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통수치는 것들은 (3) >
형이 물 잔을 들었다.
“잠깐만. 물 좀 마시고.”
“빈 잔이야.”
알려줬는데도, 형은 입에 대고 목을 꺾은 뒤에야 빈 잔인 걸 깨달았는지 더듬더듬 쟁반에 내려놨다. 담백한 얼굴에 혼란이 가득하다. 가여워 보일 정도다.
그럴 만도 하지. 몇 년 동안 사생활을 내팽개치고 일만 하던 동생한테 여자가 생긴 줄 알고 기대했을 텐데, 막상 들어보니 이건 연애상담인지 정신과상담인지 분간이 안 되니.
쓰게 웃으며 말했다.
“머리 아프게 해서 미안. 당장 이런 얘길 상담할 사람이 형밖에 없더라. 카운슬링을 받아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얼굴이 너무 팔려서 그것도 좀 그렇더라고.”
“미안하긴. 가족이 이러라고 있는 거지.”
형이 손사래를 쳤다.
“일단 가정을 해보자. 너랑 그쪽, 송하 씨가 사귄다고.”
이름을 말할 때만 낮아진 목소리가 다시 올라온다.
“네가 말한 대중의 시선, 향후 커리어, 회사, 그런 것들이 아무 문제가 안 된다고 가정하고 연애하는 거야. 헤어질 일도 없고, 좋은 관계가 깨질 일도 없어. 네가 원한다면 사귀고 결혼하고 잘 살아.”
“엄청 마음 편한 가정이네.”
“사적으론 그렇고, 대신 공적으로는 송하 씨가 네 손 떠나서 다른 사람이랑 일하는 거지. 담당을 바꾸거나, 다른 회사로 가거나. 어때?”
어떠냐고?
이송하의 필모그래피를 하나씩 채우는 것도, 같은 곳을 목표로 나란히 기어 올라가는 것도, 이송하를 꼭대기의 레드카펫 위에 세우는 것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하게 된다고?
“그건 안 되겠는데.”
싸늘한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형이 다시 말했다.
“송하 씨가 그러고 싶다고 하면?”
***
검은 스카프자락이 나부꼈다. 여자는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대리석 타일이 깔린 바닥과 군데군데 희미한 얼룩이 보이는 회백색 벽. 그리고 한가로운 햇살이 흘러드는 유리창. 예사롭다 못해 따분하기까지 한 아파트 복도에서, 오로지 여자만이 이질적이었다.
“누구래? 우리 층에 저런 여자 살았나?”
“이사 오고 한 번도 못 봤는데? 어우, 완전 연예인 포스구만.”
젊은 부부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실수인 척 헛짚으며 여자를 곁눈질했다.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 까맣게 번들거리는 워커. 옷은 평범했지만, 옷걸이는 평범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눈은 커다란 선글라스로 가렸고 머리엔 야구 모자를 썼다. 콧등부터 목까지는 때늦은 스카프를 칭칭 감아 놨다. 걸을 때마다 긴 머리카락이 스카프 아래에서 흔들렸다. 몹시 수상하고 흥미로운 여자였다.
부부가 세 번째로 도어락 번호를 틀렸을 때. 여자는 바로 몇 칸 떨어진 문 앞에서 멈췄다. 매끄럽게 관리된 손이 도어락 위에서 멈췄다가, 벨을 누른다. 곧 여자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닫힌 문에 부부의 시선이 꽂혔다.
“저 집, 그 딸 많은 집이지? 저 집 딸인가?”
“글쎄. 저 집 아줌마가 딸 자랑을 많이 해서 좀 듣긴 했는데. 첫째는 이번에 혜문여대 졸업하고 취업준비중이라고 했고, 둘째는 미술 한다고 했던 것 같고. 넷째가 무슨 대학교 유도부랬는데. 국가대표가 되니 어쩌니 했었어.”
“그럼 셋째는?”
남편의 물음에, 부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셋째를 잘 모르겠네. 외국에 있댔나?”
