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74화 (174/218)

< 누가 그의 사람인가 (6) >

담당을 못하겠다고 하라고?

여름날씨보다 변덕스러운 게 연예인이라지만, 손채영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다시 백미러를 보니 손채영은 용건이 끝났다는 듯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물기를 대강 닦아내기만 했는지 머리카락에서는 아직도 물이 떨어진다.

핸들을 툭툭 두드리다가 물었다.

“그 말 하려고 불렀습니까?”

“맞아요. 뭐 문제 있어요? 아, 백 대표님한테는 이 대화는 얘기하지 말고.”

“이유가 뭡니까?”

“뭘 이유까지 알려고 해요?”

손채영이 다시 백미러를 바라본다.

습기에 흐려진 거울너머, 유난히 선명해 보이는 입술이 벌어졌다.

“왜, 나랑 일하고 싶어요? 이젠 내가 좀 탐이 나나?”

“아뇨.”

바로 대답했다. 손채영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다.

“꼴 보기 싫어, 진짜.”

“뒤에 안대 있습니다.”

손채영이 이맛살을 구겼다.

“기가 막혀서. 이 차타고 다니다간 성질 다 버리겠네.”

거기서 더?

나야말로 기가 막힌다.

“이 차타고 다닐 일 없을 테니까 안심해요.”

태연히 대꾸했다. 손채영이 젖은 옷을 닦다말고 수건을 내팽개친다. 그리고 보란 듯이 시트에 등을 파묻었다. 시트가 젖어드는 게 백미러로도 보일 정도다. 얼씨구. 시트 적시지 말라고 한마디 더하면 아주 뒷좌석에서 굴러다니겠다.

백미러를 통해 신경질적인 눈빛을 받아넘기길 한참.

손채영이 코끝으로 웃었다.

“이젠 이 바닥 물도 꽤 마셨을 텐데, 여전히 계산을 못하네. 사람이 멀리 내다봐야지. 나쯤 되는 배우를 장사밑천으로 잡을 기회가 어디 쉽게 오는 줄 알아요?”

“좀 전엔 담당 하지 말라면서요?”

“아. 그쪽 때문에 말이 꼬였잖아요! 괜히 이유를 물어봐가지고!”

슬쩍 한번 떠볼까?

“사람이 갑자기 변하니까 궁금해서요. 뭐, 은퇴라도 하려는 건가 싶어서.”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고, 백미러로 반응을 살폈다.

손채영은 황당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은퇴? 내가 은퇴를 왜 해요. 누가 나 은퇴한대요?”

“그냥 해본 말입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잖아요.”

“갑자기는 무슨. 내가 그쪽한테 오라고 했던 게 언젠데. 버스 떠났어요.”

다시 코웃음을 치며, 손채영이 말했다.

“그리고 난 절대 은퇴 안 해요. 이거 그만두면 뭐하고 살라구요?”

글쎄, 뭐하고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두긴 했다던데.

내가 봐도 지금의 손채영은 은퇴할 생각 따윈 손톱만큼도 없는 것 같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기길래, 한창 잘 나갈 때 연예계를 떠나게 되는 거지? 무슨 소문이 돌았었다고 했더라.

중국 재벌이랑 결혼? 정신과 치료? 임신? 해외에서 연극?

정신과는 그럴듯하다. 손채영이야 정신병 두세 개쯤은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런데 왜 다 루머뿐일까. 왜 아무도 진실을 모르지?

탑급 여배우가 돌연히 은퇴를 선언했다면, 그리고 정신병이니, 임신이니 하는 자극적인 루머가 나돌 정도였다면 기자들이 숨겨진 진실을 캐내려고 벌떼처럼 달라붙었을 텐데. 손채영은 중화권에서도 탑스타니 파파라치도 붙었을 거고.

그런데 어떻게 진실이 묻혔을까.

손채영 혼자 힘으로 기자들 촉수를 피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고.

정말 중국 재벌이랑 관련이 있나?

