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그의 사람인가 (10) >
-오빠, 지금 밖이세요?
이송하가 물었다. 막 쪄낸 감자처럼 파근파근한 목소리다.
부드럽고, 목이 메는.
-저 근력운동 끝내고 4층 올라왔는데, 자리에 안 계시길래요.
“어. 나 지금 손······!”
양쪽 어깨가 과격하게 붙잡혔다. 곧장 벽으로 떠밀렸다. 딱딱한 벽을 등으로 들이받은 순간, 반사적으로 외마디 신음이 나왔다.
-오빠?
놀란 목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내 어깨를 밀어붙인 손채영이 더 바짝 달라붙었다. 발뒤꿈치를 들었는지 간교한 입술이 내 턱밑까지 올라온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이가 보였다. 가는 숨이 귓가를 스친다.
“야.”
손채영이 교활한 입으로 말을 걸었다. 핸드폰에 대고.
전화 너머의 숨소리가 화살 맞은 새처럼 경직됐다가, 퍼덕거린다.
뭐 이런······! 손채영의 어깨를 붙잡고 확 떠밀었다.
“지금 무슨, 뭐하는 겁니까?”
“그쪽 조카들이 이런 짓도 했나 싶어서?”
휘청거린 손채영이 금방 중심을 잡고 대꾸한다. 그게 들렸는지 전화기 너머 이송하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진다. 젠장. 손채영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저건 희대의 미친년이다.
안하무인에, 제멋대로고, 악의를 아무렇지도 않게 끄집어내는. 구제불능.
숨이 닿았던 뺨과 귓가를 손등으로 닦고 다시 핸드폰으로 신경을 돌렸다.
고요하다. 숨이 넘어갔나 싶을 정도로.
“송하야.”
-네.
대답은 바로 들려왔다. 생각보다는 침착하다.
“나 지금 손채영 씨 집에 있어. 일하는 중이야.”
-아······그거, 설득 때문에요?
“그래, 그거. 길게 할 얘긴 아니니까 볼일 끝내고 전화할게.”
-네.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애가 침착하니까 더 신경 쓰인다.
전화를 끊고 돌아보니 손채영은 어느새 소파에 앉아있었다. 비스듬히 꼬아놓은 다리가 뱀꼬리 같다. 뭐가 비위에 거슬렸는지, 기꺼워하는 듯하던 웃음이 싹 가셨다. 무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할 얘긴 다 끝난 것 같고. 이만 가겠습니다.”
“그러든지. 안 잡아요.”
등 뒤에서 코웃음소리와, 벨소리가 들린다. 손채영이 전화를 받았다.
“왜요. 찾았어요? 아이스홍시 말고, 홍시!”
신경질적인 수준을 넘어서 도끼로 나무를 찍는 것 같은 목소리다.
저 전화상대가 나였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오만상이 구겨진다. 역시 괜한 짓이었다. 손채영하곤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도, 엮이고 싶지도 않다.
관두자.
결심하고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
눈앞이 뒤집혔다.
“······아역부터 시작해서 연기는 참 잘했는데.”
빌어먹을!
박 국장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 적은 처음이다. 미래예지를 보면서 정보에 귀 기울이지 않은 적도 처음이고. 지금 내가 꼭두각시 신세만 아니었다면 당장 소리라도 질렀을 거다.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왜 손채영이냐고. 넵튠도, 남조윤도, 송인호나 프리티걸도 아니고.
왜, 왜 하필 손채영이냐고.
쏟아내고 싶은 말이 목구멍을 가득 채웠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보고 듣는 것뿐이다. 박국장이 이쪽을 본다. 이젠 저 입에서 나올 마지막 대사를 대신 읊을 수도 있다.
“지금은 어디서 뭐하고 살고 있을까요, 손채영.”
“그러게요.”
어?
“어디 있을까요. 다시 한 번 보고 싶은데.”
미래의 내가 대화를 이어간다.
내용은 거지같지만, 어쨌든 반복되는 악몽에서 탈출구를 찾은 기분이다.
송 기자가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팬이셨나 봐요.”
“연기가 좋았거든요. 손채영 씨가 여대생으로 나온 영화가 있었는데, 그걸 극장에서 세 번을 봤어요. 조조로 한번 보고 나오자마자, 바로 다음시간대 표를 끊어서 도로 관에 들어가 앉았던 기억이 납니다.”
