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73화 (173/218)

< 누가 그의 사람인가 (5) >

“여기 구경났어?”

뻘건 불똥이 우리한테 튀었다. 아니, 나한테 튀었다.

2팀장이 사나운 눈으로 나를 훑었다.

“정선우 넌 여기서 뭐하고 있어?”

구경하고 있었지.

본심을 말하는 대신 접시를 들었다.

“이 실장님한테 케이크 한 조각 드리려고요. 팀장님도 드릴까요?”

“너 인마, 나한테 시비 걸러 왔냐? 막가자는 거야?”

반응이 살벌하다. 볼 때마다 밀고 싶은 턱수염이 부들부들 떨린다.

나에게서 한걸음 더 떨어져 딴청을 피우던 이봉준 실장이 흠칫 놀란다. 뭐야, 내가 케이크가 아니라 도전장이라도 내밀었나. 접시를 봤다가 나도 흠칫했다. 짓뭉개진 빵과 크림덩어리가 놓여있다. 거대한 비둘기 똥 같다.

내가 손으로 뭉갰지, 참. 손채영한테 신경이 팔려서 깜빡했다.

2팀장한테 본의는 아니었다고 둘러대던 중.

“마침 잘 됐네.”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도 머리도 반질반질한 본부장이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서 있었다.

“대표님이 좀 보자고 하시는데.”

백한성 대표가?

본부장이 빙글거리며 나와 2팀장을 번갈아봤다.

“둘 다.”

대표실은 언제 들어와도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제는 나도 좀 사회물을 먹은 것 같은데. 이 자리에 앉아 백한성 대표를 바라보고 있으면 꼭 면접 보던 사회초년생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그래도 오늘은 같이 면접 보러 온 사람이 한명 더 있다. 2팀장.

나만 이런 느낌이 드는 게 아니었구만. 저쪽은 청심환이 필요한 것 같은데.

“프리티걸 첫 공연, 반응이 좋다면서. 박 팀장이 난리던데.”

백한성 대표가 차를 마시며 말했다.

클래식한 정장도, 느긋함을 두른 분위기도, 잡지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그림이다. 어째 저 사람은 볼 때마다 젊어지는 것 같은데.

줄줄 딸려 나오는 딴 생각을 멈추고 대답했다.

“현장 호응이 좋았던 게 도움이 됐는지, 첫 공연인데도 무대가 괜찮았습니다. 직캠 영상이 일일이 세지도 못할 만큼 많이 올라왔어요. 바벨 쪽에서 SNS로 감사표시를 해준 것도 꽤 도움이 됐고요.”

축제의 밤이 가고, 날이 밝기 무섭게 바벨 소속사에서 사고경위가 담긴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땜빵공연을 해준 프리티걸에 대한 감사인사도 공식 SNS에 올라왔다. 이미지 관리 차원인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지금 포털 실검은 바벨과 프리티걸이 사이좋게 갈라먹고 있다.

나한테도 기자들 연락이 쏟아지는데 홍보팀은 어련할까. 공식 쇼케이스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게 뭐냐, 대학축제에서 첫 공연을 하게 됐으면 미리 언질 좀 주지 그랬냐고 여기저기서 빽빽거리고 있을 거다.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백한성 대표는 소파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며 들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었다.

“일 마무리되고 나면 얘기할 게 좀 많겠네.”

할 얘기는 이쪽도 좀 있는데.

백한성 대표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설마 나한테 볼일은 이게 끝인 건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옆을 돌아봤다. 2팀장의 어깨가 들썩이는 게 보인다. 가자미눈이 내 쪽을 스쳤다.

본부장이 둥글둥글한 팔을 뻗어 내 어깨를 두드린다.

“뭐, 이런 이벤트까지 터졌으니 메이킹필름 방송이야 앞으로도 시청률 떨어질 일은 없을 거고. 어이구야, 복덩이 진열장에 성공 트로피 하나 더 생기겠네.”

