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성에 맞는 길로 (4) >
“위클리 연예가 핫 키워드, 1위 보여주시죠!”
아나운서 멘트에 이어 후방모니터에 영상이 재생됐다. 한 청년이 맨발로 여자를 뒤따라가는 장면. MC석에 앉은 박태평이 의자를 빙그르르 돌렸다.
“저거 안 봐도 되잖아? 인터넷에서 백만 번 봤어, 백만 번.”
“그냥 또 봐요, 좋은 건 많이 봐도 돼.”
패널석에서 여가수가 화면을 안타깝게 쳐다봤다.
화면 속 청년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꽉 다물린 턱을 따라 눈물이 떨어진다. 그는 앞서 걷는 여자가 가라고 애원하면 우두커니 멈췄다가, 여자가 돌아서 멀어지면 또다시 뒤따랐다. 여자의 뒷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질 때까지.
“네, 다들 예상하셨겠지만 핫 키워드 1위, 벼락스타 송인호씹니다!”
대중문화평론가가 큐카드를 보며 브리핑했다.
“최근 개봉한 멜로영화 ‘러브어게인’에서 데뷔한 신인이죠. 러브어게인은 여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서 어쩌면 그녀의 운명의 상대가 됐을지도 모르는 남자들을 차례로 만나는 내용인데요. 송인호 씨는 여주인공의 대학동기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개봉 직후부터 인기몰이를 시작했고요.”
“지금 인기가 대단하긴 하죠?”
패널석이 시끄러워졌다.
“어제 극장가서 봤는데, 저 친구 등장하니까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더라고.”
“영화관에 영화 보러가는 게 아니라 송인호 씨 보러 간다잖아요.”
“이 친구 인기가 어느정도냐면요.”
흥분한 연예부기자가 볼펜으로 큐카드를 탁탁 찍었다.
“원래 언론시사회 때까지만 해도, 업계 관계자들은 영화 첫 주 스코어를 최대 90만 정도로 예상했단 말이에요.”
“그것도 대박이죠.”
“근데 온라인에서 송인호 씨가 터지면서 관객이 어마어마하게 몰리고 있잖아요. 지금 개봉 첫 주 스코어가 160만 돌파했어요. 엄청난 거죠. 몸값 더 올라가기 전에 잡으려고 벌써 여기저기서 러브콜 보낸대요.”
감탄이 줄줄이 흘렀다. 아나운서가 다시 질문했다.
“문 기자님은 송인호 씨 인기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 친구가 영화 속 무진이라는 캐릭터를 굉장히 잘 소화했어요. 잘생기고 집안 좋고 사연 많은 남자. 게다가 영화는 해피엔딩인데 무진이 인생은 비극이야. 그게 더 애틋한 거죠.”
박태평이 끼어들어 말했다.
“나도 영화랑 배우랑 괜찮게는 봤는데, 이렇게 난리가 날 정돈가?”
“예상을 넘어서 확 터지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허가경 씨도 계속 무명이었다가 드라마 하나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고, 권소리 씨는 십오 초짜리 CF로 패러디 양산하면서 떴고.”
연예부기자가 손가락을 꼽으며 몇몇을 더 거론했다. 평론가가 덧붙였다.
“이런 현상을 열풍, 신드롬, 뭐 이렇게 얘기들 하죠.”
“그럼 교수님인 송인호 씨 인기가 신드롬까지 갈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나운서의 물음에 대중문화평론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미 그 근처까지 갔어요.”
“우리프로에 섭외 좀 하지. 벼락스타 특집으로.”
여가수가 대본에 없는 멘트를 던졌다. 박태평이 콧등으로 웃었다.
“섭외는 했겠지. 까였나보지. 걔 요즘 부르는데 엄청 많을 거 아냐.”
“선배님이 송인호 씨랑 전화연결 한번 해주면 안돼요?”
여가수의 말에 박태평이 눈을 껌뻑거렸다.
“내가? 나 걔랑 일면식도 없어!”
