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성에 맞는 길로 (1) >
“언론사마다 보도자료를 꾸준히 뿌리는데, 소스가 딸려요.”
“실검에 뜨는 게 제일 좋은데. 요즘 우리 회사에서 제일 핫한 애가 누구지?”
“송하요. 걔들, 프리티걸이랑. 선우 씨한테 부탁해서 사진······.”
홍보팀 여직원이 말꼬리를 집어삼켰다. 상석에 앉은 2팀장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정선우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후끈하던 회의실 내부에 찬바람이 불었다. 2팀장이 조병환 실장에게 손짓했다.
“저녁에 인호랑 지준이랑 붙여놓고 사진 한 장 찍어.”
“네, 알겠습니다.”
“지준이면 최고죠. 기자 몇 명한테 얘기해둘게요, 바로 기사 뜨게.”
홍보팀 박 팀장이 빙그레 웃으며 정리했다. 그리고 서류를 넘겼다.
“일주일동안 ‘러브어게인’ 버즈량이 급상승했어요.”
만년필이 SNS 버즈 모니터링 그래프를 짚었다. 특정 키워드의 언급률을 분석한 결과물이었다. 회의실에 둘러앉은 2팀장, 조병환 실장, 그리고 2팀과 홍보팀의 직원 몇몇의 눈길이 상승그래프에 꽂혔다.
2팀장이 턱수염을 문지르며 물었다.
“얼라이브 때랑 비교하면 어때?”
“얼라이브는 탑스타가 수두룩했잖아요. 화끈한 멀티캐스팅 블록버스터고, 러브어게인은 아무리 감독이 좋아도 멜론데. 사전반응은 솔직히 비교가 안 되죠.”
“그럼 남조윤이랑 인호 반응을 비교하면?”
박 팀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조용한 회의실 안에 눈길들이 이리저리 스치고 부딪쳤다. 2팀장과 송인호, 그리고 정선우와 남조윤. 이 사각관계야 W&U내부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슈였다.
남조윤은 충무로의 기대주로 가치를 증명했고 정선우의 안목은 확인됐으니, 남은 건 2팀장과 송인호의 성과였다. 내부에서는 러브어게인의 흥행여부만큼이나 송인호의 데뷔 성공여부에 관심이 쏠려있었다.
새파란 애송이 때문에 체면이 깎여나갔던 2팀장이 기세를 회복할지.
아니면 2팀장의 안목이 틀렸다는 걸 확인 사살하는 꼴이 될지.
2팀장은 느긋한 태도로 박 팀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만년필 끄트머리를 문지르며 다른 손으로 태블릿을 움직이던 박 팀장이 말했다.
“조윤 씨는 시사회 초반까진 잠잠했어요. SBE 필름 쪽에서 블라인드 마케팅 수준으로 숨겨놔서. 인호는 시사회 전부터 홍보물량을 어마어마하게 쏟아 붓고 있잖아요. W&U기대주라고. 인터뷰, 제작보고회, 프로모션도 다 돌고 있고.”
“그래서?”
“······이쪽도 비교가 안 되죠. 인호 개인 버즈량은 어마어마해요.”
한숨과 함께 박 팀장이 가파르게 올라가는 그래프를 내밀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2팀장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홍보팀 남직원이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지하에 멈춰 있었다.
“2팀장님이 남조윤 씨 엄청 신경 쓰시네.”
“정확하게는, 조윤 씨가 아니라 선우 씨를 신경 쓰는 거지.”
여직원이 주위를 살피며 덧붙였다. 남직원이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쳤다.
“이거 느낌이, 선우 씨가 질 것 같은데.”
“뭐래? 얼라이브 완전 대박쳤잖아!”
“영화랑 배우랑 따로 봐야지. 그게 조윤 씨 때문에 대박난 건 아니잖아.”
“그래도 조윤 씨가 초반 흥행 몰이하는데 큰 역할 한 건 감안해야지! 대중한테 연기력 인정받았지, 필모엔 천만 영화 떡하니 올렸지. 완전 무명에서 영화 한편으로 이만큼······!”
