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성에 맞는 길로 (5) >
“안녕하세요, 대표님.”
송인호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 다음은 본부장, 그 다음은 내 차례였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악수를 나누는 짧은 시간동안 눈을 맞췄다. 기대를 훌쩍 뛰어넘은 벼락스타가 됐기 때문인지, 아니면 백한성 대표와의 대면이 어려워서인지, 송인호는 평소보다 경직된 모습이었다. 맞잡은 손이 뻣뻣하고 차갑다.
내가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송인호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앉자.”
2팀장이 재촉했다. 떠밀리다시피 송인호가 빈자리에 앉았다.
분위기는 제법 화목했다. 본부장은 호들갑을 떨며 송인호의 성과를 칭찬했다. 백한성 대표도 충분히 기꺼워보였다.
“일하는 건 좀 어때. 처음이라 정신이 없을 텐데.”
백한성 대표가 물었다. 송인호가 입을 떼기도 전에 2팀장이 대답했다.
“애가 아직 실감은 안 난다는데 그래도 잘 따라오고 있어요. 첫 단추는 잘 꿰어놨고, 차기작으로 드라마로 몇 작품 골라놨습니다. 안 그래도 대표님 시간 괜찮으실 때 기획안 보여드리려고 했는데요.”
“드라마?”
“반짝하고 인기 식기 전에 드라마로 계속 얼굴 노출시켜야죠.”
“본인 생각은 어때. 마음에 드는 작품 있어?”
백한성 대표가 다시 물었다. 이번에도 2팀장이 대신 대답했다.
“인호는 아직 안 봤습니다. 제 선에서 한두 개로 추린 다음에 보여주기로 했어요. 얘가 아직 작품 보는 눈이 없어서, 고를게 많으면 또 희한한 거에 꽂힐지도 몰라서요. 그리고 스케줄도 바쁜데 여러 개 보면 애 머릿속만 복잡하잖아요. 이런 거 대신하려고 매니저가 붙어있는 거 아닙니까.”
2팀장이 구구절절 덧붙였다. 모든 게 다 송인호를 위해서라고. 치맛바람 센 학부모의 표본 같은 모습이다. 송인호는 기가 꺾이다 못해 무기력해보이기까지 했다. 저렇게 칙칙한 표정을 짓는 놈이 아니었는데.
백한성 대표가 물끄러미 송인호를 바라봤다. 관찰하는 시선은 곧 거둬졌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2팀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를 폈다. 콧대가 높아지다 못해 거꾸로 까뒤집힐 정도였다. 기세등등한 눈초리가 나와 본부장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암행어사 출두라도 한 듯한 기세다. 송인호는 마패쯤 될까.
보다 못한 본부장이 혀를 찼다.
“그래, 2팀장 너 보는 눈 확실하다. 인정해. 의심해서 미안하다, 미안해.”
“갑자기 왜 이러세요, 낯간지럽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네 눈초리가 따가워서 그런다. 하여튼 밴댕이 소갈딱지 같아가지고.”
흡족하게 웃고 있던 2팀장이 얼굴이 구겨졌다.
“밴댕이요? 진짜 쌓인 것 한번 풀어볼까요? 솔직히 말해서 저 본부장님한테 서운한 거 많아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신인 뽑아놨더니, 남조윤이가 아니라 인호를 뽑은 이유가 뭐냐, 정선우가 데려온 놈이라 마음에 안 들어서 내친 거 아니냐고 그러셨잖아요.”
“어이구야,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말했어?”
“뉘앙스가 그랬잖아요. 남조윤이랑 인호 붙여놓고 내기판 벌인 정신 나간 직원들도 있던데, 이거 다 본부장님 설레발에서 시작한 거 아닙니까. 인호 얘도 괜히 도마 위에 올라서 마음고생 심했을 겁니다.”
내기판 얘기에 본부장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2팀장의 시선이 곧바로 내 쪽으로 옮겨온다. 대놓고 거들먹거리는 태도는 아니었지만, 눈동자는 기대감으로 얼큰하게 취해있다.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제 안목 믿으시라고. 남조윤이 나쁜 배우 아니에요. 다만 둘 중에 하나를 뽑아서 W&U 기대주 감으로 밀어야 한다면, 인호가 훨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겁니다.”
2팀장이 송인호의 어깨를 자랑스럽게 두드렸다.
“보세요. 결과가 증명하잖아요.”
말은 본부장에게 하면서도 눈은 나를 보고 있다. 그가 턱을 추켜올렸다.
“정······ 팀장 생각은 어때?”
“제 생각이요?”
“정 팀장도 내가 남조윤 대신 인호 선택한 걸 두고 개인적인 보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나한테 앙금이 많았잖아. 얼라이브 개봉하고 나서부터는 거보란 듯이 굴더니만. 아직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나?”
나는 턱을 긁적거리다말고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2팀장의 눈이 집요하게 내 얼굴을 따라다녔다. 내 표정변화를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충분히 이해한다. 지금이 그에게는 가장 통쾌하고 속 시원한 순간일 테니까.