내 기억이다.
손채영이 이송하에게 저지른 짓거리를 알기 전, 케케묵은 옛날의 기억.
송 기자의 질문이 계속됐다.
“이송하 씨는 대표님이 W&U를 나오고 나서 배우가 됐으니 타이밍이 안 맞았지만, 손채영 씨는 대표님이 계실 때도 간판스타였던 걸로 아는데요. 관심 있던 여배우의 매니저 자리. 무척 탐나셨을 것 같아요.”
“그랬죠. 당시에 손채영 씨 담당이 조병환 실장님이었는데, 그 사람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부럽긴 개뿔. 하지만 이것도 기억에 남아있다.
처음 조 실장을 봤을 때, 손채영 매니저라기에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 차기작 선택을 도와주려다가 손채영한테 꺼지라는 답을 듣기 전까지는.
미래의 내가 씁쓸히 웃었다.
“마음은 그랬는데 엮일 일이 없었어요. 손채영 씨는 탑급 배우였고, 저는 W&U에 있을 때만해도 내세울 거 하나 없는 놈이었으니까. 같은 회사였어도 제대로 얘기해볼 기회도 없었거든요.”
“아······ 진짜 아쉬우셨겠어요.”
“네. 밖에서 자리 잡고 나서 수소문을 해봤었는데,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결국 포기했어요.”
고정된 미래에서는, 내가 독립해서 자리 잡기 전에 이미 손채영은 은퇴한 상태였다는 건가? 하지만 이 정도로는 시기를 특정할 수가 없다. 부스러기 정보를 머리 한 구석에 밀어 놨다.
미래의 내가 말했다.
“꼭 같이 일해보고 싶은 배우였는데. 많이 아쉬웠어요. 정말 많이.”
구구절절 헛소리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느낌이다. 손채영이 나를 매니저라고 부르던 미래가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나한테는 통째로 도려내고 싶은 기억이다.
대화를 듣고 있던 박 국장이 은근하게 물었다.
“정 대표님은 혹시 아는 거 있으세요? 손채영이 은퇴한 이유.”
움찔했다.
분명, 입 끝이 움찔 반응하는 게 느껴졌는데.
미래의 나는 뭔가 아는 게 있는 건가?
숨죽이고 답을 기다렸지만, 입 밖으로 흘러나간 말은 두루뭉술했다.
“글쎄요. 제가 아는 것도 백프로 확실한 건 아니라. 루머나 마찬가지죠.”
“그럼 대표님이 아시는 루머가, 제가 좀 전에 언급한 것들 중에 있어요?”
“음. 오프 더 레코드로?”
“그럼요. 기자로서, 지극히 개인적인 궁금증이에요.”
박 국장이 새까만 입술을 핥았다. 곧이어 미래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있다고? 박 국장이 얘기한 것들 중에? 재벌과의 결혼, 임신, 정신과 치료, 해외의 연극무대, 이 중에 단순한 뜬소문이 아니라, 사실에 근접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가?
박 국장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보니, 풍문에는 손채영이 같이 일하기 편한 성격이 아니었다던데요. 연예인 치고도 유난스러울 정도로 통제가 안 됐다고. 손채영의 그런 성격이 빠른 은퇴에 한몫 했을 거라는 말도 있었거든요.”
“저도 제대로 겪어본 건 아니지만 뭐, 녹록한 성격은 아니었죠.”
녹록은 무슨. 그 구역의 미친년이었다고 왜 말을 못해?
미래의 내가 느슨히 턱을 괬다. 손가락 끝이 턱 언저리를 툭툭 두드린다.
“꽤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만약 제가 손채영 씨의 매니저였다면, 그런 식으로 연예계를 떠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요. 그랬다면 손채영 씨의 인생도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지근지근 씹힌다.
미래의 내가 부드러운, 그리고 뚜렷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니까요.”
글쎄. 과연 그럴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지.
배신자, 최건영이 내 가슴에 쐐기를 박기 전까지만 해도.
내심 코웃음을 친 순간, 미래의 내가 담담하게 덧붙였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재빨리 무릎에 힘을 실었다. 안 그랬으면 볼썽사납게 넘어졌을지도 모른다. 쥐가 난 것처럼 팔다리가 저릿저릿했다. 내가 아는 손채영, 최건영, 그리고 미래의 내 모습. 그것들이 머릿속에서 곤죽처럼 뒤섞였다.
