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96화 (196/218)

<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2) >

“······씨! 왼쪽 한번만 봐주세요!”

셔터소리가 귀를 두들겼다.

평소보다 노이즈가 심했지만, 지금 서있는 장소가 어딘지는 명확하다. 익숙한 단편영화제 포토월이 코앞에 있었으니까. 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사진기자들. 돌아다니는 영화 관계자들. 모두 좀 전에 겪었는데.

“정선우 팀장 아냐?”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고개가 돌아갔다. 알은척을 해온 사람은 낯이 익다. 대형 투자배급사의 영화사업부장. 삼십분쯤 전에, 정확히 이곳에서 인사를 나눴던 사람이다.

이게 뭐지?

내가 지금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보고 있는 건가?

혼란에 빠진 와중에도 내 몸은 깍듯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정 팀장이 여긴 웬일이야? 신인 체크하려고?”

“그것도 있고, 감독님들이랑 저희 배우들 차기작 얘기도 할 겸 해서요.”

“아······ 그래?”

과거는 아니구나.

똑같은 단편영화제 폐막식 현장. 똑같은 장소. 그런데 몇 년 후인거지?

“주 감독, 여기 정선우 팀장 누군지 알죠?”

“압니다. 감회가 새롭네요, 작년에 딱 이 자리에서 뵀었는데.”

부장 옆의 남자가 대답했다.

“저 단편작 출품하고 처음 입상했을 때요. 그때는 기죽어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었는데.”

세팅한 머리에 메이크업한 티가 나는 얼굴. 화려한 정장. 감독이라는 호칭을 못 들었으면 연예인인 줄 알았겠다 싶을 만큼 신경을 쏟아 부은 모습이다.

주 감독. 누구지?

의외로 기억을 헤집자마다 떠올랐다. 방금 전에 본 얼굴이었다. 제작자와 인사하던 중에 소개받은 무명 감독. 경쟁부문에 작품을 출품했다던. 겉모습만 보면 아예 딴사람이다.

작년에 날 봤다는 건, 이게 지금으로부터 1년 후의 미랜가?

“그런 일이 있었어요? 오늘은 마음껏 눈 마주치고 인사해요. 주 감독이 그때의 주 감독이 아닌데, 이제 기죽을 거 없잖아.”

부장이 열심히 젊은 감독을 치켜세운다.

“데뷔작, 그것도 느와르같은 비주류 작품으로 흥행대박치고 신인감독상에 각본상까지 받았지, 칸까지 갔다 왔지, 차기작이 기대되는 감독 1순위라고 여기저기서 난리구만.”

귀가 번쩍 뜨였다.

“이건 시나리오만 거의 5년을 작업한 거라서, 다음 작품이 문제죠.”

“안될 작품은 5년이 아니라 10년을 작업해도 안돼요. 주 감독이 목숨 걸고 만들었으니까 이런 작품이 나온 거지.”

어쩐지 예지가 시작하는 순간 가슴이 묘하게 뛰더라니. 갑갑하게 막혀있던 혈관이 뚫리고 신선한 피가 전신으로 콸콸 도는 기분이다.

칸에 초청받았다면 배우빨이나 배급사 물량공세로 얻은 성과가 아니라, 확실히 작품이 괜찮았다는 거지. 이 예지가 끝나면 제대로 다시 얘기해봐야겠다.

5년 동안 작업한 시나리오. 거기다가 현재를 기준으로 1년 후에 영화 개봉까지 마쳤다면, 늦어도 몇 달 안으로 촬영에 들어가야 하는 스케줄인 건데. 지금쯤 시나리오는 거의 완성단계겠지.

읽어보고 싶어서 몸서리가 쳐질 정도다.

어떤 작품일까. 제목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생각한 순간.

“주 감독! 도시정글 잘 봤어요. 입봉작치곤 너무 잘빠졌던데?”

넝쿨째로 굴러들어왔다. 제작사 관련자들이 다가와 요란스럽게 떠들어댄다.

이번엔 왜 이렇게 정보가 후하지?

미래예지가 아니라 개꿈을 꾸는 중인가 싶을 정도다.

그때 눈앞이 확 뒤집혔다. 개꿈은 아니구나. 미래예지에서 튕겨나가면서 안도하는 건 또 처음이다. 갑자기 뒤바뀐 시야에 적응하려고 눈을 깜빡이는데, 눈앞에 노이즈가 쫙 깔렸다.

또 뭐지?

장소가 바뀌었다. 불판위에서 고기가 익는 소리와 잔 부딪치는 소리가 떠들썩하다. 식당? 연회장? 어쨌든 현재는 아니다. 또 다른 미래였다. 의아해하는 중에도 내 다리는 움직이고 있었다. 술을 적잖이 마셨는지 몸이 비틀거린다.

문을 열자 후덥지근한 밤바람이 닿는다. 여름. 한발 내디뎠을 때였다.

“왜, 아까 인사할 때. 정 팀장 표정 봤어? 아주 똥 씹었던데.”

