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 실장 배우들은, 뭔가 좀 (1) >
“하이, 큐!”
“네! 화려한 캐스팅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최성원 감독의 신작! 한국형 블록버스터 재난영화 ‘얼라이브’가 며칠 전에 크랭크인 했죠. 위클리연예에서 그 따끈따끈한 현장을 찾았습니다. 지금부터 주인공 배우들과 직접 인터뷰를···!”
“피디님! 피디님!”
조연출이 영화 스텝들 사이로 헐레벌떡 뛰어오며 소리쳤다.
“야야, 오프닝 찍는 거 안 보여?”
“피디님, 이기환이 인터뷰 못 하겠대요!”
“뭐?”
날벼락에 위클리연예 촬영팀이 발칵 뒤집혔다.
곧 담당 피디와 리포터가 주연 배우의 매니저에게로 달려갔다.
덩치가 산만한 이기환의 담당 매니저가 혀를 차며 말했다.
“오늘 촬영 씬 변경된 건 아시죠? 근데 그 씬이 출연진들 감정 씬이거든요. 기환이가 인터뷰하다가 몰입하고 있는 거 깨지면 안 돼서.”
“팀장님, 그럼 촬영 끝난 이후에···!”
“밤 씬도 있는데 언제 끝날 줄 알고요. 다음에 오시면 꼭 인터뷰해드릴게요.”
“저희 내일 생방이에요! 갑자기 이러시면 방송 펑크나요!”
“어차피 다른 배우분들하고도 인터뷰하실 거잖아요.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매니저가 제작진을 떨치고 자리를 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제작진이 황급히 다른 매니저들을 찾았다.
“이기환 씨가 인터뷰 안 한 대요? 그럼 저희도 못할 것 같은데.”
“저희 누나도 집중하셔야 하는 씬이라. 지금 말도 못 걸어요.”
“다른 주연들 다 한다고 해서 저희도 오케이 한 건데, 이러면 좀.”
줄줄이 이어지는 거절에, 담당 피디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리포터를 비롯해 카메라감독, 조명감독이 모여서 웅성거렸다.
“더러워서, 진짜. 아무리 탑스타들이래도 그렇지. 당일에 이러는 게 어딨어? 외주 제작사라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이래갖고 내일 방송 나가겠어? 아이템 바꿔야 하는 거 아니야?”
“당장 내일인데? 자료로 발라서 어떻게든 내보내야지.”
“알티 이십 분짜리 꼭지를 어떻게 자료로 다 메꿔!”
“조감독한테 배우들 좀 설득해봐 달라고 하면 안 되나?”
“턱도 없을걸요? 엄청 바빠 보이던데.”
위클리연예 제작진이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때.
“이송하 씨 분장 수정 끝났답니다! 의상팀 체크 부탁드려요!”
무선 인터컴을 낀 스텝 한 명이 뛰어가며 외쳤다.
리포터가 득달같이 말했다.
“우리 이송하 씨한텐 아직 안 까였지?”
“이런 분위기면 그쪽도 안된다고 할 거 같은데.”
“그래도 이송하 정도는, 인터뷰해주지 않을까요? 신인이잖아요.”
조연출의 말에 담당 피디가 혀를 찼다.
“이송하 정도는? 급에선 밀려도 지금 화제성은 걔가 제일 높아. 고양이 수호령 한류열풍 두 달째다. 드라마 끝났는데도 중국 애들 난리라고. 이제 예전의 이송하가 아니야, 임마.”
“소문에는 막 곤조 부리고 그런 스타일은 아니라던데.”
“뜨기 전에야 다 그렇지. 뜨고 나면 열에 아홉은 싹 변한다.”
“어쨌든 가서 비벼라도 보자. 이대로 허탕 치고 갈 수는 없잖아.”
위클리연예 제작진이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다시 움직였다. 그들이 촬영장 한편에서 이송하가 타고 있다는 하얀색 미니밴을 발견했을 때였다. 운전석 문이 열리더니 남자 한 명이 내렸다.
“어, 저 사람 정선우 실장 맞죠?”
“맞아. 맞는데······.”
촬영 감독이 정선우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삭막하네. 인터뷰 얘기 꺼내자마자 까일 것 같은데.”
