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49화 (149/218)

< 무능하거나, 유능하거나 (2) >

맙소사.

이제야 상황파악이 좀 된다.

“정재이 씨, 난 개인적으로 돈 받고 일한 적 없어요.”

-저 지금 녹음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건 브로커가 따로 있다는 건 아는데 누구한테 연락드려야 되는 건지 몰라서, 실장님께 바로 연락드린 거예요. 전화로 얘기하기 곤란하시면 기다릴게요. 실장님 시간 되실 때 부르시면 제가···.

“잠깐, 잠깐. 곤란할 것도 없고, 브로커도 없어요. 어디서 무슨 얘길 들은 건지 모르겠는데 다 헛소문이에요.”

-······얘기를, 들었는데. 남조윤 선배님도 이런 방법으로···.

“헛소문이라니까. 말도 안 되는 악질 루머.”

대체 왜 이 루머가 아직도 들리는 거지? 홍보팀에서 상세한 보도자료도 뿌렸고, 내가 직접 인터뷰도 했고, 심지어 SBE 필름에서 최성원 감독 코멘트까지 내보냈는데.

핸드폰 너머의 숨소리가 흔들렸다.

말 한마디 없는데도 동요하는 게 확연히 느껴질 정도였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지금 프리티걸 다음 앨범 준비 중···.”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도망치듯 전화가 뚝 끊어졌다.

걸려온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아예 핸드폰이 꺼져있다. 이게 웬 황당한, 이게 무슨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야? 고민도 부담도 집어던지고 즐겁게 일하자고 마음먹은 게 몇 분 전인데.

음성사서함에 다시 전화 달라고 메시지를 남겨놓고, 핸드폰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그리고 이태신 실장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답 없이 신호연결음만 이어진다.

프리티걸 소속사 대표번호가···.

-여, 여어보세요?

막 끊으려던 순간에 목소리가 들렸다. 울음에 파묻힌, 코맹맹이 여자애 목소리다. 그냥 우는 정도가 아니라 대성통곡 수준이었다. 게다가 핸드폰을 들고 있는 사람 말고도 주변에 울음소리가 더 들린다.

이건 또 뭐야.

“이태신 실장님 핸드폰 아닙니까?”

-실, 실장님 지금, 통화 못 하세요. 핸드폰을, 놓고, 가셔서···!

“잠깐, 좀 진정하고. 혹시 프리티걸 멤버예요?”

-프리티걸은, 이제 없어요. 허으으, 죽었어요.

“뭐라고요?”

-해체한다구요···!

***

어둑어둑한 욕실. 이태신 실장은 변기 위에 찌그러진 것처럼 앉아있었다.

핸드폰을 든 손이 진땀으로 미끈거렸다.

-나는 아예 손 뗄 테니까, 계속 하고 싶으면 너 혼자 하든가.

“사장님, 아니, 형!”

-정재이 나가고 윤보라랑 박효진도 짐 싸고 있다며? 그럼 끝난 거지, 뭐.

사장이 느긋하게 말했다. 이태신 실장이 화장실 문을 조금 열었다. 눈부신 형광등 불빛과 함께 흐느끼는 소리가 들어왔다. 그는 벌겋게 핏줄이 선 눈으로 바깥을 살폈다.

비좁은 원룸방.

프리티걸의 막내라인, 고등학생 멤버 세 명이 침대 위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앉아있었다. 무릎에 얼굴을 푹 파묻고. 울음소리는 그 안에서 새어나왔다. 작은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성인 멤버 둘은 커다란 캐리어에 옷과 물건들을 쑤셔 넣는 중이었다.

-쓸만한 애들 다 빠져나가고 찌끄러기들만 남는 건데. 걔들 가지고 뭐가 되겠냐?

“찌끄러기들만 남는다고? 찌끄러기? 목숨 걸고 하는 애들한테 그게···!”

