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97화 (197/218)

<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3) >

‘왕의 무사’

눈을 깜빡여 봐도 시나리오 앞장에 큼직하게 박힌 글자는 그대로다.

마른 입술을 떼고 물었다.

“혹시 장르가.”

“사극입니다.”

“그렇죠. 왕이랑 무사가 나오니까.”

시나리오를 몇 장 더 넘겨보다가 덮었다. 느와르라는 장르도, 도시정글이라는 제목도 도저히 붙일 수가 없는 내용인데. 공통점이라곤 제목이 네 글자라는 것뿐이다.

부드러운 말투로 다시 부탁했다.

“단편 시나리오나 시놉도 있으시면,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어쩌면 단편을 장편으로 재구성했을지도 모르니까, 하는 기대는 무참히 꺾였다. 주재찬 감독의 백팩에서 나온 단편 시나리오, 시놉시스 조각까지 전부 살펴봤지만 내가 찾던 것은 꼬랑지도 안 보였다.

“장편 시나리오, 오래 준비하셨다고요?”

“네. 2년 넘게 작업했어요.”

2년.

그럼 5년 동안 작업했다는 그 시나리오는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이거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이 사극이 첫 장편 시나리오에요?”

“······네. 처음이에요.”

주재찬 감독이 의기소침한 얼굴로 말했다.

“보여드린 건 다 별로신가봐요.”

“아뇨, 그게 아니고.”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시길래요. 제 작품은 이게 전분데요.”

설마 시나리오 작가가 따로 있나?

그런 뉘앙스는 아니었는데. 분명 각본상도 받았다고 했고, 본인이 뿌듯하게 5년 동안 작업한 시나리오라고도 했고. 투자배급사 영화사업부장도 처음부터 끝까지 주재찬 감독만 치켜세웠는데.

뭘까.

주재찬 감독이 지금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왜? 도시정글 제작을 맡은 제작사만 알아도 상황파악이 좀 더 쉬워질 것 같은데. 영화는 어디서 만들었지?

문득 옆을 봤다. 얼큰하게 취한 제작자가 나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술을 몇 잔 나누고, 둘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두 분은 같이 작품 들어가시는 겁니까?”

“응? 아뇨, 아뇨, 아직 뭐, 확실한 건 아니고. 그냥 좋은 작품 있으면.”

제작자가 어물쩍 넘어가듯 둘러댔다. 그리고 주재찬 감독의 등을 두드린다.

“사극 그건 들이밀지 마, 어? 입봉감독한테 사극을 어떻게 맡겨? 제작비 많이 들고 투자받긴 어렵고. 캐스팅이라도 괜찮으면 배우 믿고 가겠는데, 입봉감독은 캐스팅도 힘든 거 알지?”

말하면서 제작자가 나를 힐끔거린다. 사극이어도 급 있는 배우가 관심을 보이면 물겠다는 눈치다. 나는 슬쩍 웃고 넘어갔다. 내 반응을 조금 더 살피던 제작자가 글렀다 싶었는지 술잔을 털고 일어났다.

“사극 말고 다른 거 써, 다른 거. 코미디 같은 거 좋잖아.”

그 말을 남기고 제작자가 박희승가 다른 감독들이 있는 테이블로 건너갔다.

나는 술잔을 기울이며 주재찬 감독을 바라봤다. 표정이 우울해서 그런지 인상도 희미해 보인다. 미래에서 봤던 주 감독은 이미지가 화려했었는데. 입봉작을 성공시키고 나서 사람이 확 변한건가?

아니면 지금도 얌전한 척하고 있는 것뿐인가?

뒷풀이 술자리가 무르익고 흥청거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나는 여러 사람들을 거치면서도 몇 번이나 주재찬 감독의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리고 주재찬 감독이 만취했을 무렵 몇 가지를 다시 확인했다.

정말 다른 작품이 없는지.

느와르 장르에 관심 없는지. 슬쩍 도시정글이라는 이름도 언급해봤다. 하지만 취해서 머리를 꾸벅거리면서도 주재찬 감독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 어쩐다.

고민하다가, 상황을 정리했다.

잠시 두고 보자. 주시만 하면서. 괜히 내가 섣불리 움직였다간 변수가 생길수도 있으니까. 미래에서 주재찬 감독이 나한테 가장 먼저 시나리오를 가져왔다고 했으니, 그 미래를 손에 넣으려면 변수 같은 건 없는 게 좋겠지.

주재찬 감독에게 내 명함을 건넸다.

좋은 작품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달라는 메시지와 함께.

*

두고 보자고 마음먹었지만, 주변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자기, 기사 확인했어?

“네. 지금 보고 있어요.”

[이송하, 차기작은 ‘초능력자’ 허가경과 호흡]

[영화 ‘초능력자’ 허가경, 이송하 등 캐스팅 확정]

-초능력자 쪽에서 흘린 모양인데. 정정기사 필요하지?

