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83화 (183/218)

< 뒤통수치는 것들은 (2) >

미니밴 시동을 걸었다가 도로 내렸다. 어쩐지 일의 연장선으로 느껴져서.

도수 없는 안경하고 모자를 쓰고 지하철 역사로 향했다. 대중교통은 꽤 오랜만이다. 메이킹필름이 방송되고 나서부터는 이렇게 한가롭게 밖에 돌아다닐 일도 없었고.

번화가 거리는 눈 돌리는 곳마다 연예인 얼굴이 보인다. 옥외전광판, 포스터, 현수막, 입간판.

그 평범한 풍경 중에서도 나한테만 특별한 것들이 있다. 오픈카페에서 흘러나오는 프리티걸 신곡. 그리고 넵튠이 연장계약 중인 탄산수 광고가 붙은 버스정류장 같은 것.

포스터는 집에도 종류별로 모아놨지만, 길거리에 공개된 걸 보는 건 체감온도가 확 다르다.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면 가슴 한편이 좀 근지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그리고 가파른 계단을 뛰어올라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의류 브랜드 현수막을 장식한 남자배우를 보면 남조윤이 더 성공해서 저런 걸 찍었으면 좋겠고, 콘서트 포스터를 보면 넵튠의 개인콘서트를 열고 싶고. 그리고 외국인을 보면 이송하의 미국진출을 꿈꾸게 되고.

생각은 점점 거미줄을 타고 넓어진다.

인상 깊었던 배우의 광고가 보이면, 현재 소속사가 어디더라, 언제쯤 저 배우가 FA시장에 나올까를 생각하게 되고. 독특한 분위기의 일반인을 보면 연예인 지망생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역사까지 걷는 동안, 이송하는 눈 돌리는 곳마다 보였다.

콘택트렌즈 전문점에는 광고 포스터가 걸려있고, 같은 블록에 있는 주얼리 매장에는 이송하가 협찬 귀걸이와 목걸이를 걸고 있는 사진이 줄줄이 프린트 돼서 붙어있다. 고깃집에는 소주 광고 입간판이 서있다.

실물이 더 익숙한 애를 이렇게 보니까, 어쩐지 좀 미묘한 감상이 든다.

“저거 소주광고 모델 손채영 아니었냐? 언제 이송하로 바꿨대?”

“한참 됐어, 히키코모리 같은 새꺄.”

젊은 남자들이 입간판 앞에 멈춰 서서 떠들었다.

“이송하보다 손채영이 더 예쁘지 않냐? 난 그렇던데.”

“걔네 둘 정도면 취향 문제지, 병신아.”

“난 연애는 이송하랑 하고 결혼은 손채영이랑 한다. 이송하는 내가 떠받들고 살아야 될 것 같아서 감점이고, 손채영은 좀 요조숙녀 같잖아. 집에서 앞치마 입고 막, 아냐?”

어, 아냐.

요조숙녀? 요절날 소리 하고 있네.

“야, 이송하랑 결혼하면 떠받들고 살아야지! 걔 작년에 백억 벌었다는데!”

그 정도는 아니고.

“부질없다. 걔네야 같은 연예인이나 재벌들이랑 연애하고 결혼하겠지!”

“뭐 상상도 못하냐?”

떠들던 남자들이 서로 욕지거리를 하며 사라진다.

나도 이송하의 입간판을 잠시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지하철 역사는 혼잡했다. 지하철에 타고서도 두정거장을 서서 가다가 겨우 빈자리를 잡았다. 귀에 먹통 이어폰을 끼고, 모자를 좀 더 눌러 썼다. 연예인이 아니니 들켜도 신기하다는 시선을 받는 게 대부분이긴 하지만, 가끔은 희한한 사람들이 꼬이기도 해서.

안경 알 너머로 일상의 풍경을 구경했다.

“야야, 너 옆옆옆자리 남자 봐봐. 장선우 아냐?”

정선우겠지.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친구 옆구리를 찌르면서 나를 힐끔거린다.

“맞는 것 같은데? 주변에 이송하 있나 좀 봐봐.”

“연예인이 지하철을 왜 타냐? 밴이나 자차 타고 다니지!”

우리 애들은 택시도 자주 타는데. 가끔은 스쿠터도 끌고.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하다가,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일의 연장선처럼 느껴져서 미니밴도 두고 출발한 건데. 계속 일과 애들 생각만 하고 있다. 특히 이송하는 아예 머릿속 한편에 세 들어 살고 있는 느낌이다.

새삼 느꼈다.

이 일이 내 인생에 어마어마하게 깊게 파고들어와 있구나.

“삼촌!”

“이건 간장, 이건 파닭. 배터지게 먹어라.”

