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통수치는 것들은 (1) >
우뚝 발이 멈춘다.
계단 몇 개를 사이에 둔 채, 이송하가 나와 정재이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길고 컴컴한 터널을 혼자 걷는 느낌이었다.
“너 괜찮아?”
재빨리 계단을 내려가는데 이송하가 손을 들었다.
“오지 마세요.”
“뭐?”
“제가 잔 하나 깨먹었어요. 유리조각 있으니까 거기 계세요.”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구두를 신은 왼발을 대리석 디딤판에 문지른다. 유리조각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이송하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차분하게 세팅돼 있던 머리가 흐트러진다.
“누구 다치기 전에 빨리 치울게요.”
“가만있어. 재이야, 관우한테 가서 얘기 좀 해줘.”
당황한 얼굴로 내려오던 정재이가 도로 5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다시 이송하를 보며 물었다.
“다친데 없어? 깨먹었으면 피하지 그걸 왜 밟아?”
“잠깐 정신이 팔려서요. 전 멀쩡해요.”
이송하가 증명하듯 다리를 몇 번 굽혔다가 폈다. 스커트 밑으로 뻗은 다리를 유심히 살폈다. 다행히 핏자국은 안 보인다, 고 생각했을 때. 스타킹이 툭 찢어지더니 올이 주르륵 나갔다. 이송하가 슬그머니 다리를 뒤로 뺀다.
“살은 멀쩡해요.”
“멀쩡하긴. 너 일단······.”
말꼬리가 파묻혔다. 아래에서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터지더니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괜찮은지, 다친 곳은 없는지, 사람들은 이송하한테 한마디라도 더 말을 붙이려고 안달이었다. 이송하가 제 뺨을 꾹꾹 눌렀다.
“샴페인을 좀 많이 마셨나 봐요. 발을 헛디뎠어요.”
“어이구! 안 넘어진 게 다행이네!”
“아, 그랬으면 앞구르기로 가뿐하게 일어났을 거예요.”
“응? 앞구르기?”
“얼라이브 찍으면서 체조 배웠거든요.”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웃음으로 넘기는, 그 일련의 조처가 능수능란하다. 역시 낯설다. 백한성 대표가 없는데도, 이송하의 모습이 영 낯설게 보였다.
“송하야.”
사람이 더 모이기 전에 움직였다.
“스타킹 안에 유리조각 들어갔을지도 몰라. 내려가서 자세히 봐.”
“네.”
넵튠 애들에게 이송하를 맡기고, 걱정하는 사람들과 박살난 유리잔을 수습했다. 그리고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뒤풀이 파티 때문에 일찌감치 불이 꺼진 지하층 안쪽, 연습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임서영이 바닥에 앉은 이송하의 다리를 더듬고 있었다.
“야, 안 다쳤으니 망정이지! 넌 던질 게 없어서 유리잔을 던지냐?”
“던진 게 아니라 떨어뜨린 거라니까.”
부정하는 이송하의 얼굴을 이태희가 붙잡았다.
“보자. 취했어?”
“그런가봐.”
이송하가 이태희의 손에 뺨을 기댔다. 임서영이 코웃음을 친다.
“웃기시네! 언니랑 산삼주로 대작도 하던 게 샴페인 몇 잔으로 취하냐?”
“오늘은 술이 달았어. 원래 이런 날은 빨리 취하는 날이야.”
“어디서 약을 팔아! 너 오랜만에 손채영 봐서 트라우마 재발한 거 아냐?”
“트라우마?”
느릿느릿, 이송하가 입안에서 굴리듯이 발음했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이젠 손채영은 봐도 대수롭지도 않아. 오히려······.”
“오히려? 오히려 뭐?”
이송하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돌렸다.
“아, 취한다. 오빠 보고 싶다.”
“봐.”
말하면서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깨 두어 개가 흠칫거린다.
“나 송하랑 둘이 얘기 좀 하자.”
“어어, 그럼 보초 설까요?”
임서영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보초가 왜 필요해.”
“나,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안 일어나. 얘기한다니까. 그냥 문만 닫아. 그리고······.”
“옆에서 자판기 음료수나 한잔 마실게요.”
엘제이가 대신 말했다. 빙글빙글 웃는 눈매가 야살스럽다.
“우리만 위로 올라가면 속으로 소설 쓰는 사람들 있을 테니까. 얘처럼.”
“내가 뭘!”
임서영과 엘제이가 먼저 나가고, 이태희가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연습실 안이 고요해졌다. 이송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생채기 없이 말끔한 맨다리를 살펴보며 입을 뗐을 때.
“사실 헷갈려요.”
이송하가 먼저 말했다.
“떨어뜨린 게 아니라 던진 걸 수도 있어요. 그러고 싶었으니까.”
