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 실장 배우들은, 뭔가 좀 (4) >
“야야, 대체 촬영장에서 뭘 어떻게 한 거야?”
SBE 필름 기획피디가 탕비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반쯤 감긴 눈으로 믹스커피를 타며, 제작피디가 히죽거렸다.
“투자자들 반응 좀 오나 봐요?”
“빗발친다, 빗발쳐. 대표님이랑 투자지원팀장이랑 입이 귀에 걸린 거 못 봤냐? 뭔데?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그 양반들 혼을 쏙 빼놨죠. 대표님 주문대로.”
“좀 자세히! 나 답답한 거 딱 질색인 거 몰라?”
“아, 비루한 말솜씨론 그걸 백 프로 표현할 수가 없는데. 그냥 나중에 시사할 때 보세요.”
놀리듯이 말한 제작피디가 믹스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근데 W&U 정선우 실장 있잖아요.”
“정 실장? 그 사람이 뭐 했어?”
“정선우 실장네 배우들이 했죠. 그 사람, 진짜 뭐가 있긴 있나 봐요. 배우 딱 둘 데리고 있는데 둘 다 남다른 거 보면. 이송하만 물건인 줄 알았더니 다른 쪽도 완전···.”
기획피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쪽? 그 무명배우 말하는 거야?”
“남조윤 씨요.”
열린 문으로 하이힐이 불쑥 들어왔다. 홍보담당자 강민정이었다.
“내년엔 뉴페이스들 때문에 충무로가 좀 시끌시끌할걸요? 제가 보기엔, 우리 영화에서 신인상 수상자도 나올 것 같아요.”
“이송하?”
바로 튀어나온 이름에, 강민정이 오묘한 웃음을 지었다.
“둘이 사이좋게 상 하나씩 나눠 먹을 수도 있고.”
“누구, 남조윤도? 그 정도로 괜찮았어?”
“저도 그 둘은 시상대 위에 올라갈 것 같아요.”
제작피디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곤 말했다.
“두 가지 경우만 아니면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우리 영화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큼 아주 처참하게 망하거나.”
“야이, 씨! 제작피디란 놈이 재수 없게!”
“그럴 리 없겠지만, 이라고 했잖아요. 그런 경우 아니면···.”
“끝내주는 시나리오랑 끝내주는 배우가···.”
강민정이 커피 스틱을 싱크대에 휙 던지며 덧붙였다.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오거나.”
***
여름은 여름이다. 벌써 며칠째 장마였다.
3팀장이 푹 젖은 소매를 짜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비가 하늘에 구멍 뚫린 것처럼 쏟아지냐. 무섭게.”
“호우경보 내렸던데요. 태풍도 온다고 하고.”
내 말에 3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넌 날씨가 이래서 어떡하냐? 촬영은 괜찮아?”
“로열패밀리는 비씬이 많아서 이참에 찍으면 되는데, 얼라이브가 문제예요. 날 좋아질 때까지는 세트에서 실내씬 몰아서 찍겠죠, 뭐.”
곧 엘리베이터가 4층에 도착했다. 사무실로 들어가려는데, 3팀장이 나를 자판기 앞에 붙들어 세웠다.
“복덩이 너, 2팀장 소식 들었냐?”
“아뇨. 요즘 회사에 못 들어와서. 무슨 소식이요?”
“그놈이 지금 아주 복장 터져 죽으려고 한다더라.”
3팀장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신인 때문에. 왜, 걔 있잖아, 남자애.”
“송인호요.”
잘생긴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상을 받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울먹이던 장면도 떠오른다. 몇 달 동안 뇌리에 말뚝처럼 박혀서 나를 고민하게 한, 그 장면.
“그래, 송인호. 2팀장이 걔를 제2의 성도원으로 키워보겠다고, 아, 인성 말고 이미지, 어쨌든 야심 차게 드라마랑 영화 기획안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말이야. 송인호가 웬 시나리오를 하나 가져왔댄다.”
“···시나리오요?”
귀가 번쩍 뜨였다.
“독립영화 시나리오. 주인공 배역이라 한참 매달려있어야 하고, 촬영기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불확실하다더라. 걔가 그거 꼭 해야 한다고 2팀장 바짓가랑이 잡고 매달리면서 빌었댄다. 2팀장 그놈이 말리다가, 말리다가 결국 포기한 모양이더라고. 뒷목 잡고 있대, 지금.”
그 모습을 상상한 듯, 3팀장이 낄낄거렸다.
하지만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건 다른 쪽이었다.
“팀장님. 그 시나리오, 여분 있어요?”
“없을걸? 송인호 걔가 직접 받아온 거라. 왜, 신경 쓰이냐?”
3팀장이 내 등짝을 철썩 때렸다.
“신경 쓸 거 뭐 있어. 남조윤 그 친구는 이미 쌀이 익어서 밥이 되는 중인 거 아니야?”
그가 빙글거리며 말했다.
“내가 이런저런 소문을 좀 들었는데, 그 소문대로면, 어쩌면 이번 영화로 무명배우 딱지 단숨에 뗄 수도 있겠던데.”