“대신 W&U정선우 씨랑 좀 친하지 않아요? 같이 사진 찍은 거 SNS에 올리고 그랬잖아요. 송인호 씨도 W&U소속배우니까 어떻게 연결 안 되나?”
“되겠냐? 정선우가 뭐 W&U대표야? 소속배우들 다 연결해주게?”
박태평이 혀를 찼다. 그의 눈짓에 메인피디가 손을 올렸다.
“잠깐 끊어가겠습니다!”
연출부와 진행팀원들이 세트장으로 들어가 다음코너 소품을 세팅했다. 박태평이 생수를 몇 모금 마시고 패널석의 여가수를 흘겨봤다.
“야, 대본에 없는 걸 물어볼 거면 미리 얘기를 해! 깜짝 놀랐잖아.”
“아니 전화연결 정도는 될 줄 알았죠. 확 떴다 그래도 완전 신인인데.”
“저희도 신인이라 당연히 될줄 알고 전화했는데 여지도 없이 까였어요.”
메인피디가 다가와 말했다. 막간을 이용해 메이크업을 수정하던 연예부기자가 혀를 찼다.
“그냥 신인이 아니라 W&U신인이잖아요. 그것도 기대주라고 이장엽 팀장이 직접 붙어서 관리하고 있다던데요?”
“진짜요? 그 양반 신인 키우느라 요즘 조용했구나.”
“이장엽 팀장이 누군데요? 난 W&U는 대표랑 정선우 실장밖에 몰라.”
아나운서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물었다. 곧 대본에 없는 연예계 뒷사정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정선우 씨는 요 몇 년 사이에 대중적으로 확 유명해진 거고, 원래 제작자들 사이에서는 W&U하면 이장엽 팀장이 유명했어요. 안목 좋고 수완 좋기로. W&U배우들 섭외하려면 무조건 그 사람부터 거쳐야 됐었으니까.”
“근데 이제 정선우가 그런 급이 되지 않겠어? 팀장 됐다던데?”
“그런 추측 많았죠. 앞으론 W&U배우들 섭외하려면 정선우한테 연락해야 될지도 모른다, 늦기 전에 미리미리 정선우랑 인맥 좀 다져야겠다, 그런 얘기 많았었는데. 이제 그런 말들 쏙 들어가겠네요.”
연예부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죠, 송인호가 너무 잘돼서.”
*
레드카펫처럼 붉은 복도에 성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인사 깍듯하게 하고, 비위 잘 맞추고. 어렵게 만든 자리다, 알지?”
남자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스커트 밑으로 허벅지를 다 내놓은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속눈썹 한올까지 단장한 얼굴에 자신감이 엿보였다.
“걱정 마세요, 실장님. 제가 오디션 때는 너무 떨었어요. 차라리 이런 자리가 더 편해요. 들어가면 누구한테 잘 보여야 돼요?”
“안에 감독님, 제작사, 그리고 남자주인공 맡은 허가경이랑 그쪽 기획사 식구들 와있대. 제작사 쪽엔 비벼봐야 단역이고, 감독님이랑 허가경한테 잘 보여야 좋은 배역 떨어지지.”
“알았어요.”
여자가 얇은 시스루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최 실장! 여기.”
실장이 걸음을 재촉했다. 앞쪽에서 구깃구깃한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가 손짓하고 있었다. 영화제작사 부장이었다. 그가 마뜩찮은 얼굴로 말했다.
“나는 인사밖에 못 시켜줘. 뭉개는 건 알아서 해, 어?”
“어유, 그거면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우리 효진이가 알아서 잘 할 겁니다.”
실장이 얼른 여배우를 들이밀었다. 그녀를 쭉 훑어본 제작사 부장이 문을 열었다. 룸 안에는 몇몇이 둘러앉아 심각한 얼굴로 얘기 중이었다. 불청객의 등장에 말소리가 뚝 끊어졌다.
