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54화 (154/218)

< 무능하거나, 유능하거나 (7) >

굿프렌즈의 메인피디 최병수는 분주히 눈치를 살폈다.

왼쪽에는 황 부장이 느긋하게 앉아있고, 오른쪽에는 정선우 실장이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최 피디는 십분 전, 정선우 실장이 들어오기 전에 회의실에서 오갔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렇게 후려쳐도 괜찮을까요? 중소기획사도 아니고 W&U인데, 그리고 부장님도 정선우 실장 아시잖아요.’

‘너는 지상파 피디라는 놈이 햇병아리 눈치를 보냐.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대형 기획사들이 점점 더 버릇이 나빠지는 거야, 임마. 탑스타 데리고 있다고 오냐오냐 해주니까 아주 지들이 갑인 줄 알고.’

‘맘 상해서 리얼리티 들고 딴 방송사 간다고 하면요? 이거 기획 괜찮던데.’

‘네 프로에 넵튠 들러리 둘이나 있잖아. 걔들 하차시키겠다고 겁 좀 주면 돼.’

‘그게 통할까요?’

‘통하게 해야지. 내가 네 프로 살려주려고 이러는 거 아냐, 임마. 후려치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넌 그 햇병아리 옆에 붙어서 슬슬 얼러봐. 걔한테 뽑아먹을 거 많잖아. 다 뽑아먹어야지.’

처음엔 찜찜했지만, 최 피디의 생각에도 황 부장 말이 일리가 있었다.

일이 잘 풀려서 굿프렌즈에 W&U소속 배우를 게스트로 끌어올 수 있다면. 화제성 절정인 정선우를 제대로 써먹을 수만 있다면. 개편을 앞두고 프로그램이 메인피디 자리에서 교체될까 봐 마음 졸이던 최 피디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가 작은 희망에 부풀었을 때, 마침내 정선우가 입을 열었다.

“부장님.”

대놓고 깔보인 사람답지 않게 담담한 목소리였다.

“협찬 끼고 들어가는 아이돌 리얼리티는 보통 팬들 가지고 장사하는 경우고, 저희는 상황이 좀 다르지 않나요. 이거 화제성 좋을 텐데요. 광고도 붙을 거고. 송하가 출연하면 중국에서도 수요가 있을 테니까 수출도 가능하고요.”

“그래봤자 서너 편짜리 단발 아냐? 우리한테도 좀 더 메리트가 있어야지.”

황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우리가 뭐 엄청난 거 바라나? 좋은 시간대에 편성 빼고, 피디랑 작가진도 실력 있는 사람들로 세팅해주는 대신, W&U에서도 좀 적극적으로 협조해달라는 건데. 서로 상부상조 하자는 거잖아.”

“상부상조 좋죠. 그런데 부장님이 말씀하신 탑 급 배우들은 저희도 이래라저래라 못합니다.”

정선우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기분상한 티를 내던 황 부장이 말을 바꿨다.

“그럼 급은 좀 낮춰서 조율해보고. 그 영화배우 누구야, 요즘 기사 많이 뜨던데. 남조윤? 그 친구랑 정 실장이랑 같이 출연해서 썰 좀 풀어보면 어때. 이렇게 방송에서 펌프질을 좀 해주면 그쪽에도 좋지 않겠어?”

“그렇죠. 그렇긴 한데 예능출연은 좀 신중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워낙 중요한 시기기도 하고, 또 말주변이 좋은 배우가 아니라서요.”

“내참, 그럼 넵튠 컴백무대 우리랑 하자. 앨범 준비 중이라며? 저번엔 PBS에서 했으니까 이번엔 우리랑 한번 해야지.”

정선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황 부장이 자르듯이 말했다.

“잘 생각해 봐. 정 실장이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고 하면 우리도 좀 섭섭하지. 굿프렌즈 개편 때 임서영이랑 엘제이 멤버교체하자는 의견도 꽤 있었는데, W&U랑 관계 안 좋아지면 진짜 그렇게 될 수도 있어.”