이송하가 갑갑한 숨을 틔웠다.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고, 거추장스러운 스카프도 풀어헤쳤다. 눈으로는 거실을 둘러봤다. 해바라기가 꽂힌 화병, 오래돼서 가장자리가 헤진 패브릭 소파와 아기자기한 쿠션들.
벽에는 줄로 연결된 액자가 걸려있다. 이송하는 물끄러미 사진을 바라봤다.
제일 위에는 막내가 백일이 됐을 때 네 자매가 서로 끌어안고 직은 사진. 그 아래는 교복을 입은 셋. 그리고 첫째의 대학 졸업식 사진, 둘째가 사생대회 상장을 받은 사진, 막내가 유도복을 입고 지역대회 메달을 들고 있는 사진.
그 옆에는 다섯 명이 찍은 커다란 가족사진이 걸려있다.
평화롭고 자연스러운 사진이다. 이송하는 이곳에서도 이질적이었다.
“밖에 덥니?”
단정한 단발 곱슬머리에 부드러운 눈주름. 공익광고에 나오는 ‘어머니’의 표상 같은 중년여자. 그녀가 이송하의 어머니였다. 손에 든 접시에는 참외가 모양 좋게 놓여있다. 이송하는 어머니가 내미는 포크를 받으며 물었다.
“가족사진 언제 찍었어?”
“어, 네 언니 대학졸업 기념으로. 너한테도 얘기하려고 했는데 네가 워낙 바빴잖아. 그리고 거실에 네 사진 떡하니 붙여놓으면 손님 올 때마다 난리 날 텐데, 가족들이 그렇게 티내는 것도 연예인들한테는 안 좋더다라.”
“그래?”
“그러다가 결국 자식 이름 팔아서 장사하고, 사업하고, 자식이 번 돈 끌어다 쓰다가 사달 나고. 그런 사람들 심심하면 한 번씩 뉴스에 나오잖아. 엄만 그렇게 교양 없고 못 배워먹은 짓 안 한다.”
어머니가 이송하의 어깨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엄마가 다 널 생각해서 처신하고 있으니까······.”
“알았어. 보기 좋네, 사진.”
말허리를 끊고 이송하가 고개를 돌렸다. 방문이 열리고 첫째가 부스스한 머리를 쓸며 나왔다. 어머니와 꼭 닮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뒷목을 주먹으로 몇 번 두드리더니 이송하를 보고 다가왔다.
“막내 왔나 했더니. 웬일이야, 오늘 무슨 날인가?”
“······그냥. 오랜만에 쉬는 날이라서.”
“쉴 시간 있어? 물 들어왔을 때 열심히 벌어야지. 너 백억 벌었다고 기사 떴더라? 연예인이 좋긴 좋다. 백억이면 집이 몇 채야. 내가 대기업 들어가서 평생 벌어도 그거 반도 못 벌 텐데.”
첫째가 이송하의 어깨를 툭툭 치며 감탄했다.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대신 연예인은 한철장사잖아. 송하 너, 돈 관리 잘하고 있지?”
“회사에서 자산관리사 소개시켜줬어.”
“돈 너무 물 쓰듯 쓰지 말고 잘 모아놔. 연예인이라는 게 일할 때나 연예인이지 일 없으면 백순데, 언니 말대로 돈 벌수 있을 때 많이 모아놔야지. 엄마 생각엔 아무리 봐도 네가 연기만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엄마가 너희 대표님이랑 한번······ 이건 다음에 얘기하자.”
첫째를 힐끔 돌아본 어머니가 뒷말을 집어삼켰다.
어느새 소파에 앉은 첫째가 다시 말했다.
“메이킹필름에 넵튠 숙소생활 나오는 거 봤는데, 너 진짜 연기 잘하더라.”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어?”
“제작진이 대사 주는 거 아냐? 너 우리 집에 있을 때보다 말 두 배는 더 하던데? 집에서 그렇게 좀 해봐. 아, 그리고 너 거기서도 엄청 먹더라. 집에 있을 때도 먹을 거에 이름 써놓고 그러더니.”
