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35화 (135/218)

< 뒤끝이 길면 (5) >

환각처럼, 눈앞에 찬란한 조명이 부서져내렸다.

어느새 남자는 내 코앞까지 와 있었다. 우뚝한 콧날 아래 보기 좋은 입술이 벌어졌다.

“신인배우 송인호입니다.”

그 목소리다.

서럽게 울먹이던, 그 목소리.

“스물두 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올해 본 신인 중에 제일 잘생겼네. 딱 2팀장님 취향이다.”

웃으며 말한 박 팀장이 다시 내 등을 눌렀다.

“자기가 보기엔 어때? 잘될 것 같다고 한마디 해줘. 한창 주가 높은 미다스의 손인데. 남들 다하는 덕담이라도, 자기 입에서 나오면 또 기분이 남다르지 않겠어?”

“······네. 잘될 것 같네요.”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머릿속엔 폭탄이 떨어졌는데도.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열심히 해서 신인상 한번 타봐! 기사로 펌프질 끝내주게 해줄 테니까.”

박 팀장과 송인호가 화기애애하게 떠들었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머릿속에는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조금 전에 본 미래. 정확히는,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던 송인호.

지저분한 노이즈와 메이크업 때문에 확실할 순 없지만, 지금 저 얼굴과 똑같았다. 먼 미래는 아니다.

신인상이었을까?

올해? 아니면 내년?

뱃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내가 간절히 보고 싶은 건 내 품에 있는 사람들의 미랜데. 넵튠의 앞날. 이송하 차기작의 성패.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보고 싶은 건, 남조윤이 배우로서 성공하는지.

내가 원하는 미래는 그런 것들인데.

왜 생판 처음 보는 신인이 성공하는 모습이 보인 걸까.

그것도 하필 2팀장이 뽑은 신인을.

이 정보를······ 대체 어떻게 사용하지?

*

“결과를 가져와 봐.”

기자들과 인터뷰를 끝내자마자, 3팀장이 나를 야외 흡연실로 불러서 말했다.

“결과요?”

“너 침 발라놓은 그 배우 말이야. 남조윤.”

머리가 다시 어지러워진다. 생각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3팀장이 계속 말했다.

“지금 최성원 감독 작품 조율 중인 거, 배역 비중은 고만고만할 것 같댔지? 상업영화에선 신인이니까 그것도 괜찮아. 단 한 씬이어도 임펙트만 있으면 돼.”

그가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말했다.

“본부장님 얘기론, 대표님이 그 친구한테 관심이 생기신 거 같댄다.”

백한성 대표가?

“혹시 계약···!”

“김칫국부터 때려 붓진 말고.”

3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2팀장이 이번에 새로 뽑은 애들 있잖냐. 이효림인가 하는 여자애랑 송, 송인, 뭐였는데.”

“송인호요.”

“그래, 걔. 2팀장은 걔들이 남조윤보다 훨씬 낫다고 했다는데. 너랑 2팀장이랑 의견이 갈리니까 궁금하신가 봐. 누구 안목이 더 믿을만한지.”

“···안목이요.”

“그래, 안목.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제일 중요한 거 아니냐. 신인배우 뽑는 거야 2팀장 그놈 소관이지만, 그놈이 뽑은 애보다 네가 먼저 결과 가져오면, 그놈도 찍소리 못할걸?”

입 끝을 쭉 올리며 웃은 3팀장이 말을 이었다.

“이거 얘기하는데 본부장님이 아주 재밌어죽으려고 하더라. 금방 회사에 소문 쫙 퍼질 분위기다. 내기판까지 생길지도 몰라.”

그러면서, 3팀장이 나를 바라봤다.

“뭐, 솔직히 나도 궁금해. 남조윤 프로필 몇 번이나 봤는데, 난 모르겠더라고.”

그가 내 어깨를 툭 친다.

“그래도 정선우 안목이면, 덮어놓고 한 번쯤 믿을 만하니까.”

갈증이 난다.