“내가 재이한테 연기레슨 받아보라고 한 것 때문에?”
“네.”
선선히 대답하고, 이송하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옛날 생각이 났어요. 오빠가 저한테 연기해보고 싶은 생각 없냐고 물어봤을 때요. 여기, 연습실에서. 맨날 그게 어젯밤 일처럼 생생했는데, 갑자기 너무 멀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리고 손채영이 떠올랐어요.”
손채영?
한 호흡 뒤에, 이송하가 다시 말했다.
“그것 때문이에요. ······손채영이 왜 저를 끔찍해했는지 이해가 돼서요.”
“뭐라고?”
“걔가 저보다 연기를 잘할까요?”
부스러진 목소리가 물었다. 한기를 느낀 사람처럼, 이송하가 제 팔을 감싸 안았다. 팔뚝을 힘껏 움켜잡은 손가락이 창백하다. 내리깔린 속눈썹 끝에 눈물이 매달렸다.
입 안이 쓰다. 침을 삼키는 게 고역일 만큼.
그냥 가벼운 제안이었는데. 저번에 본 미래에서 정재이를 ‘제2의 이송하’라고 했던 게 떠올라서. 대세로 떠오른 걸그룹의 센터 역할이라서 기자들이 끌어다 붙인 말일지도 모르지만, 혹시 연기에도 재능이 있을까 싶어서.
레슨을 시켜보고 재능이 있으면 계발하고, 아니라면 가수활동에 매진하게 했겠지. 그걸 알아보려고 가볍게 제안했던 것뿐인데. 이송하한테는 그 말이 사형선고처럼 들렸을까.
“제가 이상한 거 알아요.”
고해성사 하듯, 이송하가 속삭였다.
“멀쩡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손채영처럼 되면 안 되니까.”
머릿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겹쳐진다.
언젠가 들었던, 뇌리에 깊이 박혀있던 백한성 대표의 목소리.
‘······그래서 대부분 뭔가에 의지하려고 해. 그게 약이나 술 같은 게 되기도 하고······ 사람이 되기도 하고. 너한테 의지하게 만들어. 다른데 눈 돌리지 않게.’
이송하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그 감정이 속속들이 다 헤쳐보기도 어려울 만큼 복잡하고 엉켜있다는 것도 안다. 그렇게 되도록 나도 한몫 했으니까. 지나칠 만큼 맹목적이고, 집착하는 면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무엇보다 나한테 기대고, 나한테 의지하도록.
말라붙은 입술을 핥고 말했다.
“넌 손채영하고는 달라.”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송하가 고개를 들었다.
“오빠. 저, 이제 다른 실장님이랑 스케줄 갈게요.”
이송하한테 하려던 말들이 깡그리 밀려나갔다.
“지금도 간신히 스케줄 맞추시는 거 알아요. 아는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다가 지금까지 왔어요. 앞으로는 훨씬 더 바빠지실 테니까 오빠가 제 스케줄 다 안 챙겨주셔도 돼요. 저도 홀로서기 할게요.”
홀로서기?
“그리고 혹시 다른 팀······ 2팀에서 임시적으로 저랑 일하고 싶다는 실장님이 있으면 그것도 괜찮아요. 어차피 한 번쯤 거쳐야 되는 일이니까.”
다른 팀 실장한테 맡겨도 괜찮다고?
무언가 울컥 치밀었다. 그동안 느꼈던 불쾌함은 귀여운 수준이다. 기분이 험상궂게 날뛰어서 속이 매스꺼울 정도였다. 텁텁한 침을 삼키고 입가를 문질렀다.
이래서야 이송하를 유난스럽다고 생각할 처지가 아니다. 지금 내 손에 샴페인 잔이 들려있다면, 아까 그것보다 더 박살이 났을지도 모르니까.
며칠 동안 차곡차곡 쌓였던 의심과 경계가 툭 튀어나갔다.
“대표님이 그러라고 해?”
“네?”
“손채영 일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대표님이 너 불러다가 뭔가 지시라도 했어?”
속은 난장판인데, 입 밖으로 나간 말은 신기할 정도로 부드럽다.
이송하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지시요?”
“아니면, 협박이라든가.”
협박.
그동안 혀끝에 물고만 있던 말을 뱉었더니 의혹이 더 거대하게 다가온다.
백한성 대표는 어떤 사람이지?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미래의 나는 백한성 대표의 방식에 환멸을 느끼고 W&U를 뛰쳐나갔다고 했고, 다시 정정했지. 백한성 대표 밑에 있는 게 나았을 거라고. 뱃속까지 시커먼 사람들이 넘치는 바닥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회색인 사람이었다고.
