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성에 맞는 길로 (6) >
“서지준이랑 임주······.”
본부장이 신음했다. 말꼬리는 한숨에 잡아먹혔다. 그가 관자놀이를 꾹꾹 문지르며 ‘어이구, 골머리야.’하고 중얼거렸다. 나를 보는 눈초리가 달라졌다. 복덩이가 아닌 골칫덩이를 보는 눈이었다.
“정선우. 너 진정 좀 해야겠다. 지금 생각 없이 그냥 뱉는 것 같은데.”
그가 타이르듯 말했다. 진지함이 부족하던 평소와는 다른 태도였다.
나는 힐금 옆을 돌아봤다. 진정은 저쪽이 해야겠는데. 2팀장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무시무시한 눈이 나를 노려본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나는 벌써 오체분시가 돼서 카펫위에 널렸을 거다.
본부장이 다시 말했다.
“기분은 알겠어. 알겠는데, 일을 벌이더라도 네가 책임질 수 있는 선에서, 네 능력이 미치는 선에서 벌여야지. 무작정 애들 데려가서 뒷일을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래? 제정신이야?”
놀라울 만큼 제정신이다.
나도 이 말을 내뱉고 나면 호흡곤란이나 수전증 따위가 덮쳐올 줄 알았는데. 그냥 오늘저녁은 갈치구이와 순두부찌개를 먹겠습니다, 라고 말한 듯한 기분이다. 몸도 정신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내 반응을 살펴보던 본부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방금 얘기는 없던 걸로 하자. 그렇게 하시죠, 대표님.”
“음. 본부장이 직접 확인해봐.”
긍정대신 지시가 돌아왔다.
“······확인이요?”
“서지준이랑 임주원 의사.”
당황한 본부장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나도 멈칫했다.
서지준이나 임주원쯤 되는 배우들은 회사에서도 최대한 편의를 봐주려고 노력하니까, 두 사람이 팀을 옮기겠다고 의사가 분명하면 단번에 묵살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속전속결로 진행될 줄은 몰랐지.
나한테 일반적인 성과를 넘어서는, 이 일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요구할 줄 알았는데. 이건 나를 좋게 보는 수준을 넘어서 2팀장이 백한성 대표의 눈 밖에 나기라도 했나 싶을 정도다.
의아한 눈으로 백한성 대표를 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본부장과 마찬가지로, 나를 보는 눈초리가 아까와는 달랐다. 천둥벌거숭이의 재롱을 재미삼아 관람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흡족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는 내가 이렇게 나오기를 기다린 것처럼 보였다.
그가 나와 송인호를 보고 턱짓했다.
“둘은 좀 나가있지. 2팀장하고 나하고 얘기를 좀 해야겠는데.”
2팀장은 말이 없었다. 그저 작살 같은 시선으로 내 등을 쑤셨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남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송인호를 데리고 대표실을 나왔다. 안에서 어떤 대화가 이어질까 추측하며 걷는데 따라오는 발소리가 없다. 돌아보니 송인호가 급류에 떠내려가는 놈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눈물이 쑥 들어간 얼굴이 얼떨떨하다.
“형. 이게 끝이에요? 이래도 괜찮은 거예요?”
“괜찮게 해야지.”
가볍게 어깨를 올렸을 때. 대표실 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그리고 2팀장이 성난 멧돼지처럼 다가왔다. 한 대 칠 기센데,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주먹질에 얻어맞았다. 휘청한 틈에 다시 고삐 풀린 주먹이 날아왔다.
“2팀장!”
“형!”
소리치지 않아도 두 대나 맞을 생각은 없다. 재빨리 머리를 뒤로 뺐다. 2팀장의 주먹이 콧등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내가 그의 팔을 붙들자마자 송인호와 본부장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2팀장의 어깻죽지를 잡고 나한테서 뜯어냈다.
욱신거리는 뺨을 누르고 침을 삼켰다. 입안이 찢어졌는지 역겨운 맛이 난다.