“왜 아니겠냐. 주 감독 얼굴만 봐도 속 엄청 쓰릴걸?”

발이 멈칫했다.

휘황한 간판 앞에서 벌건 얼굴 셋이 담배를 물고 있다. 현재에서도, 조금 전 미래에지에서도 봤던 제작사 관계자들이다. 옷차림은 조금 전과 똑같다. 여기, 단편영화제 뒤풀이 현장이구나.

상황파악을 하면서 귀를 활짝 열었다.

아무래도 저 양반들이 내 얘기중인 것 같아서.

“누구, 정선우 팀장이요? 그 사람이 왜요?”

“너 그 얘기 몰라? 주 감독 도시정글 시나리오, 정 팀장한테 제일 먼저 갔었다잖아. 이송하 여주인공으로 달라고 주 감독이 정 팀장 오피스텔까지 쫓아가서 부탁했다던데.”

“허, 그럼 속이 쓰린 게 아니라 뒤집어졌겠는데요. 그 작품 잡았으면 이송하 필모 삐끗하는 일도 없고, 정선우 팀장도 계속 잘나갔을 거 아니에요.”

이송하 필모가 삐끗해? 나도 계속 잘나갔을 거라고?

“그러니까. 엄청 신중한척 하면서 고르고 고르더니만, 결국 고른 작품은 국밥 말아먹고, 신인감독 입봉작이라고 깠던 작품은 대박 나고. 미다스의 손이니 뭐니 말만 요란했지 뭐.”

“미다스의 손. 그거 오랜만에 듣네.”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귓속을 갉는다. 정작 나는 술은 입에도 안 댔는데, 뱃속이 뜨겁다. 말아먹어? 신중하게 고르고 고른 작품을 말아먹었다고? 내가 결국 어떤 작품을 선택했길래?

잠깐, 잠깐.

일단 지금은 한마디도 놓치지 말고 다 귀담아 들은 다음에······.

“그리고 정 팀장, 미끄러졌다는 말도 있던데?”

“어?”

“W&U에서 팀장급 인사 채용하면서 밀려났다는 얘기도 있고, 백한성 대표한테 밉보여서 도로 실장으로 주저앉았다는 얘기도 있고. 하여튼 지금 처지가 썩 좋진 않다더라고.”

“정선우 팀장, 거기 백 대표가 팀장까지 끌어다 올린 거 아니었어?”

“올려놓고 보니까 그 자리에 있을만한 그릇이 아니었나보지, 뭐.”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다리가 성큼성큼 움직였다.

“천년만년 잘나갈 것처럼 재수 없게 굴더니만, 꼴 되게 재밌게 됐······.”

“나한테 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직접 물어보시죠. 헛소리 떠들지 말고.”

내 입에서 빈정거리는 말이 튀어나갔다. 담배연기를 뱉던 남자가 요란하게 기침했다. 잠깐 표정에 당황이 서리는 듯하더니, 금방 지워진다. 그가 비아냥대는 어조로 말했다.

“아니, 없는데서 말 나온 건 미안한데요. 헛소리 떠드는 건 아닌데? 누가 들으면 내가 없는 말 지어내는 줄 알겠네. 이거 W&U내부 사람한테서 들은 얘기예요.”

“내부, 누구?”

“그건 말하기 그렇고. 어쨌든 내부에선 소문 쫙 났다던데요?”

남자가 어깨를 들썩였다.

“정선우 팀장, 끈 떨어진 연이라고.”

요란한 박수소리가 들렸다. 뻑뻑한 눈을 깜빡였다. 더 이상 노이즈는 없다.

스크린 앞 무대에서 누군가 상패와 꽃다발을 흔들고 있었다.

“저 친구 작품 봤는데, 잘 찍더라고요.”

옆자리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경황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에 날더러 끈 떨어진 연이라고 불렀던 그 작자가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불쑥 다가오는 얼굴을 떠밀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정 팀장님, 혹시 신인감독 작품에도 관심 있으세요?”

그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지껄였다.

“왜, 데뷔작으로 대박치는 경우 있잖아요. 오랫동안 입봉 기회만 노리다가 데뷔작 진짜 목숨 걸고 만드는 친구들. 우리 외사에서 그런 신인감독 찾는 중인데, 혹시 정 팀장님도 관심 있으시면······.”

“글쎄요.”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저 작자 입에서 쏟아졌던 말들이 자꾸 떠올라서, 계속 얼굴 맞대고 있다간 손이 나갈 것 같다. 시상대에서는 낯선 남자가 감격한 얼굴로 수상소감을 읊는 중이었다.

귀담아 듣는 척 하면서 차근차근 머릿속으로 정보를 끼워 맞췄다.

꽤 많은 정보를 얻었다.

나는 앞으로 내가 고른 작품을 국밥처럼 말아먹게 될 거라는 것도 알고, 빛나던 이송하의 필모그래피가 삐끗했다는 것도 안다. 미다스의 손이라는 별명이 빛바랬다는 것도. 어쩌면 이송하 외의 다른 일들도 잘 안 풀렸는지도 모르지.

