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95화 (195/218)

<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1) >

느닷없이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중국에서 투자제안 받았던 걸, 백한성 대표가 아느냐고?

“······팀장님은 어떻게 아셨어요?”

적어도 나는 그 일을 떠들고 다닌 적이 없는데.

“이량.”

3팀장이 던지듯이 말했다.

“그 양반이 너한테 관심이 엄청 많더라고. 술자리에서 넘겨짚었었지.”

중국 현지 에이전트사의 담당자. 말쑥하고 도회적인 분위기를 풍기던 얼굴이 떠오른다. 중국 투자자를 끼고 W&U에서 독립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던, 은근한 목소리도.

딱 잘라 대답했다.

“1년 전 얘기예요, 그거.”

“알아.”

“제의는 그때 거절했어요.”

“그것도 들었고.”

돌이켜봐도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당장 W&U를 박차고 나갈 생각도 없었거니와, 그때 당시에 봤던 미래예지도 영 찜찜했었으니까.

그 뒤로도 출장 중에 만나면 이량이 지나가듯 투자 건을 물어오긴 했지만, 얘기가 더 진전된 적은 없었다. 그나마도 최근에는 언급조차 없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석에 처박아둔 기억이었는데.

3팀장이 턱을 문질렀다.

“대표님이 뭐, 투자 관련해서 얘기 꺼내신 적은 없었고?”

“전혀요.”

“그럼 됐어. 난 혹시 대표님이 그 일 아시면 너도 알아서 몸 좀 사리라고 얘기하려고 했지. 2팀장 그놈이 중국 투자금 처먹고 이 사달을 벌여가지고, 괜히 엄한 너한테까지 불똥이 튈까봐. 대표님이 모르시는 거면 뭐.”

백한성 대표가 모르면.

그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확신할 수 있나?

“그런데 팀장님이 눈치 채셨을 정도면, 대표님도 이미 알고 계실수도······.”

“아니, 이량이 내 앞이니까 한두 마디 한 거지, 대표님께 티를 내진 않았을 거야. 물밑에서 그런 얘기가 오간걸 알면 대표님이 당장 중국 에이전트부터 다른 회사로 갈아치우실 테니까.”

3팀장이 손을 내저었다. 심각한 얼굴로 듣고 있던 김현조가 끼어들었다.

“그냥 대표님한테 그런 일 있었는데 거절했다, 다 끝난 얘기라고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나? 괜히 찝찝하잖아.”

“글쎄다. 대표님이 모르시는 일이면 다 지나간 일을 끄집어내서 괜히 긁어부스럼 만들 필요 뭐 있냐. 더욱이 지금처럼 개떡 같은 타이밍에.”

“어, 타이밍이 좀 그렇긴 하지.”

김현조가 머리를 긁적이며 천장을 올려봤을 때였다. 탁자 위에서 내 핸드폰이 드르륵 울었다. 발신자를 확인하다가 멈칫했다. 동시에 3팀장과 김현조도 움찔 놀랐다.

백한성 대표였다. 이건 무슨 타이밍이지.

“······여보세요?”

-회사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목소리는 느릿했다. 그의 기분을 파악하긴 어렵다.

“예. 좀 전에 출근했습니다.”

-잠깐 볼까?

“지금이요?”

-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뭘까. 묻고 싶다는 게.

2팀장 건인가? 그 양반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독립카드를 빼든 것에는, 분명 나와의 문제가 상당부분 영향을 미쳤을 테니까.

설마하니 중국 투자문제는 아니겠지.

3팀장의 말 때문에 그것도 영 신경이 쓰인다.

대표실 문을 여는 순간까지도 머릿속은 백한성 대표의 의도를 추측하느라 뒤죽박죽 엉클어져 있었다.

“왔어?”

백한성 대표는 홀로 벽 앞에 서 있었다. W&U소속 연예인들의 프로필사진이 빼곡하게 걸려있는 벽. 백한성 대표의 손가락이 사진들을 가볍게 훑었다. 넵튠과 이송하, 남조윤, 프리티걸, 그리고 2팀장이 관리하던 배우들까지.

