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87화 (187/218)

< 뒤통수치는 것들은 (6) >

“정말요? 그건 자신 있어요!”

“얘 말고도 뭐 준비해온 거 있으면 얘기하든가.”

애들이 오디션이라도 보듯 박태평 앞에서 개인기와 토크 줄거리를 선보였다. 욕을 바가지로 먹었는데도 붕어들은 아까보다 긴장이 풀린 얼굴이었다. 박태평이 욕을 하면서도 코멘트와 디렉션을 줬으니까.

마지막으로 셀카도 하나 찍었다. 박태평 SNS용으로.

이 정도면 녹화는 문제없겠지.

다시 프리티걸 대기실로 돌아가는데, 이태신 실장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바쁘신데 직접 신경써주셔서.”

나를 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울 만큼 반짝반짝하다. 까칠하기로 유명한 박태신의 악명 때문인지 계속 낯빛이 경직돼 있더니만, 지금은 체기가 쑥 내려간 사람처럼 가뿐해 보인다.

그의 팔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감사는 무슨. 이게 제 일인데요.”

*

제작진에게도 인사를 돌리고, 프리티걸 녹화를 어느 정도 지켜본 다음에 방송국을 나섰다. 미니밴 안에 올라타자마자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둘에서 멈춰있는 카운트다운을 확인했다.

-송하야, 오늘 별일 없어?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곧장 답이 날아온다.

-네, 아무 일도 없어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 사소한 일이라도.

-싫다! 이 독재자!

물끄러미 화면을 보는데, 다급한 메시지가 도착했다.

-서여ㅓ우 ᅳᆼ닌가 보냈어요.

-서영이 살아는 있어?

-아니요. 무슨 일 있으면, 없어도 연락할게요!

2팀장과 대화한 날 이후, 매일 매일을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보내고 있다. 마치 최건영과 함께 일했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다. 언제 내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폭탄을 옆구리에 끼고 살던 그때로.

도화선에 불이 붙을 기미는 안 보인다.

아직까지는.

*

웰메이드 프로덕션은 여전히 붐볐다.

오늘 오디션을 보는 작품이 있는지, 배우랑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다. 로비에서 예쁘장한 여자가 오디션용 대본을 움켜쥐고 울고 있다.

“실장님, 저 아무래도 오디션 망친 거 같아요. 진짜 준비 많이 했는데.”

“너 준비 많이 한 거 알지, 잘 했어. 괜찮아.”

“지금 가서 기회 한 번만 더 달라고 부탁하면 안 돼요?”

배우는 울먹거리고 매니저는 달래려고 애를 쓴다. 오디션 장에서는 흔한 일이다. 몇날며칠을 연습해서 카메라와 감독 앞에 서는데, 오디션은 냉정하리만치 금방 끝나버리니까.

한숨 쉬며 가는 건 배우와 매니저들뿐만이 아니다. 참가자 수십 명을 모아놓고 성대하게 오디션을 여는 감독이 있는 반면, 야심찬 시나리오를 들고 왔다가 명함 한 장 받고 돌아가는 무명 감독들도 많다.

콘텐츠사업제작부 복도에도 연예인과 매니저들이 몇몇 보인다. 다들 벽에 전시하듯 걸어놓은 영화와 드라마 포스터를 보고 있다. 모두 웰메이드 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작품들이다.

나도 가장 끝에 붙은 포스터 앞에서 멈췄다.

내 오피스텔에도 하나 붙어있는 로열패밀리 포스터다.

실내라 선글라스를 안 썼더니 날 보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언제 술 한번 마셨으면 좋겠다며 친근하게 다가오는 매니저도 있고, 자기 매니저가 자리를 비운 틈에 나한테 개인연락처를 주는 연예인도 있다.

두 번째로 연락처를 거절했을 때, 어깨가 덥석 잡혔다.

“정 실장님! 아니지, 이제 팀장님이죠?”

로열패밀리를 함께 작업한 성 부장이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서 널찍한 회의실로 들어갔다. 성 부장이 직접 아이스커피 두 잔을 타왔다.

“자자, 커피 한잔 쭉 마시고.”

“무슨 일이시길래 부장님이 직접 커피가지 타 주십니까?”

“우리사이에 뭐 꼭 이유가 있어야 커피를 타나? 정 팀장님한테는 예전 김도원 마약문제 도움 받은 것도 있고, 로열패밀리 대박친 것도 있고, 워낙 신세진 게 많으니까 절로 커피가 우러나는 거죠.”

성 부장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리고 내 앞에 슬쩍 시나리오 하나를 내밀었다. 확인해보니 영화다. 이송하랑 남조윤 차기작 때문에 회사로 들어오는 대본,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외부 대본도 구하러 다니고 있는데, 이건 처음 본다.

“이거 박 감독님 신작이에요? 왜 미리 못 봤지?”

“우리가 제작 맡은 작품인데, 이게 시나리오 완성되기도 전에 주연세팅이 끝났거든요. 지금 밑에서 오디션 보는 건 조연 롤이고. 근데 여주인공 맡기로 한 신소라가 급하게 빠졌어요.”

