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수확의 계절 (3) >
“어, 얼라이브 시사회 끝났나 봐.”
스낵바에 줄 서있던 사람들이 시선을 돌렸다. 얼라이브 시사회 상영관. 방금 전까지 쥐죽은 듯 조용하던 곳에서 소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깥까지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릴 정도면 안쪽은 난리통일 게 뻔했다. 팝콘 값을 계산한 남자가 여자 친구를 데리고 출구로 다가갔다.
“우리 나오는 사람들 좀 보고 가자. 궁금하잖아.”
“사람들 보면 뭐 아냐?”
“영화가 재밌었는지, 별로였는지는 관객 반응 보면 바로 알지!”
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까지 덩달아 출구를 힐끔거렸다. 심지어 팝콘을 튀기고 콜라를 뽑던 직원들까지도. 평론가들과 영화 관계자들의 극찬세례를 받은 한국형 블록버스터. 얼라이브에 대한 관심은 꽤 높았다.
“관객 반응 별로라는데 내 손모가지 건다.”
안경을 쓴 남자가 친구가 든 팝콘을 집어먹으며 말했다.
“평론가들은 좋다는데 네가 뭔데 손모가지를 거냐?”
“그게 문제지. 평론가들이 너무 띄워놨잖아. 관객들이 다 할리우드 좀비영화 급을 기대하고 봤을 텐데, 그럼 백프로 실망하지. 국내영화치고 이 정도면 선방이네, 이런 마인드로 영화를 봐야 되는데.”
“얼라이브도 제작비는 엄청 들었던데?”
“삼백 억을 어따 갖다 대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수천억씩 들어가는데.”
“어, 그럼 평이 안 좋게 돌 수도 있겠···.”
말꼬리는 소란에 파묻혔다. 상영관 출구로 관객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다리던 이들이 관객들의 표정을 살폈다. 미묘했다. 심각한 사람도, 허탈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할 말이 많은 영화인 건 분명해 보였다. 관객들은 숨도 안 쉬고 동행인과 떠들었다.
“나 영화 보다가 막판에 핸드폰 세 번 봤잖아. 시간 확인하려고.”
“나도! 이거 언제 끝나나 싶어가지고.”
영화가 지루했나?
사람들이 귀를 더 기울였다.
“한 시간쯤 지났나 하고 시간 봤는데 끝날 때 다 돼 가더라. 잘못 봤는줄 알았잖아.”
“막판 30분은 3분처럼 지나가던데? 150분이 그냥 훅 갔어! 훅!”
“미쳤다, 진짜. 도로 들어가서 처음부터 다시 보고 싶은데, 이거 정상이냐?”
“끝나자마자 딱 그 생각 들더라. 무조건 다시 봐야지!”
대화를 훔쳐들은 사람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반응 좋네?”
“너 손모가지 잘라, 새끼야.”
관객 반응 별로라는데 손목을 걸었던 남자가 헛기침을 했다.
그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길래 반응이 이렇지?”
피난 행렬처럼 이동하는 관객들 틈에는 남조윤의 가족들도 끼어있었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앞사람의 등판만 보고 걸었다. 뭔가에 단단히 홀린 것처럼.
문득, 남조윤의 아버지가 옆을 쳐다봤다. 여자들이 재잘거렸다.
“누구야? 이름 안 떠? 얼라이브 미친놈이라고 검색해봐.”
“있어봐, 좀. 찾고 있다니까··· 어, 다른데서 시사회 본 사람들도 찾고 있나봐. 얼라이브에서 애기 집어던진 미친놈 배우 누구냐고 질문 글까지 뜬다?”
“야야야, 여깄네! 영화 정보에 있잖아, 남조윤!”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남조윤의 가족들이 흠칫 놀랐다. 몽롱하던 눈빛에 빛이 돌아왔다.
“프로필 사진은 완전 멀쩡하네? 영화에선 미친놈 연기 쩔던데.”
“어우, 나쁜 놈인데 화면에 나올 때마다 몰입 확 되더라. 목소리도 죽이고. 야, 평론가들이 씬스틸러니, 새로운 메뉴니 했던 게 이 사람인가 봐. 등장 씬부터 겁나 쫄깃쫄깃해지더라.”
“처음 보는데. 지금까지 연극 같은 거 했나?”
“그냥 무명이었나 봐, 필모 보니까 모르는 영화만 찍었네.”
“잘하면 이번에 확 뜨겠다, 그지?”
딸꾹.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뚝뚝 끊어지는 흐느낌과 함께.
남조윤의 아버지가 홱 돌아봤다.
“뭐야, 당신 울어?”