“뭐해? 앉아. 중국출장 다녀오느라 피곤할 텐데.”

중국 얘기가 나오자마자 반사적으로 어깨가 굳었다.

내가 빈자리에 앉자 백한성 대표가 다가왔다. 주말사이에 횡액을 겪은데다가 2팀장이 오늘도 대표실에 들어와서 난리가 났었다고 했으니, 저 사람도 평소와는 다를 줄 알았다.

백한성 대표가 벌게진 얼굴로 욕을 퍼붓고 길길이 뛰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가지만, 적어도 분위기는 살벌할 줄 알았는데. 여상스럽기만 하다. 저 평정 그 자체인 얼굴 너머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시나리오 중에 ‘텔레파시’라는 작품 있었지?”

“네?”

“이송하한테 들어온 작품. 차재호 감독에 허가경 주연. 기억 안나?”

“······납니다.”

나긴 나는데.

맥락 없이 튀어나온 화제를 따라가기 위해 기억을 되짚었다.

“여주인공 배역이 송하랑 안 맞아서 고사한 작품이요.”

본부장이랑 백한성 대표하고도 상의하고, 최종 거절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봤더니 백한성 대표가 빙긋이 웃었다.

“이송하 차기작으로 마음 가는 작품은 좀 있어?”

“그럭저럭 괜찮은 작품들은 있는데, 아직은 열어놓고 검토 중입니다.”

“음. 내가 예전에 차재호 감독한테 신세진 적이 있거든.”

얘기가 점점 더 뜬금없는 곳으로 뻗어간다.

“차 감독이 밥이나 먹자고 해서 잠깐 만났는데, 그쪽에서 이송하를 많이 탐내는 눈치야. 출연하겠다고 하면 캐릭터를 상당부분 수정할 의향도 있다던데.”

정신이 확 들었다. 2팀장의 문제도, 중국 투자건도 머릿속에서 싹 날아갔다.

설마 이송하 차기작을 그 작품으로 결정하라는 건가?

황급히 시나리오와 여주인공 캐릭터를 떠올렸다. 시나리오는 괜찮았다. 짜임새가 촘촘한 액션스릴러. 거기다 흥행보증수표로 유명한 허가경이 먼저 낙점한 작품이라 고민이 길었는데, 아깝게도 여주인공이 돋보이는 작품은 아니었다.

남주인공의 연애 상대로만 소모되는, 예쁜 얼굴과 몸매만 부각되는 캐릭터. 흥행하더라도 스포트라이트는 모두 허가경한테 돌아갈 영화다. 캐릭터를 수정한다고 얼마나 달라질까. 입안이 껄끄럽다.

“진지하게 검토 중인 작품 없으면, 그쪽 얘기 한 번 더 들어보지 그래.”

“만약 얘기가 잘 안 풀리면······.”

“그럼 마는 거고.”

고개를 휙 들었다. 백한성 대표가 태연히 말했다.

“신세진 건 신세진 거고. 더 좋은 작품이 나타나면 당연히 그걸 잡아야지.”

*

“남의 집 잔치에 온 기분이야.”

임서영이 어색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남의 집 잔치는 맞지. 단편영화제 폐막식이니까.”

“왠지 저희 엄청 주목받는 느낌인데요. 쟤들은 뭐야, 하는 눈빛들인데.”

“신기한가보지.”

영화인들의 행사라서 참석자들 대부분이 감독과 제작관계자들, 배우들이다. 걸그룹이 눈에 띄는 것도 당연하다.

포토월에 서는 건 간만이라 빡세게 꾸민 탓도 있고. 대규모 국제영화제의 레드카펫현장과 비교하면, 단편영화제의 포토월은 소박 그 자체였다. 그 사이에 넵튠을 던져놓으니 마치 두루미 무리에 난입한 플라밍고들 같다.

