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예인은 이미지를 먹고 산다 (6) >
이송하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꾹 다물린다. 뺨이 움찔거린다. 하고 싶은 말을 안간힘을 다해 삼키는 것처럼. 조명은 그대론데 얼굴빛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깜빡거린다.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 안에도 주황색 빛이 스며있다. 해질녘의 바다 같다. 바람이 불고, 요란한 파도가 떨어지는 바다 같은 소리하고 있네, 미친놈.
다시 불이 꺼졌다. 체감으론 한 삼초정도밖에 안 지났던 것 같은데. 어쨌든 다행이다. 어둠을 틈타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서 들리는 숨소리가 점차 빨라진다.
심란하다. 심란해. 내 손으로 된밥을 지어다가 엿기름 넣고, 물 넣고, 삭혀놨다가, 졸이는 것까지 해치운 기분이다.
그러니까, 순조롭게 엿 돼가고 있다는 거지.
“이제 그만 들어···.”
덥석, 전광석화처럼 뻗어 나온 손이 내 팔뚝을 움켜잡았다. 그간 수없이 보고 만져도 본 이송하의 손은 가늘고 낭창했는데. 이 힘은 어디서 솟구친 거지. 마치 곰의 앞발에 찍힌 연어가 된 것 같다.
“왜, 또 물어볼 거 있어?”
바쁜 숨소리 끝에 질문이 날아왔다.
“오빠는 왜 연애 안 하세요?”
“양심이 있어라. 그럴만한 기미만 보여도 너희가 한 날 한시에 죽은 물귀신 자매들처럼 달라붙잖아. 같이 죽자고.”
“그래도 오빠가 연애하려고 하면 충분히 할 수 있잖아요.”
그거야 마음먹고 밀어붙이면 그렇겠지만.
윤곽조차 안 보이는, 하지만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기척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옆자리를 돌아봤다.
“그냥, 한동안은 안 하려고.”
“왜요?”
“한눈 안 팔고 야망이나 활활 불태워 보려고 그런다.”
“야망······!”
옆의 기척이 부산스럽다. 불이 탁 들어왔을 땐, 이송하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치미는 격정을 못 견디겠다는 듯 속눈썹까지 파르르 떨고 있는 얼굴이. 정재이 문제로 울적해하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다.
이송하의 빈손이 내 남은 팔뚝까지 홱 움켜쥔다.
“야망 중요하죠! 제가 응원, 아니 뒤에서 밀고 앞에서 땡길게요.”
“어, 그래. 그건 고마운데.”
“저도 있어요, 야망.”
이송하가 뿌듯하게 말했다.
“작년부터 올해까진 제가 정한 계획대로 잘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십년지대계라도 세웠어?”
“아뇨!”
펄쩍 뛴다.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십년은 너무 길잖아요.”
한 오년쯤.
이송하가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비껴보며 중얼거렸다. 손을 허리에 짚었다가, 내렸다가, 발끝으로 바닥을 툭 밀었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슬그머니 입 끝을 올렸다가. 팔다리를 가만히 안 두는 통에 불빛은 계속 흘러내렸다.
“근데요. 오빠가 활활 불타서 일하시는 기간이 길어지면 결혼적령기도 지나고, 주변에 나잇대 비슷한 여자들은 거의 결혼하실 텐데. 그럼 그땐 어쩔 수 없이 커트라인을···.”
“들어가자, 이제.”
도어락을 올리며 말했다.
“무슨 결혼적령기 걱정까지 하고 있어. 그리고 어차피 이 업계는 남녀 구분 없이 결혼 늦게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네?”
“홍보팀 박 팀장님도 마흔까진 결혼 생각 없다고 하시더라.”
“······박 팀장님이요?”
이송하가 눈을 깜빡였다.
“그냥 그렇다고. 들어가, 얼른. 애들이 밖에서 뭐하나 궁금해 하겠다.”
현관문을 열고 이송하 등을 떠밀었다. 거의 구겨 넣다시피 했다.
그리고 마른침을 몇 번 삼켰다.
혀가 아렸다.
엿 돼가고 있는 건 맞는데, 그놈의 엿이 너무 달짝지근하다.
***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정재이를 비롯한 프리티걸 멤버들은 W&U 라운지 한쪽에 뭉쳐있었다. 정확히는 큰 금붕어 정재이를 중앙에 두고 작은 붕어들이 양 팔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간밤에 대성통곡들을 했는지 눈이 유난히 더 부어있었다.
“꼭 눈칫밥 먹는 소공녀들 같네. 누가 보면 내가 혼내는 줄 알겠다.”
3팀장이 수염이 거칠거칠하게 돋은 턱을 문지르며 웃었다.
“형이 좀 소공녀 괴롭히는 학원 교장처럼 보이긴 해.”
“뭔소리야. 난 키다리 아저씨 쪽이지.”
“그건 선우 씨 롤이죠. 3팀장님은 그냥 아저씨고.”
