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수확의 계절 (5) >
하차통보가 아닌 건 참 다행인데.
예능. 예능이라.
내가 출연했었던 예능프로 두 개가 뇌리를 스친다. 갑자기 목이 바짝바짝 탄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거라고나 할까. 그 경험들이, 특히나 두 번째 경험이 너무 강렬하게 남아있어서.
떨떠름하게 커피를 마셨더니, 최 피디가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토크쇼 아닙니다. PBS ‘지금부터 우리는’처럼 뛰어다니면서 미션하고 게임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 포맷이었으면 거창하게 장기 프로젝트로 기획하지도 않았죠.”
토크쇼도 아니고 게임도 아니라고?
“그럼 어떤···.”
“황 작가님, 기획안이요!”
메인작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기획안을 내밀었다.
‘굿프렌즈’
큼직한 프로그램 로고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그리고 그 아래 붙은 서브타이틀.
“웹드라마 콜라보?”
“네, 그동안 버라이어티 예능에서 별의별 콜라보 프로젝트를 다 했잖아요. 쉐프 먹방 콜라보, 스포츠스타 콜라보, 가수 콘서트 콜라보는 심심하면 한 번씩 나오고요.”
“그랬죠.”
“그래서 저희도 웹드라마로 콜라보 프로젝트를 한번 해보려고요.”
기획안 표지를 넘겨보니 기획의도와 제작방안, 세부 구성과 예시까지 꼼꼼하게 정리돼 있다. 하루 이틀 만에 나온 기획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빠르게 살펴보는 동안 최 피디가 설명을 보탰다.
“멤버들이 직접 단편 웹드라마를 제작하고, 실제로 웹상에서 서비스까지 하는 거죠.”
“멤버들이 제작을 한다고요?”
“아, 물론 연출이나 촬영, 편집 같은 전문분야는 직접 전문가들 찾아가서 부탁해야죠. 배우들한테 카메오 출연도 부탁할 예정이고요.”
카메오 얘기가 나온 순간, 나를 보는 제작진의 눈빛이 과하게 반짝였다.
최 피디가 말을 이었다.
“우리 멤버들도 희극인, 아이돌 가수, 뮤지컬 배우, 두루두루 있으니까 웹드라마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겁니다. 카메오를 부탁한 배우한테 연기를 좀 배워서 직접 배역을 맡는다거나, OST를 부른다거나.”
“품은 엄청 들겠지만, 이런 프로젝트는 성공하면 단번에 프로그램 화제성을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요. 정말 제대로 터지면, 몇 주 동안 온라인을 들썩거리게 만들 수도 있고요.”
그렇지. 성공만 하면.
기획안에서 눈을 떼고 피디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에 제가, 매니저가 왜 필요합니까?”
이송하나, W&U의 다른 배우들을 카메오로 섭외하려는 건가?
생각하자마자, 메인작가가 웃으며 대답했다.
“카메오 출연을 좀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송하요?”
“아뇨, 정 실장님이요.”
지금 내 표정이 어떨지 짐작이 간다.
메인작가의 웃는 얼굴에 금이 쩍 가는 걸 보니.
“농담이에요, 실장님. 농담.”
“···그렇죠? 깜짝 놀랐네요.”
“저도 놀랐네요.”
메인작가가 어색하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엄청 싫으신가 봐요. 저는 실장님이 연기 욕심이 있으신 줄 알았는데.”
“없습니다.”
“아. 로열패밀리 1화에서 손채영 씨랑 같이 열연을 하시길래.”
“그것 때문에 많이 시달렸거든요. 그 이후로 제가 칵테일을 못 마십니다.”
예능출연이랑 드라마 출연은 반응이 확 다르더라.
방송 나가고 가족에, 친척에, 친구 놈들한테까지 연락을 얼마나 받았는지. 온라인에도 쫙 깔렸다. 넵튠 모니터링을 하다보면 시도 때도 없이 그 장면 캡쳐나 움짤 영상을 발견하는데, 볼 때마다 시공간이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두 번은 못할 짓이다.