“네. 최대한 빨리 좀 내주세요.”

-보도자료 쓰고 있어. 사나리오 검토중인거야, 아니면 최종 고사야?

“최종 고사요. 어제 미팅하면서 정리했어요.”

적어도 나는 정리됐다고 생각했는데.

-저쪽은 정리가 안 된 모양인데. 아니면 이왕 놓치는 거 작품 홍보로 써먹을 생각이든가. 이렇게 기사 터지면 이쪽 귀찮아지는 거 알면서, 하여튼.

홍보팀 박 팀장과 전화를 끊고 박우정 기자에게도 따로 부탁했다. 그리고 모니터 화면을 새로고침하며 정정기사가 뜨기를 기다렸다.

미확정 상태에서 기사먼저 터뜨리는 거야 이 동네에선 흔해빠진 수법이지만, 이번엔 웃어넘길 여유가 없다. 혹시라도 이 기사 때문에 주재찬 감독이 시나리오를 다른 데로 가져가면 곤란하니까.

계속 새로고침을 누르고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초능력자 제작사측이었다.

“부장님.”

-아, 이송하 씨 캐스팅 확정 기사가 떴더라고요?

“그러게요. 떴더라고요.”

-우리 쪽에서 내보낸 건 아닌데, 혹시 오해 살까봐서요.

아니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도 아니고.

혀를 차며 다시 새로고침 했다. 제일 위에 뜬 헤드라인을 보자마자 굳어있던 입매가 허물어졌다.

[이송하측 ‘초능력자’ 출연확정 아냐, 최종 고사 (공식입장)]

-이거 참 난처하게 됐네.

“괜찮습니다. 정정기사 내보냈어요.”

-네?

핸드폰 건너편이 부산스러워진다. 나도 다시 새로고침을 눌렀다. 보도자료가 잘 돌고 있는지 그사이 비슷비슷한 헤드라인의 기사가 몇 개 더 올라왔다. 머지않아 한숨소리가 들렸다.

-공식입장이네요.

“기사까지 떴으니 확실하게 매듭짓는 게 양쪽에 좋을 것 같아서요. 초능력자 관련기사에 송하 이름이 자꾸 거론되면, 부장님께서도 다른 여배우 캐스팅하실 때 곤란하실 거고. 제의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다시······.”

-정선우 팀장님.

못마땅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차재호 감독님?”

-어, 난데요. 내가 지금껏 어린 여배우한테 이렇게 러브콜 보내고, 각본 수정까지 오케이 한 적이 없었는데.

아, 수정.

계약서에 도장만 찍고 나면 없던 얘기가 될게 뻔히 보이는, 그 한 장짜리 수정제안서. 자존심 세서 애드리브도 안 좋아한다는 감독이 시나리오 수정 애기를 꺼냈을 때부터 혹시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였던 그거.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차재호 감독이 잔뜩 비꼬인 목소리로 말했다.

-미다스의 손이 보기엔 내 작품이 정말 별로였나 봐. 이송하 씨 차기작 결정되면 꼭 좀 알려줘요. 내 작품 까고 뭐 얼마나 대단한 작품 들어갈지 궁금해서 그러니까.

“정선우!”

본부장이 내 책상위에 엉덩이를 올렸다. 둥글둥글한 이목구비 사이에서 유일하게 각진 눈썹이 꿈틀거린다. 2침장과의 그날 이후로 본부장은 나를 복덩이라고 부르던 것을 관뒀다. 대신 이렇게 골칫덩이 보듯 쳐다본다.

“차재호 감독한테 욕 안 먹어먹었어?”

“욕은 안 먹었는데······”

비아냥거림을 배터지게 받아먹었지.

“나중에 후회할거라던데요. 자기 작품 까고 어떤 작품 할지 기대하겠다고.”

“줄서서 기대하라 그래. 대표님도 기대 중이시거든.”

“대표님이요?”

“기사 뜬 거 보고 그러시던데. 네가 앞으로 어떤 작품들 들고 올지, 아주 기대된다고.”

“아.”

“나도 궁금하다, 네 머릿속에 뭐가 들어앉았는지.”

내 머릿속엔 도시정글이 들어앉아있지.

그 사니라오가 어디 꼭꼭 숨어있는지 궁금하고. 주재찬 감독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밥은 먹었는지, 내 생각은 하는지, 언제쯤 날 만나러 올는지도 궁금하고.

스토커 같은 생각을 하다가 문득 본부장의 얼굴을 봤다.

주재찬 감독과 도시정글 얘기를 하면 반응이 어떨까.

경력이라고는 조감독에 단편영화제에 입상했을 뿐인, 아직도 입봉도 못한 감독. 마이너장르인 느와르. 지금으로서는 제작자도 투자자도 불투명하고. 있는 그대로 털어놓으면 한 대 얻어맞지 않을까?