홍보팀 박 팀장과 김현조가 옆에서 낄낄거렸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프리티걸 멤버들에게 향해있다. 얌전히 앉아 이태신 실장과 정선우를 기다리고 있던 멤버들이 이토록 긴장한 건, 세 명의 갑작스러운 관심 때문이었다.
“어제 복덩이가 직접 발로 뛰어서 찾아왔다는 애가 얘야?”
3팀장이 정재이를 섬세하게 뜯어봤다.
“눈빛이 묘하긴 한데.”
“가만 보면 분위기가 있어요. 이런 애들은 코어 팬이 생기지.”
“더 봐야 알겠지만, 센터가 들어오니까 팀 이미지가 뚜렷해지네.”
3팀장과 박 팀장이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는 동안, 김현조는 자판기에서 이온음료를 뽑아 프리티걸 멤버들에게 돌렸다. 두 팀장에게는 커피를 뽑아 건네며 당부했다.
“곧 넵튠 애들 올 텐데. 애들 앞에서는 선우가 뛰어다녔다느니, 어쨌다느니 그런 얘긴 자꾸 하지 맙시다. 아닌 척해도 신경 쓰고 있을 테니까.”
“그건 그렇죠. 특히 송하.”
박 팀장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리고 동생들을 챙기고 있던 정재이를 살짝 불러서 말했다.
“만약에 송하가 좀 무뚝뚝하게 굴거나, 지그시 쳐다본다거나, 하여튼 평범하지 않은 짓을 해도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송하가 선우 씨를 유달리 따라서 그런 거니까. 갑자기 뚝 떨어진 막내한테 엄마 관심이 옮겨 가면 불안해하는 첫째들 있잖아.”
“다른 일엔 무덤덤한 애가, 복덩이만 끼면 감수성이 폭발한다니까.”
3팀장이 웃었을 때였다. 엘리베이터가 열리더니 이관우와 넵튠 멤버들이 내렸다. 다가오는 일행을 반갑게 맞던 팀장들이 움찔했다. 이송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온다.
여느 때와 비슷한 표정이다. 하지만 두 팀장과 김현조는 이송하의 감정이 펄떡대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경보하는 것처럼 서둘러 오는 것부터 이상했다. 여긴 정선우도 없고, 손채영도 없는데.
“저거, 내 야매 해석으론 ‘마침 잘 만났다’는 표정인 거 같은데.”
“그러게요.”
두 팀장이 딱 붙어서 소곤거렸다. 그러는 사이 이송하는 프리티걸 멤버들 앞에 섰다. 작은 붕어들이 선망의 시선으로 이송하를 올려다봤다. 사인회에 온 팬들처럼. 벌써 몇 번째 만남이건만 볼 때마다 더 심해졌다.
이송하가 말했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눈에 숟가락 대고 있으면 좋아.”
“숟가락!”
“차가운 거. 아니면 녹차티백.”
팁이라기엔 별거 아닌 얘기였다. 하지만 작은 붕어들은 입을 뻐끔거리며 기뻐했다. 이송하가 부은 눈에는 물파스가 특효라고 했어도 철석같이 믿었을 것 같은 반응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송하가 이번엔 정재이를 바라봤다.
이번에야말로 두 팀장과 김현조가 숨을 죽였다. 다른 넵튠 멤버들도 우뚝 서서 이송하의 행동을 보고 있었다. 이태희를 사이에 두고 임서영과 엘제이가 뭐라고 속닥거렸다. 이관우는 두리번거리는 게 정선우를 찾는 눈치였다.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이송하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더도 덜도 없이, 인사였다.
살짝 긴장했던 게 무색할 만큼 평범한. 심지어 이송하는 희미하게 웃고 있기까지 했다. 정재이와 첫 만남의 기억을 주고받으며 대화하는 모습에서 여유가 묻어났다.
두 팀장과 김현조는 의아함과 대견함이 섞인 눈으로 그 모습을 주시했다.
유명한 연예인일수록 폐쇄적인 환경에서 지내다보니, 성격이 점점 더 유난스러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봉준 실장한테 유독 어리광을 부리는 서지준도 그렇고. 실장은 물론 팀장 앞에서까지 깽판치고 다니는 손채영도 그렇고.
그래서 이송하가 남다른 말이나 행동거지를 보여도, 거기서 더 희한해지지 않기만 바랐는데. 웬일인지 하루아침에 어른스러워진 듯했다. 두 팀장이 해가 서쪽에서 떴느냐며 시선을 교환했을 때.
이송하가 박 팀장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지그시 바라봤다.
“팀장님.”
“응?”
“생각해 봤는데, 팀장님 되게 미인인 것 같아요.”
커피를 마시던 3팀장이 그대로 뿜어냈다.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도 입 안에 뭐가 들어있었다면 똑같이 분수를 만들었을 테니까. 연륜덕분에 금방 안정을 되찾은 박 팀장이 물었다.