정확하진 않지만 W&U안에서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돈다는 것도 알고.

이것들이 앞으로 1년 안에 일어날 일이란 말이지.

미래 꼬락서니 한번 환상적이구만.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임서영이 옆구리를 찔렀다.

“오빠, 이송하 순서예요.”

고개를 들자 이송하가 다른 수상자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있었다. 곧이어 박수가 터진다. 나는 기계적으로 박수를 치다가 우뚝 멈췄다. 그리고 수상자를 샅샅이 훑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꽃다발을 끌어안은 젊은 남자.

“주재찬 감독님, 수상소감 듣겠습니다.”

주재찬. 주 감독.

그래. 안 좋은 정보에 난타당하기 전에, 좋은 정보도 얻었었지.

내가 앞으로 어떤 작품을 선택해서 말아먹든 비벼먹든,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바꾸면 된다. 마약스캔들로 망칠 뻔한 로열패밀리를 살려냈었던 것처럼. 필요한 정보는 다 알고 있으니까.

넝쿨째 굴러온 호박을 내손에 넣기만 하면 된다.

폐막식 이후에 수상작들을 모두 감상하고, 뒤풀이 자리에 참석했다. 장소는 미래에서 봤던 곳과는 다른 야외 연회장이었다. 돌아가며 술잔을 한 번씩 부딪치는 동안, 나는 줄곧 한쪽에 시선을 집중했다.

주재찬 감독은 본인 작품에 출연했던 무명배우들과 함께 작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배우들은 인맥을 쌓으려고 이 테이블 저 테이블 열심히 돌아다니는데, 주재찬 감독은 거북이처럼 우두커니 앉아만 있다.

숫기가 없는 건지, 자기 PR할 생각이 없는 건지.

미래예지로 봤던 차림새를 떠올려보면 소심한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았는데.

지금은 투박한 백팩을 끌어안고 소주만 벌컥벌컥 넘긴다. 간혹 제작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수상자들을 힐끔거리기도 하면서.

주재찬 감독이 받은 상은 미장센 작품상이었다. 영상미와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에게 주는 상이라, 아무래도 대상이나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감독들하고 비교하면 영화제작자들의 관심을 덜 받는 편이다.

“수상 축하드립니다.”

“감사드······ 어, 안녕하세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주재찬 감독이 허둥지둥 일어났다.

“혹시 빈자리 있습니까?”

“아, 그럼요. 여기 아무데나 앉으세요!”

앉자마자 소주병을 들었다. 주재찬 감독이 성급히 제 소주잔을 비운다. 반은 옷깃으로 줄줄 흘렀다. 그의 빈 잔을 채워주고, 나도 한잔 받고. 일단 대화로 분위기부터 말랑말랑하게 녹여놓고 본론으로.

“장편 준비 중인 시나리오 있으세요?”

곧장 들어갔다. 말랑말랑이고 뭐고, 애가 타서 안 되겠다.

“······시나리오요?”

“네. 장편 상업영화요. 있으시면 한번 볼 수 있을까 해서.”

왜 그걸 묻느냐는 듯이 멀뚱히 쳐다보던 주재찬 감독이 눈동자를 굴렸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불붙듯이 기대감이 확 타올랐다. 그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짚었다.

“정 팀장님. 그렇게 물어보면 우리 신인감독 오늘 기대 돼서 잠도 못자요!”

아까 주재찬 감독을 나한테 소개했던 제작자였다. 벌써 얼큰하게 마셨는지 혀가 반쯤 풀렸다. 그가 묵직한 한 팔을 내 어깨에, 다른 팔은 주재찬 감독의 어깨에 올리며 말했다.

“주 감독, 김칫국 마시지 말고 편하게 보여드려, 편하게. 여기 정 팀장님 시나리오 킬러야. 프로 작품이건, 아마추어 작품이건, 시나리오부터 기획안까지 닥치는 대로 보더라고.”

“아······.”

주재찬 감독의 눈빛에서 불길이 잦아든다. 그가 멋쩍은 얼굴로 품에 끼고 있던 백팩을 열었다. 이런 일을 대비해서 준비해놨는지 말끔하게 제본한 시나리오를 꺼낸다.

저절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간다.

“그, 오랫동안 혼자 준비한 시나리온데요.”

그래, 그거.

“자신 있게 보여드릴 만큼 완성도 높은 건 아니고······.”

말은 그래도 시나리오를 내미는 손에는 망설임이 없다. 빳빳한 새 종이가 내 손에 들어오자마자 제목부터 확인했다. 뒷장을 넘겨 내용도 훑었다.

그리고 주재찬 감독에게 다시 물었다.

“······이것뿐이에요?”

“네? 네.”

“기획안도?”

“준비 중인 장편은 그것뿐인데요.”

다시 시나리오를 내려다봤다.

내가 알기론 분명 제목이 도시정글이고, 장르는 느와르였는데.

왜 작품이 전혀 다르지?

<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2)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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