버럭 소리친 이태신 실장이 아차 했다.

문틈으로 고등학교 멤버 셋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쨌든 난 때려치울 테니까 연락하지 마라.

하품과 함께 연결이 끊어졌다. 이태신 실장이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이 꺼져있다는 음성만 돌아왔다. 뻣뻣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욕실 밖으로 나갔다. 짐을 싸던 성인 멤버 둘이 그를 힐긋 보곤 계속 손을 움직였다.

“효진아, 보라야.”

“붙잡지 마세요. 이미 마음 정했으니까.”

박효진이 냉랭하게 말했다.

“계약으로 발목 잡을 생각도 마시구요. 전에 사장님이 월세고 공과금이고 밥값이고, 지원 하나도 못해주는 대신 원하면 언제든 팀에서 나가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변호사한테 물어봤는데 법적으로 전혀 문제없댔어요.”

윤보라가 경계하는 눈으로 거들었다.

이태신 실장이 축축한 주먹을 쥐었다 펴며 말했다.

“계약 들먹이려는 거 아냐. 그냥, 우리 이번 싱글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 쏟아부어보기로 한 거잖아. 딱 한번만 더 해보자. 곡도 이미 구했고.”

“누군지도 모르는 작곡가 곡이요?”

그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유명한 작곡가 곡 못 구해줘서 미안하다. 그건 내가 정말 미안해. 그런데 이번 곡, 내가 듣기엔 지금까지 우리가 작업했던 타이틀곡 중에 제일 괜찮아. 이대로 놓치기엔 아까운 곡이야. 그러니까 나 믿고 딱 한번만 더···!”

“못 믿겠어요.”

박효진이 이태신 실장을 홱 돌아봤다.

“실장님 못 믿겠다고요.”

“뭐?”

“이미 세 번이나 말아먹었잖아요! 거기다 재이 언니까지 나갔고. 이제 누가 봐도 가망 없는데, 딱 한번만 더? 저희 이제 스물한 살이에요. 새 팀으로 데뷔하려면 지금도 늦은 나인데, 계속 시간낭비하라구요?”

“실장님은 왜 실장님 생각만 하세요? 지금이라도 해체하는 게 저희를 위한 길이라는 생각은 안하세요? 제 살길 찾아서 나가는 거니까 잡지 마시라고요, 능력도 없으면서!”

“언니!”

고등학생 멤버가 고개를 홱 들고 성인 멤버들을 노려봤다.

“너무한 거 아냐? 우리 때문에 실장님이 얼마나 고생했는데!”

“우린 고생 안했고? 너희는 속 편해서 좋겠다, 아직 고등학생이라.”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에, 고등학생 멤버들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언제라도 터질 준비가 된 화약고에 불을 던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장에 멤버들 사이에 시끄러운 언쟁이 오갔다.

“그만, 그만해.”

이태신 실장이 창백한 얼굴로 언쟁을 말렸다.

그리고 성인 멤버들에게 물었다.

“팀에서 나가면,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생각해 본 거야?”

“살길 마련도 안 해놓고 짐 싸고 있겠어요?”

윤보라가 뿌듯한 얼굴로 덧붙였다.

“수란이가 NK엔터 걸그룹 데뷔조에 있는데···.”

“뭐? NK? 수란이가 NK에 들어갔어?”

이태신 실장이 황급히 윤보라의 어깨를 붙들었다.

“내가 거긴 가지 말라고 분명히···!”

“한참 전에 탈퇴한 멤버 앞길까지 막으시려는 거예요?”

“저희도 거기로 갈 거예요.”

박효진이 단정하듯 덧붙였다.

“NK 데뷔조에서 무대경험 있는 멤버 충원중이래요. 거기 실장님하고 미팅하기로 했어요. 어쩌면 금방 데뷔할지도 몰라요.”

“내가 거기 대표 방식을 알아. 그래서 말리는 거야!”