“본부장님도 가만 보면 참 김칫국 좋아하세요.”

2팀장이 툭 끼어든다.

“음원 성적까지 다 보고 얘기하세요, 다 보고.”

“김칫국? 넌 그 신입, 송인호 영화 시사회도 안 했는데 대박감이라면서?”

본부장이 얄궂게 웃으며 물었다. 2팀장이 거듭 헛기침했다. 송인호와 영화 쪽으로 화제가 돌아가자 그의 눈동자가 더 바빠졌다. 2팀장은 나와 본부장, 그리고 백한성 대표를 번갈아 보고 대꾸했다.

“큼, 그건 제가 슬쩍 본 게 있으니까. 영화가 진짜 잘빠졌어요.”

“그래야 될 텐데. 얼라이브 누적 관객수 천 삼백만 넘은 건 알지? 잘하면 남조윤은 상도 하나쯤 받겠던데.”

2팀장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나 원, 이쪽 뚜껑도 열어봐야죠. 인호 그놈도 보면 볼수록 물건이에요. 쓸데없는데 고집이 좀 많긴 한데, 그런 거야 앞으로 잘 컨트롤하면 되고. 이번 영화, 배역 비중도 크고 캐릭터도 좋아서 영화 흥행만 하면 확 뜰 겁니다.”

“그래?”

“그놈이야말로 연말에 상 하나 받을 거예요. 묵직한 걸로.”

대답은 본부장한테 하는데 시선은 내 쪽에 꽂혀있다.

하지만 그 번들번들하고 날선 눈빛도, 본부장의 한마디에 금방 녹이 슬었다.

“컨트롤은 손채영이나 좀 해봐. 귀국했다면서?”

“······그게.”

“걔 어쩔 거야?”

할 말이 궁색해진 2팀장이 입술만 핥았다. 송인호 얘길 할 때와는 딴판이다.

여태 잠자코 있던 백한성 대표가 말했다.

“이번엔 투정이 오래가네.”

어린애를 상대하는 듯한 뉘앙스다. 그가 턱을 느리게 문질렀다.

“이제 슬슬 곤란한데.”

“전작 말아먹은 상태에서 공백기가 너무 길면 별의별 말이 다 나도니까.”

본부장이 혀를 차며 덧붙였다.

“특히 중국 광고주들 쪽에서 신경을 엄청 쓰더라고.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 그게 중국에서 아주 폭삭 망해잖아. 선판매로 판권을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아먹었는데 그 꼴이 났으니 이미지가 좋을 수가 있나. 빨리 차기작 들어가서 뭍나인 이미지를 좀 털어야 되는데.”

안색이 컴컴해진 2팀장이 백한성 대표에게 말했다.

“원하는 거 쥐어주고 잘 달래서 드라마든 영화든 작품 결정하겠습니다. 대표님도 채영이 아시잖아요. 회사 안에서는 이렇게 제멋대로 평지풍파 일으키고 다녀도, 일단 계약서에 도장 찍고 작품 시작하면 일은 확실하게 하는 거.”

“그것도 채영이 입맛에 맞는 작품을 찾았을 때 얘기지.”

“제가 지금 최대한 끌어 모으고······.”

“예전에.”

백한성 대표가 말허리를 끊었다.

“채영이가 매니저 얘길 한적 있었지?”

그가 나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상체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정 실장, 아니지, 정 팀장이 해보면 어때. 채영이 컨트롤.”

“예?”

“임시적으로.”

덧붙이면서 그가 빙긋이 웃었다.

내 머리가 바쁘게 굴러가기 시작했을 때. 2팀장이 테이블을 거칠게 짚었다.

“대표님!”

그 서슬에 엎어진 찻잔이 테이블 위를 굴렀다.

2팀장도 한때는 나한테 손채영을 맡기려고 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랑 지금은 상황이 확 다르다. 내가 신입 실장일 때야 저 양반이 날 불러다 시키는 입장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본인이 감당을 못해서 밀려난 꼴이 되는 거니까.