그가 목소리를 죽였다.

“임신 삼 개월이라네.”

“······신소라 미혼이잖아요. 열애설 난적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요. 그쪽 소속사도 지금 벼락 맞았다더라고요.”

성 부장이 혀를 끌끌 차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박 감독이랑 여주인공 캐스팅 회의를 했는데, 둘이 곧바로 의견일치가 돼서 정 팀장님한테 연락한 거예요.”

사니리오를 들춰봤다. 어떤 시나리오든, 첫 페이지를 넘길 때는 늘 두근거린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빠르게 식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지. 그래도 박 감독 연출에 웰메이드에서 제작 확정된 작품이면 퀼리티야 문제없을 거고.

“일단 돌아가서 송하랑······.”

“손채영 씨한테 꼭 좀.”

“누구요?”

“손채영 씨 차기작을 정 팀장님이 맡게 됐다는 얘길 들었는데. 아니에요?”

이 바닥에 입 싼 사람이 많다지만, 왜 이게 외부에까지 알려져 있는 거지?

뭐 자랑할 일이라고?

어쨌든 시나리오를 받았다. 기대하는 얼굴로 보던 성 실장이 말을 돌렸다.

“송하 씨는 차기작 아직도 검토중이예요? 작품 꽤 들어갔잖아요.”

“내부회의중이에요. 이게 쉽지 않네요.”

“연말에 로열패밀리 제작진 그대로 차기작 들어가도 괜찮을 텐데. 이번엔 원톱 여주인공으로. 이것도 꼭 좀 생각해봐요. 우 감독, 장 작가에 송하 씨까지 다시 뭉치면 편성이고 투자고 쫙 열리는 거니까.”

대답 없이 웃음으로 넘겼다.

이런 미팅을 요즘 하루에도 두세 번씩 한다. 외주 프로덕션이나 영화제작사, 방송국, 감독과 작가들. 대부분은 이송하의 차기작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지만, 남조윤을 콕 집어서 시나리오를 주거나, 오디션 제안을 하는 곳도 제법 된다.

작년 이맘때랑 비교도 안될 만큼 비중 높은 배역들이 들어오는데.

마음 가는 게 없다.

시나리오와 대본을 받아놓고 수시로 들여다봐도 마음만 오락가락한다. 분명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도 보다보면 장점보다 단점이 눈에 더 들어오고. 얼라이브나 로열패밀리 때처럼 탁 골라낼만한 작품이 없다.

그렇다고 고양이 수호령 때처럼 미래예지 힌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송하와 남조윤의 차기작 선택을 미루며 신중하게 고민하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당사자인 두 사람의 의견도 들어봤는데, 이송하는 나처럼 고만고만한 것 몇 개를 골라놓고 고민하고 있고, 남조윤은 들어오는 건 다 하고 싶어 한다. 식욕은 없는 사람이 작품 욕심은 많아서.

이렇게 휴식기를 주구장창 늘릴 수는 없으니, 정 안되면 선택지 중에 이송하와 남조윤이 더 원하는 작품을 골라야 하나 생각했는데.

손안에 들린 시나리오를 보며 물었다.

“성 부장님, 이거처럼 제가 못 본 시나리오나 대본 또 있을까요?”

“정 팀장님 시나리오 엄청 보잖아요. 저번에도 여기 와서 어지간한 건 다 긁어갔고.”

성 부장이 두툼한 턱살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정 팀장님 손에 안 들어간 건 캐스팅이 이미 확정됐거나. 작가, 감독이 까다로워서 밖에 안 돌리고 조용히 캐스팅하거나. 이런 건 구하기 힘들어요. 그리고 제작하기엔 문제가 있어서 처박혀 있거나, 그런 것도 있고.”

“문제요?”

“왜, 투자받기가 어려운 내용이나 퀼리티가 영 아닌 것들 있잖아요. 특히 공모전 작품 같은 경우는 정말 별의별 게 다 오거든요. 그렇게 처치곤란으로 자리만 차지하는 것들도 많아요.”

“말씀하신 것들 제가 좀 봐도 될까요?”

성 부장이 나를 희한하다는 듯 쳐다본다.

“눈앞에 백첩반상을 두고 산나물 캐는 사람 같아서 참 이해는 안 가는데. 그래도 정 팀장님 부탁이면 뭐. 앞에 두 가지는 내가 아는 것도 많지는 않고. 처치곤란인 작품들은 많아요.”

흔쾌히 일어난 그가 나를 작품보관실로 안내했다.

불 꺼진 보관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오래된 종이냄새가 확 끼쳐왔다. 보관실은 사방이 책장이었다. 칸칸마다 제본된 시나리오와 대본들이 꽂혀있고, 박스에는 A4용지 형태의 초고와 수정본, 그리고 기획안 따위가 가득하다.

“······이게 전부 작품입니까?”