침을 삼켰다. 그래도 목구멍은 여전히 텁텁하다.

“그러니까 결과 가져와. 그럼 너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어떡할까.

홀로 남아, 네온사인으로 범벅된 도시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송인호가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건 확실하다. 그게 신인상이든 아니든, 성공적인 결과다. 그런 자리에 초대받지도 못하는 배우들이 부지기수니까.

내가 미래를 바꾸지 않는다면, 현실에서 그 장면을 보게 되겠지.

남조윤은 어떻게 될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로 자욱한 남조윤의 미래에는 뭐가 있을까.

남조윤에게 시나리오를 건넬 때까지만 해도 의욕에 불탔는데.

지금은 발밑이 흔들린다. 내가 남조윤에게서 발견한 것을, 최성원 감독이 화면에 담아줄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상을 남길 수 있을까.

만약 안된다면. 내 눈이 틀린 거라면 어쩌지.

그래서 남조윤의 미래가 안 보이는 거라면?

이번 영화도 잘 안된다면?

2팀장은 그것 보라며 콧대를 세우겠지. 송인호가 상까지 받게 되면 더 할거고.

백한성 대표가 남조윤에게서 관심을 거둬버리면, 또다시 기회가 올까. 내가 W&U에서 남조윤을 담당할 가능성은 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

내 속에서 무언가가 싹을 틔우고, 깊숙한 곳까지 뿌리를 내린다.

내가 가진 정보를 어떻게 사용해야 나한테 이득이 될까.

미래를 어떻게 바꾸는 게 최선이지?

만약. 만약에, 내가 송인호를 가로채면.

신인은 두 명이니까. 무슨 수를 쓰든 2팀장이 여자배우 쪽에 집중하도록 판을 짜놓고······. 아니면, 송인호가 앞으로 하게 될 작품을 어떻게든 내 손에 넣으면 어떨까. 그걸 남조윤한테 주면.

그럼 미래의 그 시상식에서 소감을 말할 사람이, 남조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순간 번쩍, 정신이 들었다.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선뜩하다. 손가락 끝까지 뻣뻣했다.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

“형, 누구 협박해 본 적 있어?”

리모컨을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물었다.

소파에 앉아 성경책 두께의 책을 읽고 있던 형이 대꾸했다.

“글쎄. 그건 왜?”

“만약에 형이 누굴 협박하면 어떤 느낌일 것 같아?”

형이 책에서 시선을 뗐다.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든 놈이 갑자기 쳐들어오길래 이상하다 싶었는데. 너 무슨 일 있구나.”

“누구 협박하면 어떨 것 같으냐니까.”

“음. 그야 좋은 느낌은 아니겠지.”

나는 리모컨을 러그 위에 던져놓고 머리를 쓸어넘겼다.

“사람 협박하는 게 별로 어렵지도 않고, 협박해서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는 게 아무렇지도 않으면. 그리고 뭔가를 해결해야 할 때 수단방법 안 가리는, 극단적인 방법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면. 그럼 좀 위험한 거지?”

“왜. 너 누구 협박했어?”

“나, 몰랐는데 뒤끝도 길더라고. 오늘 사람 하나 반쯤 잡았어. 나한테 한 번만 봐달라고 매달리는데 뒤도 안 돌아보고 왔거든. 그런데 그런 게, 쉬워. 아무렇지도 않아.”

머리를 잡고 거칠게 헝클었다.

“나 이러다가 나중에 나쁜 놈 될지도 몰라. 쓰레기 같은 놈.”

“할머니가 그랬는데!”

불쑥,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더니, 네쌍둥이가 커다랗고 말간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다.

“할머니가, 뭐?”

“삼촌 중학생일 때 우리가 갑자기 뚝 떨어져서, 삼촌이 우리 키우느라 바빠서 나쁜 길로 안 빠지고 바르게 큰 거라고! 우리 아니었으면 삼촌 개망나니로 컸을지도 모른댔어!”

