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 실장 배우들은, 뭔가 좀 (3) >
썩어가는 팔이 튀어나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건물 입구로 좀비들이 쏟아져나왔다.
옥상에서도, 부서진 유리창 너머에서도 좀비들이 뛰어내렸다.
생존자 일행이 아슬아슬하게 택배차에 올라탔다. 타이어가 부서진 콘크리트 위에서 헛돌았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쓰나미처럼 밀려온 좀비들이 생존자들을 덮쳤다.
“뭐하는 거야! 출발해!”
“빨리, 빨리! 빨리! 이러다 시발, 다 죽어요!”
고함, 비명, 그리고 좀비들의 괴성이 뒤엉켰다.
“장관이죠?”
제작 피디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이런 그림, 국내 작품 중에선 보기 힘들어요.”
양복을 입은 무리가 목을 쭉 빼고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얼라이브에 투자한, 또는 투자할 예정인 기업 측. 그리고 국내 콘텐츠를 수출하는 해외 세일즈 관계자들이었다.
“박진감 넘치네요. 이거 스크린으로 보면 기가 막히겠는데.”
“그죠? 음향 넣고, 리터칭 넣고 하면, 진짜 볼만하겠어요.”
“좀비 분장도 리얼하고. 확실히 돈 들인 티가 납니다.”
“개봉시기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랑 겹칠 것 같아서 겁났는데, 저 정도면 한번 부딪쳐봐도 되겠는데요?”
긍정적인 코멘트가 이어졌다. 제작피디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배우 캐스팅도 역대급, 시너지도 역대급입니다.”
모니터에는 생존자 일행이 좀비들과 사투를 벌이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담기고 있었다.
SBE 필름 홍보담당자 강민정이 거들었다.
“최성원 감독님 시나리오니까 저만한 멀티캐스팅이 가능하지, 어지간한 데선 돈다발을 흔들어도 라인업 저렇게 못 짜요. 아시죠?”
“배우들이야 말이 필요 없죠. 내로라하는 연기파 탑스타들인데.”
“티켓파워도 있는 배우들이고요.”
“포스터는 꼭 단체 샷이었으면 좋겠어요. 얼굴 잘 보이게 해서.”
제작피디와 홍보담당자가 자본주의의 미소를 지었다.
*
장시간 이어진 탈출 씬 촬영이 마무리된 후.
투자지원팀 직원들이 양복 무리를 상대하는 사이, 뒤로 물러난 제작피디가 미소를 싹 거두고 물었다.
“···텄네요. 이거 튼 거 맞죠?”
강민정이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씹었다.
“네. 반응이 나쁜 건 아닌데, 우리가 기대한 만큼도 아니네요.”
“아, 야단났네.”
제작피디가 곱슬머리를 쥐어뜯었다.
“대표님이 현장에서 저 양반들 혼을 쏙 빼놓으라고 하셨는데!”
“이 정도는 예상범위 안이었나 봐요. 현장감이 플러스알파가 돼줄 줄 알았는데, 좀비 백 명을 보고도 뜨뜻미지근할 줄 몰랐네요. 이런 반응이면 저 사람들한테 투자금 더 뽑아내긴 어렵겠는데요.”
“뭔가 다른 방법 없을까요? 이거 말곤 돈줄 다 말랐는데.”
“우리가 더 보여줄 만한 게··· 다음 씬은 뭐였죠?”
“24, 25번 씬이요. 이기환이랑 이송하, 그리고 무명인 등장씬.”
제작피디가 대답했다. 복잡한 한숨이 뒤따랐다.
강민정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시나리오를 빠르게 넘겼다.
곧, 그녀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치겠네.”
“그러게요.”
“이 씬에 나오는 무명인이 그, 그 배우 맞죠?”
“맞아요. 정선우 실장이 데리고 있는 신인.”
강민정이 시나리오를 덮고 다시 물었다.
“그 배우, 지금 뭐 하고 있어요?”
*
문이 활짝 열린 미니밴.
그 안에 심상찮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이송하가 미련이 흥건한 눈으로 보조석을 쳐다봤다. 정확하게는, 보조석에 앉은 남조윤을. 더 정확하게는, 남조윤의 손에 들린 스태프용 도시락을.
부담스러운 시선에 남조윤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그가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좀 드세요.”
“아니에요. 전 남의 밥은 안 뺏어 먹어요.”
거절하는 이송하의 표정은 침통했다.
남조윤의 도시락은 두툼한 떡갈비와 반찬들로 푸짐했다. 심지어 고슬고슬한 잡곡밥 위에 계란후라이도 얹어져 있었다.
힐끔, 이송하가 자신의 남다른 도시락통을 내려다봤다.