“십년쯤 쌓인 거니까요. 근데 이렇게 처박혀서 빛을 못 본 작품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요. 혹시 이 안에서 묻힌 대작을 발굴해낸다, 뭐 이런 생각이면 시간낭빕니다. 될 작품이면 벌써 됐어요.”

성 부장이 혀를 찼다.

나는 바스락거리는 종이들을 손가락으로 쓸며 말했다.

“일단은, 볼게 많아서 좋네요.”

그날부터 부족한 시간을 쪼개서 작품을 보는데 투자했다. 얼라이브를 제작한 SBE 필름에도 가봤는데, 거기도 찾는 사람 없이 쌓여있는 시나리오들이 꽤 많았다. 그래서 낯에 스케줄이 비면 더 가까운 회사로 가서 작품을 들춰봤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일이라는 시선을 받으면서.

그것뿐만이 아니라 온라인 시나리오 마켓에 올라온 아마추어들의 작품도 살펴보고, 작품을 밖으로 안 돌리기로 유명한 감독들을 수소문해 보기도 했다. 대부분이 깐깐한 거장들이라 수확은 별로 없었지만.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도 카운트는 여전히 둘에서 멈춰있었다.

이송하의 주변을 매일 체크하고 점검했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이장현 실장이나 조 실장을 떠보기도 했지만 더 나오는 게 없고. 어쩌면 그날의 대화가 생산적이었던 걸 수도 있지. 2팀장이 내 말을 믿고 꿍꿍이를 잠재운 걸지도.

아니면 그쪽도 일이 바빠서 잠시 미뤄놓은 걸지도 모르지.

늦은 밤의 시사회관은 빈자리가 제법 보였다. 지난주에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가 한참 인기몰이를 하는 중이라, 대진 운이 별로 좋지 않다. 포스터나 예고도 지나치게 트랜디하고 유치한 느낌으로 뽑았고.

장르가 로맨스라, 좌석을 채운 사람들은 대부분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들이었다. 그들은 영화 타이틀이 올라갈 때까지도 서로 속닥거리느라 바빴다.

나는 그 틈에서 홀로 영화를 기다렸다.

그리고 두 시간 후.

시끄럽게 떠드는 관객들이 사라지고 스크롤이 다 올라간 후에, 나는 생수병을 들고 일어났다. 목이 타서 흔들어봤지만, 이미 빈병이다. 상영관 밖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이 울렸다.

-어.

-지금쯤 끝났을 것 같아서요. 형, 영화 어땠어요?

영화 보러 들어갈 때 통화했는데, 그 뒤로 두 시간이 넘도록 마른침만 삼키며 기다린 모양이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거칠다. 조금 전에 스크린에서 들린 오디오와는 딴판이다.

긴장한 송인호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대답했다.

-시나리오랑은 좀 다르더라.

-아, 시나리오에서 좀 여러 부분 바뀌었어요. 막바지에 제 씬이 확 늘어나는 바람에. 어쩌다 그렇게까지 됐는지 모르겠는데, 제 비중이랑 남자주인공 비중이랑 거의 비슷해요. 저 때문에 영화 망하면······.

답답한 한숨소리가 들린다.

나는 자판기에서 생수 한 병을 더 뽑았다. 목이 타서 안 되겠다.

-시나리오 봤을 때는, 그대로만 잘 뽑히면 좋은 작품 나오겠다 싶었는데.

화장실 쪽에서 커플이 다가온다. 둘 다 얼굴이 발갛게 상기돼 있다.

“그냥 로맨틱코미디라 골랐는데, 잘 골랐다. 두 시간 후딱 갔어.”

“와, 나 영화 보다가 얼굴 보고 소리 지르긴 또 처음이네.”

“걔는 남자가 봐도 헉소리 나더라. 만화책 찢고 나온 것처럼 생겨가지고.”

시끌시끌한 커플을 지나치며 계속 말했다.

“완성본이 시나리오보다 훨씬 좋다. 훨씬. 내용도, 네 배역도.”

-진짜예요?

송인호의 목소리가 확 밝아진다.

나는 목구멍이 물을 쏟아 부었다. 그 때. 전화가 한통 더 걸려왔다.

이송하였다.

“잠깐만. 내가 다시 전화할게.”

양해를 구하고 이송하의 전화를 받았다. 영화 보러 들어가기 전에 오늘도 별일 없었다는 확인을 받았는데.

-오빠?

“어, 무슨 일 있어?”

-네.

비상구 계단을 내려가다가 멈칫했다.

이송하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2팀장님이 엄마한테 연락하셨나 봐요.

비상계단을 밝히던 불이 툭 꺼졌다. 나는 어둠속에 우두커니 선채로 이송하와 통화했다. 전화를 끊었을 때는, 속을 바짝바짝 말리던 갈증이 싹 사라진 뒤였다. 그 대신 더 뜨끈한 것이 확 일어났다. 카운트다운이 끝났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그 불길을 느낀 순간, 나는 아마도······ 웃었던 것 같다.

< 뒤통수치는 것들은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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