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수확의 계절 (4) >
흔들리던 머리통이 기어이 맥주병을 들이박았다.
“서지준 선배님이랑 이 실장님이랑 딱 붙어 계시는데, 저한테는 그게!”
“부러웠다고.”
“맞아요! 너무 부러워서 눈물 날 뻔 했어요. 팀장님 보러 갈 때마다 숨이 콱 막혀요. 저희 팀장님이요. 저 고3때 담임 선생님보다!”
“무섭다고.”
“형은 어떻게 제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아요? 들려요?”
“어.”
네가 다섯 번이나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또 했으니까.
시간을 보니 이미 밤이 깊었다. 송인호가 러그 위를 기어 다니기 시작한 것도 한 시간째다. 이제는 앞구르기까지 한다. 팔다리도 길쭉길쭉한 놈이 사지를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소파 밑으로 내려갈 수가 없다.
송인호가 데굴데굴 굴러와 내 발목을 붙들었다.
유기견 같은 눈을 하고 웅얼거린다.
“형이 제 매니저였으면 좋겠어요.”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솟는다.
겨우 삼켰다.
다리를 툭툭 흔들어서 송인호를 떼어냈더니, 다시 쫓아와서 덥석 잡는다. 내 다리가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축축한 목소리로 매니저, 매니저, 노래를 부르는 놈을 가만히 바라봤다.
송인호를 보고 있으면 시험에 드는 기분이다.
나한테 독립영화 시나리오를 내밀었던 그날부터, 줄곧 그랬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참았었나 싶을 만큼 엄청난 유혹에 시달렸다. 속이 바짝바짝 탔었다. 뺏을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지금이야 2팀장이 잡아온 영화도 함께 촬영 중이라, 미래에 송인호가 어떤 영화로 상을 받았던 건지는 더 불확실해졌지만. 그때는 그 독립영화 시나리오가 안 긁은 당첨 복권처럼 보였으니까.
길을 잘못 들면 미래에 쓰레기 같은 놈이 될지도 모른다는 경각심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남조윤과 이송하의 노력을, 연기를 보면서 성공에 대한 확신을 다지지 않았더라면.
그 시나리오, 가로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마음이 흔들렸다.
시나리오에 대한 유혹을 이기고 나니, 다음엔 송인호라는 배우가 탐났다.
그 결과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내가 꼬드겼다. 저 입에서 ‘형이 제 매니저였으면 좋겠어요.’ 라는 말이 나오도록.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 손만 뻗으면 지금이라도 움켜쥘 수 있다.
2팀장한테서 송인호라는 배우를 가로챌 수 있다.
그런데 불쑥불쑥 그런 생각이 든다.
송인호가 2팀장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것. 그리고 2팀장이 남조윤에게 수작질을 했다는 심증. 나와 2팀장의 껄끄러운 관계. 내 욕심을 합리화한 그런 조건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나는 송인호를 뺏어올 생각을 했을까.
“형, 저 내일 낮에 촬영 있는데···.”
“일찍 깨워줄 테니까 이제 자. 굴러다니다 또 토하지 말고.”
“형이랑 일하고 싶다아.”
조금만.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현관 벨이 울렸다.
올 사람이 없는데. 송인호를 밀어놓고 현관문을 열었다.
가장먼저 보인 건 헬멧이었다. 카레이서들이나 쓸 것 같은 밥통만한 헬멧을. 가죽바지에 감긴 다리가 모델처럼 길고 늘씬한걸 보니, 여자였다. 장갑을 낀 손에는 터질 것 같은 편의점 봉지를 들고 있다.
여자가 봉지를 내밀었다. 병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뇌물이에요.”
익숙한 목소리라고 생각한 순간. 얼굴을 가리던 바이저가 슥 올라갔다.
그 속에서 이태희가 지친 얼굴로 웃었다.
“너 혼자 왔어?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스쿠터 타고요.”
이태희가 헬멧을 흔들며 말했다.
“스쿠터?”