2팀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주일! 일주일 안에 제가 채영이 설득해서 데려오겠습니다.”

*

2팀장이 단언한 일주일의 둘째 날.

출근길에 잠시 차를 세웠다. 전화에 걸려왔다. 아주 꺼림칙한 전화.

-나예요. 내 번호 알죠?

번호를 모르는 상태였더라도 손채영이라는 걸 단숨에 알았을 거다. 이것도 능력이다. 고작 말 몇 마디로 상대방의 부정맥을 유발하는 거.

“압니다. 무슨 일입니까?”

바로 대답이 날아올 줄 알았는데. 손채영은 한 호흡을 쉬고 말했다.

-나랑 얘기 좀 해요.

무슨 용건이지?

커피숍의 창문을 바라보며 궁리하다가, 그냥 예측하는 걸 포기했다.

진한 커피를 들이켰다. 카페인이 필요하다. 손채영과 커피숍에서 마주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일단 만나서 얘기해보면 반복된 미래예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나오긴 했는데. 영 떨떠름하다.

어찌 보면 내 매니저 인생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지만, 사실 손채영과 단둘이 대화한 적은 거의 없다. 그나마도 유쾌하지 않은 기억들이고.

작년에 중국 호텔복도에서 한번. 우리가 서로 대화다운 대화를 하려면 사과로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했더니, 돌아온 답이 가관이었지. 하도 기가 막혀서 토씨 하나까지 기억하고 있다.

‘난 그런 거 안 해요.’

‘왜요?’

‘난 원래 그래요!’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그리고 그 전에는 회사 회의실. 백한성 대표한테 날 달라고 했다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 매니저로 오라고 떠들었지. 그때 말들도 전부 생생하다.

‘지금 그쪽을 키워주겠다고 말하는 거잖아요, 내가.’

‘그러니까 어린애 데리고 소꿉장난하지 말고 내가 오랄 때 오라구요.’

소름 돋는 미래예지를 보고 난 다음이라 정신적 충격이 더 컸었는데.

머릿속에 잊고 싶은 기억이 떠오른다. 갓난애를 들고, 날더러 매니저라고 부르던 손채영. 그때 손채영의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인지 그런 미래를 다시 본적은 없다. 하지만 아직도 가끔, 그 장면이 개꿈에 등장한다.

손채영과 단둘이 만났던 기억은 다 이 모양이다.

꿈에 나오면 개꿈이 되는 것들.

오늘 그 개꿈의 소재가 하나 더 늘어나게 되는 건가.

커피를 마시며 다시 창을 바라봤다. 빗방울이 주르륵 미끄러진다. 커피가 나올 무렵부터 한두 방울씩 떨어지더니, 이젠 제법 쏟아진다. 일기예보를 못 봤는지 우산 없는 사람들이 가게처마 아래 옹기종기 모여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다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뭐지?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갔다. 자전거를 탄 여자가 보인다. 비에 쫄딱 젖은.

처마 아래서 잠시 쉬어갈 게 아니라면 페달이라도 필사적으로 구를 것이지, 마실 나온 사람처럼 느긋하다. 때때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하늘을 올려다보기까지 한다.

콧속으로 빗물이 다 들어갈 텐데.

누가 보면 살수차 불러다놓고 드라마 찍는 줄 알겠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여자의 얼굴이 눈에 확 들어왔다.

맙소사.

곧바로 카페를 나와 주차장에 세워놓았던 미니밴에 올라탔다. 다시 카페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차라리 헛것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여자는, 손채영은 그때까지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찬찬히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었다.

우산을 쓴 행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손채영을 바라본다.

근처에 차를 대고 차창을 내렸다.

“타요.”

나를 발견한 손채영이 자전거를 멈췄다.

그리고 흠뻑 젖은 머리를 양손으로 쓸어 넘긴다. 기분 좋게 웃는 얼굴로. 그제야 손채영을 알아본 사람들이 너도나도 핸드폰을 꺼낸다. 누군가는 나를 바라본다.