내가 지금껏 보고 겪은 백한성 대표는 유능하고, 때로는 든든하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손채영이 말하는 백한성 대표는 소속 연예인의 약점을 잡아 목줄을 매놓는 사람이다.
만약에 백한성 대표의 방식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면,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이송하가 이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한테 무슨 말 들으셨어요? 정말 저번에 말씀드린 게 다예요. 제가 오빠한테 한 말은 다 제 생각이에요. 협박 같은 건 없었어요. 대표님이 뭐 때문에 그런 극단적인 짓을 해요?”
뭐 때문에?
이송하가 걸어 다니는 1인 기업 소리를 들을만한 급이 됐으니까. 백한성 대표가 직접 회사 간판이라고 언급할 만큼 컸으니까. 7년짜리 전속계약 기간은 3년밖에 안 남았고, 대표와 임원들은 이미 그 이후를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백한성 대표는 설득보다 협박이 더 쉬운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나처럼.
“너, 그때 그 사진. 나랑 같이 찍혔다고 했던 거.”
“그·······사진이요?”
이송하가 불시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놀란다. 상체가 뒤로 주춤 물러났다.
“혹시 그게 네 발목 잡을 수도 있는 사진이면, 내가.”
“아니에요! 그 사진은 그냥, 그, 낯부끄러운 흑역사 같은 거예요. 발목 잡힐 만한 사진 아니에요. 만약 공개되더라도 눈 한번 딱 감고 수습하면 되는, 그 정도 문제예요.”
“정말이야?”
“네. 갑자기 왜 그런 걱정을 하세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되묻는다. 거짓말하는 기색은 없다. 이송하가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를, 나를 속일 수 있는 사람인가? 내가 강박에 사로잡혀 있나? 정말 내가 모르는 협박 같은 일은 없었나?
그렇더라도, 앞으로도 없을까?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야말로 움직이는 정신병동이다.
한숨을 내쉬며 당부했다.
“송하야,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기면 나한테 꼭······.”
“오빠.”
이송하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 오빠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질이 나빠요.”
“뭐?”
“누구한테 협박당하는 것보다는, 누굴 협박할 생각을 하고, 아니, 할까봐 걱정인데. 그리고 대표님은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전 이제 대표님도 별로 안 무섭거든요.”
이송하가 슬며시 웃었다.
“제가 무서워하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오랫동안 팽팽하게 조여져 있던 실이 툭 끊어졌다.
*
여름의 문턱을 넘어서긴 했나보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창밖에 햇볕이 부딪치고 있었다. 드러누운 채 커튼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집었다.
낮밤 없는 기자들과 피디, 작가들의 흔적이 부재중 목록에 가득하다. 다른 때라면 하나하나 살폈겠지만, 오늘은 다 제쳐놓고 전화부터 걸었다. 금방 소란스러운 배경음과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서 제일 바쁜 놈이 아침부터 웬일이야? 지금 퇴근해?
“아니, 쉬는 날이야.”
-너한테 쉬는 날도 있었어? (아빠, 왜? 삼촌 쉬는 날이래? 백만 년 만인 거 아냐? 쉬는 날이면 놀러오라고 하자!) 들리지? 애들도 놀란다.
이런 소리를 들을 만도 하다. 한동안은 정말 숨도 안 쉬고 달렸으니까. 일 생각 하나도 안하고 온종일 쉬어본 게 언제 적인지도 모르겠다. 친구 놈들은 군대 간 셈 치라고 하더니 말뚝 박았냐고 떠든다.
-로드매니저 할 때는 실장으로 올라가면 좀 숨통 트인다더니, 넌 왜 나날이 더 바빠? 집에 못 내려간 지도 꽤 됐잖아. 너 사생활은 있냐? 내일모래 서른인데 누구 만난다는 말도 없고. (아빠! 나, 나도 한마디만 할게!)
곧 전화기 너머에서 심각한 목소리가 들렸다.
-삼촌! 티비에 나왔는데 청춘은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까지래! 삼촌은 내년부터 청춘도 아냐!
“너희도 이제 귀여운 나이 다 지나서 징그럽다. 삼촌한테 존댓말 써.”
-삼촌이 우리보고 징그럽대!
왁왁 떠드는 쌍둥이들 틈에, 형의 웃음소리가 다시 들렸다.
-너 보고 싶어서 저러는 거야.
“지금 갈게.”
침대를 짚고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온다고? 그래도 돼?
“프로젝트도 끝났으니까 잠깐 숨 좀 돌려야겠어. 정리할 것도 좀 정리하고. 그래서 말인데, 형.”
-어?
“나 상담 좀 하자.”
-나한테? 무슨 상담. 인생 상담?
“아니, 연애상담.”
< 뒤통수치는 것들은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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