“시나리오를 공모로 받을까 해요.”
최 피디가 다시 본론을 꺼냈다.
“공모요?”
“시청자 참여도가 높으면 화제성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시청자들 대상으로 단편용 웹드라마 시나리오를 공모해서, 모집한 시나리오를 멤버들이랑 전문가 분들께 보여드리고 제작할 작품을 고르려고 합니다.”
메인작가가 눈을 과장스럽게 깜빡이며 덧붙였다.
“정 실장님이 그 선택을 좀 도와주실 수 없을까요?”
***
“로열패밀리 시청률 20프로 돌파!”
손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술병들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젠장, 나 이걸로 기사 삼십 개는 썼다! 이제 지겹다, 지겨워.”
“난 얼라이브! 홍보팀에서 보도자료 하나 들어오면 그거 쪼개고 쪼개서 기사 몇 개씩 내보내잖아. 나도 신물 나 죽겠다.”
“굼벵이 앞에서 주름잡나. 여기 지금도 쓰고 있는 사람들 있거든?”
뺨이 홀쭉한 기자가 말했다. 그는 무릎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쉬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중이었다. 정보교환 차 포차에 모인 다른 기자들이 은근슬쩍 노트북을 훔쳐봤다.
“단독 쓰는 건 아니지? 우리끼리 서로 물 먹이고 그러진 말자, 진짜.”
“단독거리가 어딨어. 얼라이브 보도자료 복붙이지. SNS 훑어보니까 누가 완전 씬스틸러였다던데. 팩트 조사할 틈도 없어서 그냥 시사회 리뷰 받아 적고 있다. 이거 넘기고 로열패밀리도 하나 써야 돼. 니미럴.”
“여기나 저기나 기삿거리는 다 비슷하구만?”
“그만큼 로열패밀리랑 얼라이브 화제성이 대단하다는 거지.”
여기자가 오돌뼈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 양쪽에 팔다리 다 걸치고 있는 이송하는 진짜, 대박인 거고.”
“아니지.”
홀쭉한 남자가 기사를 쓰다 말고 대꾸했다.
“진짜 대박은 정선우 실장이지. 두 작품 다 정선우가 고른 거 아냐?”
기자들에겐 몹시 흥미진진한 떡밥이었다.
테이블이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보자. 처음 넥스트 K스타 시청률 대박 나서 시즌제 들어간 거, 팩트고.”
“고양이 수호령은 말할 것도 없고.”
“넵튠 미니앨범도 히트시켰지. 그것도 뜬금없이 자작곡 밀어서.”
“아, 예능도. 설특집이랑, ‘지금부터 우리는’이랑. 둘 다 방송 나가자마자 실검 올라갔잖아. 내가 그때 기사 쓰다가 지문이 닳아 없어질 뻔 했다고.”
“임서영이랑 엘제이 꽂은 예능도 뭐, 시청률은 평타 이상이고.”
“로열패밀리는 초대박. 얼라이브는 천만을 넘을 것이냐, 말 것이냐가 관건이고. 둘 중 하나라도 망하면 정선우 까는 기사 쏟아내려던 기자들 많았는데, 지금 다 꿀 먹은 벙어리 됐잖아.”
손가락이 하나하나 꼽힐 때마다, 기자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죽인다. 완전 무패행진이네.”
“대체 그 사람은 비결이 뭐야? 궁금해 죽겠네.”
“안 그래도 내가 그걸 좀 알아봤는데.”
진하게 화장한 여기자가 말을 꺼냈다. 단숨에 시선이 몰려들었다.
“나 원래 미신 안 믿거든. 근데 내가 정 실장 기획기사 쓰려고 무당을 찾아갔었단 말이야. 그 보살님이 그러는데, 정 실장 분명 박수무당일거래. 신내림 받은 지 얼마 안돼서 신빨이 쭉쭉 뻗는 거라던데?”
“너 설마 그거 기사로 썼냐?”
“썼지. 그리고 기레기라고 욕 푸지게 처먹었잖아.”