“송인호 반응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서.”
남직원의 말에, 여직원이 입을 벙긋거렸다.
“배우 대 배우로 봐봐. 너도 영화 봤잖아. 송인호도 연기 만만찮던데.”
“······잘하긴 하더라.”
“캐릭터도 좋아. 앞에선 착한 부잣집 도련님이고, 뒤에선 거친 애정결핍 반항아고. 극중에서 서브역할이라 짠내도 나고. 등장 씬도 많고. 감독이 매력을 남주인공이 아니라 송인호한테 몰빵한 느낌이던데.”
“그게 대놓고 노린 설정이긴 한데, 알고도 넘어가게 만들긴 했지.”
여직원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남직원이 손으로 자기 얼굴을 훑었다.
“뭣보다 송인호는 이거, 얼굴로 반은 먹고 들어가잖아. 지금 외모 하나로 SNS에서 반응 끌어 모으는 거 아냐. 걔 아이돌이었으면 팬덤 어마어마했을걸. 상품성으로 따지면 조윤 씨보다 낫지.”
남직원이 입술을 핥으며 덧붙였다.
“걔는 여기서 운만 받쳐주면, 진짜 엄청 크게 터질걸?”
“야, 남조윤씨도 괜찮아! 섹시하고 그, 위험한 매력이 있잖아!”
“봐라.”
태블릿을 두드리던 남직원이 턱 들이밀었다. 송인호의 프로필 사진이 화면가득 떴다. 밀짚모자를 쓰고 웃고 있는, 청량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보자마자 여직원의 뺨이 벌게졌다. 저절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끈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으으, 얜 뭐 이렇게 잘생겼니. 아냐, 그래도 너무 남동생 스타일······.”
스륵,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 발을 들여놓던 여직원이 흠칫했다. 안쪽에 누군가 벽에 느슨하게 기대 서있었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푹 숙인채로.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가라앉은 얼굴이 보였다. 스산한 분위기였다.
“인호, 팀장님 보러 왔니?”
여직원이 또다시 흠칫 놀랐다. 어느 샌가 박 팀장이 뒤에 서있었다. 그제야 눈앞에 사람들을 눈치 챘는지 송인호가 팔짱을 풀고 걸어 나왔다. 얼굴에는 프로필 사진처럼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네, 회의 끝났다고 올라오라고 해서요. 안녕하셨어요?”
“안녕하지. 너 반응 쭉쭉 올라와서 일할 맛 난다, 요즘.”
“저희 부모님도 되게 좋아하세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박 팀장과 직원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송인호가 2팀장실 쪽으로 멀어졌다. 떠올랐던 웃음은 몇 걸음 만에 도로 흩어졌다. 얼굴은 금세 살풍경해졌다.
여직원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쟤 저런 얼굴은 처음보네. 맨날 생글생글 웃고 다녔는데.”
“뭐야? 쟤 지금 한창 들떠있어야 할 때 아니에요? 왜 저렇게 우울해?”
남직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박 팀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쌓인 게 터질 때가 됐나 보지.”
2팀장실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눈살을 찌푸렸던 2팀장이 주름을 풀었다. 송인호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는 소파에 앉아있는 조병환 실장을 힐금 보고 곧장 2팀장 앞으로 걸어갔다.
“팀장님, 저 연예플러스 인터뷰해요?”
“그래. 연예정보 프로그램 중에서 시청률 제일 잘 나오는 건데, 해야지.”
“그거 남녀주인공 둘이 하는 거였는데. 구성도 이미 다 나온 거잖아요.”
“내가 거기 피디랑 통화했어. 구성 바꾸고, 너까지 셋으로 갈 거야.”
2팀장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최대한 네 얼굴 많이 잡아달라고 해놨으니까 준비해.”
“저 그거 못하겠어요.”
팀장실 안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팽팽해졌다.
