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45화 (145/218)

< 봄, 수확의 계절 (6) >

변화는 순식간이었다.

소란이 진압되고 팬들이 허둥지둥 움직였다. 멱살잡이 직전까지 갔던 이들도, 한발 물러나 바라보던 팬들도. 온순한 양떼들처럼 뭉치더니 입가에 어색한 웃음까지 띄워 올린다.

작가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드렸잖아요. 지금 수업 종 쳤어요.”

먹송하가 미니밴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수석이 먼저 열렸다. 긴 생머리의 여자가 내렸다. 선글라스로 얼굴 반을 가리고, 턱 아래부터 발목까지 새까만 패딩에 둘둘 말린 모습이 펭귄을 닮았다. 한눈에 이송하를 알아본 시민들이 떼를 지어 달려들었다.

넵튠 팬들은 손을 움찔거리며 참았다.

경호원들과 W&U스텝이 시민들을 뚫고 이송하를 대기실로 안내했다.

이송하가 사라질 때까지도, 넵튠 팬들은 붙박이처럼 얌전히 서 있었다.

운전석에서 내려 곧장 이쪽으로 다가오는 정선우 실장 때문이었다.

작가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팬덤들 난리 났을 땐 연예인이 와서 신신당부를 해야 이만큼 잠잠해졌었는데, 여긴 희한하네요? 정선우 실장님이 엄청 무서운가 봐요?”

“그런 건 아니고요. 이유가 좀 있어요.”

먹송하가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작가가 자기를 부르는 인터컴 소리를 듣고 아쉽게 자리를 뜬 후.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됐을까 싶은 어린 팬이 다가와 물었다.

“실장님이 어떤데요, 언니? 넵튠 덕질 시작한지 얼마 안돼서 잘 몰라요.”

“그게, 정선우 실장님은··· 말하자면 보호종 같은 거거든.”

“보호종이요?”

어리둥절해하는 팬에게, 뿔테 안경을 쓴 트리톤 회원이 대답했다.

“정선우 실장님이 넵튠 매니저 되고나서부터 이뤄놓은 게 있잖아. 실장님이 다른데 간다고 하면 팬덤 발칵 뒤집어지지. 그래서 그룹 올팬이든, 개인팬이든, 정선우 실장님 말은 다 잘 들어.”

“가끔 정 실장님까지 불판위에 올리려는 분탕종자들이 있긴 한데···.”

먹송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

“근데 솔직히, 정선우 실장님도 너무 이송하만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조금 전 언쟁을 벌였던 팬 중 한명이었다.

“넵튠 매니저면 다른 멤버들도 두루두루 케어 해줘야지. 꼭 이송하 전담처럼 보이잖아요. 차별당하는 멤버들 서럽게. 이거 W&U홍보실에 전화해서 항의하면···!”

식은 불판에 기름을 붓던 팬이 말꼬리를 흐렸다. 아까와는 달리 그녀에게 동조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오히려 공공의 적을 집중 사격하듯, 살벌한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먹송하가 어린 팬에게 말했다.

“그런 종자들은 보통 저렇게, 타팬덤에서 잠입한 프락치 취급당하거든.”

“팬들은 정실장님은 안 건드려. 그나마 실장님이 있어서 이 정도지, 아니면 팬덤 갈가리 찢어져서 진짜 개판 될지도 모르니까.”

뿔테 안경을 쓴 팬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는 사이 정선우 실장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바쁜 일정 때문인지 피곤해보였다. 안 그래도 찬바람이 쌩쌩 부는 인상이 살짝 찌푸려져 있다. 그가 양떼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팬들을 쭉 둘러보고 나서 말했다.

“경호원 분한테 들으니까, 우리 팬덤이 좀 소란스러웠다고 하던데요.”

흠칫한 팬들이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정선우 실장이 희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넵튠 팬덤에 대한 안 좋은 얘기가 자꾸 귀에 들어오면, 나처럼 마음 약한 매니저는 일 못해요. 신경 쓰여서.”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팬들은 소리 없이 시선을 교환하며 술렁였다. 협박보다 무서운 말을 들은 것처럼.

누군가 황급히 운을 뗐다.

“아, 아닌데. 그냥 사소한 의견충돌이었는데요?”

“바로 화해했어요! 새우젓들은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죠!”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일하세요, 실장님!”

곳곳에서 변명이 쏟아졌다.

“그럼 다행인데.”

정선우 실장의 입 끝이 조금 더 올라갔다. 그가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공연 끝나고 바로 가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요. 추운 날 야외에 나와서 응원하는데, 멤버들이랑 인사는 하고 가야지.”

팬들 사이에서 환호가 터졌다. 몇몇이 눈치를 살피며 질문했다.

“사인도 받을 수 있어요?”

“사진 찍어도 돼요?”

“실장님! 넵튠 다음 정규앨범 성공해요?”

앳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팬들이 조용해졌다. 이윽고 정선우 실장이 대답했다.

“성공해야죠.”

“성공한다고 해주세요! 아니, 성공하게 해주세요! 네?”

