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77화 (177/218)

< 누가 그의 사람인가 (9) >

“기분 어때요?”

“좋네요.”

“좋아요? 손채영한테 까이러 가는 게 좋다고요?”

“아뇨. 승차감이요.”

푹신한 마사지시트를 쓸어보며 대답했다. 매니저 일 하면서 흔히들 연예인 밴이라고 말하는 차를 여러 대 타봤는데, 그중에서 이게 최고다. 음식냄새나 텁텁한 먼지 냄새도 안 나고. 밀폐된 다락방처럼 안락하고.

이런 게 있으면, 이송하도 밤샘촬영 할 때 덜 피곤하겠는데.

밴 내부를 이곳저곳 둘러보다가 이장현 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태평하시네. 손채영 집에 가는데 승차감 따질 여유도 있으시고.”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요, 뭘.”

재난구역인건 맞지만.

이장현 실장이 콧등을 찌푸렸다. 코웃음을 참는 것처럼.

“이송하 같은 애처럼 생각하고 접근하면 발모가지 날아가요. 이송하가 꽃동산이면 손채영은 지뢰밭이거든. 카운트다운 같은 것도 없어요. 그냥 막 터지는 거야.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재계약하고 나서부턴 아예 미쳐 돌아간다니까요. 시벌, 나도 미쳤지. 괜히 맡겠다고 나섰다가 이게 웬 개고생이야.”

적잖게 시달렸는지 쌍스러운 욕지거리까지 나온다. 손채영을 길들여 보겠다고 나섰다가 2팀장 종아리 붙들고 못하겠다고 매달렸던 실장이 있다더니만. 그게 이 사람인가?

“뭐, 어쨌든. 나만큼 손채영한테 빨리 익숙해진 사람도 없어요.”

이장현 실장이 으스대며 말했다.

“내가 팁을 좀 줄 테니까, 내가 하는 걸 잘 보고 참고하시라고요. 그래야 손채영이랑 얘기라도 나눠볼 수 있을 거 아니에요.”

한마디 할 때마다 내가 너한테 선심 쓰는 거라는 티를 풀풀 낸다.

무슨 수작이지?

누군가 나한테 수작을 걸어오는 상황은 대부분 짜증나지만, 가끔은 재미있을 때도 있다. 이번은 후자였다. 야외 흡연실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날 보는 시선에 가시가 삐죽삐죽 돋아 있었는데.

뭐, 지금도 내가 너한테 원하는 게 있으니 좀 도와준다는 태도지만.

유심히 보는 시선을 알아챘는지, 이장현 실장이 헛기침했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진다. 담배와 라이터, 명함, 잡다한 것들 속에서 그가 껌을 집었다. 입에 들어간 껌이 금방 풍선처럼 부푼다.

“껌 하나 줘요?”

“괜찮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매니저가 껌 씹고 다니면 양아치 같다고 하는데, 이거 야구선수들도 많이 씹어요. 긴장완화에 효과가 있는 거거든요. 배우들도 슛 들어가기 전에 씹으면 도움 될 텐데.”

이장현 실장이 내 쪽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그런데 이송하 있잖아요.”

“송하요?”

“정 실장님 안 그래도 딸린 식구 많아서 바쁘잖아요. 그래서 남조윤도 급하게 임시 매니저 구해서 맡긴 거 아니에요? 이제 손채영 문제까지 신경 쓰려면 더 바빠질 텐데. 정 실장님 혼자선 이송하 스케줄 다 못 챙기실 것 같아서요.”

아하. 이송하?

나한테 바라는 게 뭐길래 선심을 쓰시나 했더니.

정말 수작 걸고 싶은 사람은 이송하고, 나는 징검다리구만?

“그런 경우엔 보통 누가 땜빵 가요?”

“송하 스케줄은 웬만해선 제가 다 챙깁니다. 피치 못할 경우에만 관우나 김현조 실장님이 가시고, 둘 다 바쁘면 저희 팀장님이 가실 때도 있고요.”