고개를 푹 숙인채로, 남조윤의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딸꾹질은 어딜 보나 그녀에게서 새나오고 있었다. 시선이 모이자 남조윤의 어머니가 황급히 소매로 눈을 문질렀다.
“이 양반이 헛것이 보이나, 울긴 누가 울어?”
“우는구만! 아깐 나한테 다 늙어서 주책이라더니. 조윤아, 네 엄마 운다!”
“아니라니까! 오래 화면 쳐다보고 있었더니 눈알이 따가워서 그러지!”
어머니가 아버지의 등판을 철썩 때렸다. 하지만 말과 다르게 찡그린 눈에는 눈물이 흥건하게 고이고 있었다. 팝콘과 콜라를 분리수거하고 있던 남조윤이 눈을 크게 뜨고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괜찮어, 괜찮어. 당연히 괜찮지.”
고개를 끄덕이자, 고여 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둑이 터진 것처럼 눈물이 콸콸 흘렀다. 참느라 뚝뚝 끊어지는 흐느낌에 딸꾹질까지 요란하게 섞였다. 놀리던 아버지가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 돌발 상황에 가장 당황한 건 본인이었다.
“아이고, 이게 왜 이래, 갑자기!”
눈을 부릅떠 보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눌러보기도 했다. 모두 허사였다.
출구 앞에 서있던 커플이 수군거렸다.
“이 영화 엄청 슬픈가봐. 저분 통곡하시는데?”
“뭐야, 신파야? 눈물 짜는 영화 잘 못 보는데. 보지 말까?”
눈물을 그치려고 애쓰는 중에도 그 말을 들었는지, 남조윤의 어머니가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이거 슬픈 영화 아니에요. 보셔도 돼요. 꼭, 꼭 보세요.”
“맞아요. 이거 슬픈 내용은 거의 없었는데.”
한참 남조윤 이야기를 하던 여자들이 거들었다.
그녀들이 들고 있던 팝콘통과 멀쩡한 냅킨을 쓰레기통에 버리려던 때였다.
“그 냅킨. 안 쓰시는 거면 제가 좀······.”
“아, 네! 쓰세요.”
여자가 냅킨을 건네려고 뒤돌았다.
그리고 딱 마주쳤다.
스크린에서 봤던, 그리고 조금 전 프로필 사진에서 봤던 그 얼굴과.
“어?”
“네?”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비명이 터졌다. 앞만 보고 우르르 몰려나가던 관객들이 깜짝 놀라 멈출 만큼, 어마어마한 비명이.
“야, 너 미쳤어? 왜 그···!”
말리던 친구가 남조윤을 보곤 입을 벌렸다. 떨리는 손이 연신 삿대질했다. 다른 관객들이 남조윤의 얼굴을 알아본 건 그야말로 순식간. 출구 복도가 혼란에 휩싸인 것도 순식간의 일이었다.
“야야, 맞지? 영화에서 애 던졌던 미친놈, 아니, 그 사람 맞지?”
“배우가 왜 여기 있··· 네? 어? 어? 뭐야? 진짜야?”
“대박! 가족들이랑 영화 보러 왔나? 사, 사인 받을까?”
남조윤의 가족들 주위로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접근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연예인이라서가 아니었다. 영화 속에서 봤던 남조윤의 잔혹한 연기가 아직 머리에 선명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람들이 좀비 떼처럼 남조윤에게 달려들었다.
*
“여기 스탭룸에서 한숨 돌리시고, 비상구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니저님.”
정선우가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인사했다.
신기하다는 듯 그의 맨얼굴을 쳐다보던 매니저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배우 분들 무대 인사하러 오실 때 매뉴얼인데요, 뭐. 저기 그런데···.”
매니저가 슬그머니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얼라이브 포스터였다.
“괜찮으시면 포스터에 사인 좀···.”
“아, 네. 해 드려야죠.”
“혹시 괜찮으시면 인증샷도 좀···.”
결국 포스터에 남조윤의 사인을 받고, 함께 인증샷까지 찍은 매니저가 희희낙락한 얼굴로 나갔다. 이제 좁은 사무실에 남은 건 정선우와 남조윤의 가족들뿐이었다. 말없는 공간에 거친 숨소리만 떠다녔다.
남조윤의 가족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반값세일 현장에서 튕겨져 나온 사람들처럼. 키가 작아서 사람들 속에 파묻히다시피 했던 사촌 여동생은 봉두난발이었고, 통곡하던 어머니는 눈물이 쏙 들어간 모습이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사촌 남동생이었다.
“와. 우와아, 뭐야, 이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꿈이야, 생시야?”