“개망······ 할머니가 그랬어?”

“할아버지도 우리보고 복덩어리들이라 그랬어! 효자래!”

“아. 할아버지도?”

다닥다닥 붙은 머리통 네 개가 동시에 끄덕거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래에 대한 걱정과 막연한 불안감으로 위가 쓰렸는데. 지금은 다른 의미로 충격적이다.

“형, 내가 그런 놈이었어? 나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얌전한 편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얌전하진 않았지.”

형이 두꺼운 뿔테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성악설이야? 애초에 나쁜 놈이 될 싹이었다거나, 그런 거야?”

“뭐가 문제야.”

형이 내 헝클어진 머리를 만졌다.

나랑 닮은 곳이라곤 하나도 없는 눈이 부드럽게 휘어진다.

“나쁘게 안 컸고, 앞으로도 그렇게 안되면 돼.”

악몽을 꿨다.

명확하게 기억나지도 않는. 찝찝함만 남아있는 악몽.

이불 안에서 한숨을 내뱉었다.

몇 시지? 비행기 타려면 일찍 준비해야 하는데.

핸드폰을 찾아 손을 더듬거리는데, 이불의 촉감이 낯설다. 내 이불은 이렇게 부드럽지도, 좋은 냄새가 나지도 않는데. 이건 마치 바로 어제 햇빛 아래에서 따끈따끈하게 말린 듯한 이불이다.

이불 밖에서 앳된 어린애들 말소리가 들린다.

아. 나 형 집에 왔지, 참.

“그리고요, 누나. 저희 삼촌은 계란말이 달인이에요. 되게 잘해요!”

“맞아, 먹어보셨어요? 엄청 큰데!”

“부침개도 잘해요! 근데 이제 잘 안 해줘요, 귀찮다고.”

“맞아. 우리 초등학생 되고 나서 애정이 식었어.”

저놈들이 지금 뭐 하는 거지?

이불을 걷었다. 침대 아래, 익숙한 머리통 네 개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내 핸드폰을 가운데 두고. 뽀얗게 젖살이 덜 빠진 뺨을 씰룩거리면서 뭐라고 떠들어댄다.

그리고 애들 목소리 틈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드문드문 섞였다.

“뭐하냐.”

묻자마자, 애들이 펄쩍 뛰었다.

“삼촌! 일부러 받은 거 아니야!”

“계속 소리 나길래 알람인 줄 알고 끄려고 했는데 전화였어!”

“언니들이랑 인사만 하고 삼촌 깨워서 바꿔주려고 했어! 근데 어쩌다 보니까 얘기가 길어진 거야!”

“우리도 네 명이고 누나들도 네 명이라 대화가 잘 통해서!”

대체 무슨 헛소리들이지.

“가져와 봐.”

일어나 앉으며 손을 뻗었다. 겨울이가 넙죽 핸드폰을 내민다.

화면을 쳐다보자마자 네 쌍의 눈과 마주쳤다.

“깜짝이야.”

-오빠! 눈 떠요, 눈!

임서영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뜨고 있어.”

아침 댓바람부터 이게 웬 난리야.

뻑뻑한 눈을 깜빡이는데, 임서영 옆에서 엘제이가 툭 말했다.

-옷부터 좀 입어요. 맨살 다 보이는데.

“뭐?”

재빨리 아래를 내려다봤다.

편하게 입는 회색 반소매 티셔츠에, 반바지.

-농담이에요. 잠 깨시라고.

“그래. 정신이 확 드네. 고오맙다.”

엘제이가 흡족한 얼굴로 웃는다. 쌍둥이들도 킬킬거렸다.

핸드폰을 뒤집어놓고,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정리했다. 사람 꼴을 만든 다음에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멤버들이 미어캣처럼 목을 빼고 나를 쳐다본다.

“아침부터 웬 영상통화야? 무슨 일 있어?”

-어제 계속 연락 안 됐잖아요! 저희 스케줄 새벽에 끝났어요!