“못해? 그게 신인배우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프론 줄 알아? 너한테 그거 잡아주려고 지준이 차기작 정보까지 줬는데 그걸 왜 못해. 구성안 나오면 멘트 달달 외우고, 카메라 앞에서 웃기만 하면 되는데.”
“제가 갑자기 굴러 들어가면 주인공들 분량이 줄어들잖아요.”
“네가 그걸 왜 신경 써. 이런 일은 비일비재······.”
“이명 선배 얼굴을 못 보겠어요.”
“뭐?”
이이명. 러브어게인의 남자주인공이었다.
두 사람을 힐끔거리던 조병환 실장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팀장님, 인호 때문에 이이명 분량이 확 줄었잖아요. 상영시간 맞추느라 이이명이 찍어놨던 씬도 많이 빠졌고. 시나리오랑 너무 다르니까, 시사회 때 편집본 보고나서 이이명 쪽 분위기가 좀 싸늘하긴 했어요.”
“그래서 그 자식이 시비라도 걸어?”
“보는 눈들이 있으니까 대놓고 그러는 건 아닌데, 요즘 프로모션 행사 때문에 계속 같은 버스 타고 이동하잖아요. 남자주인공이 인상 쓰고 있으니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에요. 인호 얘는 신인인데, 아무래도 신경은 쓰이죠.”
“나 참.”
2팀장이 헛웃음을 지었다.
“다 괜찮은 놈이 왜 성격이 물렁해가지고는. 너 그거 고쳐야 된다니까. 이런 일 하나하나 신경 쓰면 이 바닥에서 일 못해. 스포트라이트 받는 놈이 있으면 못 받는 놈도 있는 거야.”
“전 그 스포트라이트를 비겁한 방식으로 받고 있잖아요.”
송인호가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병환 실장이 황급히 2팀장의 안색을 살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2팀장이 송인호를 쏘아봤다. 겨우 화를 참고 있는지 목덜미에 굵은 핏대가 들썩거렸다.
두어 차례 숨을 내뱉은 2팀장이 짐짓 달래듯이 말했다.
“다른 놈들은 한번만 밀어달라고 안달이야, 인마. 그리고 실력 없는 놈들은 회사에서 골백번 밀어줘도 못 떠. 거기 들어가서 분량 늘리고 살아난 건 네 실력이야. 네 연기랑 캐릭터 해석이 마음에 드니까 감독이 이이명 줄이고 널 늘린 거라고. 기회 얻었으면 좋아해야지. 어?”
송인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거스러미 없이 매끈한 입술에 핏기가 슬었다.
휙 뻗어온 2팀장의 손등이 송인호의 턱을 툭툭 건드렸다.
“깨물지 마. 입술에 상처 난다.”
“팀장님!”
“네가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서 그래. 지준이도 그랬어. 그거 금방 익숙해진다. 그러니까 잔말 말고 연예플러스 촬영 준비해. 참, 저녁에 SNS용으로 지준이랑 사진 한 장 찍어야하니까 머리 좀 깔끔하게 하고.”
“그래, 인호야. 샵에서 기분 전환 좀 하자.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조병환 실장이 송인호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송인호는 눈앞의 2팀장과 조병환 실장을 번갈아보고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이 뻣뻣하게 일그러졌다. 2팀장이 다시 한마디 하려던 때.
노크소리가 분위기를 깼다.
2팀장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누구야!”
-어, 저, 이봉준인데요. 이따가 다시 오겠습니다.
“들어와, 인마!”
곧 느릿느릿 문이 열렸다. 중국 출장기간동안 맛집탐방이라도 다녔는지 더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이봉준 실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도살장에 끌려온 새끼돼지 같은 얼굴이었다.
“네, 그, 저 찾으셨다고 해서. 바쁘시면 이따가······.”
“이봉준, 너 내가 보낸 시나리오랑 대본 봤어, 안 봤어?”
“봤죠. 바로 보긴 봤는데요.”
“봤으면 가타부타 말이 있어야 될 거 아냐!”
“지준이랑 조금만 더 검토 해보겠습니다.”