곧이어 남조윤의 숙부와 숙모까지 거들고 나섰다.
“어이구야, 영화는 하나도 기억 안 나고 조윤이 얼굴만 기억나네.”
“조윤이 이제 유명해지는 거 아니에요? 아주버님이랑 형님은 이제 쟤 걱정은 하나도 안 하셔도 되겠네!”
“유명해지면 그 뭐야, 아침 드라마 같은 것도 할 수 있나?”
“아침 드라마 말고 예능! 오빠 예능프로 나올지도 몰라! 팬 사인회도! 조윤이 오빠 유명한 연예인 되면, 나, 난 어떡하지?”
“형이 유명해지는데 네가 뭘 어떡하냐?”
“연예인 가족사진 인터넷에 뜨기도 하잖아! 나 쌍꺼풀 수술할까?”
“놀고 있네.”
“아주버님! 어머님 아버님하고, 오늘 못 온 애들한테 연락해서 날 새로 잡을까요? 조윤이가 엄청 많이 나오는데, 다 같이 영화관에서 봐야죠!”
친척들이 잔뜩 흥분해서 떠들자, 남조윤의 부모님도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남조윤의 아버지가 무릎을 치며 외쳤다.
“그래, 일단 영화표를 한 백장쯤 사 놓고!”
“어머님 아버님은 안돼요. 보시다가 놀라서 쓰러지실 수도 있어.”
“그건 그러네요. 조윤이가 애 집어던지고 사람 잡을 때, 저도 식겁했어요.”
“어어, 형 진짜 미친놈 같더라. 좀비보다 형이 더 무섭던데.”
우두커니 선 남조윤을 붙들고 가족들이 요란스럽게 떠들었다. 당사자인 남조윤은 잠잠한데, 주위를 둘러싼 얼굴들은 흥분으로 터질 것처럼 붉었다. 남조윤의 아버지는 만취한 사람처럼 어깨까지 들썩거렸다.
정선우는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에게 남조윤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영화 시작 전에도 그를 쳐다보는 눈빛엔 고마움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숫제 은인을 보는 시선이었다. 아직 불그스름한 흔적이 남은 눈을 몇 번 깜빡인 어머니가 말했다.
“아까 정신이 없어서 내가 이걸 못 물어봤는데, 저, 실장님이···.”
“정선웁니다. 편하게 부르세요, 어머니.”
찬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래요, 그럼 그, 동생이 혹시 조윤이 매니저예요?”
곧장 남조윤의 사촌 여동생이 끼어들었다.
“큰엄마, 그 오빠는 이송하 매니저라니···!”
“맞습니다.”
정선우가 대답했다.
친척들한테 둘러싸인 채로 그를 쳐다보는 남조윤과 눈을 맞추면서.
“제가 형 매니저예요.”
호들갑은 비상구를 내려가는 동안에도 계속됐다. 남조윤의 가족들은 벌써 4차 영화관람 계획까지 세우는 중이었다. 이러다 영화표를 청첩장처럼 돌릴 태세였다.
뒤쪽에서 내려가는 정선우의 어깨에 손이 얹어졌다.
남조윤이었다.
“고마워. 이렇게 만들어줘서.”
조용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남조윤의 건조하기만 하던 얼굴에는, 틀림없이 평소와는 다른 벅찬 감정이 배어있었다.
“뭘 다 끝난 것처럼 그래요. 이제 시작인데.”
정선우가 선글라스를 다시 쓰며 말했다.
“앞으로 정신없어질 거예요. 오늘 겪은 건 예고편도 안될 만큼. 일단 전속 계약 건은 좋은 조건으로 얘기중이고, 아, 인터뷰나 예능 프로그램도 생각중인 게 있는데. 혹시 그런 거 싫어하면 미리 얘기···.”
“그냥 알려줘. 뭐 하면 되는지.”
남조윤이 말했다.
“네가 하라는 일은 뭐든 할 테니까.”
정선우가 걸음을 멈췄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죠, 형. 내가 앞으로 뭘 시킬 줄 알고.”
“뭐든 괜찮다니까.”
“이상한 예능 잡아온다?”
정선우가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장난인지 진담인지 모를 표정이었다.
하지만 남조윤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대로 그를 앞질러 걸어갔다. 그리고 시끌벅적한 가족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잠깐 동안 멈춰있던 정선우가 곧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
-얼라이브에 무명인으로 출연한 남조윤씨, 팀장님 네 회사 소속이에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엔 섭섭함이 가득했다.