임서영이 얼마 못 잤다고 엄살을 떨며 하품했다.

이태희가 차분히 말했다.

-언제 오세요?

“11시 비행기 타고 갈 거야.”

대답하면서, 애들 얼굴을 살폈다. 떨어진 시간은 하루뿐이지만, 그래도 잘 있는 건지 확인차. 임서영이나 엘제이는 평소처럼 혈기왕성하고. 이태희도 평소처럼 기력 없이 흐느적거린다.

그리고 이송하는···.

열심히 기웃거리고 있다. 임서영과 엘제이 뒤에서.

나한테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입술을 벙긋거리면서.

-오빠!

한마디에, 산뜻한 바람이 함께 실려온다.

-오빠, 서른 전에 결혼하실 거예요?

헛소리도 함께 실려온다.

“뭐라고?”

-얼마 안 남았는데. 오빠 일 년 반만 있으면 서른이에요!

“그래, 내 나이 알려줘서 고맙다. 근데 무슨 헛소리야. 웬 결혼?”

“할머니가 그랬는데.”

불쑥, 침대 아래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데자뷘가?

쌍둥이들이 내 눈치를 보며 이실직고했다.

“저번에 할머니가, 삼촌 서른 먹기 전에 장가보내야 한다 그랬어!”

“맞아! 엄마가, 삼촌 결혼하면 연예인이 결혼식장 와서 축가 불러주는 거 아니냐고, 벌써 기대된다고 했어!”

“그리고 삼촌 연예인이랑 결혼할지도 모른다고······!”

“그만해, 이놈들아.”

애들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 영상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송하가 재빠르게 말했다.

-요즘은 다 결혼 늦게 하는 추세라던데. 한 서른둘, 서른다섯··· 마흔쯤 넘어서 결혼해도 괜찮잖아요. 그치?

그 말에, 다른 애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어어······ 그렇지, 백세시댄데 마흔이면 한창때지, 뭐!

-원래 이쪽 사람들은 결혼 늦게들 하니까.

-어차피 결혼 일찍 못 할걸?

엘제이가 어깨를 으쓱 올리며 마무리를 찍었다.

“그건 어디서 나온 확신이냐. 결혼 못 할 건 또 뭐 있어.”

-주위를 봐요.

“주위?”

-현조 오빠 독신. 팀장님도 독신. 심지어 대표님도 독신이잖아요.

희한하게 설득력 있네.

그러고 보니, 20년 후에 대표가 된 나도 독신이었던 것 같은데. 손에 결혼반지가 없었던 걸 보면. 설마 이러다가 진짜 마흔 넘어서까지 결혼 못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헛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왜 웃으세요?

“삼촌 갑자기 왜 웃어?”

화면 너머에서, 그리고 옆에서. 여덟 개의 머리가 갸웃거린다.

나는 계속 웃으며 말했다.

“어이가 없어서.”

어제까지만 해도, 미래 생각을 하면 형체가 없는 그림자와 싸우는 기분이었는데.

미래의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 나는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는 사람인가. 형이 앞으로 그렇게 안되면 된다고 말했을 때도, 그게 생각처럼 될까, 하는 정체 모를 걱정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는데.

그게 바로 어제 일인데.

지금은 미래의 내가 결혼을 하는지 못하는지를 궁금해하고 있네.

-오빠, 왜 그러세요?

내 표정이 이상한지, 이송하가 걱정스런 눈으로 물었다.

다른 애들도 나를 빤히 보고 있다.

“별거 아냐. 영혼이 썩어가고 있었는데.”

-썩어요?

“어. 근데 그게 좀 정화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웃음을 흘리면서, 잠시 후에 보자고 인사를 건넸다.

전화를 끊고 기지개를 쭉 켰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지금은 바쁘게 움직여야 할 때다.

얽매이지 말자.

만약에, 나쁜 놈이 되는 게 내 미래라면.

나도 그 미래를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진 않을 테니까.

< 뒤끝이 길면 (5)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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