달려드는 쌍둥이들에게 치킨 두 마리를 미끼로 던졌다. 전에는 넷을 팔다리에 다닥다닥 매달아도 거뜬했지만, 이젠 무리다. 턱도 없겠다. 못 본 사이에 콩나물들처럼 컸다. 내가 얘들을 한 이년 못 봤나?

날쌔게 치킨을 받은 애들 재잘거린다.

“배터지게 먹으라고? 삼촌, 지금 우리 무시하는 거야?”

“우리 작년부터 1인 1닭하는데? 치킨에 대한 예의지!”

예의는 개뿔. 형이랑 형수 등골이 휘겠구만.

“삼촌, 근데 우리 사촌동생 언제쯤 생길 계획이야?”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보고 똥강아지들 다 컸다고 서운해 하시던데?”

“사촌동생들도 네쌍둥이였으면 좋겠다! 쌍둥이는 유전이잖아!”

“무서운 소리 하지 마라.”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거실로 들어갔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가득하다. 뭔가 팔팔 끓는 소리, 그리고 프라이팬 위에서 기름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듣는 소리다.

형수님이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애가 넷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얼굴에 반가운 웃음이 떠오른다.

“이게 얼마만이에요? 한동안 TV로 봐서 그런가, 연예인 보는 것 같네!”

“아, 방송 보셨어요?”

“당연히 봤죠! 회사에 어린애들도 그거 많이 보더라고요. 내가 도련님이라고 말하고 싶어서 입이 아주 근질근질 했다니까요?”

“말하지 그러셨어요. 엄청난 비밀도 아닌데.”

“안 돼요. 그거 얘기하면 저도 피곤하고 도련님한테도 민폐예요. 분명 누구누구 사인 받아다 달라고 난리 날 텐데. 그리고 회사 체육대회나 결혼식 축가로 연예인 좀 불러주면 안되냐고 들들 볶일 거예요. 안 봐도 뻔하지.”

딱 잘라 말한 형수님이 빙그레 웃었다.

“요즘 일은 어때요? 여전히 재밌어요?”

“예. 좋아서 하는 일인데 재미없으면 안 되죠.”

“다행이네요. 형이랑 잠깐 얘기하고 있어요, 점심 다 돼 가니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형이 보던 책을 소파에 내던졌다. 그리고 나를 애들 방으로 끌고 들어간다. 2층 침대가 놓인 방은 어수선하다. 벽에는 내가 구해다준 연예인 사인들이 붙어있고, 책장에는 앨범 CD가 줄줄이 꽂혀있다.

“말해봐. 무슨 연애상담? 너 애인 생겼어? 결혼까지 생각하는 관계야?”

형이 급하게 물어왔다. 평소 지루할 만큼 조용하던 사람이, 지금은 눈이 반짝반짝하다.

“네 나이쯤이면 슬슬 결혼 생각하고 만나잖아. 나는 네 나이에.”

“애가 넷이었지. 알아.”

바닥에 대충 앉고 침대난간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말을 골랐다. 혼자 정리하다보니 머리만 복잡해져서 왔는데, 무슨 말부터 꺼내야 될지 모르겠다.

어렵다.

“애인은 없어.”

“그럼 그거 뭐야, 썸 타는 상황인 거야? 아니면 네 짝사랑?”

“이게 좀 복잡한데.”

“혹시 상대가 연예인이야?”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자? 남자?”

“······여자.”

예상도 못했던 질문이라, 심각하던 기분이 확 깼다.

“아니, 네가 복잡하다길래. 연예계는 그런 쪽에 열려있다면서. 네가 작년에 남조윤 씨한테 반찬통도 많이 싸가고 그랬잖아.”

“아니라고. 송하야, 송하.”

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애들 책상을 뒤져서 넵튠 미니앨범의 포토북을 꺼낸다. 휘리릭 넘기고 한 페이지를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송하 혼자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이다.

“이송하?”

“내 주변에 송하가 걔 말고 또 있어?”

“야, 너 눈이 높아도 너무 높아진 거······!”

말꼬리를 집어삼키고 벌떡 일어나더니, 밖에 나가서 냉수 두 잔을 들고 왔다. 얼마나 급하게 따랐는지 쟁반에 물이 철철 넘쳐있다. 나는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닫힌 문을 힐금 봤다.

그리고 오랫동안 눌러놨던 이야기를 꺼냈다.

“송하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뭐? 직접 들었어?”

“아니. 나 좋아하냐고 물었었는데 아니래. 절대 아니래. 죽어도 아니래.”