“아, 그만해요!”

근처의 누군가가 뜯어말렸다. 하지만 말리는 팬보다는 기대와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팬이 더 많았다. 끈끈한 시선들이 정선우 실장에게 치덕치덕 달라붙었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부담 좀 그만주지. 진짜 점쟁인 줄 아나.”

운동선수 체격의 트리톤 회원이 혀를 차며 말했다.

누군가 덧붙였다.

“되게 많아요. 정 실장님이 손대면 무조건 잘될 거라고 생각하는 팬들.”

“W&U에 전화해서 넵튠 정규 타이틀, 정 실장님이 선택하게 해달라고 한 애도 있대요. 기가 막히죠.”

“그런데 사실···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거든요.”

뿔테 안경을 쓴 회원이 말했다.

“정 실장님이 작업한다고 하면, 일단 믿음이 가잖아요.”

***

성공하게 해주세요.

나야말로 부탁하고 싶다.

안 그래도 요즘 이 문제로 골이 아프다. 로열패밀리도, 얼라이브도, 더없이 순조로운데. 어딜 가든, 누굴 만나든 축하한다는 소리부터 듣는데.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에는 정규앨범과 넵튠에 대한 고민이 덩치를 불리고 있다.

이태희의 자작곡이 성공을 거두게 될지. 세 가지 곡 중 어떤 곡이 가장 반응이 좋을지. 대체 정규 앨범을 어떻게 만들어야, 어떻게 기획하고 활동해야 넵튠을 비온 뒤에 땅이 굳는 것처럼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을지.

부탁하는 것으로 그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절이라도 하면서 부탁했을 거다.

송인호가 상을 받던 미래. 그걸 끝으로 벌써 몇 개월째 감감무소식이다. 능력이 아예 사라져버린 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예고 없이 툭 나타난 능력이니, 예고 없이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속에서 곰팡이 같은 것이 번지는 느낌이다.

넵튠 대기실 앞에 서서 복잡한 머리를 흔들었다.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너 뭐하냐?”

단숨에 머리가 비었다.

모델포즈로 앉아있던 임서영이 날 보더니 화들짝 놀란다.

“제, 제가 뭘요?”

“방금 그거. ‘내가 임서영이다’포즈. 뭐야?”

“으아아!”

임서영이 허둥지둥 일어났다. 그리고 토끼 귀처럼 양쪽으로 묶은 머리카락을 잡아서 얼굴을 가린다. 그래봤자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이 다 보였다.

또 무슨 희한한 짓이지?

대기실 안을 둘러보니 다른 멤버들은 평소의 모습이다. 이태희는 공연 전 언제나 그렇듯 이어폰을 꽂고 소파 끝에 늘어져있고, 이송하는 이태희 무릎을 베고 졸고 있다.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이태희가 날 보고 꾸벅 인사한다. 그리고 눈을 내리감는다.

오피스텔에 이태희가 찾아왔던 그 밤. 내가 조금 더 생각해보겠다고 말하고 돌려보냈던 그 밤 이후로, 이태희는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나를 재촉하지도 않고. 아무런 내색도 없이.

“걔 지금 선배병 걸렸어요.”

엘제이의 말에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다리를 꼬고 앉은 엘제이가 느긋하게 핸드폰 게임을 하며 말했다.

“오프닝무대 하는 걸그룹이 곧···.”

고개를 든 엘제이가 날 보더니 말을 바꾼다.

“혹시 일박이일동안 정기 빨리고 왔어요?”

“뭐?”

“얼굴이 까칠하시길래. 쟨 뱀술이라도 먹은 것처럼 얼굴에서 윤이 나는데.”

엘제이의 시선이 태평하게 졸고 있는 이송하한테 머무른다.

“헛소리 말고 하던 말이나 계속해봐. 오프닝 걸그룹이 뭐?”

“인사하러 온대요. 걔들 롤모델이 우리라고. 쟤 그 말 듣고 선배병 발병하더니 십분 만에 말기 찍었어요.”

엘제이가 임서영을 보며 말했다.

“어떤 자세로 기다릴까, 오면 인사하면서 뭐라고 할까,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왔다갔다, 정신 사나워 죽겠네.”

평소처럼 짓궂은 말투였다. 하지만 반응은 평소와 달랐다.

임서영이 엘제이 옆자리에 바싹 붙었다.

“야, 넌 걔들이 와서 인사하면 뭐라고 할 거야?”

“뭘 뭐라고 해?”

“우리가 롤모델이라잖아! 좋은 말 해줘야지!”

“파이팅.”

“야! 넌 우리 무명일 때 어땠는지 기억도 안 나?”

결국 임서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선배들 대기실 찾아가서 인사할 때마다, 무시당하는 기분 들면 얼마나 서러웠는데! 게다가 걔들은 우리가 롤모델이라잖아!”

“그 롤모델, 어차피 지분 중에 90프로 이상은 쟤 말하는 걸걸.”

엘제이가 이송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래도! 혹시 알아? 우리가 던진 한마디가 걔들 인생의 길잡이가 될지!”