다른 기자들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신빨이 뻗어서 성공할 작품이 보이면 뭐 하러 손바닥만 한 판에서 놀겠냐? 당장 할리우드로 가지. W&U에서 할리우드 시장에 진출한다고 배우들 보내놓고, 몇 년째 맨땅에 헤딩만 하고 있는데.”
“그럼 뭐냐고. 진짜 운인거야? 아님 선구안이 징그럽게 좋은 거야?”
“근데 운이든 실력이든, 그 부담을 어떻게 견디지?”
홀쭉한 남자가 이맛살을 구기며 말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는데, W&U 내부에서도 정선우 실장 의견엔 일단 귀부터 기울이고 볼 거 아냐. 제일 수혜를 많이 받은 넵튠 팀이야 아예 덮어놓고 믿을 거고.”
“아무래도 그렇겠지.”
“미다스의 손이라고 무턱대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고, 저 새끼 언제 실패하나 보자고 팝콘 들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은데. 니미럴, 나 같으면 부담스러워서 똥도 안 나오겠다.”
“지금은 특히나 더 그럴걸? 넵튠 정규앨범 때문에.”
여기자가 입술을 문지르며 말했다.
“내가 알기론 넵튠 팬덤이 지금, 삐걱삐걱 하거든.”
*
“넵튠! 야, 넵튠 스탠바이 됐어?”
중계차에서 나온 피디가 FD를 붙들고 물었다.
“네, 이송하 빼곤 다 스탠바이 됐어요.”
“이송하를 빼면 어떡하냐! 걔가 핵심인데! 예고편에 대문짝만하게 때려서 이송하 보려고 생방 보는 사람도 많을 거고, 지금 광장에 모이는 시민들도 이송하, 이송하, 노래를 부르더라! 걔 빠지면 큰일 나!”
“인천공항 도착하자마자 바로 이쪽으로 넘어온다고 했어요. 중국 스케줄 때문에 밤새고, 눈도 못 붙이고 오는 거라던데···.”
“작가들은 무슨 스케줄을 이렇게 빠듯하게 잡았어?”
“넵튠 쪽에서 스케줄 안 된다는 걸, 우리가 매달려서 잡은 거라 그렇죠. 그래도 초대가수 명단에 넵튠, 이송하 이름 딱 박으니까 부장님이 엄청 좋아하셨잖아요.”
“에라이. 다시 전화해서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해!”
피디와 FD가 흩어진 후.
중계차 뒤에 있던 반삭머리 대학생이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광장 한복판에 세워진 야외무대 앞이었다. 응원도구나 카메라 따위를 든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초대가수들을 보러 온 팬들이었다.
반삭머리 대학생이 한편에 모여 있는 넵튠 팬덤에 합류했다.
“오다가 들었는데, 송하 중국에서 날밤 새우고 잠도 못자고 오는 거래요.”
그 말이, 아슬아슬하던 분위기에 제대로 불을 질렀다.
“중국 왔다 갔다 하느라 스케줄 빡셀 텐데, 넵튠 활동은 좀 쉬지.”
“저기요. 송하도 넵튠 멤버거든요?”
넵튠의 그룹 팬, 그리고 이송하의 개인 팬 몇몇이 서로를 노려봤다.
비꼬는 말로 시작된 언쟁은 금방 활활 타올랐다.
“아니, 솔직히 넵튠 활동이 송하한테 무슨 도움이 되는데요?”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넵튠 멤버들도 손해 감수하고 송하 개인스케줄 챙겨 주는 건데. 안 그랬으면 행사도 더 뛰었을 거고, 정규앨범도 벌써 나왔을 걸요? 송하 때문에 정규앨범 작업 계속 미뤄지는 거잖아요!”
“왜 독박 씌우고 그래요? 이태희도 아직 곡 못 만들고 있잖아요!”
“그리고 정규앨범도 다른 멤버들한테나 급하지, 송하한테는 안 급하거든요? 곡 녹음하고 안무 연습하려면 고생 엄청 할 텐데. 그러다 앨범 망하기라도 하면 시간낭비에 개고생만 하는 거잖아요!”