이태신 실장이 아연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가슴이랑 허벅지 다 보이는 야한 의상, 야한 안무, 뮤직비디오는 포르노처럼 찍고! 너희들한테 섹스 취향이 뭐냐고 물어보는 그런 프로그램에 내보낼 거야! 그런 쌈마이 같은···!”

“그게 뭐 어때서요?”

박효진이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뮤직비디오도 돈 들여서 찍어주고, 방송 프로그램도 잡아준다는 거잖아요. 섹시컨셉이 뭐 어때서요. 그것도 전략인데. 그렇게라도 시선 끌고 이름 알리는 게 중요한 거 아니에요?”

“효진아!”

“그리고 쌈마이인 건 여기나 거기나 똑같아요. 아니, 여기가 더하지. 사장님이 투자자들이랑 술 마실 때 재이 언니 데리고 나간 거. 실장님이랑 쟤들 말곤 다 알아요.”

이태신 실장이 눈을 부릅떴다. 그의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졌다.

고등학생 멤버 셋도 악몽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사장님한테 물어보세요.”

성인 멤버 둘이 정리가 끝난 캐리어를 들고 일어났다. 성큼성큼 현관으로 향하는 두 사람에게, 이태신 실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그런 일이 있었으면, 너희는 왜 나한테 말을 안 하고···!”

“왜겠어요?”

박효진이 문을 열며 말했다.

“재이 언니가 스폰서라도 잡아서 뜨면, 우리 팀도 같이 뜰 수도 있잖아요!”

두 사람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원룸을 나갔다.

캐리어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개새끼, 이 개새끼가···!”

굳어있던 이태신 실장이 황급히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실장님! 어, 어디가세요?”

“잠깐만 나갔다 올 테니까, 여기 있어. 너무 울지 말고.”

문이 거칠게 닫혔다.

이제 원룸방 안에 남은 건 고등학생 멤버 셋뿐이었다. 세 명은 넋이 빠진 것처럼 침대위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이미 흥건하게 젖어있는 뺨 위로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그때, 벨소리가 울렸다.

침대 아래에 떨어진 이태신 실장의 핸드폰이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멤버가 전화를 받았다.

-여, 여어보세요?

얼마 후. 누군가 원룸 문을 노크했다.

기진맥진해있던 멤버들이 화들짝 놀라 문을 쳐다봤다.

“노, 노크할 사람 없는데?”

“진짠가? 진짜 오셨나?”

“어떡하지? 실장님한테 빨리 연락드려야 되는 거 아냐?”

“핸드폰 놓고 가셨는데 어떻게 연락해!”

당황해서 떠드는 동안, 다시 한 번 노크소리가 들렸다.

“문부터 열어! 기다리시잖아!”

둘은 이불로 눈물범벅인 얼굴을 문질러 닦고, 그나마 상태가 나은 멤버가 허둥지둥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흐트러진 회색 모직코트. 손아귀에서 찌그러질 것 같은 선글라스. 계단을 뛰어올라왔는지 숨을 고르고 있는 남자.

정선우 실장이 문 밖에 서 있었다.

***

애티가 남은 멤버 셋이 나를 올려다본다.

당황했는지 눈동자가 흔들린다. 꼴이 가관이다. 얼굴은 벌겋고 눈은 퉁퉁 부은 게, 꼭 금붕어 같다. 한명은 딸꾹질까지 하고 있었다.

멍하니 있던 멤버 한명이 퍼뜩 외쳤다.

“하나, 둘, 셋! 안녕하세요! 프리티, 프리···!”

코맹맹이 소리로 인사하던 애들이 굳었다. 허리를 굽힌 상태 그대로. 머리를 드는데, 멎었던 눈물이 소나기처럼 후드득 쏟아지고 있었다. 나도 혼란스럽지만 얘들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프리티걸이 아니라 그냥 찌끄레기예요.”

“찌끄레기?”