미팅 날 이후로 나한테 어떤 엿을 먹어야 분이 풀릴지 이를 갈며 궁리했을 텐데, 타이밍 좋게 송인호가 확 떴으니. 그에게는 송인호가 둘도 없는 복덩어리로 보였겠지.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을까. 송인호를 향한 대중의 반응에 불이 붙고, 언론이 움직이고, 마침내 송인호에게 벼락스타라는 수식어가 붙기까지. 지난 일주일동안 바쁘게 기름을 뿌리고 부채질하는 동안에도 내심으론 이 순간을 기대했을 거다.
내 앞에 송인호를 들이밀고 쾌감을 맛볼 순간을.
“왜, 아직 인정을 못하겠어?”
“아뇨. 인정합니다.”
나는 기꺼이 2팀장의 쾌감을 북돋아주기로 마음먹었다.
“2팀장님 선택에 앙금이 남았었던 건 사실입니다. 그때는 제가 2팀장님께 밉보여서 조윤 형, 남조윤 씨한테 괜한 불똥이 튀었다고 생각했거든요.”
솔직히 어느 정도는 맞잖아, 이 양반아.
아랫입술에 침을 바르며 계속 말했다.
“그랬는데, 지금은 인정합니다. 송인호 씨를 선택한 2팀장님 안목도, 판단력도. 지금 대중이 송인호 씨 때문에 난린데 인정 안할 수가 없죠.”
힐끔 앞을 보니 2팀장의 눈이 환희에 젖어있다. 나를 무릎 꿇리고 내 입에서 최고의 찬사를 뽑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박장대소를 참고 있는지 뺨이 씰룩거리고 턱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이 2팀장의 절정의 순간일까.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을까.
나는 송인호를 힐긋 보고 말했다.
“가능성도 많고 정말 좋은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탐이 날 만큼.”
“탐난다고?”
“예. 보면 볼수록 탐나네요. 그래서 말인데······ 저 주세요.”
“뭐?”
2팀장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뭘 줘?”
“송인호 씨요. 꼭 같이 일해보고 싶은데.”
“뭐, 인마?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정선우, 너 정신 나갔어? 나한테 인호 맡겨놨어? 달라 말라 하게?”
2팀장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눈길을 돌렸다. 송인호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다. 본부장은 세상에 이보다 중한 볼거리는 없다는 듯,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시선집중하고 있고.
그리고 백한성 대표는 웃는 얼굴이었다.
기대주로 떠오른 송인호를 봤을 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기꺼운 얼굴이다.
“맡겨놓은 건 아니지만, 비슷하죠. 제가 대표님께 부탁드린 게 있거든요.”
“대표님?”
2팀장이 고개를 홱 돌렸다. 공기가 팽팽해졌다.
“부탁이요? 대표님, 저 놈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겁니까?”
“정 팀장이 채영이 설득해서 차기작 계약서에 도장 받아오면, 내가 정 팀장이 원하는 사람들로 팀을 꾸려주겠다고 했었거든.”
“대표님!”
2팀장이 벌떡 일어났다. 노여움으로 솜털까지 곤두선 얼굴이었다.
궁금하다. 높은 곳에 올라서자마자,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
“그래서요? 설마 인호를 빼다가 저 놈한테 홀라당 넘겨주시겠다는 겁니까? 뭐 이런,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인호 제가 뽑아서 제가 키웠어요, 제 새끼란 말입니다!”
그놈의 새끼 타령.
“프로젝트 성공한 대가랍시고 저놈 팀장으로 올려주신 게 엊그제예요! 그런데 채영이 설득한 대가로 뭘 또 주신다고요? 일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면, 인호를 W&U기대주로 키워놓은 저한테도 뭐 대가가 있어야하는 거 아닙니까?”
“그거랑은 좀 다르지.”
본부장이 코끝을 긁적이며 끼어들었다.
“그럼 정 팀장은 올 초에 로열패밀리, 얼라이브 쌍으로 터뜨렸으니 아예 본부장으로 올려야 되게? 팀장 승진 건은 대표님이 전부터 기회를 보시다가 프로젝트 성공을 명분 삼은 거고, 채영이 문제는 대표님이 따로 부탁한 건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저놈 챙기겠다고 제 뒤통수치시는 거 아닙니까! 대표님, 편애가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니에요? 이러시니까 회사 내부에 저놈이 사실 대표님 아들 아니냐는 얘기까지 도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백한성 대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소문까지 도나? 정 팀장이 몇 살이지?”
“스물아홉입니다.”
“스무 살 차이면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네.”
“대표님!”
2팀장이 다시 한 번 노성을 터뜨리자, 백한성 대표가 손을 저었다.
“진정하고 앉아. 사이좋은 파트너를 굳이 갈라놓진 않을 테니까.”
“그럼······!”
“배우가 원한다면 모를까.”
송인호의 눈동자가 다시 확장됐다. 백한성 대표와 나, 그리고 송인호를 쌍심지를 켠 눈으로 번갈아보던 2팀장이 다시 고함을 지르려던 때였다.
본부장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예전에 2팀장 너랑 조 실장이 쳐들어와서 이송하 담당 바꿔 달라고 했던 거 기억 안나? 그때도 이송하한테 오케이 받아오면 생각해보겠다고 했잖아. 조 실장이 이송하 설득했으면 한참 전에 담당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
“본부장님! 그 때랑은 지금 상황이······!”