“맞아. 그 시간에 드라마나 영화를 하나 더 찍는 게 낫지!”
“어이가 없네? 팀이고 나발이고, 그냥 따로 놀겠다 이거예요?”
“송하가 넵튠 활동에 방해되는 거 같으면 그쪽도 W&U에 항의전화해요! 송하 넵튠에서 빼달라고!”
“장난하나. 멤버들은 다 멀쩡히 잘 지내는데 왜 빼라마라 지랄이에요?”
“멀쩡히 지내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공식 SNS에 올라오는 사진만 봐도 친한 거 보이거든요?”
“그건 언플용 사진이고요. 송하는 빠지고 싶은데 다른 멤버들이 눈치주고 못 나가게 하는 걸 수도 있죠! 넷이서 숙소 생활하고, 또 송하가 막낸데. 무슨 핍박을 받으면서 사는지 어떻게 알아요!”
“야! 이게 어디서 근거도 없이 궁예질이야? 너 말 다했어?”
“덜 했는데? 더 할 건데?”
결국 욕지거리까지 튀어나왔다. 양측이 팽팽하게 씨름하는 동안.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팬들이 혀를 찼다. 행성 모양의 응원봉과 커다란 카메라를 장착한 팬들. 넵튠의 공식 팬클럽인 트리톤의 1기 회원들이었다.
운동선수처럼 덩치가 큰 남자가 중얼거렸다.
“지랄이 대풍이네.”
“그러게요. 야외 공연이라, 오늘은 유난히 병신들이 많네요.”
뺨에 아직 젖살이 남은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회원이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왜들 저래요? 수능치고 오랜만에 현장 나왔더니 적응이 안 되네.”
“저 사람들 다 첨보는 얼굴인데. 넵튠에 왜 저런 어그로들이 묻었지?”
“먹송하 언니, 쟤들 우리 팬덤 맞아요?”
“로열패밀리 때문에 신규 유입된 사람들이에요.”
넵튠 팬으로 잔뼈가 굵은 먹송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송하 개인팬덤 커지면서 덩달아 넵튠 팬도 늘었는데, 팬이 많아지면 그만큼 안티도 많아진다더니만. 저건 팬이 아니라 거의 안티라니까요. 공홈에서도 분탕치는 사람들이 많아서, 요즘 분위기가 좀 그래요.”
“저기, 그러데······.”
뿔테안경을 쓴 남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멤버들, 진짜 사이 껄끄럽고 그러진 않겠죠?”
“저도 분란 생길까봐 걱정되더라고요. 송하가 혼자 너무 확 떠가지고.”
“정규앨범 나오고 단체 활동이 많아져야 팬덤도 안정될 텐데.”
먹송하가 여전히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곁눈질했다.
그들 중 한명이 울컥한 얼굴로 소리치고 있었다.
“그룹에서 이송하를 빼고 싶으면 그러시든가! 대신 갈 때 가더라도 정선우 실장님은 놓고 가요!”
“정 실장님 송하 매니저거든요?”
“웃기시네! 처음부터 넵튠 매니저였거든요?”
“그럼 반땡하시든가!”
소란이 점점 커지자, 작가가 경호원과 함께 부랴부랴 달려왔다.
“여기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넵튠 팬들인 것 같은데요.”
“생방 때까지 저러면 큰일 나는데. 넵튠 담당 매니저 분한테 연락···!”
“작가님!”
먹송하가 재빨리 작가에게 다가갔다.
“넵튠 팬클럽인데요. 소란 피워서 죄송해요. 금방 조용해 질 거예요!”
“조용해진다고요?”
작가와 경호원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 순간에도 싸움판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멱살잡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주변의 다른 팬과 일반 시민들까지 수군거리며 시선을 보냈다.
“안 조용해 질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조금만 있으면 수업 종친 것처럼 조용해 질··· 어!”
차분하게 설명하던 먹송하가 반색했다.
“정 실장님 왔다!”
광장 주차장으로 흰색 미니밴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 봄, 수확의 계절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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