그 말에 어머니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 족발이니, 치킨이니, 먹는 것만 계속 나와서 엄마 낯이 다 부끄럽더라. 언니들이나 동생은 안 그런데 넌 왜 그렇게 식탐이 많아? 사람들이 보면 부모가 굶기면서 키운 줄 알겠다.”
“굶고 큰 건 우리지. 얻어먹긴 쟤가 제일 많이 얻어먹었잖아. 예쁘다고.”
“어렸을 땐 안 그랬는데 혼자 미국에서 살다 와서 식습관이 잘못됐나. 하여튼 먹는 것도 적당히 해야 복스럽지, 너무 식탐 부리면 보기 안 좋아. 게걸스러워 보이고.”
이송하가 티 나게 눈살을 찌푸리고 나서야 대화가 끊어졌다. 이송하는 손에 들린 포크를 도로 접시에 내려놨다. 참외는 입도 대지 않은 채였다. 그때, 도어락 풀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야야야, 잠깐만! 잠깐만 밖에 있어봐. 집에 손님 왔어!”
대학생인 막내가 우르르 들어오던 친구들 등을 도로 떠밀었다. 똑같이 유도복을 입은 친구들이 현관문 밖으로 밀려나갔다. 재빨리 현관문을 닫은 막내가 커다란 눈으로 이송하를 바라봤다.
“깜짝 놀랐네! 언니 왔으면 연락 좀 하지!”
“내가 손님이야?”
이송하가 물었다. 집안에 잠시 거북한 침묵이 돌았다. 이송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현관으로 걸었다. 그리고 워커를 신었다. 눈이 더 커다래진 막내가 황급히 이송하의 팔을 잡았다.
“잠깐, 언니! 그러고 나가게? 내 친구들 언니가 내 언닌 거 몰라!”
“언니가 아니라 손님이라고 해. 계속.”
높낮이도 없이 말한 이송하가 문손잡이를 잡았다.
“송하야!”
어머니가 고함을 치다시피 하며 다가왔다.
“네 동생 국가대표 될지도 몰라. 근데 네 동생이라는 거 퍼지면 기자들이 둘 다 가만히 두겠니? 연예인 동생이라고 기사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관심 받으면, 애가 같이 훈련하는 동료들 보기 얼마나 미안하겠어. 너한테도 좋을 거 없고. 엄마가 말했지. 우리가 다 널 생각해서 처신······.”
“알았으니까 그만 해.”
이송하가 다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스카프를 둘렀다. 어머니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얼굴을 다 가린 이송하가 현관문을 열었다. 기다리던 학생들의 시선이 꽂히자, 스카프를 더 끌어올렸다.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1층을 눌렀다. 묵직한 워커의 앞굽이 바닥을 툭툭 쳤다. 아래층에서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은 이송하를 보고 한번 흠칫하고, 어두침침한 분위기에 다시 흠칫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이송하가 제일 빨리 걸어 나왔다. 아파트 입구를 지나자 걸음은 느려졌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문득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넵튠의 단톡방에는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 몇 개가 올라와있다.
포문을 연 건 역시나 임서영이었다. 간만에 쉬는 날을 가족들이랑 보내야 한다고 고향집에 가더니, 셀카를 찍어 올렸다. 울었는지 벌게진 눈을 한 임서영의 뒤쪽에 밥 먹는 가족들 모습이 보였다. 밥상이 진수성찬이다.
임서영의 등쌀에 엘제이와 이태희도 짤막한 답을 달았다. 이태희는 아버지와 횟집에 가서 낮술을 기울이고 있고, 엘제이는 옛날 친구들과 어울려 술집에서 회포를 푸는 중이었다.
