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능하거나, 유능하거나 (9) >
“햇병아리가 W&U에서 수작질만 배웠구만?”
정선우와의 통화내용을 고스란히 전해들은 황 부장이 코웃음을 쳤다.
최 피디가 안절부절 못하며 서성였다.
“전화 돌려서 알아봤는데, 리얼리티 기획에 프로덕션이랑 케이블에서 눈독 들이고 있는 건 맞아요. PBS 얘기도 있고.”
“그렇겠지. 아이템이 좋으니까.”
“이러다 정선우 실장이 진짜 기획안 들고 다른데 가버리면 어떡하죠? 우리한테 제일 먼저 왔는데 다른 데로 가서 대박나면, 국장실에서 벼락 떨어질 텐데요.”
“하여간 소심해가지고. 이런 놈도 피디라고.”
황 부장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최 피디를 쏘아봤다.
“넌 연차가 몇 년인데 햇병아리 수작질에 낚여서 놀아나고 있냐.”
“놀아나는 게 아니라,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진짜 어그러질까봐 그러죠. 그냥 적당한 선에서 조건 맞추고 제작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일단 제작 들어가면 주도권은 다시 우리 손에 들어오니까 그때···.”
“글쎄. 봐줄 마음이 안 생기는데. 이놈 하는 짓이 괘씸해서.”
황 부장이 입술을 비틀었다.
“케이블이랑 외주 프로덕션에서 대접받고 다니니까 이제 지상파 부장도 만만해 보이는 거야, 이놈이. 그러니까 다른 방송사로 가네 마네 수작떨면서 딜을하고 있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그가 기사가 떠있는 핸드폰 화면을 보며 덧붙였다.
“갑자기 기사 터진 것도, 그놈이 뒷구멍으로 터뜨려놓고 모른 척 하고 있는 걸 수도 있어.”
“알아 봤는데, 무슨 고등학생이 SNS에 올린 게 출처라던데요.”
“찌라시 출처 세탁하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몇 다리만 건너면 알아서 퍼지는데. 어쨌든 봐줄 생각 없어. 저놈 뻗대는 것도 잠깐이야. 다른 데선 이런 방법이 통했는지 몰라도, 나한텐 턱도 없다.”
황 부장이 손을 내저었다.
“근데 정 실장이 수틀려서 넵튠 애들 하차까지 각오하고 돌아서면요?”
최 피디가 침을 삼키고 말했다.
“굿프렌즈 장기 프로젝트 출연건도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그냥 다른 방송사로 날라버리면 어떡해요?”
“배짱 있으면 해보라고 해.”
황 부장이 싸늘하게 말했다.
“방송국 하나랑 척질만한 배짱.”
“네?”
“그놈이 네 말대로 나오면, 난 바로 국장님한테 갈 거거든. 너도 알잖아, 국장님 싸가지 없는 놈들 싫어하는 거. 성격 괴팍하셔가지고.”
킬킬거린 황 부장이 계속 말했다.
“W&U실장 놈이 저 수틀린다고 자기 소속사 애들도 프로그램에서 빼가고, 기획안도 괘씸하게 간만 보다가 다른 방송사로 낼름 넘겼다고 하면 국장님이 좋아하시겠냐고.”
“근데 말 안 들으면 애들 하차시키겠다고 우리가 먼저 말 꺼냈잖아요.”
“국장님한텐 내가 입 잘 털면 돼. 팔은 어차피 안으로 굽는 거야.”
번드르르하게 말을 늘어놓은 황 부장이 최 피디에게 손짓했다.
그의 입가에 교활한 웃음이 떠올랐다.
“지금 내가 한 얘기를, 정선우 그놈한테 그대로 전해.”
“그대로요?”
“그럼 그놈이 숙이고 들어오게 돼 있어.”
확신이 가득한 태도에, 최 피디가 눈을 깜빡였다.
“왜요?”
“그놈이 일을 그렇게 키울 군번이 못되지. W&U가 구멍가게도 아니고 거기서 일하는 직원이랑 연예인이 몇 명인데. 저 혼자 수틀린다고 방송국을 들이받을 수 있겠냐고. 회사 내부에서 먼저 반대하고 나올걸? 그리고 그놈 지금 임시 팀장이라면서.”
“네. 이번 프로젝트 맡으면서 임시 팀장 달았다고 하던데요.”
