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81화 (181/218)

< 누가 그의 사람인가 (13) >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렸던 대리석 계단이 낯설다. 백한성 대표와 이송하도 낯설었다. 평소와 같은 옷차림인데. 여유로운 표정으로 웃는 백한성 대표에게서도, 서늘한 이송하에게서도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올려다봤다.

나뿐 아니라 서지준에게 쏠려 있던 시선들도 모조리 그쪽으로 옮겨 붙었다. 회사 직원들도, 방송국과 프로덕션 관계자들도. 심지어 메이킹필름 팀의 카메라까지.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은 여럿이었지만, 두 사람의 들러리로 보일 뿐이다.

그 모습이 마치······.

“이거 꼭.”

서지준이 장미꽃다발을 어깨에 비스듬히 걸치며 말했다.

“주연 등장하는 것 같네.”

백한성 대표가 걸어왔다. 몇몇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면서. 소탈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존재감은 거목처럼 뿌리 깊고 묵직하다. 그의 근처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든다. 이송하는 여전히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곧 그가 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는 꺼칠꺼칠한 침을 삼키고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음. 나도 정 팀장이랑 샴페인 한잔 마실까 하고.”

백한성 대표가 내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내가 그에게 샴페인 잔을 건넸을 때, 2팀장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보란 듯이 웃는 얼굴이다.

“그럼 나도 다시 한잔 주지, 정 실장. 대표님 오셨는데 건배는 해야지.”

빈 잔을 내밀던 2팀장이 미간을 찌푸린다. 그가 백한성 대표에게 말했다.

“아, 지금은 팀장이죠. 사람들이 정선우 팀장 부를 때마다 호칭이 이랬다저랬다 해서 저도 헷갈리네요. 이제 프로젝트팀도 끝났으니까 호칭을 통일해야 헷갈리는 일이 없어지겠······.”

“그럼 앞으로는 팀장으로 통일해.”

백한성 대표가 말했다. 호수에 조약돌 하나 던지는 것처럼 가볍게. 하지만 파문은 컸다. W&U직원들은 물론이고, 말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전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2팀장은 거의 졸도 직전으로 보였다.

“방금 말씀이, 그러니까, 팀장이요?”

“내가 약속한 게 있거든.”

대꾸하면서 백한성 대표가 나를 봤다.

“이번 프로젝트 성공하면, 정식으로 직급 올려주겠다고.”

“대표님!”

“성공했잖아. 나도 약속 지켜야지.”

그가 샴페인 잔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갑자기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 기분이다. 시선에 파묻힐 지경이었다. 손채영 문제가 정리된 다음에나 조용히 언급할 줄 알았는데.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아침 인사하듯 말할 줄은 몰랐지.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고, 잔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고맙지. 2년 전부터 지금까지 날 실망시킨 적이 없는데. 이번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넵튠도 그렇고, 새 식구를 발굴한 것도 그렇고. 송하를 W&U간판스타로 키워낸 것도 정 팀장이고.”

힐끔 이송하를 바라봤다. 날 보고 웃고 있다. 축하한다는 듯이.

“간판이요?”

서지준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는 백한성 대표에게 깍듯이 인사하더니,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장미꽃다발을 내려 한 송이를 쑥 뽑았다. 이봉준 실장이 서지준의 옆구리를 쑤셨으나 소용없었다. 서지준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장미를 백한성 대표에게 내밀었다.

“저한테도 간판이라고 한마디 해주시죠, 대표님. 여기 보는 눈도 많은데.”

“그럼. 지준이도 당연히 우리 간판이지.”

백한성 대표가 소리 내 웃었다. 그리고 선뜻 장미꽃을 받아 흔들었다. 모여 있던 사람들 틈에서 웃음이 흘렸다. 그가 서지준과 2팀장, 그리고 나를 번갈아 보며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다른 팀인데도 격의 없고. 보기 좋네.”

2팀장이 입을 열려는 순간, 백한성 대표가 다시 말했다.

“넵튠도 우리 간판이고. 저기 새 식구, 프리티걸도 우리 간판이고.”

“가, 감, 가, 검사합니다.”

붕어들이 화들짝 놀라며 희한한 발음으로 인사했다.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음악이 뚝 끊긴 파티장처럼 어색하던 분위기가 금방 부드러워졌다. 이제 뻣뻣하게 굳어있는 건 2팀장뿐이었다.

백한성 대표가 빙긋이 웃었다.

“W&U소속 연예인들은 다들 간판이지.”

“저도요?”

싱그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인파 속에 선글라스와 모자를 쓴 여자가 비딱하게 서 있었다. 손채영이다. 저건 물구나무를 서서 봐도 손채영이었다. 걸어오며 선글라스를 벗는다. 힐끔거리던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홍해가 갈라지듯 길이 생겼다.

손채영이 여긴 갑자기 왜, 무슨 일로 왔지?