“형, 괜찮아요?”
다가오는 송인호를 2팀장이 붙들었다.
“송인호! 넌 뭐가 문제야, 내가 너한테 뭘 못해줬어!”
“팀장님.”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말을 해야지. 뭐하는 짓거리야, 이게!”
송인호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2팀장이 계속 윽박질렀다.
“내가 이런 개 같은 꼴을 당하고도 저놈이든, 너든, 가만히 둘 것 같아? 이 바닥 좁다고 했지. 뜨자마자 키워준 은혜고 나발이고 팽개치고 등 돌리는 놈, 소문이 좋게 날 것 같아? 인성 글러먹은 놈이라고······!”
“소문은 이렇게 나야죠. 대표님이 내부개편하면서 배우들 소속을 바꿨다.”
한발 나서면서 대꾸했다.
“앞길 창창한 W&U기대준데, 괜히 루머 돌면 회사 입장에서도 안 좋잖아요. 홍보팀만 힘들고. 그리고 팀이 바뀌어도 어쨌거나 회사 식군데, 아무리 화가 나셔도 그렇지 배우한테 가만히 둘 것 같으냐는 말은 좀······.”
협박은 적재적소에 알맞게 써먹어야지.
“그리고 팀장님 입장에서도 그런 걸로 해두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뭐?”
“인호 하나면 인성이니 뭐니 하는 얘기가 먹히겠지만, 셋이면 오히려 팀장님한테 문제가 있는 걸로 보일 텐데. 이 바닥 좁잖아요.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팀장님 체면이 뭐가 됩니까.”
“이 새끼가!”
2팀장의 기세가 더 험악해졌다. 뒤쪽에서 적당히 하라는 듯 나를 보고 손짓을 하던 본부장이 결국 이마를 짚었다. 다시 주먹질이라도 오갈까 걱정됐는지 그가 2팀장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씩씩거리던 2팀장이 송인호를 쏘아봤다.
“너, 저놈이 뭐라고 꼬드겼는지는 몰라도 저놈이라고 별다를······!”
“제가 매달렸어요. 저 좀 데려가 달라고.”
송인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2팀장이 멈칫했다.
“제 문제요? 마음에 안 드는 거요? 그동안 수도 없이 말씀드리고 빌었는데, 그걸 왜 모르세요?”
송인호가 갑갑한 한숨을 토했다.
“팀장님 방식을 못 따라가겠어요. 숨이 막혀요. 팀장님 말씀대로 배은망덕하고 인성 글러먹은 놈이라고 소문나서 연기 못하게 될까봐 겁났어요. 그런데 계속 팀장님 옆에 있으면 연기하는 게 싫어질 것 같아요. 그게 더 겁나요.”
말이 이어질수록 2팀장의 어깨가 더 거칠게 들썩거렸다. 굴욕과 배신감, 그리고 노여움에 휩싸여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본부장이 혀를 차며 나한테 눈짓을 보냈다. 나는 송인호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기 시작하자, 송인호가 무너지듯이 벽에 기댔다.
“괜찮아?”
“형이야말로 괜찮으세요?”
“나야 뭐.”
좁아지는 문틈으로 2팀장이 보였다. 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도 마주봤다. 그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2팀장의 얼굴 대신, 반질반질한 문에 내 얼굴이 비쳤다.
다시 태어난 것처럼 산뜻한 얼굴이었다.
*
송인호는 술 한 잔에 모든 시름을 날려버렸다. 오피스텔 거실을 기어 다니는 놈을 잡아 내 침대에 처박았다. 발목을 부여안고 놓질 않아서 한참을 씨름했다. 이불로 멍석말이를 해놓고 나오니 세상이 다 고요하다.
혼자 남은 술병을 비웠다. 물처럼 들이붓는데도 정신은 멀쩡하기만 하다.
그저 심장만 더 요란스럽게 뛰었다.