제작사 부장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감독님, 가경씨, 여기 이효진 씨라고 개미엔터 여배운데, 다른 방에서 미팅중이더라고요. 감독님이랑 가경씨 팬이라고 인사 좀 시켜달라고 해서 같이 왔어요. 들어와요, 들어와.”
“안녕하세요, 감독님! 선배님!”
여배우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인사했다.
“얼마 전에 오디션도 봤었는데, 제가 그때는 긴장해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어요. 준비 많이 했는데 실력발휘도 못하고. 그게 계속 아쉬웠는데 마침 여기 계신다고 해서 제가 졸랐어요. 잠깐만 인사드리고 가도 될까요?”
“인사 지금 했잖아요. 가면 되겠네.”
감독이 말했다. 싸늘한 분위기에 여배우가 주춤했다.
“네?”
“인사 잘 받았으니까 가보세요. 지금 중요한 얘기 중이니까.”
중앙에 앉은 남자가 피식거렸다. 담백하고 이지적인 첫인상 너머로 교만한 본성이 어른거렸다. 30대 남자배우를 인기 순으로 꼽으면 무조건 한손 안에 꼽히는 허가경이었다.
얼굴을 발갛게 붉힌 여배우가 다시 인사하려는 걸 부장이 허겁지겁 막았다. 소파 한쪽에서 제작사 피디가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뒤늦게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 챈 부장이 여배우와 살장을 쫓아냈다.
허가경이 느릿느릿한 어투로 말했다.
“우리 부장님은 여유있으신가 봐요. 여주인공 캐스팅도 안됐는데 듣도 보도 못한 배우를 막 들이미시네.”
“가경씨, 그게 아니라 우연히 만났어요, 우연히.”
부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감독이 양주를 입에 털어 넣으며 물었다.
“가경씨는 여주인공으로 누굴 했으면 좋겠는데?”
“처음부터 말씀드렸잖아요, 감독님. 전 이송하가 좋다니까요.”
감독이 취기 가득한 한숨을 쉬었다. 제작사 부장이 달래듯이 말했다.
“가경씨, 우리가 가경씨 의견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이송하 씨 쪽하고 얘기가 잘 안 풀렸어요. 내가 정선우 실장이랑 미팅을 세 번이나 했다니까. 이송하 씨 말고, 가경씨 상대역이면 더 급 높은 여배우들도 관심······.”
“부장님.”
허가경이 말허리를 뚝 끊었다.
“안한다고 하면 하게 해야죠. 그게 제작사 하는 일 아니에요?”
입을 달싹이던 부장이 결국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내가 정선우 실장을 다시 한 번······.”
“됐어요.”
이번엔 감독이 말을 잘랐다.
부장의 표정이 밝아지려는 찰나, 감독이 다시 말했다.
“내가 거기 백한성 대표랑 얘기 해볼게.”
*
“인호 씨! 영화 축하해요!”
기계적으로 걷고 있던 송인호가 삐거덕 멈췄다.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제도 축하해주셨던 것 같은데.”
“오랫동안 축하하고 싶어서 그래요. 가능한 한 오랫동안.”
W&U 2팀 직원이 송인호의 어깨를 쓰다듬고 사라졌다. 그 후로도 수차례 축하인사가 날아들었다. 2팀은 요새 계속 들뜬 분위기였다. 기대를 한참 뛰어넘은 송인호의 반응 덕이었다. 팀장실이 평화로워지니 2팀 전체가 평화로웠다.
팀장실 앞에 선 송인호가 숨을 삼켰다. 손이 닿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2팀장이 팔을 벌리고 송인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복덩어리는 네가 복덩어리다, 네가!”
가뭄 끝에 소나기를 맛본 사람처럼 충만한 목소리였다. 2팀장에게는 송인호가 바로 소나기였다. 장맛비였다. 정선우 때문에 울화로 피폐해졌던 그의 정신에, 송인호가 생기를 불어넣었다.