“서영이 거요. 기자들 조심하면서 왔어요. 엘제이 옷으로 변장도 했고.”
“아니, 기자보다 네가 멀쩡하게 여기까지 도착한 게 다행이다.”
정말로.
이태희를 소파에 앉혀놓고 다시 물었다.
“볼일 있으면 나한테 전화를 하지. 이 술은 또 뭐야. 무슨 뇌물?”
“오빠한테 부탁이 있어서요.”
이태희가 가죽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다가 멈칫한다.
“저건 뭐예요?”
시선이 꽂힌 곳은 거실 한 면을 가리는 커튼이었다.
정확하게는 커튼 밑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송인호의 발.
화장실 갔나 했더니.
“도둑?”
“아냐. 너 그 안에서 뭐하냐.”
커튼을 홱 젖혔더니 송인호가 슬금슬금 나온다.
“팀장님이 저 잡으러 왔는줄 알고.”
“네가 무슨 도망노비냐.”
2팀장이 쳐들어오는 걸 상상했더니 술도 안 마셨는데 속이 거북하다.
커튼 속에 나오자마자 무릎을 꺾어 엎어진 송인호가 이태희와 인사를 나눴다. 다시 굴러다니기 시작하는 송인호를 이태희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얘 여기 와있는 건 비밀이다. 사정이 좀 복잡해.”
“알았어요. 저 여기 온 것도 비밀이에요. 특히 송하한테.”
“어, 그래. 부탁할 게 뭐야?”
이태희가 USB를 내밀었다.
“그동안 작업한 곡이에요.”
“정규앨범에 넣을 곡?”
“네. 세 개를 만들었는데, 오빠가 제일 먼저 들어주셨으면 해서요.”
내가 노트북을 세팅하는 동안, 이태희는 뇌물이라며 가져온 술을 테이블 위에 쭉 늘어놨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은 내가 데려다주겠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밤막걸리를 따서 나발을 불었다.
송인호가 덩달아 빈 맥주병 주둥이를 입에 넣는다. 가관이다.
노트북에 USB를 꽂고 파일을 찾으며 물었다.
“이런 부탁이면 아무 때도 말하지. 뭐 하러 밤에 혼자 찾아왔어?”
“애들이나 회사 사람들이나, 제가 작업 끝내길 기다리고 있잖아요. 곡이 A&R팀으로 넘어가서 최종 오케이까지 받으면 바로 앨범 준비 들어갈 거고. 그래서 숨기고 싶었어요.”
이태희가 차분히 말했다.
“들어보시고 별로면, 정규앨범엔 자작곡은 뺐으면 좋겠어요.”
“뭐?”
파일을 재생하다말고 고개를 홱 돌렸다.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켠 이태희가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아직은 괜찮아요, 넵튠. 그런데 앞으로도 괜찮을지 잘 모르겠어요.”
“혹시 안 좋은 소리 들었어?”
넵튠도 어느새 4년차고, 주위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람들도 많다. 이태희나 임서영, 엘제이도 각자 노력하면서 자기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지만, 이송하가 워낙 까마득하게 앞서가고 있으니까.
달갑지 않게도 어느 순간부터 ‘이송하 그룹’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원맨팀은 한계가 있잖아요. 가족처럼 끈끈하던 팀도 결국 트러블 생겨서 해체하거나, 비즈니스만 따지게 되는 경우 많이 봤어요. 정규앨범 망하면 우리도 그렇게 될 수도 있으니까. 꼭 잘돼야 하는데, 제가 만든 곡으로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이태희가 신뢰가 가득한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그 시선이, 어깨위로 묵직하게 떨어진다.
“오빠가 한번 들어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떤지.”
“이 노래, 뜰 거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들어본 노래 중에 제일 좋아요!”
첫 번째 곡을 재생했을 때. 송인호가 벌떡 일어나 감탄했다.
“이거, 이건 제 인생 곡이에요. 너무 좋아요!”
두 번째 곡을 듣고, 송인호가 춤을 췄다.
술병을 들고 흐느적흐느적. 개업가게 앞에 있는 바람인형처럼.