“아니, 꺼내보지도 못하고 까일 것 같은데요.”
“저 실장, 유명한 거에 비해서 경력은 별로 안 됐지? 나이도 아직 서른도 안된 것 같은데. 어째 다른 배우들 팀장, 이사급보다 저쪽이 더 좀, 그렇다.”
“그지? 말 걸기 부담스럽지? 왠지는 모르겠는데 부담스러워.”
쌀쌀한 인상 때문인지, 아니면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미다스의 손이라는 별명으로 언론에 오르내리던 인물이라서인지. 정선우에게는 다른 매니저들하고는 다른, 기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야 담당 피디가 걸음을 옮겼다.
“실장님! 미리 연락드렸던, 위클리연예 이철준 피딥니다.”
“아. 안녕하세요. 다른 배우들은 인터뷰 다 캔슬했다고 하던데.”
담당 피디가 입술을 깨물었다.
“좀, 저희가 인터뷰는 오 분 내로 끝낼 수 있으니까, 어떻게···.”
“송하 인터뷰만 나가는 겁니까?”
태연한 물음에, 담당 피디가 눈을 크게 떴다.
“이, 인터뷰 가능하세요?”
“가능해야죠. 약속한 건데.”
“감사합니다! 진짜 이거 엎어야 하나 싶었는데···!”
담당 피디가 구명줄을 잡은 얼굴로 제작진들에게 손짓했다.
금방 리포터와 조연출, 그리고 스텝 몇 명이 모였다. 그들이 부랴부랴 카메라와 조명을 꺼내는 동안.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있던 정선우가 말을 꺼냈다.
“그런데 송하 인터뷰 하나로 분량이 되시겠어요? 이십 분짜리 코너로 알고 있는데요. 촬영장면은 유출금지라 지금은 방송으로 못 내보내실 거고, 쓸 수 있는 그림은 현장 스케치 몇 컷일 텐데.”
“그건, 꼭지 알티를 좀 줄이든가 해서···.”
“이렇게 된 거, 아예 포커스를 송하한테 맞춰보시는 건 어떠세요.”
한숨을 토하던 담당 피디가 고개를 홱 들었다.
“네?”
“그럼 인터뷰 시간 최대한 빼 보겠습니다. 넵튠이나 한류 관련 자료는 저희 쪽 홍보팀 통해서 바로 보내드릴 수 있고. 최성원 감독님은 힘들어도, 스텝 몇 분한테 코멘트 부탁하는 것도 가능하고요.”
담당 피디의 눈이 빠르게 좌우로 굴러갔다.
곧, 급히 통화를 마치고 온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 자막으로 이송하 씨 이름 대문짝만하게 박아 놓겠습니다.”
“그거 좋네요.”
정선우의 입 끝이 길게 올라갔다.
“어어, 피디님! 피디님! 저기요, 저기!”
조연출이 호들갑을 떨며 담당 피디를 불렀다. 또 무슨 큰일인가 싶어 돌아본 피디가, 멈칫했다.
호들갑이 터질만했다.
옆에서 카메라 감독과 조명 감독이 혀를 내둘렀다.
“어우야, 저거만 찍어 내보내도 이 꼭지 시청률은 걱정 없겠다.”
“이래서 이송하 촬영한 감독들이 이송하 이송하 하는구만.”
“배우는 배우네. 죽인다, 진짜.”
정선우 실장의 뒤꽁무니를, 이송하가 타박타박 따라왔다.
반만 묶은 생머리가 바람결에 흩어진다.
화장기 하나 없는, 하지만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 외모. 회색 리본 넥타이와 빳빳한 흰색 블라우스. 얌전하게 단추를 채운 재킷과 H라인 교복 스커트.
정선우 실장이 멈춰 서자, 등 뒤에서 나온 이송하가 웃었다.
“안녕하세요, 이송합니다.”
“알죠, 이송하 씨! 교복이 진짜 위험할 만큼 잘 어울리네요.”
리포터가 친근하게 웃으며 와이어리스를 내밀었다.
“오랜만에 입어서 좀 어색해요.”
“이번에 어떤 역할인지 소개부터 부탁드려도 될까요?”