“내가 뭐랬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신인상 받으면서 화려하게 데뷔하게 만들어준다고 했지? 유명해지니까 기분 어때?”
송인호가 몇 번 입을 달싹이고 말했다.
“아직, 실감이 잘 안 나서.”
“스케줄 소화하다보면 금방 실감나게 될 거야. 부모님 반응은 어때?”
“······좋아하시죠. 밤마다 영화관에 가세요, 내릴 때까지 매일 보신다고.”
“그래? 영화티켓 넉넉하게 좀 보내야겠네.”
2팀장이 송인호를 엘리베이터쪽으로 데려갔다.
“위에 대표님 계시니까 인사부터 하고 오자. 너 한번 보자고 하셨으니까.”
“대표님이요?”
“원래 배우들 간간히 불러서 작품얘기도 하고 그러시거든. 너한테는 특히 관심 많으실 걸. 네가 정선우, 남조윤, 그놈들이랑 같이 엮이는 바람에 회사 내에서도 말이 많았으니까. 이젠 그것도 끝이지만.”
2팀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6층에서 내리자 여비서가 다가왔다.
“대표님 안에 계시지?”
“계시는데, 아직 얘기가 안 끝나셨는데요.”
“무슨 얘기? 안에 본부장님도 계셔?”
“네. 그리고 정선우 팀장님도요.”
비서의 입에서 정선우와 팀장이라는 단어가 붙어 나온 순간, 2팀장의 얼굴이 돌변했다. 마치 오물덩어리라도 보는 듯 불쾌한 표정이었다.
“그놈은 뭐하러 왔는데?”
“그것까진 잘······.”
오만상을 찌푸리던 2팀장이 문득 송인호를 돌아봤다. 송인호는 대표실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긴장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 입매가 경직돼 있었다. 반대로 송인호를 눈에 담기 무섭게 2팀장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는 곧장 대표실 문 앞으로 걸어갔다. 전리품을 가득 싣고 온 개선장군마냥 거침없는 걸음이었다. 그가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대표님, 저 2팀장입니다. 인호랑 같이 왔습니다.”
-······음. 들어와.
한 호흡 늦게 답이 들렸다. 백한성 대표의 목소리였다. 2팀장이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복잡한 얼굴로 서있던 송인호가 다시 기계적인 걸음을 옮겼다. 2팀장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대표실 문을 열었다.
***
백한성 대표가 계약서를 덮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어디보자.”
기다렸다는 듯 본부장이 계약서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장에 찍힌 도장을 확인했다.
“손채영이 진짜 도장을 찍었네. 복덩이 너, 얘한테 뭘 한 거야?”
“설득을 했죠.”
본부장이 내 쪽으로 엉덩이를 옮겨왔다.
“걔가 설득으로 얌전해지는 애였으면 여기 같이 앉아있겠지. 요즘도 너한테 볼일 있는 거 아니면 아예 회사에 발도 안 들여놓잖아. 말해봐. 설득을 어떻게 하면 손채영 입에서 ‘내 사람’이라는 말이 나와?”
진실을 토해내라고 찔러대는 본부장에게 떫은 웃음을 보냈다.
백한성 대표가 말했다.
“채영이가, 정 팀장이 아주 마음에 들었나보네.”
그건 아니고.
건조한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본론을 꺼냈다.
“차기작이 결정됐으니까, 저번에 말씀하셨던 ‘팀’얘기를 계속해도 될까요?”
혼자 중얼거리던 본부장이 입을 딱 다물었다.
커피잔을 들고, 백한성 대표가 희미하게 웃었다.
“빼오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지?”
“네.”
“당사자 동의는 받았고?”
대답하려는데 노크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2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 들어와.”
백한성 대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2팀장이 송인호의 어깨를 감싸 쥐듯이 잡고 들어왔다. 짧은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내 것과 부딪치고 섞였다.
백한성 대표가 말했다.
“마침 잘됐네.”
“예. 마침 잘됐네요.”
내가 대답했다.
< 적성에 맞는 길로 (4)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