그리고 세 번째 곡이 끝났을 때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이태희의 이름을 외쳤다. 그런 광팬을 눈앞에 두고도, 이태희는 눈도 돌리지 않고 나만 바라봤다. 막걸리 병 모가지를 우그러뜨릴 것처럼 움켜잡고서.
음악이 끝난 거실은 고요했다.
이태희가 잠깐 뜸을 들이고 물었다.
“어때요?”
“음. 잠깐 세수 좀 하고 올게. 맑은 정신으로 얘기하자.”
이태희의 시선을 등에 꽂은 채 욕실로 들어왔다.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고, 욕실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전혀 모르겠다.
어떤 노래가 성공할 노랜지.
사실 좀 자신하고 있었다. 미래예지 없이 내 판단으로 선택한 로열패밀리와 얼라이브가 성공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까. 이정도면 내 안목도 상당히 쓸 만한 거 아닌가,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개뿔. 이어서 들은 세 가지 곡 중에 뭐가 가장 좋은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음악방송 1위를 했던 위성도, 미래예지가 있었으니까 확신을 갖고 밀었던 거지.
이태희한테 뭐라고 할까.
이번에는 감이 안 잡힌다고 할까?
신뢰 가득하던 눈빛이 밟히긴 하지만, 미래에 대한 힌트가 없으면 난 곡선정에선 선무당이나 마찬가지다. 이쪽 일에 전문가인 A&R팀 직원들이나 3팀장이 훨씬 잘 알거다.
로열패밀리 OST의 성공도 음악감독의 판단이 맞았던 거니까.
일단 이태희가 작곡한 곡들을 김현조와 회사 직원들한테 들려주고···.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이태희의 곡을 최종 낙점해서, 만약 앨범이 망하면.
이태희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다.
이송하가 넵튠의 견인차 역할을 확실히 해주고 있긴 하지만, 이대로 멤버들과의 격차가 계속 벌어지기만 하면 팀 내에서건 팬덤에서건 잡음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3팀 내부에서도 이 문제로 여러 번 회의를 했었다. 어떻게 해야 넵튠을 더 튼튼한 팀으로 만들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이송하 그룹으로 싸잡아 묶이지 않고, 다른 멤버들도 존재감을 확고히 할 수 있을지.
정규앨범의 성패에 따라 많은 게 좋아지거나, 나빠질 거라는 건 분명하다.
이럴 때 타이밍 좋게 미래가 보이면 바랄 게 없겠는데.
차가운 세면대를 짚고 거울을 바라봤다. 찡그린 얼굴이 보인다.
로열패밀리 때도, 얼라이브 때도 잠잠했으니까.
오랜만에 한번 도와주라, 좀.
***
물소리가 멎었다. 서로 빈 술병을 끼고서 욕실 문을 쳐다보던 이태희와 송인호가 동시에 숨을 멈췄다. 하지만 곧, 다시 문틈으로 물소리가 이어졌다. 숨을 도로 내쉬다가 두 사람의 눈이 딱 마주쳤다.
“저, 선배님.”
“저요?”
송인호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실장님이, 형이 아니라고 하면, 정말 자작곡 포기하시려고요? 세 곡이나 만들려면 많이 힘드셨을 것 같은데.”
“앨범이 잘 되는 게 중요하니까요.”
이태희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입술을 뗐다 붙였다하던 송인호가 중얼거렸다.
“대단하다. 형을 진짜 많이 믿으시나봐요.”
“중요한 선택에선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요. 한번도.”
“하긴, 선배님은 계속 옆에서 보셨겠네요. 저도 형이 잘될 것 같다고 하면, 정말로 잘될 것 같은 느낌이더라고요. 전에 제가 형한테 독립영화 시나리오를 보여드렸었는데 그때 형이 그랬어요.”
기우뚱, 일어나 앉은 송인호가 흉내 내듯이 말했다.
“제가 보기엔 좋은데요. 시나리오 뺏어가고 싶을 만큼.”