“에이, 부장님. 그 얘기는 왜 또 꺼내세요.”

타이밍을 살피던 최 피디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서영이랑 엘제이랑 다 우리 식군데. 화제성 낮은 거야 제작진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건데, 왜 자꾸 열심히 하는 멤버들을 들었다 놨다 하세요.”

“우리만 식구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서 그러지, 임마!”

황부장이 혀를 차더니, 전화 한통 하고 온다고 회의실 밖으로 사라졌다.

최 피디가 정선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안해요, 실장님. 우리 CP라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나도 참 난감하네.”

정선우가 그를 돌아봤다. 최 피디는 마른침을 넘기며 정선우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방송국 부장의 으름장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하거나, 분통을 터뜨리거나. 둘중 하나일 줄 알았는데.

어느 쪽도 아니었다.

“좀 당황스럽긴 하네요. 이게 IBC입장이라고 생각하면 됩니까?”

“저는 아니고, 부장님들 입장이죠. 윗분들 마인드 아시잖아요. 제가 부장님이랑 얘기 다시 잘 해볼 테니까, 실장님도 조금만 손 좀 빌려주세요. 서영이랑 엘제이 돕는다고 생각하시고. 물론 리얼리티 기획도 제대로 밀어······.”

열심히 설득하며, 최 피디가 다시 반응을 살폈다.

정선우의 입 끝에 진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관우 매니저 맞죠? 넵튠 로드 보는.”

“아, 네. 맞습니다.”

덩그러니 앉아서 회의실 입구를 힐끔거리던 이관우가 벌떡 일어났다. 다가온 남자는 IBC 사원증을 걸고 있었다. 자신을 드라마국 감독이라고 소개한 그가 따듯한 캔 커피를 내밀었다.

“정선우 실장 예능국 들어왔다던데. 맞아요?”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아이고, 내가 얘기 듣고 밥 먹다가 날아왔잖아. 작품 얘기 한번 하려고 해도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우리 정 실장은 커피를 좋아하나, 주스를 좋아하나?”

감독이 한손엔 캔 커피, 한손엔 주스 병을 들고 물었다.

“제가 알기론 커피를 좀 더 자주 드십니다.”

“근데 무슨 회의 중이에요? 기분 좋게 나와야 나도 편하게 얘기할 텐데.”

“예능 쪽으로 그냥···.”

이관우가 친절하게 둘러대고 있을 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정선우가 걸어 나왔다.

드라마국 감독이 반색했다.

“어, 뭔지 몰라도 얘기 잘 끝났나본데? 웃고 있잖아.”

“그러게요.”

이관우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부리나케 정선우에게 다가간 감독이 캔 커피와 대본을 내밀었다.

“정 실장! 이거, 전에 전화로 얘기했던 건데, 진짜 대박작품이야.”

“안녕하세요, 감독님.”

“주연배우 세팅이 안돼서 편성을 못 받고 있는데, 이거 이송하 씨가 한다고 그러면 편성 바로 나올 거라고. 송하 씨도 원톱 주연 할 때 됐잖아! 딴 데 가지 말고 우리랑 하자.”

“음. 차기작은 스케줄을 좀 봐야 하는데.”

“스케줄은 우리가 다 맞춰줄 수 있지! 대본보고 꼭 연락 좀 줘, 어?”

“그럼요. 감독님께 제일 먼저 연락드릴게요.”

정선우가 빙긋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쉬워하는 드라마국 감독을 뒤로하고, 그는 성큼성큼 방송국을 빠져나갔다.

이관우가 뒤따르며 물었다.

“회의가 잘 안 풀리셨나봐요?”

“왜 그렇게 생각해? 나 웃고 있잖아.”

“그러니까요. 평소랑은 많이 다르셔서.”

정선우가 소리까지 내면서 웃었다.

슬쩍 한걸음 떨어지며, 이관우가 소름이 올라온 목덜미를 긁적였다.

아는 척을 하며 인사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상대한 정선우가 다시 말했다.

“이 정도로 얕보인 건 오랜만이라, 상큼하네. 이 년쯤 어려진 기분인데.”