-그런 괜찮은 신인 있으면 말씀 좀 해주시지. 요즘 영화마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이라, 신선한 피 수혈하고 싶어서 여기저기 난린데. 팀장님, 남조윤 씨 차기작은 얘기중인 거 있어요?
2팀장은 태연히 감독과의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전화기를 통째로 집어던졌다. 벽에 부딪친 전화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안절부절 못하며 기다리던 조실장이 숨을 죽였다.
“오늘만 세 번째야.”
“네?”
“남조윤이 찾는 전화가, 오늘만 세 번째라고! 나한테도 들어올 정도면 홍보팀에는 문의전화가 쏟아지고 있다는 거 아냐!”
2팀장이 욕지거리를 하며 털썩 의자에 앉았다.
조실장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잠깐 지나가는 바람이죠, 뭐. 사람들 호들갑 아시잖아요.”
“밖에 나가기만 하면 그놈의 남조윤, 남조윤, 시끄러워서. 날 무슨 눈이 삔 놈처럼 쳐다보는데, 내가 쪽이 팔려서 사무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우리 인호 영화 개봉하면, 팀장님 안목 의심하는 헛소리들은 쏙 들어갈걸요. 작품도 대박 날 작품이지만, 인호 그놈 현장에서 연기하는 거 보면 아주 난놈이에요.”
송인호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2팀장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그래야지. 내가 고른 놈인데.”
“윤 감독님도 처음엔 낙점된 배우 밀어내고 들어왔다고 안 좋아하는 눈치더니, 지금은 뭐, 두 손 들고 인정하고 있고요.”
“인호 그놈은 내가 잘 키워서 무조건 탑 급으로 만들 거야. 남조윤이 하곤 비교도 안 되는 급으로. 너도 인호 잘 지켜봐. 도원이 자식 아랫도리 잘못 놀려서 그 꼴 나고, 채영이 걔는 심심하면 회사 뒤집어놓고. 지준이 그놈도 옛날엔 고분고분하더니 요즘은 영 말을 안 들어. 인호는 처음부터 딱 붙들어놓고 제대로 키워야지.”
“제가 주시하겠습니다.”
2팀장이 텁텁한 한숨을 뱉었다.
“근데 남조윤이 계약 건은, 뭐 어떻게 돼가고 있어?”
“정선우랑 3팀장님이랑, 본부장실에서 계약 조건가지고 얘기하더라고요. 정선우 그놈은 이미 남조윤이 자기 배우라고 생각하는 거 같던데요?”
“······그 놈, 저 할 일은 제대로 하면서 딴 짓하는 거야?”
2팀장이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그게, 이송하야 지금 드라마랑 영화 쌍끌이 하면서 쭉쭉 올라가는 중이라.”
“이송하는 그렇다 치고, 넵튠은 요즘 어때?”
“넵튠이요? 이태희는 드라마 OST가 터져서 요즘 반응 괜찮죠. 저번 미니 에 이어서 더블잭팟이라 A&R팀에서는 다음 정규앨범도 이태희 자작곡을 내세워보려는 것 같고, 임서영이랑 엘제이도 방송 하고 있고요. 화제성이 없어서 그렇지, 시청률은 괜찮게 나오는 거 같던데요.”
“그 놈이 아무리 운이 좋아도, 밑에 애들 하는 일까지 다 잘 풀릴 리가 없어. 자세히 한번 알아봐. 뭐 문제없는지!”
2팀장이 음험한 눈빛으로 지시했을 때.
누군가 다급한 노크와 함께 팀장실로 들어왔다. 송인호였다. 지난 몇 달간 아낌없이 관리 받은 덕에, 외모는 누가 봐도 감탄할 정도였다. 하지만 처음 풋풋하고 생생하게 빛나던 눈빛이 지금은 늪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팀장님, 저 내일 스케줄이 갑자기 변경된 것 같은데요.”
“그 독립영화 스케줄?”
2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바꾸라고 했어. 윤 감독 쪽이 스케줄을 내일로 옮겼으면 좋겠다고 해서.”
“저 내일 로케이션 촬영이에요. 겨우 섭외된 장소라 내일 못 찍으면···!”
“독립영화 스케줄은 조 실장한테 조정해 놓으라고 했으니까, 넌 걱정 말고 내일 촬영할 씬이나 신경 써.”
“안 그래도 저 때문에 영화 일정에 자꾸 차질 생기는데, 또···!”
“송인호. 내가 이래서 너보고 그 독립영화 하지 말라고 한 거야.”
“팀장님!”
송인호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가 도와달라는 듯 조 실장을 쳐다봤지만, 조 실장은 2팀장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던 2팀장이 달래는 것처럼 말했다.