“3팀장님도 바쁘면요? 왜, 요즘 블랙아웃 해외콘 때문에 바쁘신 것 같던데.”

“저희 팀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뭐. 팀은 달라도 회사 식구잖아요.”

“3팀장님도 안될 땐 스케줄을 조정하···.”

“제가요.”

마음이 급한지 이장현 실장이 끼어들었다.

“여유가 좀 있거든요. 제가 맡고 있던 정균이가 곧 입대할 예정이라서. 이송하 땜빵 맡길 사람이 여의치 않으면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될 것 같은데.”

목소리에도, 얼굴에도, 욕심이 줄줄 흐른다.

나는 비뚜름한 입꼬리를 웃음으로 가렸다.

또다. 또 불유쾌한 감각이 올라온다. 백한성 대표 때만큼은 아니지만, 무시하고 넘길 만큼 가볍지도 않다. 무슨 스위치라도 켜진 건가. 이송하를 탐내는 사람들이야 셀 수도 없는데, 볼 때마다 기분이 더러워서 어쩌려고.

이거 야단났네.

속내를 감추고, 영업용 웃음을 지었다.

“그런 일이 생기면, 그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고급 주택단지를 돌던 밴이 멈췄다. 손채영의 집이라면 언덕위의 하얀 집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실제 집은 드라마에서나 보던 개인주택이다. 사생활보호 때문인지 담벼락이 성벽처럼 높다. 붉은 벽돌담엔 담쟁이덩굴이 뒤덮여있고, 담 위로는 나무꼭대기가 잔뜩 솟아있다.

“기다려 봐요. 이제 전화해 볼 테니까. 지금쯤이면 핸드폰 켰을 거예요.”

이장현 실장이 전화를 걸었다. 그가 말한 대로 손채영이 핸드폰을 켰는지, 신호음이 새나온다. 그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것 보라는 듯이.

십초. 삼십초. 일분을 기다려도 반응은 없다.

전화를 끊은 이장현 실장이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보통은 한 다섯 번쯤 걸면 받아요.”

“다섯 번이요?”

“네. 그리고 밴에서 한참 기다라면, 아, 얘가 집안에 외부사람 안 들여놓거든요. 기다리면 이동해야 할 시간 딱 맞춰서 문 열려요. 다른 건 안하무인이어도 스케줄 시간은 칼같이 지키더라고. 그러니까 손채영이랑 얘기하려면 무조건 스케줄 시간에 맞춰야 돼요.”

두 번째도 불통. 세 번째 전화를 거는 그에게 말했다.

“그럼 뭐하러 일찍 와서 벌서고 있습니까? 이동시간 맞춰서 오면 되잖아요.”

“내참, 아니죠. 어제까지 칼같이 시간을 지켰어도, 오늘은 아닐 수도 있는 게 손채영이거든요. 손채영에 대해서는 뭘 짐작하고 예측하고 그러면 안돼요. 안 맞거든. 이런 것도 모르시고, 나 없었으면 맨땅에 헤딩하실 뻔 했네.”

이장현 실장이 혀를 쯧쯧 찬다.

이건 다른 의미로 신입사원 때로 돌아간 기분인데.

“보세요. 이제 받을 거예요.”

이장현 실장이 다섯 번째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울린다. 계속.

그가 당황한 얼굴로 담벼락너머를 바라봤다.

“왜 안 받지? 받아야 되는데?”

“확실히, 짐작이나 예측이 안 맞긴 하네요.”

“시발, 이건 왜 또 내가 데리러 온 날 지랄이야!”

여섯 번째도, 일곱 번째 전화도 소득 없이 부재중기록만 올렸다.

이장현 실장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신음했다.

“일단, 잠깐만요. 조 실장님한테 SOS쳐보고······!”

“제 전화로 한번 걸어볼게요.”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누구요? 조 실장님한테요?”

“아뇨. 손채영 씨요.”

이장현 실장이 헛바람 소리를 냈다.

“아, 뭐. 그러세요, 그럼.”