“왜, 리얼리티는 못하겠다고 합니까?”

“아니. 하자는데, 바라는 게 좀 많다.”

“바라는 거요?”

“한번 둘이 잘 살아보자고 했더니만, 자기랑 살고 싶으면 우리더러 집이랑 세간 살림에 혼수까지 다 해오고, 차도 한 대 뽑아오라네.”

“그게 무슨······.”

회의실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 챈 이관우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방송국과 기획사간의 엎치락덮치락하는 기싸움, 그리고 편성권을 쥔 지상파 피디들의 터무니없는 횡포. 새삼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긴.”

정선우의 얼굴에서, 웃음이 흔적도 없이 가셨다.

“그렇겐 못살지.”

***

이관우를 회사로 보내고 곧장 넵튠 숙소로 향했다.

도어락을 열고 들어갔더니, 현관 앞에 이태희가 서있다.

보통은 이송한데.

“자요.”

내 의문을 알아챘는지 이태희가 고갯짓했다. 거실 소파 위에 이송하가 엎어져 자는 중이었다. 어제도 새벽까지 인터뷰 촬영이 있었으니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보니, 일하지 않을 때는 먹거나 자는 모습만 보는 것 같다.

“다른 애들은?”

“자는 것 같던데. 아침부터 비 온다고, 다들 침대에서 안 내려오네요.”

“넌 뭐하고 있었는데?”

“비오는 날은 막걸리죠.”

이태희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한 병 마시면서 작업 중이었어요.”

“자작곡 얘긴, 다른 애들한텐 했어?”

“아뇨. 최종 확정되면 얘기하려고요.”

그러면서 희미하게 웃는다. 이태희다운 표정이다.

나한테서 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줄곧 저랬지. 차분하고, 조용하고.

하지만 김현조와 3팀장이 자작곡을 듣고 나서 춤을 추며 좋아했다는 얘길 전해줬을 때. 그리고 내가 확인이 늦어서 미안하다고, 넌 아무래도 천재인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을 때.

이태희가 비로소 안도하던 그 표정은,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어도 속으론 생각이 많았겠지. 그리고 그건 이태희만 그런 건 아닐 거다. 하루가 다르게 유명해지고 있지만, 한편으론 단체팬덤을 들쑤시는 악성 개인 팬이 늘어난 이송하도. 그리고 방송으로 개인활동을 하고 있는 임서영이나 엘제이도.

나한테 말하지 않고 삼키고 있는 생각들이 얼마나 많을까.

“오빠! 언제 오셨어요?”

임서영이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막 일어났는지 머리는 산발이고, 노란색 담요를 망토처럼 두르고 있다. 임서영의 명랑한 호들갑이 숙소를 흔들었다. 이송하가 먼저 눈을 번쩍 떴고, 엘제이도 하품을 하며 나왔다.

“이송하 또 스케줄 있어요? 으아아, 쟤 꼴 완전 방구석 폐인인데.”

“나 꼴 괜찮아.”

“턱에 쌈장 묻었거든?”

부정하던 이송하가 황급히 턱을 문지른다.

“거짓말인데.”

임서영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다시 나한테 묻는다.

“진짜 뭔 일로 오셨는데요?”

“너 보러.”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진짠데.”

담요자락을 들고 장난스럽게 흔들던 임서영이 멈칫했다.

“진짜라구요?”

“너랑 엘제이 보러 왔어.”

한발 늦게, 임서영과 엘제이가 눈을 깜빡인다.

엘제이 방으로 들어갔다. 임서영 방은 인형 때문에 발 디딜 틈이 없어서.

여긴 운동기구나 게임관련 물건들이 가득하다. 책장에는 원서로 보이는 두꺼운 책들이 질서정연하게 꽂혀있고. 겉표지에 쇠사슬이나 수갑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무슨 내용인지 짐작도 안가는 책들이다.

셋이 책상의자와 바닥, 침대에 골고루 자리를 잡았을 때.

문이 끼익 열렸다.