예전에 2팀 실장 한명이 그랬었지. 우리가 묵었던 중국호텔 소유주가 손채영이랑 밥 한번 먹는 게 소원일 만큼 팬이라고. 그때 손채영의 반응을 봐선 그런 작자가 한둘이 아닌 것 같던데.

그게 아니면 소속사에서 적극적으로 틀어막았을 수도 있고.

빗물로 흐려진 차창위로 백한성 대표의 얼굴이 떠올랐을 때.

“다시 말하는데, 백 대표님한테는 내 담당 못한다고 해요.”

손채영이 차창에 올린 팔에 턱을 괴어놓고 말했다. 창문을 살짝 열었는지 겨우 말라가는 머리카락이 젖은 바람에 흔들린다. 그 사이로 반쯤 내리깐 눈이 보인다. 물고 뜯을 준비가 끝난 투견처럼 달뜬, 그리고 설레는 눈이.

“그쪽이 못한다고 딱 잘라 거절해도, 대표님한테 밉보일 일은 없을걸요.”

요란한 빗소리 사이로 손채영이 목소리가 들렸다.

“어지간한 실장급 매니저들은 다 못한다고 할 테니까.”

*

손채영의 말은 예언이었다.

비바람 속의 라이딩 이후. 손채영은 미친년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걸 아낌없이 보여줬다. 하루하루 패악과 행패를 일삼으며 지뢰밭을 뛰어다니는 통에 2팀이 있는 곳엔 날마다 귀곡성이 울려 퍼질 정도였다.

2팀장이 손채영한테 붙인 실장급 매니저들은 줄줄이 나가 떨어졌다. 태풍에 휩쓸린 잠자리처럼. 이봉준 실장이 물어다 준 소식인데, 손채영을 길들여 보겠다고 나선 실장 한명은 2팀장 종아리를 붙들고 못하겠다고 매달렸다나.

그래서 손채영한테 익숙한 조 실장이 임시로 다시 떠맡게 됐다고 들었다. 회사에서 오며가며 조 실장과 몇 번 부딪쳤는데, 첫 만남에서 이웃집 형을 떠올렸던 인상이 지금은 이웃집 폐인이었다.

조 실장과 2팀장이 착 달라붙어서 손채영을 어르고 달래고 중인가본데. 백한성 대표 앞에서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약속한 것도 벌써 닷새째. 그쪽에서는 여전히 사건사고가 폭탄처럼 터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쪽에도 터지기 직전이다.

“오빠! 오빠, 오빠, 이거 딱 터뜨릴 때 찍어주세요!”

“걱정 말고 실이나 잘 당겨.”

“으아아, 사진을 오빠가 찍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파티용 폭죽이.

메이킹필름 시청률 15프로 돌파 기념으로 팬클럽에서 밥상만한 케이크를 만들어 보냈다. 다 같이 먹는 인증샷도 찍고, 시청자들한테 감사의 마음도 표할 겸 4층 라운지에 모여서 축하 파티중이다.

다들 머리에 고깔모자를 쓰고, 입에는 생크림을 덕지덕지 묻힌 채로.

시끌벅적한 중앙에서 한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디지털 카메라에 현장감 넘치는 사진들을 담았다. 넵튠 머리위로 파티용 폭죽이 터지는 장면. 사람들이 걸신들린 것처럼 케이크를 숟가락으로 퍼먹는 장면.

술에 진탕 취한 것처럼 헤실헤실 웃고 있는 막내라인 붕어 셋.

그리고 조각낸 케이크와 음료수를 서빙하느라 분주한 정재이.

한참 사진을 찍고 있는데, 이태신 실장이 옆자리에 휘청거리며 앉았다. 그리고 감격에 질식할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 날, 공연 날 이후로, 애들이 자신감이 많이 붙은 것 같습니다.”

“그래요?”

“네. 그렇게 호응이 엄청났던 무대에 서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 순간을 떠올리는지, 이태신 실장이 열띤 숨을 흘렸다.

“야유나 쓰레기가 날아올지도 모른다고 단단히 각오하고 올라간 무대였는데. 어딘가에서 벼락처럼 함성이 터지고, 불길이 사방으로 번져나가고. 그 순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올라서 일상생활이 안 될 정돕니다.”