“다를 게 뭐야. 이번에도 송인호가 싫다고 하면 없었던 일이 되는 건데. 왜, 네 새끼 못 믿겠어?”
말문이 막힌 듯 2팀장이 턱을 꽉 다물었다.
“그럼 당사자 의견 좀 들어볼까.”
백한성 대표가 송인호에게 손짓했다. 시선이 더 따갑게 몰리자, 송인호가 무릎위에 얌전히 올려놓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손등이 하얗게 질렸다. 백한성 대표가 고개를 기울였다.
“너무 갑작스럽나?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
“아뇨. 저는······.”
송인호가 입술을 뗐다. 하지만 다시 다물린다.
뭔가 이상한데.
송인호에게로 눈짓을 보냈다. 지금, 한마디면 네가 원하던 대로 될 거라고.
하지만 송인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래서 세상 근심걱정을 다 끌어안은 놈처럼. 삽시간에 눈이 벌게지더니 눈물이 뚝 떨어졌다. 송인호가 우는 거야 몇 번 봤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서러운 울음이다.
나는 커피잔을 들었다. 손아귀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백한성 대표와 본부장의 시선이 느껴진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묻는 시선.
글쎄. 나야말로 궁금하다.
마음의 변화라도 생긴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인호야!”
2팀장이 짐짓 다정한 손길로 송인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뭘 또 울기까지 하고 그래. 괜찮아, 인마.”
그가 못마땅한 시선을 돌렸다.
“나 원. 애가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으면 울겠어요. 이놈 아직 새파랗게 어려요. 안 그래도 대표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바짝 굳어있었는데, 갑자기 대표님이랑 본부장님 사이에 끼어서 이런 상황에 내몰렸으니 안 놀라고 배깁니까?”
혀를 차더니 이번엔 나를 쏘아본다.
“뭣보다 정선우 저놈이 그래도 팀장인데, 얘가 눈치가 안 보이겠어요? 뼈다귀 굵은 놈들이라면 몰라도 얘는 그 제의를 받고 면전에서 걷어찰 만큼 맹랑한 애가 못된다고요. 마음이 약해 빠져가지고.”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송인호에게 돌아갔다.
“별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얘기해. 넌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팀장님.”
“그래, 괜찮으니까······!”
송인호가 팔을 벌렸다. 2팀장도 온화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곧장 송인호가 와락 끌어안았다.
나를.
내 뼈를 분지르려는 것처럼 우악스럽다. 마치 거대한 낙지에 휘감긴 느낌이다. 가볍게 숨을 내뱉고, 나는 송인호의 어깨너머를 바라봤다. 2팀장이 여전히 팔을 벌린 채로 멈춰서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파악이 덜된 얼굴이다.
입 끝이 올라갔다. 2팀장이 아까 그 순간을 기대했던 것처럼 나도 고대했다.
2팀장의 기분이 가장 높은 곳에 다다랐다가, 곧장 추락하는 순간을.
웃으며 턱 아래에서 들썩거리는 등을 두드렸다.
“왜 울고 야단이야? 나랑 같이 일하기 싫어?”
“아뇨! 당연히 형이랑 일하고 싶죠! 일하고 싶은데······.”
“그런데?”
“저 이제 배우 못하는 거 아니에요?”
송인호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목소리에 근심과 체념이 섞여있다.
“무슨 헛소리야. 배우를 왜 못해.”
“2팀장님이 저를 이렇게 띄웠으니까, 딴 생각하거나 배를 갈아타면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이 바닥 좁아서 그런 놈이라고 소문나면 일 못한대요. 오랫동안 연기하고 싶으면 그거 명심해야 된다고······!”
“아. 2팀장님이?”
내 물음에 송인호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순간.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고만 있던 2팀장의 얼굴이 팍 썩었다.
안 그래도 무슨 심경의 변화인가 했다. 저 좀 데려가라고, 고아원에서 친부모 기다리는 애처럼 목을 빼고 있던 놈인데. 좋아하기는커녕 세상종말을 앞둔 놈처럼 굴길래 뭔가 했더니. 2팀장한테 협박이나 다름없는 당부를 듣고 혼자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한 모양이지.
절로 입 끝이 비틀렸다.
“걱정하지 마,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송인호의 등을 다시 두드리며 백한성 대표를 돌아봤다.
“대표님. 제 팀으로 데려오고 싶은 배우, 더 말씀드려도 됩니까? 승낙은 받아놨습니다.”
“······누구. 손채영?”
백한성 대표가 비스듬히 턱을 괴며 물었다.
“아뇨, 손채영 씨 건은, 제가 손채영 씨 트러블 생길 때마다 2팀장님을 도와드리는 걸로 할까 하는데요. W&U대들보를 데려오면 2팀장님께 너무 죄송해서. 제가 그 정도로 막돼먹은 놈은 아니라서요.”
“그럼 누구?”
일그러지는 2팀장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서지준 씨랑 임주원 씨요.”
< 적성에 맞는 길로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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