젠장, 그냥 같은 회사 소속 매니저처럼 구는 게 낫겠다.

우산을 들고 내렸다. 손채영을 미니밴 뒤에 구겨 넣고, 자전거는 접어서 트렁크에 실었다. 차를 몰고 자리에서 벗어나는 동안 손채영은 행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적당히 멀어지고 나서야 손채영이 창문을 다시 올렸다.

홍보팀에 전화해서 사진이 찍혔을지도 모른다고 전달하고, 글러브 박스를 열었다. 이송하가 쟁여놓은 주전부리들 틈으로 수건이 만져진다. 꺼내서 뒷좌석으로 던졌다.

“차에 물 떨어집니다.”

“다 젖었네. 비가 오면 온다고 말을 해줬어야죠!”

“제가 왜요.”

내가 기상청이야?

첫마디부터 어이가 달랑달랑한다.

“그리고 젖는 게 싫으면 빨리 오든가. 왜 기어옵니까?”

“급하게 페달 굴리면 웃기잖아요!”

“방금 그 꼴은 안 웃겼는 줄 알아요?”

“그것도 웃겼어요? 아이씨, 짜증나.”

나 원.

“아니, 애초에 왜 자전거를 탑니까. 것도 선글라스도 안 끼고.”

“나 지금 매니저 없어요.”

“택시 있잖아요.”

설마 혼자 택시도 못타는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되지만 손채영이니까, 하고 생각했을 때였다.

“이 바닥은 활동 안하면 금방 잊히는 거 몰라요? 가끔 얼굴 까고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일상사진도 찍히고 해야, 공백기동안 사람들이 날 안 잊어먹죠.”

얼씨구.

“그냥 작품을 하나 하시죠.”

“왜요. 나한테 주고 싶은 대본이라도 있어요?”

“없습니다.”

그런 게 있으면 이송하한테 벌써 줬지.

그나저나 말하는 걸 보면 은퇴할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미래에서 들은 정보는 지나치게 단편적이다. 시기적인 힌트라곤 손채영이 한창 인기 많을 때 은퇴했다는 것뿐인데.

그게 올해인지, 내년인지, 몇 년 후인지 어떻게 알아.

한번 반복된 이후로는 미래예지도 잠잠하다. 내가 손채영 일에 발을 담그겠다고 마음먹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혹시 몰라서 나한테는 필요 없는 정보라고 다시 생각해봤는데, 그래도 잠잠했다.

복잡한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봤자 금방 다시 생각으로 지저분해진다.

와이퍼로 부지런히 닦아봤자 금세 빗자국에 얼룩지는 차창처럼.

“왜 보자고 한 겁니까?”

내가 먼저 운을 뗐다.

백미러 속에 비친 손채영이 나를 바라본다. 머리카락을 다 닦았는지, 젖은 수건으로 목덜미를 훔치면서. 조용하니까 더 껄끄럽다. 보조석 쪽 창문을 조금 열었다. 시끄러운 빗소리가 안으로 들어온다.

“백 대표님이 내 얘기 안 해요?”

손채영이 되물었다.

“물어봤을 텐데. 나 관리해 볼 생각 없냐고. 아니에요?”

“비슷합니다.”

“팀장님이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고 달래기 시작한 걸 보면, 이제 발등에 떨어진 불이 옮겨 붙기 시작했다는 건데. 난 불을 끌 생각이 없거든요. 그럼 백 대표님 성격에 이 상태를 계속 두고 보진 않을 거고.”

손채영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떠오른다.

“분명히 대표님이 그쪽을 다시 찾을 거예요. 그럼 무조건.”

거울 속에서 손채영과 눈이 마주쳤다.

손채영이 계속 말했다.

“대표님한테 내 담당은 못하겠다고 해요.”

< 누가 그의 사람인가 (5) > 끝

ⓒ 장우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