그가 조 실장한테 전화하는 사이, 나는 손채영한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을 기다리는데 대뜸 목소리가 들렸다.

-뭐예요?

깜짝이야.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었나?

나야 지난번 경험이 있어서 움찔하고 말았지만, 이장현 실장은 고개를 홱 돌리다가 등받이에 코를 처박았다.

-뭐냐니까요? 이번에도 또 스피커폰이에요?

“아닙니다.”

-그럼 뭐하러 전화했어요? 또 밖에서 나랑 비슷한 사람이라도 봤나?

“그것도 아니고. 여기 손채영 씨 집 앞입니다.”

돌아오던 목소리가 뚝 멎었다. 핸드폰을 보니 이미 전화가 끊어져있었다.

이장현 실장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예요? 뭐래요?”

“그냥 끊어졌는데.”

“아, 그럼 제가 다시 전화해볼게요. 저 인줄 알고 받은걸 수도 있어요. 뭐, 일단 통화가 됐으니까 기다리면 준비해서 나올······.”

그가 안도와 떨떠름한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말했을 때였다.

덜컹, 문이 열렸다.

손채영이 나오더니 집 앞을 휙 둘러본다. 대기 중인 차는 이것뿐이다. 손채영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양손을 살폈다. 칼이라도 든 건 아닌가 싶어서. 그만큼 살기등등한 기세였다.

이장현 실장이 몇 번 헛손질을 하더니 차문을 열고 구르듯이 내린다. 나도 뒤따라 내렸다. 우뚝 걸음을 멈춘 손채영이 팔짱을 낀다. 그리고 나와 이장현 실장을 번갈아봤다.

“채영 씨!”

정신을 차렸는지, 이장현 실장이 친근하게 다가섰다.

“벌써 준비 다 하고 나온 거······.”

“여긴 왜 왔어요?”

“용건이 있어서요.”

나한테 물은 것 같아서 대답했다.

“무슨 용건?”

“손채영 씨 차기작. 저한테로 넘어와서, 얘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

“이런, 씨······!”

손채영이 바닥을 콱 짓밟았다. 그 발밑에 지뢰라도 있는 것처럼, 이장현 실장이 급히 내 뒤로 두 발짝 멀어진다. 그를 뾰족하게 노려본 손채영이 다시 나를 바라봤다.

“들어와요. 시끄러워질 것 같은데.”

이장현 실장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채영 씨 집에요?”

“밖에서 얘기하면 경찰차 뜰 거 같은데. 그래도 되겠어요?”

“안 되죠!”

날 보는 이장현 실장의 눈에 동정심이 스친다. 그가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저도 같이 들어가서···.”

“이 실장님.”

손채영이 말허리를 끊고 말했다. 웃으면서.

“홍시가 먹고 싶어 죽겠는데. 그것 좀 사다주세요.”

“홍시요? 감?”

이장현 실장이 입을 벙긋거렸다.

“감은, 가을에 익지 않나? 초여름에 그걸 어디 가서 구해요?”

“알면 이미 먹었지. 먹고 싶어 죽을 때까지 이러고 있겠어요?”

“왜 그게 갑자기, 먹고 싶은데요?”

“몰라요. 입덧인가 보죠.”

내가 흠칫 놀라서 손채영의 배를 내려다본 순간.

“채영 씨! 밖에서 함부로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합니까! 루머 생기면······!”

“왜. 농담 같아요?”

“농담이 아니면 진······! 진, 진담은 아니죠?”

이장현 실장의 시선이 내리꽂혔다.

느슨한 셔츠에 가려진, 손채영의 납작한 배에.

“농담이에요. 홍시는 진담이고.”

손채영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기어코 이장현 실장을 쫓아 보내고, 손채영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걸음이 험악해서 나한테까지 진동이 닿는 것 같다. 뒤따라 들어가며 목을 주물렀다. 역시, 오래는 못할 짓이다.