“여기 카메라 쫙 깔렸네.”

엘제이가 나와 이송하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밀려난 이송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엘제이가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스캔들씩이나 났던 사인데, 투샷 조심하라고.”

“그래, 떨어져, 떨어져. 기자 손에 잘못 걸리면 투샷이 러브샷 된다!”

거들면서 임서영도 끼어든다. 이송하가 두어 발짝 더 밀려났다. 좀 전까지 활짝 개어있던 얼굴에 음산한 먹구름이 끼었다. 맨 뒤에서 마실 나온 사람처럼 어슬렁어슬렁 따라오던 이태희가 달래듯 이송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 저기 박희승! 맞지, 맞지? 오빠, 맞죠?”

임서영이 포토월 앞에 있는 배우를 보고 오두방정을 떨었다. 이렇게 정신 사나운 것도 오랜만이라,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샜다.

“그래, 맞네.”

“어, 눈 마주쳤어! 이쪽으로 온다, 어떡하지?”

저 혼자 난리부르스를 추더니 다른 멤버들을 보고 정색한다.

“우리 영화배우 앞이라고 호들갑 떨지 말고,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지나가자. 안 창피하게!”

“야. 호들갑은 너 혼자 푸지게 떨고 있거든. 영화배우 하루 이틀 보냐?”

“그래도 쫌 다르지! 연예인의 연예인 같은 느낌이잖아!”

엘제이의 핀잔에 임서영이 고개를 홱홱 젓는다. 그 말대로 박희승쯤 되면 연예인들의 연예인이다. 예능을 비롯한 TV출연을 거의 안하고 오로지 연기활동에만 올인하는 배우니까. 이런 영화제 행사가 아니고서는 얼굴 보기도 힘든.

사실은 나도 사인 받고 싶은 욕망이 목구멍까지 찼다.

박희승이 코앞까지 걸어왔다. 다듬지 않은 턱수염과 투박한 인상에서 연기파배우의 냄새가 물씬 난다.

“안녕하세요!”

바로 포토월에 올라가야 해서 호들갑을 떨 틈도 없었다. 가볍게 악수만 나누고 멀어지는데, 등 뒤에서 박희승이 매니저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야. 걸그룹이랑 악수했네. 부럽지?”

“겁나 부럽다. 손바닥 나한테 팔아라.”

그 순간 임서영의 눈에서 별이 튀었다. 다급한 손이 내 옷자락을 흔들었다.

“오빠, 오빠, 방금 들었어요?”

“어.”

“영화배우들한테도 우리가 좀 먹히나?”

“아저씨들한테 먹히지.”

킬킬거리며 애들을 카메라 앞으로 내보냈다. 삽시간에 포토월 주변이 카메라 플래시에 뒤덮였다. 박희승 못잖은 반응이다. 애들이 기자들의 주문대로 포즈를 바꾸는 사이, 플라밍고를 구경하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정선우 팀장 아니에요?”

중년 남자가 알은척을 하며 다가왔다. 얼굴은 낯익은데 누구더라. 머릿속을 뒤져서 겨우 떠올렸다. 어떤 시사회 뒤풀이 현장에서 만났던 제작자다. 그가 포토월 쪽을 힐긋 보고 물었다.

“어떻게 넵튠 멤버들이랑 다 같이 왔네요?”

“송하가 시상자로 참석하니까, 넵튠한테 축하공연 부탁이 들어와서요.”

“아, 나는 실력 있는 신인감독 있나 싶어서 와봤는데······.”

제작자가 뒤를 힐긋 돌아봤다. 오리처럼 그의 꽁무니를 따라온 사람들이 아까부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들의 시선을 다시 긁어모은 제작자가 내 어깨를 짚었다.

“자, 인사들 해. 다들 알지? W&U 정선우 팀장.”

사람들이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제작자가 뒤이어 그들을 소개했다.

“여긴 이번에 경쟁부문에 작품 출품한 감독이랑 배우들이에요.”