회사에선 친한 척도 말라더니, 서지준처럼 나한테 축하소리를 하려는 건 아닐 테고. 아니겠지. 설마. 불현듯 손채영의 집에서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에서 잘그락거렸을 때.

2팀장이 이를 물고 말했다.

“채영이 넌 여기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요. 팀장님 보러 왔죠.”

“무슨 팀장?”

“제가 볼일 있는 팀장님이 누구 또 있어요?”

2팀장을 똑바로 보고 하는 말에, 그의 눈썹이 올라갔다.

나는 어색한 입매를 샴페인 잔으로 가렸다.

“광고 스케줄 때문에 할 얘기 있어요. 조용히 올라가려고 했는데, 대표님이 간판 얘기를 하시길래. 나도 모르게 끼어들었네.”

조금 누그러진 2팀장이 말했다.

“넌 간판 정도가 아니라 대들보지. W&U대들보.”

“대들보?”

손채영이 피식거리며 눈을 돌린다. 시선은 나를 비껴가 백한성 대표에게 닿았다. 그의 표정에 보기 드물게 곤란한 빛이 스친다. 곤란? 손채영이 관계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사고라도 칠까봐 걱정하는 건가?

손채영이 시선이 이송하에로 넘어간다. 그리고 가장 오래 머물렀다. 이송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메말랐다. 이번엔 내가 긴장했지만. 헛짓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래, 안녕.”

둘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한솥밥을 먹는 보통 연예인들의 모습이다. 손채영은 떨떠름한 표정의 서지준과 넵튠, 그리고 만화영화 주인공이라도 보는 애들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프리티걸 멤버들에게도 알은척을 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봐요?”

“정 실장님, 아니지, 정 팀장님 프로젝트팀 성공기념 뒤풀이.”

서지준이 대답했다. 손채영이 아, 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나를 힐끔 본 손채영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런 날이면 나한테도 좀 알려주지.”

“너한테 왜?”

서지준이 물음에 곧장 답이 돌아온다.

“피하게.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이 또 드글드글 다 모여 있네.”

“얼씨구. 너 신비주의 같은 건 집어치웠냐? 여기 방송국 사람 많다.”

“그래서 작은 목소리로 말하잖아. 귀찮으니까 이제 말 걸지 마.”

손채영이 신경질적으로 잘라냈다. 그때, 이쪽의 소리죽인 대화가 궁금하다는 듯 주위에 몰려있던 사람들이 속에서 유수영 피디가 걸어 나왔다. 카메라를 든 VJ감독과 함께.

“대표님. 혹시 이대로 딱 한 컷만 찍어도 될까요? 지금 풀샷 그림이 너무 좋아서요. 대표님부터 팀장님, 연예인들까지 다들 가족적이고, 훈훈하고.”

서지준이 콜록콜록 기침소리를 냈다.

유수영 피디가 다시 말했다.

“프리티걸이 앞으로 일하게 될 소속사가 이런 분위기라는 걸 한 컷에 담으면, 해피엔딩으로 에필로그까지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힐끔 프리티걸 쪽을 돌아봤다. 호박마차를 본 신데렐라가 저런 표정일까.

화려한 치장을 걷어내면 마차 속에 흉한 것들이 우글거린다는 걸 잘 아는 넵튠 애들이 혀를 끌끌 찼지만. 붕어들은 이미 혼이 쏙 빠져있다. 맏언니인 정재이조차도 뺨이 상기돼 있다.

곧 백한성 대표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시죠.”

VJ감독이 카메라를 어깨에 짊어졌다. 넵튠 애들이 지느러미 끝까지 새빨개진 붕어들을 데리고 중심으로 들어왔다.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손채영도, 서지준도 웃고 있었다. 이송하도 웃었다. 다들 웃고 있었다.

나도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음. 정말 가족적인 광경이다.

*

“늦어서 미안. 인터뷰 끝나고 스텝들한테 사인해주고 오느라.”

남조윤이 눈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잘 했어요. 스케줄이랑 팬이 중요하죠.”

“너도 중요해.”

“간지럽게.”

잘도 저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

웃으면서 남조윤을 살폈다. 어디 안 좋아 보이는 곳은 없는지.

그때 목이 빠져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김현섭이 물었다.

“저기, 조윤이 어머님. 손채영 왔다면서요? 제가 진짜 팬인데.”

“갔어요. 한참 전에.”

손채영은 촬영이 끝나자마자 2팀장과 함께 사라졌다. 백한성 대표도 그때 함께 갔고. 지금쯤이면 다들 집에 들어가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아직까지 남아서 사람들 눈을 즐겁게 해주는 건 서지준뿐이다.

절망하는 김현섭을 무시하고, 남조윤에게 물었다.

“근데 형. 손에 그건 다 뭐예요?”

손바닥으로 서빙을 하나, 양손에 카나페가 한 가득이다. 놓을 곳이 부족했는지 손목 위에도 있다. 먹을 거에 욕심 부리는 사람이 아닌데. 오히려 굶고 넘기는 게 익숙해서 몇 끼를 굶어야 겨우 배고픈 줄 아는 사람이지.