애들이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안내를 받아 원룸 안으로 들어갔다. 방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온갖 살림살이들이 다 끄집어내진 채 나뒹굴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도둑 들었다고 오해하기 딱 좋은 광경이었다.

일단 사태파악부터 했다. 애들 셋이 나를 둘러싸고 앉아서 지난 사정을 설명했다.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 틈틈이 눈물을 닦고, 코를 풀고,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서럽게 통곡도 하면서.

아니, 이 애들한테는 하늘이 무너진 게 맞지.

난데없이 팀이 반쪽이 났으니까.

나도 기가 막힌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되지?

그냥 가만히 예정대로만 갔으면, 이번 싱글 앨범으로 산소호흡기 떼고 살아날 애들인데. 그렇게 될 팀이었는데. 어쩌다 하룻밤 만에 이렇게 풍비박산이 난 거냐고.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정재이. 내가 자길 마음에 들어 한 걸로 오해하고, 대가를 받고 일을 맡는다는 루머를 사실이라고 믿은 정재이가 무턱대고 팀을 탈퇴했고. 다른 성인 멤버 두 명이 기다렸다는 듯 폭언을 쏟아 붓고 뛰쳐나갔다.

이제 남은 건 눈앞의 세 명과 이태신 실장.

결국 내가 정재이를 좀 오래 쳐다봤던 거. 그게 시발점이었다는 건데.

뭐 이런 거지같은 나비효과가 다 있어?

“그런데 무, 어후, 죄송해요.”

왼쪽 멤버가 딸꾹질을 삼키며 말했다.

“실장님은 여기, 무슨 일 때문에 오신 거예요?”

“음. 그러니까···.”

붕어 셋이 나를 바라본다.

이걸 어쩐다.

어떻게 해야 이 사태를 가장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겉으론 태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속으론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였다. 현관문 밖에서 키패드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멤버들이 재빨리 문을 바라봤다. 경계와 기대, 그리고 서러운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문이 열렸다.

들어온 건 이태신 실장이었다.

사장이랑 몸싸움이라도 했는지, 입술은 터져있고 행색도 엉망이었다.

“실장님!”

“얼굴 왜 그러세요? 다치셨어요?”

“별거 아냐. 다른 애들한테는 혹시 연락 없··· 어?”

나를 발견한 이태신 실장이 우뚝 멈췄다.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정 실장님이 여긴 어떻게 아시고, 아니 왜, 무, 무슨 일로?”

“전화 드렸는데 멤버가 받더라고요. 울고 있길래···.”

“아! 감사, 아니, 죄송합니다.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횡설수설하던 그가 돌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나를 뚫어지게 본다. 흐리멍덩하던 눈에 빛이 떠올랐다. 그가 달려들 듯이 내 팔을 붙잡았다. 늪에 빠진 사람처럼 애타고, 간절하게.

“정 실장님, 혹시 W&U에 넵튠 이후로 걸그룹 제작할 계획은 없으세요?”

“계획이요?”

“있다면, 연습생으로 어떻게 오디션이라도 볼 수 없을까요?”

그가 멤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눈에 확 띄게 화려하진 않아도, 정말 착하고 열심히 하는 애들이에요. 그렇게 고생을 시켰는데도 포기한단 말한 적 없고요. 언니들 신경전 벌일 때마다 한방에서 눈치 보면서도 우는 소리 한번 안 한 애들인데.”

급기야 이태신 실장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프리티걸 멤버 세 명은 그의 팔을 붙들고 훌쩍이고 있었다.

“안되면 혹시, 다른 회사에 소개를 좀 부탁드릴 순 없을까요? 제가 그런 능력이 없어서······. 도와주시면 이 빚은 꼭,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겠습니다.”

그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애달픈 울음소리와 부탁이 귓속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신없이 굴러가던 생각이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해 보자.

< 무능하거나, 유능하거나 (2)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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