2팀장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너 인마, 안 그래도 요즘 하는 짓마다 마음에 안 드는데 이제 대놓고 정선우 닮아 가냐? 아니면, 지준이 채영이 꼴 내려고 그래? 고르고 골라서 보낸 것들인데 검토를 얼마나 더 하려고! 너 지준이 일 안 시킬 거야?”
“신중하게 결정해야 되는 문제니까, 지준이랑 머리 맞대고 조금만 더······.”
“애가 늑장을 부리면 네가 잘 달래서 결정을 해야지!”
2팀장의 고함에 이봉준 실장이 문짝에 딱 달라붙었다. 그러다가 주르륵 밀렸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문틈 사이로 서지준이 얼굴을 불쑥 들어 밀었다. 날카로운 눈이 사무실 안을 쭉 훑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 작품은 조금 더 고민해 볼게요.”
“지준아, 너······!”
“누구처럼 아예 안하겠다는 게 아니라, 아직 확 끌리는 게 없어요.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결정해서 올게요.”
고개를 꾸벅 숙인 서지준이 엉거주춤 서있는 이봉준 실장을 잡아당겼다.
“형, 대본 보러 가자.”
“먼저 가. 나 팀장님이랑 얘기중이잖아.”
“안 돼. 나 혼자 싸돌아다니면 불안해. 공항장애 같은 거 있나봐.”
“공황장애, 인마. 공황장애.”
“어쨌든.”
거절하는 듯하더니, 이봉준 실장은 저보다 훨씬 얇은 서지준의 손에 잡혀서 질질 끌려 나갔다. 마지막으로 2팀장에게 인사를 하고 문이 탁 닫혔다. 들어올 때보다 열배는 빠른 퇴장이었다.
“저, 저, 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2팀장이 말까지 더듬었다. 불똥이 사방팔방 튈 분위기였다. 조병환 실장이 송인호와 함께 빠져나가려고 눈짓을 했다. 하지만 송인호는 굳게 닫힌 문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눈빛이 고요하게 일렁거렸다.
송인호를 설득해서 내보낸 후, 2팀장이 조병환 실장을 홱 바라봤다.
“애 언제까지 저렇게 둘 거야? 옆에서 얘기 좀 잘 하라니까!”
“네, 네, 팀장님.”
송인호와 함께 탈출하는 데 실패한 조병환 실장이 고개를 진땀을 흘렸다.
“애 성격문제라서······. 채영이는 이런 문제로 애먹이는 일은 없었는데.”
“걔는 성질머리만 아니면 일로는 흠잡을 게 없었지. 일을 안 해서 문제지.”
의자에 털썩 앉은 2팀장이 혀를 찼다.
2팀장의 기분을 좋게 해줄만한 이야깃거리가 떠올랐는지, 조병환 실장이 밝아진 얼굴로 말을 꺼냈다.
“아, 그런데 요 며칠 정선우가 채영이 집에 꾸준히 드나든다네요?”
“그놈 아직도 포기 안했어?”
“이장현 실장 말로는, 분위기가 점점 더 살벌해진답니다.”
그 말에 기분이 좀 풀렸는지, 2팀장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미련한 놈.”
***
손채영이 말했다.
“후회 안 하겠어요?”
나는 자몽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시금털털하다.
“후회를 하든, 안하든 그건 제 문제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귀찮아질 텐데.”
“적당한 건 감수하고, 과하면 알아서 정리하겠습니다. 지금은 서로 오고가는 게 확실하다는 게 중요하죠. 나는 손채영 씨를 이용하는 거고, 손채영 씨는 날 이용하겠다는 거고.”
내 대답을 들은 손채영이 다시 웃었다. 화장기 하나 없어도 붉은 입술이 비스듬히 올라간다. 교활한 웃음이다. 이 순간, 나도 저런 웃음을 짓고 있을까봐 심히 걱정스럽다.
“그럼 이제 가서 얘기해요.”
손채영이 자몽주스가 든 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내 잔에 툭 부딪쳤다.
“손채영이 차기작 한다고 했다고.”
< 적성에 맞는 길로 (1)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