거실이 내 오피스텔의 몇 배만 하다. 벽에는 손채영의 사진이 걸려있다. 화보가 아니라 작품 스틸 샷이다. 아역 데뷔작부터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까지. 손채영이 연기한 배역이 담긴. 집이 아니라 꼭 갤러리 같다.

잠깐 거기 한눈을 팔았다. 손채영을 잊을 정도로.

“이봐요, 지금 다른데 신경 쓸 상황이에요? 뭘 그렇게 봐요!”

“사진이요.”

“얘기 끝내고 봐요! 내가 저번에 한 말 기억 안나요? 그쪽 금붕어예요?”

금붕어들은 따로 있고.

“내가 무조건 거절하라고 했죠. 내 담당 못한다고 하라고, 말했잖아요!”

“대답한 기억은 없는데.”

“뭐라고요?”

“제가 그 말을 왜 들어야 됩니까?”

“뭐가 어째요?”

손채영이 황당하다는 듯 헛바람을 토했다.

앉을 자리를 내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아서, 벽에 등을 기댔다.

“제대로 된 설명도 없고, 그렇다고 부탁도 아니고. 손채영 씨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을 제가 꼭 들어야 될 이유가 있습니까? 반면에 대표님은 확실한 대가를 들고 부탁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대가?”

손채영이 사납게 다가온다. 불똥이 튀는 눈동자가 코앞에 보였다.

“대표님이 뭘 준다고 했는데? 얼마나 혹할만한 대가였길래 콧대 높은 사람이 날 찾아왔어요? 나는 탐나지도 않고, 밴 뒤에 태울 일도 없다더니? 무슨 일편단심 결벽증 걸린 사람처럼 굴더니만, 대가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니까 그 머릿속에 계산이 팍팍 돌아가나?”

“무슨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뭐요!”

“대표님이 저한테 부탁한 건 손채영 씨가 차기작을 하도록 설득해 보라는 거였습니다. 전담 매니저가 되라는 게 아니라.”

그런 거였으면 무조건 거절했지. 무슨 못 볼 꼴을 더 보려고.

만난 지 오 분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것도 후회되기 시작한다. 백한성 대표가 장담한 달콤한 대가도, 두 번 중복된 미래예지에 대한 의문도 흐려진다. 손채영하고 붙어있으면 내 영혼에 곰팡이가 피는 기분이다.

손채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매끈한 입술도 비틀린다.

“어쩌나. 미안한데, 아니, 안 미안한데, 난 그쪽이 무슨 짓을 해도 차기작 정할 생각 없어요.”

“그럼 뭐, 어쩔 수 없고. 무슨 짓까지 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손채영의 눈썹도 들썩인다.

“그래도 당분간은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해요?”

“대표님이랑 본부장님, 2팀장님 앞에서 손채영 씨 설득해보겠다고 한 지 반나절도 안됐는데. 노력하는 척은 해야죠. 너무 빨리 때려치우면 제 이미지가 뭐가 됩니까. 뭐, 그러다가 손채영 씨가 마음 바뀌어서 차기작 정하면 더 좋고.”

“안 한다고요!”

“그래요, 그럼.”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그쪽이······!”

손채영이 버럭 소리쳤을 때였다. 내 왼손에서 핸드폰이 드르륵 울렸다.

이송하다.

내가 이름을 확인한 순간, 코앞에 있던 손채영도 그 이름을 봤다.

손채영이 교활하게 웃었다.

“그쪽이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이송하도 알아요?”

“모르죠.”

휙, 뻗어온 손이 핸드폰을 노렸다.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하지만 헛손질이다. 핸드폰을 든 손을 머리위로 들자, 손채영이 씨근덕거렸다.

“더럽게 빠르네.”

“이런 짓 하던 조카가 넷이라. 걔들도 초등학교 들어가고선 안 이럽니다. 뭐하는 겁니까?”

내가 말하는 동안에도 손채영은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내 약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진동은 끊이지 않고 계속 울렸다. 일단 손채영한테서 두세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전화를 받았다.

“어, 송하야.”

< 누가 그의 사람인가 (9)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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