“그럴 거예요. 어쩌면이 아니라, 꼭.”
머릿속의 태풍을 눌러놓고 대답했다.
“2팀장 그놈, 어디 너를 저한테 갖다대고 비교하느냐고 코웃음을 치더니만. 자랑하던 안목으로 한방 얻어맞으면 구름 위에서 둥둥 떠다니는 그놈 콧대도 콱 눌릴 거다, 아마.“
3팀장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벌써 기대되네.”
자판기에서 탄산음료를 하나 뽑았다.
뱃속이 시원해지니, 그제야 생각이 좀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3팀장의 말대로다. 신경 쓸 필요 없다.
내 쪽도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미친 듯이 달려왔으니까.
그 미래 때문에. 그게 자꾸 눈에 밟혀서. 언제 이만큼 노력해본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일에 매달렸다. 잠잘 시간도 아끼면서. 이송하도, 남조윤도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은 게 신기할 만큼 노력했다.
그리고 노력한 만큼, 연기로 보여주고 있다.
촬영은 하루하루가 감탄의 연속이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둘의 연기를 지켜볼 때마다 희열이 솟구친다. 박수치며 촬영장을 뛰어다니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미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에 신경 쓰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며 사무실로 들어갔을 때.
“아, 안녕하세요, 실장님!”
내 책상에 기대고 서 있던 사람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밖에는 장맛비가 주룩주룩 오고 있는데, 저곳만 햇볕이 내리쬔다.
“송인홉니다. 지난번에 인사드렸던.”
“···기억해요.”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히 걸었다.
사실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무섭다. 같은 미래가 다시 보일까 봐.
하지만 눈앞이 깜깜해지는 일도, 노이즈도 없었다.
굳어있던 어깨를 풀고 말했다.
“3팀엔 어쩐 일로?”
“그게, 실장님 뵙고 싶어서요. 이것 때문에.”
송인호가 손에 쥔 것을 들어 보여줬다.
얼마나 넘겨봤는지 끝이 해진 A4용지 묶음. 단번에 알았다.
저거구나.
“독립영화 시나리오예요. 잘 아는 감독님 작품인데, 제가 주인공 역을 하게 됐거든요. 그래서 혹시 실장님만 괜찮으시다면, 보여드리고 조언을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 해서. 워낙 유명하시니까요.”
송인호가 아랫입술을 한번 물고 덧붙였다.
“저희 팀장님께 먼저 보여드렸는데, 반응이 좀···.”
“2팀장님은 뭐라고 하셨는데요?”
“검증 안 된 무명 감독에, 투자 안 붙을 시나리오.”
툭 말하고는 흐릿하게 웃는다.
“시간은 시간대로 뺏기고. 제대로 개봉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확실하고. 개봉하더라도 이런 저예산영화는 상영관이 많아야 스무 개. 관객 수는 만 명 넘으면 대성공인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도 이 작품, 하려고요?”
내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송인호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W&U에 들어오기 전에 이 감독님께 많이 배웠어요. 언젠가 좋은 시나리오 완성되면 출연하겠다고 했고요. 이거, 저를 주인공으로 놓고 쓰셨대요. 이 작품 만들겠다고 집 전세금까지 빼셨다는데.”
송인호가 조심스럽게 시나리오를 매만졌다.
내려다보는 눈빛엔 기대와 뿌듯함이 가득하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거절해요. 저는······.”
송인호의 곧은 시선이 나를 바라봤다.
“전 그런 배우가 되고 싶진 않아요.”
······아. 이거 야단났네.
탐이 난다.
담배 연기처럼 텁텁한 숨을 뱉고, 나는 손을 내밀었다.
“볼까요, 그럼.”
***
남조윤이 원룸 문을 열었다.
중년 여자가 두툼한 목도리를 벗으며 들어왔다. 그의 어머니였다.
“여름엔 태풍이 왔다 가더니, 겨울엔 눈보라가 미친년 산발한 것처럼 치네. 골고루 한다, 아주.”
“왜 전화 안 하셨어요. 모시러 나갔을 텐데.”
“서울 한두 번 올라오냐. 이제 나도 잘 찾아다닌다.”
어머니가 삭막한 원룸 방을 훑어봤다.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투박한 노트북. 화면에는 영화가 재생을 멈추고 있다.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모서리가 너덜너덜한 시나리오 뭉치와 노트들. DVD 케이스가 빼곡하게 든 책꽂이.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핀 후에야 주름진 얼굴이 느슨해졌다.
“저번보단 낫네. 오늘은 그래도 사람 사는 방 같다.”
남조윤이 멋쩍게 목덜미를 만졌다.
성큼성큼 냉장고 앞으로 걸어간 어머니가 배불뚝이 짐가방을 내려놨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지퍼 팩에 꽉꽉 눌러 담아 온 반찬들이었다.