드레싱도 없는 닭가슴살 덩어리. 그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푸릇푸릇한 채소. 근 두 달째 보고 있는 식단 그대로였다. 고뇌에 잠겨있던 이송하가 슬그머니 말했다.
“그럼 서로 한 젓가락씩만 바꿔먹을까요? 제 거 닭가슴살 두 덩어리랑, 떡갈비 반의반 쪽···!”
“그냥 드세요. 어차피 남아요.”
이송하가 헛숨을 삼켰다.
“이게 남아요? 어떻게 이게 남아요?”
“많이 안 먹는 게 버릇이 돼서.”
남조윤이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송하가 그를 바라봤다. 남모르게 의식하던 시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둘도 없는 동지를 보는듯한 눈빛이었다.
탐욕스러운 젓가락이 떡갈비에 닿기 직전.
“어어, 안돼!”
스타일리스트가 재빨리 가로막았다.
“송하 너, 정 실장님한테 이른다. 빨리 네 밥 먹어.”
“이건 밥 아니에요.”
이송하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사료예요. 개도 이것보단 잘 먹을 거예요.”
“오늘 건 정 실장님이 직접 쌌다던데. 새벽에 일어나서.”
이송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 먹을 거면 줘봐, 맛 좀 보자.”
“제 거예요!”
허겁지겁, 이송하가 도시락통을 사수했다.
스타일리스트가 킬킬거렸다. 그리고 남조윤에게 속닥거렸다.
“저번에 둘이 스캔들 난 것 때문에 다른 생각 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데, 송하 쟤는 광신도에 가깝다고 보시면 돼요.”
“광신도요?”
“쟤가 믿는 사이비 종교 같은 거 있어요, 정선우 교라고.”
남조윤이 슬쩍 웃었다.
그때, 도시락을 신줏단지처럼 품고 있던 이송하가 눈을 깜빡였다. 아예 도시락에 코를 박을 것처럼 내려다보더니 대뜸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뭐야, 왜 그래, 또? 안 먹을 거야?”
이송하가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건드리면 하트모양이 찌그러지잖아요.”
“하트? 하트가 어딨어?”
“여기 잘 보세요. 여기부터 여기까지요. 하트모양.”
손가락이 비뚤비뚤한 동그라미를 그렸다. 닭가슴살을 감싸고 있는 채소의 모양이었다. 미묘한 표정으로 도시락을 살피던 스타일리스트가 남조윤을 바라봤다.
‘저게 하트로 보이세요?’하고 묻는 눈빛으로.
남조윤이 고개를 저었다.
“어때, 맛 괜찮아?”
불쑥, 정선우가 차에 올라타며 물었다.
이송하가 화들짝 놀랐다. 그 바람에 손에 들린 도시락이 크게 들썩거렸다. 허둥지둥 도시락을 내려다본 이송하의 얼굴이, 나라 잃은 사람처럼 허망해졌다.
“아, 나 얘 때문에 웃겨 죽겠네!”
스타일리스트가 배를 잡고 넘어갔다.
남조윤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정선우만 홀로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
“······정선우 실장 배우들은.”
흰색 미니밴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강민정이 말했다.
“긴장감이라곤 쥐며느리 오줌만큼도 없네요.”
“그러게요. 이 와중에 저 집만 무슨 소풍 나온 것 같네요.”
제작피디가 허탈하게 웃으며 동조했다.
“곧 감정 폭발하는 연기 할 사람들치곤, 지나치게 태평한데요.”
“이송하 씨야 금방금방 몰입하는 스타일인 거 아니까 그렇다 쳐도, 저 남조윤이라는 신인은 무슨 배짱으로··· 그것도 첫 촬영 날.”
강민정이 혀를 차며 결정을 내렸다.
“투자사들 데리고 자리 옮길게요.”
“네? 그래도 지금 상태론 투자 설득이···.”
“다음 씬, 촬영 결과에 따라서 나중에 편집시사 때 반 토막 날 수도 있는 씬이잖아요. 우리도 아직 확신 못 하는 무명배우 덥석 내보였다가 저 양반들 실망하면, 안 하느니만 못한 꼴 돼요.”
강민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다음 씬은 투자사한테는 안 보여주는 게 나아요.”
“다음 씬까지 보고 가면 안 될까요?”
투자사 관계자의 말에, 강민정의 미소가 깨졌다.
“팀장님, 다음 씬은 볼거리가 많은 씬은 아닌데요.”
“그건 들었는데, 그래도 좀 궁금해서요.”
그 한 명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상황이었다.
강민정이 찌푸려지는 미간을 겨우겨우 펴며 물었다.
“궁금·····. 뭐가요?”
“촬영 끝난 배우들이 안 가고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네?”
“다들 다음 씬까지 보고 간다던데요?”