“그럼 이번 일 무조건 제 선에서 잘 처리하고 싶을 거 아냐. 근데 이게 국장님 선으로 올라가면 당연히 W&U대표가 나서지 않겠냐? 그럼 제가 아직 협상테이블에 앉을 능력 없다고 인증하는 꼴 아냐.”
그 말에, 최 피디가 감탄을 흘렸다. 걱정이 싹 가신 얼굴이었다.
황 부장이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말했다.
“주제모르고 기어오르는 놈들은 이렇게 길들이는 거야, 임마.”
*
-국장님 선까지 올라가면 진짜 일이 커질 수도 있어요.
스피커 너머에서 최 피디가 한숨을 내쉬었다.
-황 부장님 뿔나신 건 제가 조금이라도 풀어 볼 테니까, 실장님이 그냥 고개 한번 숙여주세요. 이렇게 줄다리기 하다간 실장님이랑 부장님 문제가 아니라, 진짜 W&U랑 IBC문제로 커질 수도 있어요.
“······그럼 안 되죠.”
정선우가 마른 입술을 쓸며 대답했다.
최 피디의 목소리가 확연히 밝아졌다. 내부회의 후에 다시 통화하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종료됐다.
회의실 안에 침묵이 내려왔다. 이태신 실장은 미지근해진 커피로 타는 갈증을 달랬다. 최병수 피디와 정선우가 통화하는 동안 욱하고 치밀어 오른 감정은 아직도 잠잠해질 기미가 없었다.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권력으로 찍어 누르겠다는 협박. 권위 있는 지상파 방송국 피디, 그것도 부장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 일하는 방식은 치졸하기 짝이 없었다.
이태신 실장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정선우를 돌아봤다.
대놓고 이런 압력을 받았으니, 그의 속도 엉망진창일 게 분명했다. 정선우는 무표정으로 커피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로. 그 모습이 마치 똬리를 틀고 있는 뱀처럼 보였다.
이윽고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아니라 팀장님이나 대표님이 나서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겠죠?”
“없었겠지.”
박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자괴감 느낄 필욘 없어. 이렇게 사이즈 큰일을 자기 정도 연차가 맡는 게 드문 일이니까. 황 부장 그 양반, 자기가 혼자 기획안 들고 온 거 보고 무시당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그런 양반들이 또 급을 엄청 따지잖아.”
박 팀장이 정선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가볍게 말했다.
“어떻게, 지금이라도 대표님한테 SOS칠래? 그럼 깔끔하게 해결될 걸?”
이태신 실장이 침을 삼켰다.
“아뇨.”
정선우의 입 끝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좀 더 기다려보죠. 보험 들어놓은 게 있으니까.”
“보험이라면······.”
이태신 실장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정선우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럴 것 같아서 새벽까지 술을 좀 마셨거든요. 아는 감독님이랑.”
“가, 감독님이요?”
*
IBC 드라마국.
국장이 거칠게 넥타이를 풀며 들어섰다. 시끌벅적하던 드라마국 감독, 조연출들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국장실로 향하던 그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사무실에 엉덩이 붙이고 앉은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다들 촬영 없어? 이러고 놀 시간에 한 컷이라도 더 찍어야 대작이 나올 거 아냐! PBS 로열패밀리는 시청률 25프로 넘어가게 생겼는데 배도 안 아프냐!”
버럭 고함을 내지른 그가 국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두 사람이 따라 들어갔다. 커리어 잘 쌓다가 미니시리즈 하나 말아먹고 절치부심해서 새 작품을 준비 중인 문 감독. 그리고 총괄CP인 김 부장이었다. 문 감독을 보고 국장이 쌍심지를 켰다.
“문희성이 너 주인공 섭외됐어?”
“아뇨.”
“남녀주인공 탑급으로 잡아오기 전까진, 편성얘긴 입도 뻥긋하지 마.”
“그 섭외 문제 때문에, 국장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참다 참다 도저히 못 참겠어서요.”
문 감독이 험악한 얼굴로 말했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국장이 눈을 깜빡였다.
“뭘 못 참아?”
“국장님 말씀대로 저도 탑급으로 배우 세팅하고 싶어요. 로열패밀리 같은 시청률 내고 싶고! 그래서 배우들이랑 매니저들 앞에 엎어져서 애걸복걸하고, 과일바구니 사보내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근데 그렇게 해서 관계 다져놓으면 뭐해요. 예능국에서 깽판을 쳐놓는데!”
“뭐?”