그가 프리티걸 멤버들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제가 이 정도니, 애들한테는 훨씬 의미가 컸을 겁니다. 아마 평생 못 잊을 거예요.”

“다행이네요. 좋은 쪽으로 기억하게 돼서.”

대답하며 카메라를 돌렸다.

프레임 속의 금붕어들은 좋은 꿈을 꾸는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런 거죠.”

옆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카메라를 든 채로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 이송하가 보인다. 어느새 이태신 실장 대신 이송하가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케이크 두 조각을 챙겨들고. 생크림보다 더 포근포근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왼손도 모르는 걸, 너는 매번 어떻게 아냐.”

이송하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다. 고개만 돌린다.

앉은 채로 슬금슬금 의자를 움직이더니 내 옆에다가 착 붙인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다시 셔터를 눌렀다.

***

“우린 귀신의 집이고, 여긴 회전목맙니까? 뭐가 이래요?”

매니지먼트 2팀 소속인 이 실장이 투덜거렸다. 추임새처럼 말 중간 중간 앓는 소리가 섞었다. 그는 고작 이틀 만에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였다. 물론 손채영 때문이었다.

“같은 건물 한층 차인데 분위기가 너무 다른 거 아니에요?”

그가 옆을 돌아봤다. 조 실장이 말라죽은 생선처럼 퀭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모퉁이에 멈춰선 중이었다. 4층 라운지에서는 시끌벅적한 파티가 한창이었다.

두 사람은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봤다.

“정선우 쟤는 사람 운도 기가 막히네요.”

이 실장의 찐득한 시선이 정선우에게 닿았다가, 그 주위에 모인 프리티걸과 넵튠 멤버들에게로 옮겨갔다. 소란스럽고 따사로운 분위기. 제목을 ‘화기애애’라고 붙여야 할 것 같은, 그림 같은 광경이었다.

그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어떻게 저렇게 괜찮은 애들만 걸렸을까요? 프리티걸이야 이제 막 숨구멍 뚫린 거니까 더 지켜봐야겠지만, 넵튠은 문제가 생길만도 하잖아요. 애들이 여럿이면 한 명쯤은 삐딱선 탈만도 한데 신기할 만큼 조용하단 말이에요.”

“그러게.”

“바른 연예인 표창장이라도 돼야 될 것 같다니까요. 그리고 뭣보다.”

그의 시선이 다시 돌아갔다.

정선우 옆자리에 얌전히 앉아있는 이송하에게로.

“쟤요. 이송하가 제대로죠. 그죠?”

“글쎄다.”

조 실장이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그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이 실장이 재차 말했다.

“아니, 고양이 수호령 빵 터졌을 때는 초심 생각하느라 조용한 건줄 알았는데. 그 뒤로 두 작품 연달아 대박 터뜨리고, 인기가 나날이 상한가를 치고 있는데도 애가 변하는 게 없잖아요.”

“뭐······.”

“쟤만큼 뜬 애들 중에 재처럼 데리고 일하기 편한 애 없을걸요. 고집 없고, 변덕 없고, 사고도 안 치고. 애가 일 외적으론 관심이 없어서 스캔들 날까봐 마음 졸일 걱정도 없고.”

이 실장이 손가락을 꼽았다.

“시키는 일은 또 좀 잘해요? 쟤가 정선우한테 뭐 하기 싫다고 짜증내는 거나 떼쓰는 거 본적 있으세요? 드라마랑 영화 겹치기 촬영하랴, 넵튠 행사 다니랴, 반년동안 스케줄 살벌했는데 잡음 한번 없었잖아요. 손채영하고 비교하면 완전 극과 극이지.”

이 실장의 말이 이어질수록 조 실장의 표정은 점점 더 떫어졌다.

뭔가 꺼림칙한 구석이라도 있는 것처럼.

조 실장이 가뭄 든 논처럼 쩍쩍 갈라진 입술을 축이며 물었다.

“지금 이송하 평판이 꽤 좋지?”