젠장.
다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소파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뭐, 뭐예요? 간다더니?”
“잠깐만요.”
손채영이 당황하건 말건, 빈 소파에 앉아서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미래예지.
벌써 세 번째다. 손채영에 대한 얘기가 반복된 게.
그 뒤로 이어진 대화를 떠올려보면 하나는 확실하다. 고정된 미래의 내가, 손채영에 관한 아쉬움을 품고 있다는 것. 연기 잘하는 배우를 대하는 대표로서의 마음이건, 아니면 은퇴과정에 얽힌 뭔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건.
손채영의 미래만 반복해서 보게 된 건 그것 때문인가?
미래의 나에게 아쉬움으로 남은 일을, 현재의 내가 무시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어떻게든 손채영의 미래를 바꾸기를 원해서? 설마 계속 무시하면 앞으로도 이 미래가 무한 반복되는 건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손채영이 떨떠름히 나를 보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갔다. 손채영의 표정이 더 괴상해졌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요? 지병 있어요? 119 불러요?”
“119는 무슨. 잠깐만요.”
시끄러운 목소리를 흘리면서, 다시 생각에 빠졌다.
최건영이라는 놈을 겪으면서 나는 마음속에 쐐기를 박아 넣었다. 그놈이 나를 엿 먹이겠다는 포부를 즐겁게 털어놓았을 때는, 그 쐐기가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환경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현재를 어떻게 바꿔도.
나를 배신할 놈은, 결국 나를 배신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손채영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아역배우로 이 바닥에 들어와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으니, 그 환경이 손채영을 저런 꼴로 만들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모든 아역배우 출신이 저렇게 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손채영 같은 사람은 애초에 저런 사람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엮이고 싶지 않았던 거고.
하지만 그렇게 고정해 버리면, 나는?
미래에서 최건영과 2팀장을 내 팀원이라고 말하던, 이미 남을 협박하는 게 설득하는 것보다 쉬운 나는? 내가 나쁜 놈이 됐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보고나서 그렇게는 되지 않겠다고, 경각심을 갖자고 마음먹었는데.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도 변할 수 없는 게 되잖아.
반대로 내가 변하는 게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도, 손채영도 변할 수 있···.
“야.”
손채영이 불쑥 말했다.
“이거? 내가 이송하한테 이거 한마디 했다고 이래요, 지금? 내가 비명을 질렀어, 신음을 질렀어? 고작 말 한마디 가지고 야단은. 그냥 그쪽 조카들이 그런 짓도 하나 궁금해서 해본 거라니까?”
텁텁한 한숨을 토했다. 난장판인 머릿속을 대충 쓸고 대답했다.
“제 조카들은 그런 짓 안합니다. 하면 혼난다는 걸 알만큼은 컸으니까.”
“그럼 나도 혼내보든가.”
손채영이 콧등으로 웃으며 다시 다리를 꼬았다. 이제는 팔짱까지 낀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듯이.
그 꼴을 가만히 보다가, 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을 다시 꺼냈다.
“저번에 비 오던 날, 차 안에서 했던 말.”
“그건 왜요. 기껏 만나서 얘기했더니 들어먹지도 않아놓고!”
“백한성 대표님한테는 왜 얘기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손채영이 멈칫했다. 눈살이 확 찌푸려졌다.
그 앞에 핸드폰을 내밀고 주소록을 뒤졌다.
“저 백 대표님 번호도 압니다.”
“야!”
소파가 바닥을 긁었다. 손채영이 거칠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아주 노기등등이다.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려고 하다가도 저런 꼴을 보면 다시 고개를 젓게 된다. 어떻게 보면 볼수록 더 구제불능으로······.
“그건, 내가!”
“내가?”
“짜증나, 진짜!
손채영이 씨근덕거리며 거실 바닥을 걷어찼다.
성질머리 하고는.
“내 말 못 들었어요? 나 차기작 안 한다구요! 이 회사에서 더는 작품 할 마음 없다고! 2팀장님이 나랑 대표님 사이에 끼어서 등짝 터져나간 거 몰라요? 거기서 같이 등 터지게 생긴 거 빼돌려 놨더니······!”
빼돌려?
< 누가 그의 사람인가 (1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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