“네 인생의 길잡이나 찾아, 길치야.”

말문이 막힌 듯 임서영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다가가서 동그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평소 너 하던 대로 친절하게 말하면 되지, 뭘 포즈까지 신경 쓰고 있어.”

“그게요, 오빠.”

임서영이 뒤쪽을 힐끔 본다. 다른 멤버들을 한 번씩 눈에 담더니 고개를 숙인다. 옆통수에서 나란히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꼭 기운 없이 축 늘어진 것처럼 보인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가 기어왔다.

“비교하면요. 제가 좀···.”

“네가 뭐.”

“그러니까, 제가 좀···.”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관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실장님! 프리티걸이 스탠바이 전에 인사하고 싶대서 같이 왔는데요.”

프리티걸?

이름이 귀에 익다.

무대의상보다는 교복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여자애들이 우르르 밀려들어왔다. 여섯 명이다. 나란히 서더니 긴장한 얼굴로 허리를 숙인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프리티, 프리티, 프리티걸입니다!”

애들이 뭔가 더 말하는 것 같은데.

같이 들어온 매니저가 나한테 악수를 청하고 있는데.

그런 것들보다, 나는 다른 것에 정신을 모조리 빼앗겼다.

눈앞에 노이즈가 생기고 있었다.

세상이 뒤집혔다.

몇 바퀴 구르고 일어난 것처럼 어지럽다. 잡음이 섞인 합창이 들렸다.

“프리티, 프리티, 프리티걸입니다!”

유치하지만 기억에는 확실히 남는 구호.

왜 지금 이 구호가 들리지?

이게 얼마 만에 보는 미랜데. 설마 넵튠도 아니고, 남조윤도 아니고, 인연도 없는 걸그룹의 미래가 보이는 건 아니겠지?

재빨리 눈과 귀를 활짝 열었다.

회사다. 나는 4층 라운지에 있는 TV앞에 서 있었다. 화면에 무대의상을 입은 걸그룹이 비친다.

살에 닿는 공기는 훈훈하다.

시선을 TV에 고정한 상태라, 감촉을 더듬어 내가 입고 있는 옷을 살폈다. 긴 바지. 웃옷은 와이셔츠 같은데, 꽤 얇은 것 같다. 계절을 확정짓기 어려운 옷차림이다.

“인생 한방이다, 진짜.”

드디어 고개가 돌아간다. 옆에 김현조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평소보다 더 퀭하게 상한 얼굴.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은 남방에 청바지.

내가 말했다.

“그러게요. 올 초에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잘될 줄 몰랐는데.”

“2주째 주간차트 1위다, 쟤들.”

1위?

음원 차트를 말하는 건가?

“이번 싱글로 산소호흡기 떼고 확 뜨겠어.”

“당분간 차트 상위권에서 안 내려갈 것 같네요. 분위기가.”

“곡이 좋잖아, 곡이. 저 작곡가 몸값 꽤 올라갈걸? 프리티걸이 운이 좋았던 거지, 저건 누가 불렀어도 잘됐을 곡이야.”

김현조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넵튠이 불렀으면 더 대박 났을 걸?”

“저어기··· 실장님.”

선명한 시야로 남자가 보인다. 어색하게 손을 내밀고 있는.

낯빛이 흐려진 남자가 슬그머니 손을 거둔다. 그 손을 덥석 잡았다.

“죄송합니다. 잠깐 현기증이 나서.”

“아, 아닙니다. 괜찮으세요? 요즘 많이 바쁘시단 얘긴 들었는데. 아니, 본 거죠. 그, 인터넷 기사로.”

안색이 확 밝아진 남자가 횡설수설한다.

뒤쪽을 곁눈질했다. 프리티걸 멤버들이 넵튠 애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방금 미래에서 보고 온, TV너머에 있던 그 애들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정선웁니다.”

“당연히 알죠! 어지간한 연예인 급으로 유명하신데. 저는 프리티걸 맡고 있는 이태신 실장입니다. 재작년 가을에 제가, 실장님한테 우리 애들 CD도 드렸었는데. 오래전이라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네요.”

“재작년에요?”

“네, Knet 음방 대기실에서요. 저는 그때 정 실장님 정장입고 계셨던 것도 다 기억나는데.”

이태신 실장이 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제야 기억났다.

첫 출근 날.

“혹시 그때 무대의상이, 에이프런이랑 교복···.”

“맞습니다! 데뷔곡은 묻혔어도, 그 의상은 많이들 기억하시더라고요.”

그가 프리티걸과 넵튠을 번갈아 바라본다. 그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때 데뷔곡 시원하게 말아먹고, 미니 말아먹고, 정규까지 말아먹었습니다. 처음에 여덟 명이었던 애들도 두 명 나가고 이제 여섯 명 남았는데. 새로 준비하는 디싱까지 말아먹으면 뭐···.”

“디싱이요?”

“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메마른 입술을 떼고 물었다.

“······곡은 구하셨고요?”

< 봄, 수확의 계절 (6)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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