강민정과 제작피디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촬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스타크래프트 밴과 승합차들. 그리고 디렉터체어 뒤에 모여서 최성원 감독과 얘기 중인 배우들이 보였다.
두 사람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24번 씬은 실내촬영이었다.
모니터에는 동선을 확인하는 이송하와 남조윤의 모습이 비쳤다. 촬영을 끝낸 배우들이 각자의 이름이 적힌 의자에 앉아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손에는 어디선가 조달해온 과자가 한 봉지씩 들려있다.
“시나리오 보고 생각했던 이미지랑은 좀 다르네.”
“이송하 쟤가 워낙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임팩트 덩어리라 저 배우도 그런 스타일 아닐까 했는데. 그냥, 평범한데요.”
“이송하 같은 물건이 막 굴러다니고 그러진 않지.”
빨래터 아줌마들 버금가는 수다에, 최성원 감독이 웃었다.
“다 왜들 이래요? 사람 부담스럽게.”
“앞부분만 슬쩍 보고 갈 거예요, 슬쩍. 어떤가만 보고.”
“좀 보자, 매너리즘에 빠진 늙은이가 자극 좀 찾아볼라고 그래.”
배우들이 의자에 엉덩이를 눌러 붙이며 말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는, 투자 관계자들이 속닥거렸다.
“남조윤? 이름은 낯설어도 얼굴 보면 아는 배울 줄 알았는데. 쌩판 처음 보는 얼굴이네.”
“대사도 꽤 있는 조연인데, 인지도가 너무 낮은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제가 아는 배우 중에도 훨씬 괜찮은 배우들이···.”
“촬영 끝나고 SBE 필름 쪽이랑 얘기 좀···.”
목소리에 마뜩잖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 대화를 훔쳐 듣던 제작피디와 강민정이 답답한 한숨을 쉬었다. 주위를 둘러본 강민정이 자리를 옮겼다.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서 있는 남자 옆으로.
“정 실장님. 보는 눈이 많아요.”
“그래 보이네요.”
정선우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송하 씨는 걱정 안 해요.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거 알고, 이 영화에 매달려서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도 봤으니까. 그런데 남조윤 씨는 걱정되네요.”
강민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믿고 봐도 되겠어요?”
“이 영화에 매달린 건, 두 사람 다 똑같습니다.”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한번 믿어봐 주세요.”
제각각 다른 생각을 품은 시선들이 모니터로 모였다.
마침내, 슬레이터가 부딪쳤다.
*
거실은 아수라장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아이가 코를 훌쩍였다. 여고생 이연우가 곁눈질로 아이를 살폈다. 그러는 동안에도 손은 욕실 문앞을 가로막은 것들을 치우고 있었다.
문틈으로, 꺼져가는 촛불처럼 희미한 남자의 목소리가 새나왔다.
「···현관문이 고장 나는 바람에 숨을 곳이 여기밖에 없었어요.」
「처음엔 안에서 소리가 들리길래 괴물 가둬놓은 건 줄 알았어요.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혼자 버려두고 다들······.」
「사지 멀쩡한 사람도 목숨이 간당간당한데, 다친 사람까지 데려가 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휘청거리던 목소리에 서서히 힘이 실렸다.
「버틸만했어요. 욕실이라 변기도 있고, 세면대에 물도 나오고. 사람들이 먹을 것도 좀 넣어주고 갔거든요.」
이윽고 욕실 앞이 말끔해졌다. 이연우가 문고리로 손을 뻗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흠칫 놀란 이연우가 뒷걸음질 쳤다. 어두운 욕실 입구에, 목소리만 들리던 남자가 서 있었다.
「이대로 죽는 줄 알았는데.」
남자가 웃었다.
지옥에서 구원받은 사람처럼 환하게.
좀비들이 모조리 밖으로 몰려나간 덕분에 복도는 조용했다.
이연우가 앞장섰다. 한쪽 팔로는 아이를 끌어안고, 어깨에는 라면이나 햄 통조림 같은 먹을 것과 생필품을 꾸역꾸역 쑤셔 넣은 가방을 멘 채로.
남자는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그 역시 묵직한 가방을 짊어지고 있었다.
침묵이 깨진 건, 복도 너머에서 인기척을 발견했을 때였다.
「아저씨!」
「어, 연우야! 너 왜 여기, 너도 여기 남아 있었어?」
단단한 체격의 삼십 대 남자, 장태영이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등 뒤에는 젊은 여자가 어깨를 움츠리고 달라붙어 있었다.
「저는 진주 데리고 도망치다가, 안 되겠어서 숨어있었어요. 아저씨는요?」
「난 위층에서 다른 생존자를 발견해서 구하느라고.」
「저도 찾았어요. 여기···.」
문득 장태영이 고개를 돌렸다.