“예능국에서 기획사들 상대로 갑질하는거야 제 알바 아닌데, 우리한테 피해는 주지 말아야하는 거 아닙니까? 우린 뭐 자존심이 없어서 대본 한번 봐달라고 삼고초려하고 다녀요?”
분통을 터뜨린 문 감독이 씩씩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도 그냥 예능피디나 할걸, 드라마 찍는다고 생고생은 다하고···.”
“이놈 갑자기 왜 이래?”
국장이 황당한 눈으로 김 부장을 쳐다봤다. 부장이 혀를 차며 거들었다.
“섭외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예능국 쪽 문제 때문에 산통 깨졌답니다. 안 그래도 이런 일들 때문에 애들 불만 많았어요.”
문 감독이 부추기듯 김 부장의 옆구리를 찔렀다.
김 부장이 덧붙였다.
“예능국이랑 드라마국이 분리돼 있다고 해도 같은 IBC인데, 기획사 애들 예능국에서 물 먹고 나면 우리 보는 눈도 곱지 않다고요. 똥은 그쪽에서 싸고 왜 뒤처리는 우리 애들이 합니까.”
그 뒤로 삼십분 정도 더 대화가 오갔다.
한숨을 푹푹 내쉬던 국장이 마침내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예능국장이랑 얘기 좀 해볼게. 가능한 이런 문제 안 생기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낸 후, 문 감독과 부장이 국장실 밖으로 나왔다.
문 감독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장님.”
“네 말 아니더라도 한번 걸고넘어질 문제였으니까. 근데 너 솔직히 말해봐. W&U 그, 정선우한테 뭐 받기로 했냐?”
“받긴 뭘 받아요, 팍팍하게.”
부장이 코웃음을 쳤다.
“새벽까지 같이 술 마셨다며. 뭐 오고간 게 있었으니까 네가 이렇게 발 벗고 나선 거 아냐? 뭐 좋은 얘기 있었으면 빨리 말해봐.”
“별 얘기 없었어요. 그냥 같이 술 마시는데, 정 실장이 술 좀 들어가니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아주 죽으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도와주고 생색 좀 내려는 거예요.”
마른 입술을 핥고, 문 감독이 다시 말했다.
“멀리 보고 가야죠. 내가 드라마 한 작품 하고 말 것도 아니고, 정 실장이 계속 실장일 것도 아닌데.”
“뭐?”
“그 친구 지금 W&U 임시 팀장이래요. 재작년에 로드, 작년에 실장, 올해 임시 팀장. 내년엔 뭐가 될지 누가 압니까. 그때를 위해서 미리미리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해야죠. 어려울 때 좀 도와주면서.”
문 감독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래. 근데 너 뭐 받긴 했지?”
“아, 아니라니까요!”
*
IBC 예능국장은 차갑고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다.
W&U 로고가 박힌 리얼리티 기획안을 다 훑어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데서도 탐낼 만하네. 재밌어. 우리가 해야겠다.”
앉아서 기다리던 황 부장이 반색했다.
“기획안도 기획안이지만, 핵심은 정선우죠. 지금 한창 화제성 좋고, 방송 출연이 적어서 이미지 소모도 적고. 이놈 예능 불러다놓으면 뽑아먹을 게 넘칠 겁니다. 제가 지금 잘 길들이고 있으니까···.”
“조 부장 좀 오라고 해.”
“네?”
“조 부장.”
황 부장이 얼떨떨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가 밖에서 돌아다니는 직원을 붙잡아 이야기를 전달하자, 오 분도 안돼서 조 부장이 국장실로 들어왔다.
반 이상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안경 너머의 눈에는 주름이 선명했다. 전체적으로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지만, 턱과 옷깃에 묻은 새빨간 국물자국이 그를 십년은 젊어보이게 했다.
동기지만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라, 황 부장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국장실 들어오는데 뭘 그렇게 묻히고 와?”
“아, 이거. 작가들이 간식으로 떡볶이를 시켜가지고 한입 얻어먹다가.”
조 부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에게 국장이 기획안을 내밀었다.
“이거 가져가.”
“기획안이네요?”
“기획사 측이랑 처음부터 다시 조율해봐.”
“국장님! 지금 무슨······!”
뒤늦게 상황파악을 한 황 부장이 벌떡 일어났다.
국장이 말했다.
“넌 이제 손 떼.”
“네?”
“빠지라고.”
황 부장이 멍청히 입을 벙긋거렸다.
< 무능하거나, 유능하거나 (9)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