가로등과 네온사인 불이 번진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전화를 걸었다.
-누구세요?
“나야, 엄마.”
-아, 둘째 아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잊어먹고 있었네. 너 얼마 만에 전화한 건지 알아?
서운함을 감춘 목소리가 일상과 함께 덮쳐왔다.
“좀 오랜만인가?”
-오랜만? 너 군대 보내놨을 때보다 목소리 듣기가 더 힘들다, 어째. 네 아버지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바쁜 게 좋은 거다, 그러면서 내버려두라는데. 어디 정도껏 바빠야지. 평일은 당연히 바쁘고, 주말도 바쁘고, 공휴일도 바쁘고, 하다하다 명절에도 바쁘고. 너만 그러니?
“다들 그래. 죄송해요, 추석 때는 최대한 내려갈게요.”
달력을 확인하며 말했다. 하루 이틀은 시간을 뺄 수 있으려나.
-잘 지내지?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는 일은 없고?
음. 오늘 스트레스 주는 양반을 눈앞에서 치웠지.
“잘 지내. 참, 저 승진했어요.”
-승진? 무슨 승진?
“팀장으로.”
얼떨떨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확 높아진다. 안주용 문어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팀장 승진까지의 일들을 듣기 좋게 각색해서 얘기했다. 한참 들떠서 추임새를 넣던 엄마가 심각하게 말했다.
-알았어. 이건 엄마만 알고 있을게.
“누가 알아도 상관없어. 이게 무슨 비밀이라고.”
-그래? 너 TV나가고 나서부턴 입조심 하는 게 버릇이 돼서.
엄마가 멋쩍게 웃더니, 머뭇거리며 덧2붙였다.
-그런데 엄마야 네가 출세해서 TV에도 나오고, 일 잘돼서 승진도 했다니까 좋긴 한데. 승진이 원래 이렇게 빠른가?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책임져야 되는 것도 많을 텐데. 괜히 걱정되네.
“······못할 것 같으면 한다고도 안 했지.”
-힘들면 형이랑 의논하고, 그래도 안 풀리면 집에도 내려오고 그래.
당부하던 엄마가 갑자기 웃음소리를 냈다.
-바꿔줄게요, 바꿔줄게!
“응?”
-전화 끊는 줄 알고 네 아버지가 옆에서 엄마 잡아먹으려고 한다.
입 끝이 저절로 올라간다. 아버지하고 통화를 마치고, 모처럼 형한테도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폰으로 네쌍둥이들과 한 시간을 떠들었다. 요즘 내 인생만큼 다이내믹한 인생이 또 없는 줄 알았는데, 네쌍둥이들 일상도 만만찮다.
쌍둥이들 이후로 넵튠 애들하고도 한통, 그리고 서지준과 이봉준 실장, 임주원과 성 실장하고도 통화를 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알리는 동안 미쳤다는 소리를 오십 번쯤 들은 것 같다. 심지어 메시지로도 왔다.
거의 새벽이 돼서야 거실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어젯밤에 보다 멈춘 시나리오를 다시 훑었다. 이송하와 남조윤뿐만 아니라 송인호, 서지준, 임주원의 배역까지 함께 아른거리니 머릿속이 훨씬 풍성해졌다.
내친김에 오피스텔에 있는 시나리오와 드라마 기획안, 대본을 모조리 꺼냈다. 거실 테이블 위의 술병과 안주를 싹 쓸어내고 그 자리에 배우들의 화보사진과 포스터 따위를 늘어놨다. 그리고 정신없이 들여다봤다.
하얗게 지새우면서도 만족스러운 밤이었다.
*
주말동안 이박삼일짜리 중국출장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밀려왔다. 폭염이 시작됐는지 반팔 티셔츠를 입었는데도 등이 축축하게 젖는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시들시들했다.