옷자락을 꽉 붙들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그를 놓치면 큰일 나기라도 할 것처럼 등 뒤를 바짝 따라오던 여자가 새파란 얼굴로 멈춰서 있었다. 뭔가 두려운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저, 저 사람···! 저 사람이에요, 제가 말한 그 미친놈!」
떨리는 손가락이 이연우 뒤에 선 남자를 가리켰다.
「사람 죽인 놈이라구요! 우리가 가둬놨는데······!」
당황한 장태영이 머뭇거린 순간.
그리고 남자의 입꼬리가 실쭉 올라간 순간.
이연우가 벼락같이 움직였다. 들고 있던 가방을 던지고 아이만 안은 채로 뛰었다. 겨우 다섯 걸음이었다. 순식간에 이연우를 따라잡은 남자가 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억눌린 신음이 터졌다.
「미친놈은 아니었는데.」
경악한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남자가 말했다.
「이런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일도 일어나니까. 그런 거였지.」
「연우야! 너 뭐야, 그거 안 놔!」
가까스로 경악에서 벗어난 장태영이 달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남자가 가방을 휘둘렀다. 복도 옆 유리창이 산산이 부서지며 유리 조각이 쏟아졌다. 이연우가 몸을 웅크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장태영이 다시 멈칫한 찰나.
남자가 이연우의 품에서 뜯어내듯이 어린아이를 빼앗았다.
끄윽끄윽. 겁에 질린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이의 멱살을 붙잡고 창문턱에 앉히며, 남자가 말했다.
「좁아터지고, 축축하고, 컴컴한 곳에 오래 갇혀있었더니··· 지금은 정말로 미친 것 같기도 하고. 밖에 나왔는데도 아직도 그 안에 있는 것처럼 숨통이 조이는 게.」
화가 난 표정은 아니었다.
위협하는 것도, 비웃는 것도 아니었다. 겉보기에 남자의 표정은 조금 전과 똑같아 보였다. 일상에 속해있는 듯한 편안한 분위기. 하지만 분명 달랐다. 목소리가, 눈빛이, 남자의 모든 것이 꺼림칙했다.
뒷걸음치던 젊은 여자가 홱, 뒤돌아 도망쳤다.
남자가 뻥 뚫린 창문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1층까지 내려가는 데 얼마나 걸리지? 한 삼십 초면 되나?」
「뭐?」
「삼십 초 후에 던집니다. 빨리 뛰면 받을 수 있겠네.」
「지금 무슨!」
「하나, 둘, 셋···.」
남자가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여섯을 넘어 일곱이 됐을 때, 억센 손아귀에 붙들린 채 발버둥 치던 이연우가 소리쳤다.
「가세요! 아저씨, 빨리 가요!」
「젠장!」
다가오지도, 돌아서지도 못하고 갈등하던 장태영이 일그러진 얼굴로 등을 돌렸다.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이제 복도에 남은 건 이연우와 남자, 눈물 콧물을 흘리며 끅끅거리는 아이뿐이었다.
남자가 헤아리는 숫자가 이십을 넘어섰다.
이연우가 달려들고, 매달리고, 빌기까지 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남자의 입에서 결국 삼십이라는 숫자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장태영은 건물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남자가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생각보다 달리기가 느리네.」
「하지 마세요, 잠깐, 조금만 더···!」
이연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서럽게 울음을 참는 어린아이를 툭, 떠밀었다.
*
홍보담당자, 강민정이 주춤 걸음을 물렸다.
그제야 주위가 눈에 들어왔다.
시야가 넓어지고, 어디선가 꿀꺽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최성원 감독은 반들거리는 눈으로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부스럭거리던 과자봉지 소리는 한참 전에 멎었다. 이야기를 주고받던 배우들도 입을 다물었다.
투자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홀린 듯이 모니터를 바라봤다. 불 꺼진 영화관 안에서 스크린을 보는 관객들처럼.
흑백 같은 공간. 선명하게 움직이는 건 정선우 실장뿐이었다.
그는 관찰하듯이 사람들의 반응을 눈에 담고 있었다.
강민정이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쉬었다.
“실장님. 남조윤 씨요.”
“네.”
“영화 개봉하기 전에 기자랑 인터뷰 안 하셨으면 해요.”
그가 강민정을 돌아봤다.
“···인터뷰요?”
“홍보용 보도자료에서도 뺄 거고, 예고편에도 안 넣을 거예요.”
천천히, 정선우 실장의 입 끝이 위로 올라갔다.
강민정이 마른 침을 삼키고 말했다.
“저 배우. 관객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스크린에서 처음 봤으면 좋겠어요.”
< 정 실장 배우들은, 뭔가 좀 (3)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