숨소리도 죽이고 경청하던 형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아닌가보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래. 처음엔 혼자 압박감을 많이 느끼던 애라, 옆에서 도와준 나한테 기대는 건줄 알았는데. 아니야. 느끼면 느낄수록, 이건 모르는 게 병신인 수준이라.”

처음엔 설마 했다. 독점욕 같은 게 지나쳐서 그런 줄 알았지. 서지준이나 이봉준 실장의 관계처럼.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아니다. 내가 엘제이처럼 눈치가 비상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병신까진 아니거든.

“그게, 언제부터 그랬는데?”

“오래됐어. 일 년도 더됐으니까.”

형이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그걸 지금까지 모른척하고 있었어?”

“아는 척을 해서 어쩔 건데.”

고개를 기울이며 대꾸했다. 형이 안경을 고쳐 쓰며 궁리했다.

“아, 저쪽에선 너 안 좋아한다고 했댔지. 근데 만약에 너도 마음이 있으면, 잘 얘기해볼 수도 있잖아. 요즘 연예인들은 연애 많이 하던데. 광고모델 하는 것 때문에 열애설 나면 안 되나? 그럼 그냥 비밀리에 만나도 되고.”

고개를 젓고 말했다.

“이 바닥에 비밀이 어딨어. 시간문제지.”

국내에도 파파라치 매체가 늘어나는 판인데.

일이 터지면 광고주들이 한바탕 난리가 날거고, 이미지에도 타격을 입겠지. 한창 팬 유입을 늘려야 할 때인데 그것도 주춤할 거고. 이 바닥은 어제까지 사랑받은 사람이 오늘은 외면 받는 곳이니까.

차라리 같이 드라마를 찍었던 서지준이나 임주원이 상대라면 대중의 반응이 좀 얌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상대면 영 애매하지. 분명 좋은 반응보다는 나쁜 반응이 우세할 거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관계가 되면 일단 담당 매니저 일부터 그만둬야 돼. 회사 문제도 있고, 지금처럼 밤낮없이 붙어 다니면 별별 지저분한 말이 다 나돌 테니까. 그러다가 헤어지면 그땐 송하랑 같이 일하는 게 더 힘들어지겠지.”

포토북 속의 이송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같이 대본리딩을 하고, 악플과 논란을 겪고, 결국에는 보란 듯이 성공하고. 그렇게 같은 곳을 올려다보며 기어 올라온 시간이 눈앞에 스친다.

“그래서 모른척했어. 송하도 그래서 극구 아니라고 한 걸지도 모르고.”

다른 어떤 리스크보다, 지금의 관계가 깨지는 게 가장 감당하기 힘들다.

언제 삐끗할지 모르는 연애감정을 위해서 평생을 같이 가고 싶은 파트너 관계를 깨뜨리느니, 가만히 묻어두는 게 낫다.

그리고 생각했다.

만약 몇 년쯤 더 지나서 내가 이 바닥에서 제대로 뿌리를 박고 난 후에. 이송하도 발밑을 탄탄하게 다져서 누구랑 연애를 해도 버틸 수 있을 만한, 그런 여유 있는 환경이 됐을 때.

만약 그때까지도 이송하가 변함없이 지금처럼 나를 바라보면.

어쩌면 그때는······.

“그랬는데, 갑자기 상담이 필요하게 된 이유는 뭐야?”

형이 다시 물었다. 순간 머릿속을 떠돌던 상념이 날아갔다. 그 자리에 익숙한 뱀이 기어들어온다. 나는 찬 물로 입술을 적시고 말했다.

“나한테 변화가 좀 생겼는데.”

“변화?”

“송하가 홀로서기를 하겠다고 하더라고. 나 말고 딴 사람이랑 일해 보겠대.”

뱀이 허물을 벗는다. 냄새가 역하다.

“이건 환영해야 할 일이거든. 송하가 나한테 지나치게 집착하는 걸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도, 걔를 위해서는 긍정적인 일이고. 그런데.”

“그런데?”

“그게 싫더라고.”

목소리에 독이 섞여 나오는 느낌이다.

“송하가 나 외에 다른 사람한테 기대거나 의지하는 것도 싫고, 거슬려. 무슨 미친놈 같은 충동이 들거든. 그래서 내가 지금 좀 헷갈리는데. 이게 사람사이의 평범한 연애감정인지, 아니면 연예인과 매니저 사이의 과도한 소유욕인지.”

만약 두 번째라면.

이송하의 약점 따위를 잡아서 다른 곳으로 못 떠나게 묶어놓는, 그런 환멸스러운 짓을 하는 게 백한성 대표가 아니라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일까봐.

당황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형에게 다시 물었다.

“형이 보기엔 이게 뭐 같아?”

< 뒤통수치는 것들은 (2)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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