“윤 감독 작품에 너 집어넣으려고 얼마나 애먹은 줄 알아? 그 독립영화랑 이거랑, 둘 중에 뭐가 더 중요한지 모르겠어? 너한테 가능성이 없어 보였으면 내가 이렇게 붙어서 잔소리 하지도 않아, 임마! 충분히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놈이 겨우 그딴 거에 발목 잡혀 있으면 어떡해?”
2팀장이 단호하게 덧붙였다.
“얌전히 시키는 대로만 해. 그럼 내가 너 무명시절 따위 없이, 신인상 받으면서 화려하게 데뷔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서지준과 이봉준 실장이 느긋하게 복도를 걸었다.
손에는 두툼한 시나리오를 든 채였다.
“형, 이 시나리오, 정 실장님한테도 한번 보여주면 어때?”
이봉준 실장이 인상을 썼다.
“이 자식이. 너 나 못 믿냐?”
“아니, 내가 형 안목을 못 믿는 게 아니라, 그냥···.”
“벌써 정 실장한테 보여줬지, 임마. 읽고 나서 얘기하기로 했다.”
이봉준 실장이 배를 내밀며 말했다.
서지준이 감동한 눈으로 그의 둥글둥글한 어깨에 덥석 팔을 걸쳤다.
“아, 진짜. 형이 내 매니저 아니었으면 어쩔 뻔 했어. 형 없으면 난 쓰레기야. 알지?”
“말로만 그러지 말고 인터뷰할 때 내 얘기를 좀 해, 임마.”
두 사람이 킬킬거리며 2팀장 사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안쪽에서 끓는 듯한 고함이 터졌다. 2팀장의 목소리였다. 문손잡이를 잡았던 이봉준 실장이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서지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고 의견을 맞추고 뒤돌아선 순간.
문이 홱 열렸다. 그리고 송인호가 딱딱한 얼굴로 빠져나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 실장님.”
“어, 그래.”
딱 붙어있는 서지준과 이봉준 실장을 잠시 바라보던 송인호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멀어졌다. 훤칠한 뒷모습이 어쩐지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봉준 실장이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찼다.
“또 한바탕 했나보네. 저러다 애 잡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옛날 생각난다. 나도 신인 때 옆에 형 없었으면 우울증 왔을지도 몰라. 근데 팀장님도 요새 유난히 히스테릭하시네. 갱년긴가?”
“정 실장 때문이지, 뭐. 그놈의 기싸움에 지금 걸린 게 많잖냐. 걔가 하는 것마다 잘되니까 회사 배우들 중에서도 관심가지는 애들이 좀 있나보던데. 배우들한테야 뭐, 대박칠 작품 잘 잡아다주는 매니저가 최고니까. 팀장님 입장에선 그것도 신경 쓰이겠지.”
이봉준 실장이 닫힌 사무실 문을 힐끔거렸다.
“내가 보기엔 지금은 폭풍 전의 고요야. 앞으로 제대로 한번 부딪칠걸?”
“팀장님이랑, 정 실장님이랑? 정 실장님이 아무리 요즘 잘 풀린대도 그렇지, 둘이 부딪치면 게임이 되겠어? 우리 회사에 팀장님이 데려온 배우가 몇 명인데. 영향력부터 비교가 안 되잖아.”
서지준이 날렵한 턱을 문질렀다.
“뭐, 나라도 우리 정 실장님 편 들어줘야겠네.”
“글쎄다. 예전이면 나도 그렇게 생각했겠는데.”
이봉준 실장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정선우 걔도 보면 볼수록, 보통 놈이 아닌 것 같더라고.”
*
송인호가 다시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여전히 신호음만 들려왔다.
핸드폰을 내리고, 그는 계속 고요한 오피스텔 복도를 걸었다. 물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처럼 한걸음 한걸음이 무거웠다. 곧 문 앞에 도착한 그가 손을 들어올렸다. 머뭇거림은 잠시였다. 손끝이 벨을 눌렀다.
전화와 마찬가지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송인호가 벽에 등을 기댄 채 구겨지듯 주저앉았을 때였다.
삐걱, 문이 열렸다.
그 틈으로 막 씻은 듯 젖은 머리위에 수건을 얹은 남자가 나왔다. 그를 보자마자 송인호가 벌떡 일어났다. 입술을 깨물며 참고 있던 눈물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툭 떨어졌다.
“실장님, 형······ 저 숨 막혀 죽을 것 같아요.”
정선우가 떨리는 송인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길에 송인호가 그에게로 무너졌다.
< 봄, 수확의 계절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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