회사에 도착했음 즈음에는 갈증으로 목이 탔다. 자판가 음료수부터 한잔 빼야겠다. 아니지, 얼음정수기가 낫지. 결정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라운지에 사람이 우글거린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정 팀장님.”
분위기가 뒤숭숭한데.
머리를 맞대고 웅성거리다가 내가 내리자마자 소음이 뚝 그치는 것도. 더듬거리고 쭈뼛거리면서도 빠짐없이 내 인사를 받는 것도. 뭣보다 날보고 정 팀장님이라고 부른 양반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무시하던 2팀 실장이다.
2팀장과 있었던 일이 수면위로 올라왔나?
무슨 일인지 물어볼 사람을 찾는데, 때마침 3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팀장님.”
-너 회사에 들어오면 바로 나 좀 보자.
“이미 들어왔는데요. 지금 라운지예요.”
말하기 무섭게 사무실 안에서 3팀장과 김현조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연행하듯이 내 팔을 잡고 빈 회의실로 끌고 갔다. 다른 직원들의 시선이 등짝에 들러붙어 질질 늘어졌다.
“회사 분위기가 왜 이래요? 저랑 2팀장님 문제 때문이에요?”
답이 없다. 일단 의자에 앉아서 두 사람을 봤다. 당혹스러운 얼굴들이다. 2팀장과 나 사이에 벌어진 일이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 그 문제라면 저렇게 동요할리가 없는데.
“뭔데요?”
“주말에 2팀장님이 사표를 썼대.”
“······사표요?”
김현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실 앞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2팀장의 얼굴이 떠오른다. 뭔가 또 다른 수작을 걸어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사표? 이대로 회사를 박차고 나간다고? 그날 백한성 대표와 무슨 얘길 했던 거지?
“그냥 엄포 같은 건 아니고요?”
“나도 처음 들었을 땐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야. 중국에서 투자받고 독립할 계획이라고 했대. 자기 새끼들이랑 얘기 됐으니까, 계약기간 얼마 안 남은 애들은 다 데리고 나가겠다고. 손채영이나 지준이 같은 탑급 아니더라도 2팀장님이 데려온 애들 여럿이잖아.”
그렇지. W&U 배우풀의 허리를 채우는 사람들.
그중에 송인호나 서지준처럼 2팀장의 방식과 안 맞아 튕겨 나오는 배우는 소수다. 2팀장이 FA시장에서 낚아온 배우들 중 대부분은 2팀장의 방식과 능력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들이다. 예전의 손채영처럼.
그렇게 뒤통수 맞고, 치는 거에 민감하게 굴던 양반인데.
백한성 대표한테 등 돌리고 자기 따르는 배우들 데리고 나간다고 했다고?
“그래서요? 정말 나갔어요?”
“나갔어.”
김현조가 저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묵묵히 팔짱을 끼고 있던 3팀장이 덧붙였다.
“혼자.”
“네?”
“혼자 나갔다고. 얘기가 잘 안된 건지 막판에 어그러진 건지, 2팀장이랑 같이 나가기로 했다던 배우들은 다 남는가 보더라. 그래서 좀 전에 2팀장 그놈이 대표실에 뛰어 들어가서 회사가 발칵 뒤집어졌어.”
김현조가 3팀장에게 물었다.
“다시 돌아올까?”
“글쎄.”
“투자를 받는다고 해도, 믿을만한 배우도 없이 나가면 말라죽기밖에 더 해? 회사에서 지저분하게 나갔다는 소문 금방 퍼질 텐데, 대표님이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먼저 눈치 볼 거 아냐. 배우들이 2팀장님이랑 계약하려고 하겠어?”
“국내에서 자리 잡긴 글렀지. 중국으로 가면 뭐, 먹고는 살겠지만.”
3팀장이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꽉 닫힌 문을 확인하더니,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
“너 말이야, 중국에서 투자제의 받은 적 있지.”
“······네?”
“그거 대표님도 아시냐?”
< 적성에 맞는 길로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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