“여고생 이연우고요. 엄격하고 권위적인 집안에서 자란, 어, 요조숙녀예요. 체조선수가 꿈이었는데 부모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그만둔. 어느 날 갑자기 좀비들이 출몰하고 재난상황이 벌어지면서,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는, 그런 역이에요.”
“이연우 역을 소화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하셨을 것 같은데, 힘들었던 게 있다면···.”
돌연 이송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눈빛이 음습하게 가라앉았다.
“끔찍했어요. 중국에서 귀국하고 거의 한 달 반 동안.”
리포터가 덩달아 심각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군것질을 하나도 못했어요.”
“네?”
“먹고 싶은 것도 하나도 못 먹었고. 트레이너 선생님이 체조선수 몸 만들려면 근육량 늘려야 한다고 식단을 짜주셨는데, 사람이 먹을 게 아니었거든요. 원래 차 글로브 박스에 과자 채워놨었는데 그것도 다 뺏기고. 배고프고 눈물 나서 밤에 잠이 안 왔어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이송하는 물기가 번지는 눈으로 먼 곳을 바라봤다. 리포터가 떨떠름한 얼굴로 이송하를 위로했다. 촬영 감독이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그 모습을 촬영했다.
몇 차례 인터뷰 질답이 더 이어지고, 리포터가 떡밥을 던졌다.
“이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분들이 정말 많은데, 혹시 이송하 씨가 특별히 더 신경 쓰시는 분이 있나요?”
“네. 있어요.”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리포터와 담당 피디는 눈을 마주치며 소리 없이 쾌재를 불렀다. 신경 쓰이는 배우가 있다. 시청자들이 관심 가질 수밖에 없는 떡밥이다. 여배우면 여배우대로, 남배우면 또 그것대로 좋은.
“혹시 누군지···.”
입을 열던 이송하가 갑자기 멈칫했다.
그리고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는 정선우를 바라봤다. 피디에게 양해를 구한 정선우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송하가 와이어리스에 잡히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뭔가 말했다.
곧 정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피디님, 죄송한데 이 질문은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우리가 뭐 자극적으로 엮고 그럴 건 아닌데.”
“생각하시는 것 같은 유명배우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정선우가 묘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 배우는 아직 첫 촬영 전이라. 이런 식으로 언급하는 건 좀, 시기상조라서요.”
*
ENG 카메라가 자리를 옮겼다.
촬영현장은 낡은 빌라 앞이었다. 건물 주변에는 CG 작업을 위한 대형 블루스크린이 세워져 있었다.
백 명이 훌쩍 넘는 스텝들과 보조출연자들이 북적거렸다.
“보조출연자들 좀 찍어줘요, 감독님. 저거 좀비 분장한 사람들.”
“겁나 리얼하네. 밤에 보면 기겁하겠다.”
얼굴 피부가 너덜너덜하게 뜯어져 근육이 다 보이는 사람도, 내장을 줄줄 흘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들 촬영 전에 셀카를 찍으며 인증샷을 남기느라 바빴다.
“저거 실리콘 덮고 특수분장하는데 한 명당 거의 다섯 시간씩 걸린대요. 솔직히 한국형 좀비 영화라길래 또 할리우드 짝퉁 하나 나오는구나 했는데, 저거 보니까 좀 기대되네요.”
제작진이 속닥거리고 있을 때.
목에 인터컴을 얹은 조감독이 다가왔다.
“촬영장면은 찍으시면 안 됩니다. 아시죠?”
“알죠. 현장은 촬영 준비하는 풀샷만 따고, 이송하 씨 연기할 때 스텝반응만 살짝 찍겠습니다.”
“방해만 안 되게 해주세요. 오늘 중요한 촬영이라서.”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지금 시작하는 씬에는 이송하 씨가 얼마나 나옵니까? 편하게 인터뷰해주신 거 보면 큰 부담 없는 씬인 것 같긴 한데.”
“네?”
조감독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닌데. 이거 이송하 씨가 제일 중요한 씬이에요.”
“인터뷰도 안 해주는 것들 보고 감탄하기 싫은데, 대단하긴 하다.”
“탑스타들만 모아놓으니까 박력 끝내주네. 저걸 찍어야 되는데.”
위클리연예 제작팀이 속닥거렸다.