“오빠, 커피 드릴까요?”

이송하가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냐, 괜찮아.”

“유자차도 있어요. 인삼즙이랑, 토마토주스랑.”

“우리 냉장고에 그런 게 있어? 왜 난 못 봤지?”

임서영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엘제이가 심드렁히 말했다.

“뭐든 갖다달라고 해요. 오빠가 말하다가 목말라 쓰러질까봐 저러나 본데.”

“그럼 유자차로.”

“잠깐만 기다리세요. 타 올게요.”

그 말에 임서영이 도끼눈을 떴다.

“우린 안 물어보냐? 오빠 거 내가 다 뺏어먹는다?”

“생수랑 보리차 있어.”

“야!”

“거짓말이야.”

복수를 마친 이송하가 곧 마실 것 세잔을 내왔다.

내 몫의 유자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임서영을 바라봤다. 얘기 좀 하자는 말에  딱 굳어버리더니, 이송하 덕에 평소대로 풀어졌다. 양손으로 토마토주스 잔을 쥐고 홀짝이는 걸 보면서 물었다.

“굿프렌즈 촬영장 분위기 어때?”

커다란 눈동자가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린다.

“좋··· 은데요?”

“정말 좋아? 개편 앞두고 분위기 뒤숭숭한 것 같던데.”

“아닌···.”

“좀 그래요.”

엘제이가 툭 말했다.

화들짝 놀란 임서영이 소리도 못 내고 엘제이의 등짝을 철썩 때렸다.

“아, 왜! 이제 말해도 상관없잖아. 출연하기로 된 거니까.”

“그래도 괜히······!”

“어차피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돼.”

새파란 시선이 내 쪽으로 돌아왔다. 엘제이가 생수 잔을 단숨에 비웠다.

“제작진이 돌아가면서 오빠 섭외 좀 해오라고 난리였어요. 나한테는 부탁이었는데, 쟤는 만만해 보였는지 달달 볶는 것 같더라고요. 특히 피디님이. 매니저한테 그 정도 부탁도 못하냐느니,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이 없냐느니.”

“최병수 피디?”

엘제이가 고개를 끄덕이곤 덧붙인다.

“그 피디님 말인데요.”

“야, 그만해! 쪽팔리게 또 무슨 얘기 하려고!”

임서영이 안절부절 못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만할까요?”

묻는 엘제이에게, 내 유자차를 내밀며 말했다.

“아니. 이참에 다 해봐.”

*

매가리 없는 봄비가 앞 유리에 부딪쳐 흘러내린다. 골목길이 창백한 가로등 불빛이 그 위로 뭉개졌다. 나는 운전석에 앉은 채로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봤다. 머릿속에서는 방송국에서의 일과, 엘제이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이 떠다닌다.

“정 실장님!”

목소리가 상념을 깨뜨렸다. 이태신 실장이 조수석에 올라탄다. 우산도 없이 달려 나왔는지 앞머리가 축축하게 젖어있다.

그가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펴곤 고개를 떨궜다. 얼굴빛이 먹구름이 가득한 밤하늘만큼이나 칙칙하다.

“죄송합니다. 재이를 아직 못 찾았어요. 집에도 소식이 없고, 가수 되겠다고 고등학교 때 지방에서 올라온 애라, 신세질만한 친구도 없을 텐데. 다른 애들은 소속사라도 잡고 들어갔는데 얘는 대체 어디 숨어서 뭘 하는 건지.”

말을 하면서도 그는 연신 내 눈치를 살폈다.

내 입에서 정재이를 그만 찾으라는 말이 나올까봐 걱정하는 기색이다.

“제가 계속 수소문해 보고 있으···.”

“기사 터지고 나면 연락이 닿을지도 모르겠네요.”

“기사요?”

이태신 실장이 고개를 번쩍 든다.

“네. 붕어들, 아니, 멤버들한테도 전해주세요. 집에 얘기해도 된다고.”

“그럼······!”

입 끝을 올리며 말했다.

“이제 시작이에요.”

< 무능하거나, 유능하거나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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