이송하도 답장 칸에 손을 얹고 망설이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느리던 걸음이 아예 멈춰버렸다. 주위를 휘휘 둘러본 이송하가 선글라스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화면에 찍힌 발신인을 확인했다. 곧 캄캄하던 눈동자 속에 눈이 부실 만큼 환한 햇무리가 번졌다.
“네, 오빠.”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대며, 이송하는 탭댄스라도 추듯 경쾌하게 걸었다.
***
“너 계속 그러고 기다렸어?”
“사람이 많아서요. 들키면 안 되잖아요.”
냉큼 조수석에 올라탄 이송하가 얼굴을 가린 것들을 벗어던진다.
얼굴은 밝아 보인다. 이쪽은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가슴이 덜컹했는데. 집에 들렀다가 혼자 나왔다길래 데리러 왔더니, 혼자 공원 벤치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있었다. 무슨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생각하다가 내심 혀를 찼다. 주인? 강아지?
젠장, 비유를 해도 꼭. 아주 제대로 미쳐가는구만.
옆을 돌아보니 이송하는 뭐가 그리 좋은지 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다. 글러브 박스를 척 열고 뒤지는 폼이 아주 자연스럽다. 큼직한 쿠키가 들어있는 봉지를 뜯더니 하나는 나한테 주고 하나는 제가 덥석 문다.
“배고파? 집에서 밥도 안 먹고 나왔어?”
“······갑자기 손님이 와서요.”
“그럼 밥 먹으러 가자. 나도 안 먹었어.”
사실은 형수님이 권해서 밥을 두 공기나 쑤셔 넣었지만, 한 공기쯤 더 들어가겠지. 그동안 못 챙긴 끼니가 얼만데. 조용하게 밥 먹을 수 있는 곳을 떠올리며 출발하는데, 옆에서 이송하가 먹던 쿠키를 주섬주섬 다시 포장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빠, 제가 먹는 게 게걸스러워 보여요?”
“아니.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 너 먹는 거 보기 좋아.”
집에서 무슨 일이 있긴 있었구나. 그동안 먼발치에서 봤던 이송하의 가족들이 떠올랐다. 기삿거리가 될 만큼 사이가 험악한 가족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살가운 것도 아니었다.
이송하가 쿠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위아래로 언니동생이 많잖아요. 옛날부터 제 게 별로 없었거든요. 자꾸 누가 가져가거나, 없어지거나 해서. 그래서 먹는 게 좋았어요. 일단 삼켜버리면, 무조건 제 게 되는 거니까. 제 배를 갈라서 꺼내갈 순 없잖아요.”
이송하가 나를 바라봤다.
“전부터 오빠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누가 오빠를 안 가져갔으면 좋겠는데, 오빠는 사람이라 내가 먹어치울 수도 없고. 불안하고. 그래서 제가 이상해진 것 같아요. ······오빠는 물건이 아닌데.”
눈을 감았다 뜬 이송하가 다짐하듯이 말했다.
“멀쩡해질 때까지 노력할게요. 매일 같이 일하는 게 아니라도, 이렇게 한 번씩 오빠가 데리러오고, 같이 밥 먹고, 그러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멀쩡해지고 나면 나중에 제가, 계획대로······.”
비장하기까지 한 목소리가 웅얼거리다가 꼬리를 감췄다.
멀쩡해질 때까지라.
나는 차창에 시선을 고정하고 내 속을 들여다봤다. 뱀 한 마리가 신나게 허물을 벗다말고 엉거주춤 앉아 있다. 그냥 벗는 김에 훌훌 다 벗어버리지, 뭘 망설이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젠 멀쩡해지려고 노력해야 할 사람이 이송하뿐만이 아니지.
그리고······.
“송하야. 너 그, 십년지대계.”
“네?”
“아니지, 5년짜리라고 했나? 네가 말한 그 계획.”
내 질문에 당황했는지, 이송하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오, 5년 계획이에요. 2년쯤 지났으니까 이제 3년?”
3년이라.
“3년. 그때까지 기다려보자, 그럼.”
< 뒤통수치는 것들은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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