어쩐지. 제작사 직원들이라기엔 인물들이 지나치게 말끔하다 했다. 웃는 얼굴로 악수를 나눴다. 특히 감독은 유심히 살폈다. 지금이야 입봉도 못한 무명 감독이지만, 어쩌면 내년에는 떠오르는 신예가 될지도 모르니까.

애들이 포토존에서 나오고 나서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소개받고 소개했다. 오늘의 주역인 단편영화 감독들과 배우들, 괜찮은 신인감독을 체크하려고 참석했을 제작, 배급사 관계자들. 그리고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유명 감독들.

“멤버들이 전부 비주얼이 좋네. 특히 임서영 씨는 연기해야 되는 얼굴인데.”

약 파는 감독도 있고.

“저요? 제 얼굴이요?”

“가수라 그런지 발성도 좋고. 표정도 좋고. 연기해야겠네!”

“제가요? 그럴리가 없는데요.”

곧 임서영을 발견기의 아이콘으로 거듭나게 한 동영상을 본 감독이 말했다.

“이태희 씨는 연기에 관심 없나?”

넵튠 애들이 웃고 떠드는 동안, 나는 감독들과 제작자들 사이에 파묻혔다.

“장준모 감독님이랑 희승 씨도 뒤풀이 참석한다던데, 정 팀장님은 어때요?”

“아, 가야죠.”

중요한 일 얘기는 거기서 다 오갈 테니까.

“손채영 씨 드라마 한다면서요? 영화 찍지, 영화. 괜찮은 작품 있는데.”

“서지준 씨는 요즘 잠잠하네.”

“정 팀장님이 시나리오랑 기획안 엄청 긁어모은다고 소문났던데. 뭐 괜찮은 작품 건진 거 있어요?”

늘 느끼는 거지만, 이놈의 동네는 소문이 참 빠르다. 나한테 서지준이나 손채영 스케줄을 묻는 사람들은 이미 2팀장의 일까지 아는 눈치였다. 나를 보는 시선이 다른 때보다 끈적거렸다.

“이송하 씨 텔레파시 합류한다는 얘긴 뭐예요?”

“텔레파시? 차 감독님 작품이요? 그거 들어간다고?”

“정말이에요?”

찌푸려지려는 눈살을 억지로 폈다. 소문도 빠르고, 헛소문은 더 빠르다.

“확정된 건 아니고. 검토 중입니다.”

“그래요? 투자배급사에선 확정으로 알고 있는 것 같던데?”

“얘기가 중간에 잘못 전달됐나보네요.”

아니면 저쪽에서 고의적으로 얘기를 흘렸거나. 미팅을 당겨야겠다.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고, 안될 것 같으면 확실하게 마무리 지어야지. 백한성 대표도 더 좋은 작품을 잡으라고 했으니까.

더 좋은 작품.

이제 어지간한 작품은 다 뒤져봤다. 뭔가 놓친 게 없을까 하고 이미 읽어본 기획안을 다시 들춰보는 실정이다. 이젠 작품을 확정지어야 할 시긴데. 여전히 마음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내가 너무 특별한 걸 바라나? 지금 추려놓은 것 중에서 고를 수밖에 없나?

생각에 잠긴 동안 영화제 폐막식이 시작됐다. 상영관 스크린 앞에서 공연을 마친 넵튠 애들이 박수갈채를 받으며 내 옆쪽 관람석에 자리를 잡았다. 입상한 작품들 소개와 함께 낯선 무명 감독과 배우들이 호명된다.

나는 기계적으로 박수를 치면서 계속 고민했다.

이송하와 남조윤은 말할 것도 없고, 서지준과 임주원에게도 새로운 작품이 필요하다. 좋은 작품을 잡아주고 싶다. 선뜻 내 손을 잡아준 사람들이니, 무슨 수를 써서든 좋은 작품을 잡아주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눈앞에 노이즈가 확 깔렸다.

그리고 가슴이 요란하게 뛰었다.

<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1) > 끝

ⓒ 장우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