“그런 생각을 갑자기 왜, 뭣 때문에 하게 됐는지···.”
“그리고 두 분이 잘 어울리시는 거 같아요.”
안정은 다시 박살났다.
이송하가 말한 두 분은 박 팀장과 3팀장이었다. 3팀장은 목구멍으로 넘어갔던 커피마저 역류했는지 요란하게 콜록거렸다. 김현조가 그의 등을 기계적으로 두드렸다.
황당한 얼굴로 이송하와 3팀장을 번갈아 보던 박 팀장이, 이번엔 다른 넵튠 멤버들을 바라봤다. 프리티걸 멤버들과 신변잡기 인사를 나누느라 바빴다. 마치 국회의원 선거기간의 유세 현장처럼 열정적이었다.
박 팀장이 이송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송하야. 나한테 왜 이러니.”
“언제든 박 팀장님이 결혼하시면 제가 축가도 부를 수 있고, 부케도 받을 수 있고, 식권 나눠주는 거나, 입장할 때 웨딩드레스 잡는 것도 할 수 있다고 미리 말씀드려놓고 싶어서요. 급하게 일꾼이 필요하실 지도 모르니까.”
그 말에 박 팀장이 못 견디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고마운데, 너 부케 받고 6개월 안에 결혼 못하면 평생 못한다?”
“그건 취소. 다른 건 다 돼요.”
흠칫 놀란 이송하가 정정했다.
우는지 웃는지 헷갈리는 얼굴로 박 팀장이 3팀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3팀장은 이미 한참 전부터 기침과 웃음을 동시에 토하고 있었다. 그가 김현조의 옆구리를 찔렀다.
“쟤 학부모 어딨냐?”
***
프로듀서 실에서 족제비 피디와 한참 얘기하다가, 황급히 4층으로 올라갔다. 3팀장의 급한 호출이었다. 이관우한테 넵튠이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은 직후라, 혹시 넵튠이랑 프리티걸 사이에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 싶었는데.
막상 보니 두 팀의 분위기는 평화롭다. 새로 합류한 정재이도 잘 섞여들어 있다. 함께 올라온 이태신 실장이 그 모습을 보고 조심스럽게 안도했다.
그럼 뭐지.
고개를 돌려보니 3팀장과 박 팀장이 배를 잡고 웃고 있다.
김현조한테서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이송하는 처음 나를 보자마자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더니, 지금은 벽보고 서있다. 예전에 집에서 길렀던 강아지가 사고치고 난 후에 딱 저랬었는데.
“내가 네 앞에서 뭔 말을 못하겠다.”
다가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송하가 벽에 더 찰싹 달라붙는다. 아주 뚫고 넘어가겠다. 저도 부끄럽긴 한가 보지. 뭔가 하려면 나한테 들키지나 말던가.
곁눈질하면서 눈치 보는 꼴이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그래서 웃었더니 고개를 슬쩍 들고는 살살 따라 웃는다.
“웃지 마.”
“네.”
대답은 잘하지.
다시 찌그러지는 이송하를 다른 멤버들에게 보내놓고, 박 팀장과 3팀장에게는 대충 둘러댔다. 박 팀장이 손사래를 쳤다. 뭣 때문에 저러는 건지는 몰라도 이 정도면 애교 수준이라며. 오랜만에 뒤집어지게 웃었다면서.
“프로젝트는 착착 진행되고 있냐?”
3팀장이 불쑥 물었다. 시선은 애들한테 닿아있었다.
“뭐 할 때마다 바로바로 보고받다가 이렇게 뚝 떼서 내보내니까 경과를 하나도 모르겠네. 답답한 건 둘째 치고 궁금해 죽겠다. 회사에 IBC 촬영 팀도 돌아다니고, 프리티걸 멤버도 돌아오고,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긴 한데.”
그가 마른입술을 핥았다.
“리얼리티 프로, 메이필. 그건 어때? 그게 핵심이잖아.”
“괜찮게 빠질 것 같아요.”
“방송 나가고 나면 프리티걸도, 넵튠도 네 계획대로 풀릴 것 같아?”
“네.”
웃으며 대답했다.
메이필 회의에 몇 번 참여했던 박 팀장도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풀려야지. 그렇게 만들려고 밤낮 없이 뛰어다니는 건데. 이 프로젝트로 얻으려고 했던 것들을 모조리 다 얻어내기 위해서.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매달려있다.
김현조가 핸드폰으로 달력을 보며 물었다.
“방송은 두 달 후라고 그랬나?”
“네. 그때 굿프렌즈 시간대로 들어가요.”
3팀장이 입맛을 다신다.
“우린 두 달 기다렸다가 일반 시청자들이랑 같이 방송 봐야겠구만. 두 달이라. 멀다, 멀어.”
“멀긴요. 두 달 금방이죠. 눈 감았다 뜨면 첫 방일걸요.”
달력 날짜를 눈으로 짚어보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대로, 두 달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 연예인은 이미지를 먹고 산다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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