하지만 이 건에 한해서는 설득할 자신 있다.

이 작품이 성공한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고양이 수호령 때처럼.

설득할 자신은 있는데, 시나리오가 행방불명인 게 문제지.

“어쨌든 네 자리 네가 잘 챙겨라. 팀장실로 이사 가자마자 방 빼지 말고.”

본부장이 책상에서 풀쩍 내려왔다. 그리고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혀를 찬다.

“이송하뿐만이 아니라, 이제 너한테 작품 물어오라고 짹짹거리는 배우들이 한둘이 아닌데. 대표님은 네 기똥찬 안목 믿고 일단 맡겨본다곤 하시는데 말이야. 실장이 실패하는 거랑 팀장이 실패하는 건 규모가 다르다, 너.”

중얼거리던 본부장이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네가 삐끗하면 배우들도 같이 넘어지는 거 알지?”

*

회의실 탁자에 시나리오와 기획안 몇 부가 가지런히 놓였다.

이봉준 실장이 성의민 실장과 머리를 맞댔다.

“내가 보기엔 이 대본 괜찮은데. 지준이 그놈이 흥미가 없단 말이야.”

“지준이 말고 누구한테 대본 보냈대요? 주원이한테 한번 보여줄까 싶은데.”

“윤태경한테도 갔다는 것 같은데?”

나는 두툼한 종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각자가 고르고 고른, 추리고 추린 작품들이다. 나도 이송하 차기작을 궁리하면서 몇 번씩 살펴본 작품들이다. 시놉도 괜찮고 작가감독도 나쁘지 않은, 객관적 우량주들인데.

‘신중한 척 하면서 고르고 고르더니만, 결국 고른 작품은 국밥 말아먹고.’

미래예지에서 들었던 그 말이 뇌리에 들러붙었다. 내가 말아먹을 작품이 뭔지 제목이라도 들었으면 그것만 피해갔을 텐데. 이젠 저것들이 전부 다 국밥들로 보인다. 환장할 노릇이다.

좋은 작품. 좋은 작품.

무슨 수를 써서든 배우들한테 좋은 작품을 잡아주고 싶은데.

자연스럽게 생각이 도시정글로 이어졌다.

주재찬 감독이 정해놓은 배우만 없다면, 다른 배역에 이송하 외의 배우를 제안 해보면 어떨까. 일단 시나리오를 봐야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놈의 시나리오. 그걸 확인해야······.

다음순간 눈앞이 시커메졌다. 그 위로 노이즈가 뿌려진다.

또? 또 미래예진가?

한치 앞도 안보일 만큼 시야가 캄캄했다. 아, 눈을 감고 있다. 눈꺼풀 속에서 눈동자가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멀찍이서 떠들썩한 소음이 들리고, 콧속으로 텁텁한 담배냄새가 흘러들었다.

“후회해요?”

누군가 옆에서 물었다. 그제야 미래의 내가 눈을 떴다.

나는 시멘트바닥에 걸터앉아 있었다. 옆으로 비스듬하게 벽에 기대있는 다리가 보인다. 고개를 들어보니 주재찬 감독이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우울하고 소심해 보이는 주재찬 감독 말고. 화려한 정장을 입고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래의 주재찬 감독이.

아직도 뒷풀이 현장인가?

지난번엔 연달아 두 번이나 보이더니. 이거 희한한데.

“그때 입봉감독이라고 제 작품 깠던 거요. 이제 후회 하나 좀 궁금해서.”

주재찬 감독이 독촉하듯 다시 물어왔다. 취했는지 혓바닥이 반쯤 꼬였다.

일단 의문을 밀어놓고 귀를 기울였다.

“입봉 작품이라 깐 게 아니라, 다른 작품 때문에 스케줄이 안됐었습니다.”

“아, 그거요. 망한 작품.”

주재찬 감독이 짧아진 담배를 야외재떨이에 던지며 킬킬거렸다.

미래의 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후회는 합니다. 작품 재밌게 봤어요. 내용도 좋고, 캐릭터도 좋고. 여주인공은 송하가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제가 선택을 잘못했죠, 그때.”

내용 좋고, 배역 좋고. 다행이다. 초능력자처럼 존재감 약한 여주인공일까 봐 조금 걱정했는데.

“후회한다니까 통쾌하네.”

주재찬 감독이 다시 킬킬거렸다.

“이렇게 후회할 거, 이쪽에서 매달렸을 때 했으면 서로 좋았잖아요.”

“그러게요.”

“시나리오 좋다고 했잖아요, 제가.”

시나리오.

혹시라도 실마리가 되는 정보가 나올까 싶어서, 귀를 바짝 기울였다.

주재찬 감독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 시나리오 손에 넣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

손에 넣어?

<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3)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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