“좋기만 해요? 저 정도면 역대급이죠. 드라마, 영화, 광고, 화보, 뭐 쟤가 다녀온 현장에선 뒷말 나온 적이 없는데. 다들 또 같이 일하자고 난리지. 저도 일하면서 연예인 엄청 봤지만, 저런 애는 처음이에요. 그냥 완벽하다니까요.”

이 실장의 목소리에 욕심이 치덕치덕 들러붙었다.

“이송하 담당실장 새로 구한다고 하면 줄 설 사람 어마어마할 텐데. 전 볼 때마다 탐나더라고요. 쟤 데리고 있으면 매일매일 로또 당첨된 기분일 것 같은데. 조 실장님은 욕심 안 나세요?”

“······만약에 전담 실장이 바뀐다고 쳐.”

“네? 바뀐대요?”

이 실장이 득달같이 물었다. 사실이라면 당장 이송하에게 달려가 눈도장이라도 찍을 기세였다.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조 실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침을 삼키며 말했다.

“위에서 시켰든 어쨌든, 전담 실장이 바뀐다고 치자고. 그런데 그 이후로 이송하한테서 문제가 막 쏟아져 나오는 거야. 연기도 제대로 못하고, 지긋지긋하게 말 안 듣고, 사고치고.”

“뭐 그런 끔찍한 소릴 하세요? 그건 딱 손채영이구만.”

“그러니까, 쟤가 갑자기 손채영 꼴 나면 말이야. 그럼 위에선 어떡하겠냐?”

이 실장이 눈동자를 굴렸다.

“무조건 달래라고 하겠죠.”

“손채영 겪고도 모르겠냐. 그게 달랜다고 달래져? 그리고 손채영은 이미 공인된 망나니니까 걔 맡았을 땐 고생한다고 동정표라도 받지. 이송하 맡았다가 그 꼴이 나봐. 어떻게 되겠어?”

상상했는지, 이 실장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정선우 밑에 있을 땐 얌전하던 애가 왜 너한테 가선 그렇게 됐냐고, 일을 어떻게 한 거냐고 욕이란 욕은 다 처먹겠죠. 젠장. 생각만 해도 숨 막히네.”

그가 어깨를 부르르 떨고 말을 바꿨다.

“그렇게 되면 다시 담당 바꿔서 정선우한테 맡겨야죠, 뭐.”

“그렇겠지?”

“손채영이야 지금 걔 목에 방울 달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 사달인거고. 조 실장님 말대로라면 이송하를 정선우한테 붙여놓기만 하면 문제될 게 없다는 거잖아요. 제가 임원이라면 그렇게 하겠는데요.”

말을 듣는 동안, 조 실장의 표정은 점점 더 미묘해졌다.

이 실장이 그의 팔을 툭 건드렸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왜 하세요? 너무 심하게 극단적이잖아요. 이송하가 정선우를 좀 많이 따르긴 해도, 설마 담당 바뀐다고 애가 손채영 급으로 달라지겠어요? 극과 극인데?”

“지금 우리가 한 애기. 예전에 내가 똑같이 했었거든.”

“네? 누구랑요?”

조 실장이 이송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메이크업도, 조명도 없이 의자에 앉아있을 뿐인데도 이송하에게는 남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홀로 동떨어진 세상에 있는 것처럼 거리감도 느껴진다. 하지만 정선우와 이야기할 때는 얼굴에 표정이 생겼다.

밀랍인형에 생기가 불어넣어진 것처럼.

조 실장이 중얼거렸다.

“이송하랑.”

“네?”

“좀 미친 생각이긴 한데, 쟤 말이야. 저거 다 연기하는 걸지도 몰라.”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던 이 실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손채영 후유증이 크시네. 이 정도면 트라우마 아니에요?”

이 실장이 혀를 차며 조 실장의 야윈 어깨를 주물렀다.

그 반응에 조 실장이 몇 번 입을 달싹거렸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보기엔 그렇다고. 지금은 안전핀이 붙어있으니까 얌전하지만.”

그가 정선우와 이송하를 다시금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 안전핀 뽑히면, 쟨 손채영보다 더할 것 같아.”

< 누가 그의 사람인가 (6)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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