“아.”
“그러면서, 영화 찍으면서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도와주겠다고 해서. 그래서 제가 이렇게 몰래몰래 찾아오는 거거든요. 저희 팀장님이 형 싫어하잖아요. 들키면 난리 날 걸요. 근데 거기 있으면 너무 숨이 막혀서···!”
갑자기 벌떡 일어난 송인호가 소파를 덮쳤다.
이태희가 흠칫할 정도의 기세였다.
그가 이태희가 기대고 있던 쿠션을 낚아채, 와락 부둥켜안았다.
“넵튠 선배님들도 부럽고, 새로 회사 들어오신다는, 남조윤 선배님도 부럽고. 다 부러워요. 저도 형이 제 매니저였으면 좋겠는데. 형을 매니저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송인호가 러그 위를 구르며 아우성을 쳤다.
투쟁심으로 불타오르던 눈이 얼마 안 가 다시 축축해졌다.
그 해괴한 모습을 보고 이태희가 슬쩍 웃었다.
“송하가 이거 알면, 야식 엄청 시키겠네.”
“네?”
“아니에요. 누가 좀 생각나서.”
이태희가 나란히 줄 세워진 술병들을 가리켰다.
“울지 말고, 술이나 한 병 더 해요.”
“선배님도 한 병 하세요.”
곧 술병 두 개가 주둥이를 탁 부딪쳤다.
“꼭 같이 일했으면 좋겠네요. 오빠하고.”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헛된 꿈이에요. 안될 거예요, 어차피.”
송인호가 한 손엔 쿠션을, 한 손엔 술병을 든 채로 말했다.
“형은 실장이고, 팀장님은, 팀장님이니까.”
***
“요즘 많이 바쁘시죠, 실장님.”
수더분한 인상의 남자가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영화, 드라마, 양쪽 다 반응 폭발이라 눈코 뜰 새 없으실 것 같은데.”
“아무리 바빠도 피디님은 뵈러 와야죠.”
임서영과 엘제이가 고정으로 들어가 있는 IBC 예능프로의 연출자. 최홍선 피디다. 그의 뒤로 익숙한 피디들과 조연출, 작가들이 줄줄이 회의실 안에 들어와 앉았다.
내 몫의 커피를 받으며 제작진의 안색을 살폈다.
갑자기 전화해서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다고 하길래, 우리 애들 하차통보 받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런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 제작진이 내 눈을 안 피하는 걸 보면.
다행이다.
최악의 경우였으면 애들 앞날 고민하느라 머리가 복잡했을 텐데.
“그런데 중요한 얘기라는 게.”
“아, 그게. 봄 개편 때문에요.”
뜨거운 커피를 목구멍에 들이부을 뻔 했다.
이거 느낌이 싸한데. 왜 개편 얘길 꺼내지?
혹시 프로그램이 엎어지나? 아니지. 시청률이 안 나오는 것도 아닌데.
그럼 멤버교첸가?
“개편 때 뭔가 달라집니까?”
“달라져야죠. 우리 프로가 시청률은 꾸준히 나와 줘도, 화제성은 좀 부족하잖아요. 국장님도 계속 그 부분을 찌르셨고.”
내 표정을 본 피디가 빠르게 덧붙였다.
“아, 서영이나 엘제이는 정말 잘 해주고 있습니다. 다른 멤버들도 프로그램 위해서 열심히 해주는데, 그 놈의 화제성이 자꾸 발목을 잡네요. 다 연출팀 기획력이 부족한 탓이죠.”
서론이 길다.
제작진들이 은근히 날 곁눈질하는 게, 아주 찜찜하다.
하차통보에 대비해서 내가 제안할 수 있는 조건들을 몇 개 떠올렸을 때.
“그래서 이번에, 포맷을 바꿔서 장기 프로젝트를 시도해볼까 하는데요.”
“···장기 프로젝트요?”
피디의 가무잡잡한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거기에 실장님이 한 손 거들어 주실 수 없을까 해서요.”
< 봄, 수확의 계절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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