지저분하게 깨지고 부스러진 시멘트 바닥 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탑스타들이 촬영용 분장과 의상을 갖추고 연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막말로 우리도 제 몸 지키기 힘든 판에, 애를 구해서 어쩔건데!”
“그래서 버리고 가자구요? 애가 울잖아요! 저러다 죽어요!”
누군가는 고함을 지르고, 누군가는 안타까운 눈물을 흘렸다.
급기야 일행 사이에서 멱살잡이까지 벌어진다. 난장판이었다.
거대한 블루스크린과 인공적인 세트가 설치된 공간.
수많은 카메라와 스텝. 호기심 가득한 구경꾼들로 둘러싸인 상황.
극에 몰입하기 어려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연기가 현실감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카메라 렌즈가 그 숨 막히는 장면을 원 테이크로 쫓았다.
“······저건 좀, 인터뷰 못 할 만한데요. 진짜로 다 감정씬이네요.”
“근데 이송하 씨만 감정씬이 아닌가. 혼자만 너무 조용하네.”
“분명 비주얼은 최곤데, 저 사이에 끼어있으니까 좀 묻히네요. 관록이 부족해서 그런가.”
이송하는 과격하게 움직이는 배우들 사이에서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얌전하게 곧은 자세로. 두 눈을 살짝 내리깐 채.
극중 설정에 맞는 모습이긴 했다.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온실 속 화초. 하지만 지나치게 침착하다. 재난과 분쟁에 둘러싸인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치 이송하만 한 걸음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송하 씨 중요한 씬이랬는데, 저걸로 괜찮나?”
“배역이 저런 배역인 거 아니에요?”
“그래도 존재감이 너무 없잖아. 지금 이송하, 차기작에서 뭐 좀 보여줘야 하는 타이밍 아냐?”
“그렇지. 그래야 원히트 원더니, 거품이니, 고양이 수호령 인생연기니 하는 소리가 더는 안 나올 건데. 저건 좀······ 연기가 잘 안 되나? 혹시 우리랑 인터뷰한 거 때문에 몰입 못 하는 거 아니야?”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제작진이 힐끔 정선우 실장을 쳐다봤다. 그리고 혼란에 빠졌다. 지금 누구보다 더 걱정하고 있어야 할 사람인데도, 정선우의 표정은 태연스럽기만 했다.
그는 오히려 웃으면서 이송하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 다시 누군가의 노성이 터졌다.
“누군 사이코패스라 그냥 가자고 하는 줄 알아? 저 빌라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4층에 있는 애를 어떻게 구해올 건데!”
“그건, 일단 계획을 세워보고···!”
흥분한 사람들 속에서, 남자 단역배우 한 명이 떨어져나왔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어간 곳은 이송하의 옆이었다. 그가 슬그머니 이송하의 어깨를 끌어안듯 감쌌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데 상황파악들을 저렇게 못 하나. 아, 학생은 걱정하지 마. 내 옆에 딱 붙어있으면 위험한 일 없을테···.”
“제가 갈게요.”
상황에 맞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흥분한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여고생 이연우가 말했다.
“저 애, 데려올게요.”
“학생 미쳤어? 저 안에 지금 괴물, 좀비, 하여튼 그것들 천지야!”
남자를 부드럽게 밀어낸 이연우가 갑자기 교복 재킷 단추를 끌렀다. 조끼까지 한꺼번에 벗어놓고 리본 넥타이도 풀어 그 위에 얹는다. 그리고 반절만 묶인 생머리를 풀고, 다시 하나로 높이 올려 묶었다.
“칼 좀 빌려주세요.”
“어? 이, 이거?”
또 다른 단역 배우가 당황한 얼굴로 들고 있던 칼을 내민다.
이연우가 칼을 교복 치마 속으로 집어넣었다. 오른쪽부터, 허벅지를 감싸는 H라인 치맛자락이 위로 부욱 찢어졌다. 왼쪽도 마찬가지였다. 망설임 없는 칼질 몇 번에 뽀얀, 하지만 탄력 있는 허벅지가 훤히 드러났다. 주변의 술렁임이 커졌다.
칼을 되돌려주고 이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결심이 선 눈빛이, 빌라의 4층에서 멈췄다.
“제가, 안에 안 들어가고 데려올 수 있어요.”
< 정 실장 배우들은, 뭔가 좀 (1)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