“멸치 볶은 거 하고, 마늘종 장아찌 담은 거 하고 이것저것. 다 오래 놔둬도 괜찮은 거니까 좀 챙겨 먹어. 컵라면 같은 거나 뜯어먹지 말고. 어? 사람처럼 좀 살아라, 사람처럼.”
“잘 먹고 살아요. 나이가 몇인데.”
“어이구. 너 어떻게 사는지 내가 안 봐도 훤하다, 훤해. 금치산자 같은 놈.”
어머니가 가자미눈을 하고서 냉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멈칫했다. 이미 마른반찬이 든 통 몇 개가 들어있었다.
“웬일이냐, 냉장고에 사람 먹을 게 다 있고? 어디서 난 거야?”
“아, 그거. 같이 일하는 동생이 나눠준 거예요.”
남조윤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동시에, 그녀의 눈이 반찬 통에 붙은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먹어요, 굶지 말고]
“여자냐?”
“남자요.”
혹시나 하고 기대하던 표정이 폭삭 내려앉았다.
벌떡 일어난 어머니가 남조윤의 등짝을 후려쳤다.
“못산다, 못살아. 얼마나 사는 게 딱해 보였으면 남자가 남자한테 반찬을 다 챙겨주냐!”
비좁은 원룸 방에 한참이나 찰싹거리는 소리가 터졌다.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후에야, 그녀가 말했다.
“어쨌든 고맙네, 그 동생. 언제 한번 집에 데리고 내려와. 고기 구워줄 테니까.”
“물어볼게요.”
남조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그머니 등을 문지르면서.
다시 냉장고 앞에 앉은 어머니가 반찬들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너 그, 여름에, 정효원인가 하는 배우랑 같이 찍는다고 했었던 영화는 아주 안 하는 거지?”
“사정이 있어서. 그건 한참 전에 그만뒀어요.”
“그놈의 사정. 그 바닥엔 뭔 놈의 사정이 허구한 날 생기는지.”
어머니가 혀를 차며 말했다.
반찬 통을 냉장고 안에서 이리 옮겼다가, 저리 옮겼다가 하던 어머니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너, 이번 설에는 그냥 서울에 있어. 집에 내려오지 말고.”
남조윤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어머니가 재빨리 덧붙였다.
“너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 아니다. 아버지 때문에 그래.”
“아버지한테 무슨 일 있으세요?”
남조윤이 딱딱한 얼굴로 물었다.
어머니가 머뭇거리듯 몇 번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게 아니라, 아버지가 저번에 작은집 식구들하고 고모들하고 같이 술 먹다가, 말을 잘못했어. 너 큰 영화 찍고 있다고. 그 양반들이 너 요즘엔 뭐하냐고 하도 물어들 봐서, 술김에 그랬나 보더라.”
그 화상. 그놈의 술이 원수지.
중얼거리며,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너 집에 오면 극성맞은 양반들이 또 이거저거 물어보고, 결국 듣기 싫은 소리나 할 텐데. 뭐하러 그거 들으러 기차 타고 오냐. 설음식 싸서 보내줄 테니까 그냥 서울에 있어.”
어머니가 냉장고 문을 닫고 일어났다.
짧은 침묵을 깨고, 남조윤이 말했다.
“그거 대신 찍은 영화 있어요. 문제없으면 여름 전에 개봉할 거예요.”
“그래. 그놈의 사정만 없으면. 이번엔 어디 극장에서 상영한대냐. 아무리 바빠도 그건 가족끼리 같이 봐야지.”
“이번에는, 전국 영화관에서 다 볼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에 어머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국? 저기, 지방 영화관에도? 다?”
“아마도요.”
“웬일이래. 그, 여름에 그만둔, 그거만큼 큰 영화야?”
남조윤의 입이 살짝 열리다가, 멈칫했다.
짧은 침묵 끝에 그가 다시 말했다.
“영화 편집 끝난 후에, 확실해지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래. 그게 낫겠다. 아버지한테는 말 꺼내지 말고. 그 양반 또 혼자 기대하다가 실망···.”
어머니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남조윤이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해요.”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어머니가 다시 남조윤의 등허리를 철썩 때렸다.
“어차피 그만두지도 못할 거, 그냥 너 좋아하는 거 실컷 하고 살어. 밥만 안 굶고 살면 돼.”
퉁명스러운 말에, 남조윤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머니가 그의 등허리를 슥슥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좀 궁금은 하네, 어떤 영환지.”
***
평소처럼 미니밴에 올라타려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파에 얼어붙어 있던 세상이 녹는 중이었다. 목도리와 패딩으로 중무장하고 잔뜩 몸을 움츠리며 걷던 사람들이 한결 느슨해졌다. 입김도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흩어진다.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홍보팀 박 팀장이었다.
-자기, 회사로 출근할 거지?
“네. 왜요?”
-얼라이브 메인 포스터 도착했어.
“아.”
-로열패밀리 보도자료도 끝났고. 우리도 이제 전속력으로 달려야지.
“시간 참 빠르네요.”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내는 사이, 어느새 불쑥 다가와 있었다.
봄.
수확의 계절이.
< 정 실장 배우들은, 뭔가 좀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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