먹고, 사람들 모여드니까 피하다가 쓰러졌다면서요. 아니에요?
미치겠네.
-회사에 그렇게 소문난 것 같던데요. 팀장 달고 갑자기 딸린 식구가 많아지니까, 부담감이랑 불안감 때문에 공황장애 왔다고.
진짜 미치겠네.
병문안 오겠다는 걸 말려놓고, 멀쩡하다고 거듭 말한 후에야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살펴보니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가득하다. 회사 실장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남조윤과 서지준, 프리티걸, 송인호까지. 확인해보니 내가 정신없던 사이에 여럿이 병실에 다녀간 모양이었다.
부재중 기록에 손채영 이름까지 보인다. 공황장애라는 헛소리가 어디까지 퍼진 건지 모르겠네.
혀를 차며 남은 메시지들을 훑어보다가 멈칫했다. 모르는 연락처로부터 장문의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그 내용을 읽자마자 황급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신호가 울리기 무섭게 연결됐다. 긴장한 듯한 여자의 목소리다.
“오현경 감독님?”
-네. 오현경입니다. 혹시 정선우 팀장님······.
“맞습니다. 메시지보고 연락드렸는데요.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어서요.”
-그게,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는데······ 팀장님 입에서 제 시나리오 얘기가 나왔다고 들어서요.
“감독님 시나리오요?”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네. 도시정글이요.
<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4)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