“지금 배고파요? 언제부터 밥 안 먹었어요?”

“먹었어. 이건 밑에서 사람들이 자꾸 먹으라고 줘서.”

“조윤이 얘가 떠오르는 먹싶남이라서 그래요.”

김현섭이 덧붙였다.

“먹싶, 뭐요?”

떠오르는 별명 같은 게 있으면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먹싶남. 먹이고 싶은 남자요. 제가 지은 건데.”

“아.”

“그, 카톡 사진이 반응이 좋아가지고. 한번 밀어볼까 하고요.”

사진?

김현섭이 핸드폰을 꺼내 기사에 첨부된 사진 하나를 보여준다. 아, 이거. 남조윤이 나한테 돈을 주고 로비를 했다는 루머가 퍼졌을 때, 홍보팀 박 팀장이 배포했던 보도자료 중에 있던 사진이다.

-형, 밥 먹어요.

-먹을게.

-형, 밥이요.

-먹을게.

-밥.

-먹을게.

“이걸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더라고요. 모성애를 자극하나?”

비슷한 단답형의 메시지가 하루에 한 번씩 되풀이되는 것뿐인데.

어쨌든 좋아한다니 잘됐네.

만족스럽게 웃는데, 모성애 자극의 대표주자가 걸어왔다. 곱상하게 잘생긴 얼굴, 임주원이었다. 옆에 서지준과 이봉준 실장, 성의민 실장도 보인다.

임주원이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정 실장님 축하하는 자리에서 오랜만에 주목받고 생색 좀 내려고 했더니. 혼자 뒷북쳤네. 서지준 씨 중국에서 계속 러브콜 들어온다고 기사 뜨던데 요즘 안 바빠요? 일 없어요?”

서지준은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다.

“없어. 나 요즘 놀잖아. 그리고 실장님이 아니라 팀장님.”

“반말하지 마시고.”

퉁명스럽게 말한 임주원이 갑자기 뒷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뭔가를 꺼내 나한테 내밀었다.

“정 팀장님, 축하해요. 화환이나 꽃다발 같은 건 오버하는 거 같아서 안 샀고. 이거 오다가 주웠어요.”

빨간 장미꽃 한 송이. 옆에서 서지준이 킬킬거리며 웃는다. 떨떠름하게 꽃을 받아들고 인사하는 동안 3팀장과 김현조, 이관우까지 다가왔다. 아까의 모습이 쇼윈도 가족이었다면, 이제야말로 진짜 가족 같은 느낌이 난다.

빠진 얼굴들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송인호다.

-회사에서 뒤풀이 한다면서요? 서지준 선배님도 가셨다던데. 나도 거기 가고 싶다. 지금 산속에서 독립영화 촬영 중인데 추가촬영이 또 잡혔어요. 팀장님한테 시달리기 전에 산삼이라도 캐먹으려고요. 축하해요, 형!

꽃다발 모양의 이모티콘이 붙어있다. 이쯤 되면 짰나 싶을 정도다.

웃으며 답장을 보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송하는 어디쯤 있지? 다른 애들하고는 그래도 틈틈이 부딪치면서 얘길 했는데 이송하하고는 얘기할 틈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도 백한성 대표나 손채영 이름은 꺼내지도 못했다.

그놈의 스캔들 때문에, 아직도 우리가 속닥거리면 힐끔거리는 시선이 집요해진다.

5층을 다 둘러봤지만 이송하는 안 보인다. 좀 전까진 저쪽에 있었는데, 아래층으로 내려갔나? 주변 사람들한테 잠깐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는데, 층계참 구석에 익숙한 붕어 머리들이 보였다.

“여기 모여서 뭐해? 올라왔으면 나한테 오지.”

망설이는 애들 사이에서 윤솔이 말했다.

“그게, 뭐랄까, 가려고 했는데 좀 낯설고 멀게 느껴지고 그래서요.”

“낯설어? 왜?”

“실장님, 아니, 팀장님 주변에 배우들이 너무 많아가지고.”

“너희가 무슨 사생팬이야? 괜히 궁상떨지 말고 가서 인사해. 나도 금방 갈 테니까.”

이관우를 불러다가 애들을 맡겼다. 애들이 요란하게 심호흡을 하고 계단을 올라간다. 다시 이송하를 찾아 걸음을 옮기려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어서 정재이를 붙들었다.

“참, 재이야.”

“네. 팀장님.”

우뚝 멈춘 정재이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본다.

“너 연기 레슨 받아볼래?”

정재이의 눈이 동그래진 순간. 계단 아래에서 뭔가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파삭, 유리조각을 밟는 소리가 이어진다. 그리고 계단아래 모퉁이에서 이송하가 걸어 올라왔다.

< 누가 그의 사람인가 (13)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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